기업들의 지난 한해 사업 실적을 결산하는 3월 정기 주주총회를 앞두고, 러시아에 현지공장이나 법인을 두고 있는 국내 기업들의 희비가 엇갈리고 있다. 삼성과 LG, 현대차 등 러시아 진출 대기업들은 지난 한해 '망했다'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실적이 부진하다. 지난해 3월부터 현지 공장 가동을 중단하고 판매할 물건이 바닥나면서 제대로 영업을 못한 결과다.
그러나 '초코파이'로 러시아 시장을 장악한 오리온은 코로나19 팬데믹, 우크라이나 전쟁이 오히려 현지 시장을 확대하는 동력이 되고 있다. 공장 생산 시설의 증설 계획과 영업 확대 전략 등이 꾸준이 나온다.
LG전자는 최근 연결감사보고서에서 러시아 법인의 지난해 매출액이 9,445억4700만원을 기록했다고 밝혔다. 전년 매출(1조8867억원) 대비, 절반 수준이다. 또 232억5600만원의 순손실을 기록하면서 적자로 돌아섰다. 공장은 멈춰섰지만, 인건비와 관리·유지비 등이 계속 빠져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LG전자 루자공장(위)와 현지인들의 견학 모습/사진출처:LG홈페이지
LG전자는 지난해 3월 우크라이나 전쟁에 따른 글로벌 해상 물류 차질 등을 이유로 러시아에 대한 모든 선적을 중단했다. 이후 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러시아행 선적 중단 조치를 풀지 못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모스크바 외곽 루자 지역에 있는 가전 생산 공장은 멈춰섰다. 냉장고와 세탁기를 생산하는 이 공장은 원활한 부품 조달이 불가능해 제품을 만들고 싶어도 만들 수가 없다고 한다.
러시아에서 스마트폰 점유율 1위를 기록했던 삼성전자도 다르지 않다. 삼성전자 러시아 법인의 지난해 말 기준 당기순손실액은 489억원이다. 2021년 순이익 935억3000만원을 올렸던 러시아에서 1년만에 적자로 꼬꾸라진 것이다. 삼성전자의 칼루가 현지 공장이 가동을 중단하고, 러시아행 선적도 스톱됐으니 예상된 결과다.
팔고 싶어도 팔 물건이 없는 스마트폰은 시장 점유율 1위 자리를 중국업체에게 내주고 점유율 한자리 숫자로 내려앉았다. 시장조사업체 카운터포인트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삼성 스마트폰의 러시아 시장 점유율을 2%였다. 전쟁 발발 전만 해도 35%로 러시아내 1위였다.
삼성전자 칼루가 공장/사진출처:삼성전자 홈피
물품 지급을 둘러싼 현지 판매 대리점과의 소송이 삼성전자가 현지에서 처한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러시아 중재법원에 따르면 삼성전자 러시아법인은 지난 2월 현지 판매 대리점인 ‘하모니(Гармония)’를 상대로 납품 미수대금과 지불요구 불이행 가산금 등을 합쳐 총 4억4,890만 루블(약 77억원) 배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지난 2016년 12월 하모니와 판매 대리점 계약을 체결한 삼성전자는 하모니 측이 작년 5월부터 제품 대금을 지급하지 않고 있다고 주장했다. 하모니는 러시아 41개 도시에 문을 연 64개 매장에서 스마트폰과 냉장고, 에어컨 등 삼성전자의 제품 대부분을 판매하는 대리점이다.
하모니가 미납한 대금 총액은 3억2,440만 루블. 양사 계약에 따라 작년 5월 7월부터 지난 2월 8일까지 미납한 금액에 대한 가산금도 1억2,450만 루블에 이른다. 삼성전자는 당연히 합산 금액을 청구했다.
하모니 측은 삼성전자의 제품 공급 중단을 문제삼는 것으로 알려졌다. 내달 첫 심리가 열릴 것으로 전망되는데, 러시아의 '특수 군사작전'(우크라이나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은 삼성전자보다는 하모니 측에 유리하게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현지 언론에서는 삼성전자가 러시아에 스마트폰 공급을 재개할 것이라는 설(說)이 간혹 제기되기도 했으나 현지 사업은 여전히 ‘올스톱’ 상태다.
가전·전자나 자동차 업종과 달리 러시아의 식음료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오리온은 러시아 사업을 계속 확장하고 있다. 식료품 분야는 서방의 대러 제재조치를 일정 수준에서 피해갈 수 있고, 도덕적으로도 국제사회의 비난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오리온 주주총회 모습/사진출처:오리온
오리온은 23일 서울 용산구 본사에서 연 정기 주주총회에서 "지난해 고성장세를 이어가기 위해 공격적인 영업 전략을 전개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러시아 법인은 올해 트베리 신공장(제3 공장)에 초코파이 라인을 신설할 계획이라고 했다.
지난해 6월 완공된 오리온 제3공장은 현재 파이·비스킷 2개 라인을 가동하고 있다. 연내에 젤리 라인을 구축해 모두 6개 라인을 모두 가동하겠다는 계획이다. 오리온 관계자는 "6개 라인이 모두 운영되면, 생산 규모는 약 2,000억원에 달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러시아 법인은 지난해 오리온 해외 법인 중 매출액 증가 폭이 가장 컸다. 지난해 연결 기준 매출액과 영업이익은 각각 2,098억원, 348억원이다. 전년 대비 증가 폭은 각각 79.4%, 106.9%에 달한다.
잘 나가는 오리온과 달리, 전자업체나 자동차및 부품업체는 우크라이나 전쟁의 장기화로 '출구 전략'도 고민 중이다. 하지만 뾰족한 방법이 없는 게 현실이다. 러시아 시장의 특수성상, 시장에서 한 번 철수하면 향후 재진입하기도 힘들다.
실제로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이후 많은 서방 기업들이 '자의반 타의반'으로 러시아 시장 철수를 공식 발표했지만 1년이 지난 지금도 적잖은 기업이 러시아 비즈니스를 접지 않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미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미국 예일대 최고경영자리더십연구소(CELI)는 러시아 내 약 1천600개 외국 기업 중 25% 이상이 여전히 정상적으로 사업을 이끌어 나가고 있는 것으로 파악했다. 유라시아재단이 우크라이나에 설립한 대학인 KSE대 부설 연구소 집계 기준으로는 현재도 운영 중인 외국 기업이 전체의 절반에 이른다.
영업을 계속하는 이유는 다양하다. 프랑스의 유통 대기업인 슈퍼마켓 체인 '오샹'은 현지에서 식료품을 공급하고, 230개 매장, 2만9천여 명의 직원 고용을 유지하려면 매장 운영이 불가피하다는 입장이다. 오샹의 지난해 매출을 알려지지 않았지만, 전쟁 전 2021년 매출은 32억유로(약 4조4천억원)로 전체 매출의 10%를 차지했다.
미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외국 기업들이 러시아를 쉽게 떠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로 러시아의 터무니 없는 자산의 헐값 매각 요구를 꼽았다. 러시아 정부는 법령(혹은 대통령령)을 통해 자국에서 철수하는 기업의 자산을 시장가치의 절반 가격으로 판매하도록 했다. 또 비우호국(한국도 포함) 기업의 경우, 기업의 폐쇄(혹은 폐업)를 지급 불능 상태(파산)으로 보고 국유화(우리식으로는 법정관리)할 수 있는 주요 사유 중 하나로 추가했다. 담배회사 '필립모리스인터내셔널'과 석유기업 BP, 엑손모빌 등도 이같은 규정들에 발목이 잡힌 상태라고 한다.
러시아의 지독한 관료주의도 매각 절차를 지연시키는 걸림돌이 되고 있다. 현지 자동차 딜러업체 '아프토돔'의 지분을 보유한 독일 벤츠사는 전쟁 발발 이후 줄곧 지분 매각을 추진했으나 최근에야 승인을 받았다고 한다.
러시아에 진출한 국내 기업도 이 규정에서 예외가 아니다. 휴업이 아니라 공장 문을 닫을 경우, 파산으로 간주돼 기업을 빼앗기는 것은 물론, 간부들이 법적 처벌을 받을 수가 있다. 울며 겨자 먹기로 전쟁이 끝날 때까지 공장의 휴업 상태를 유지하면서 버틸 수 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