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영(鄭周永)이 꿈꾸었던 여인들
변중석 / 정주영과 부인 변중석 / 소첩 김경희
<첫 번째 부인 변중석>
-살아 있는 천사(天使)로 불리던 아름다운 여인 변중석!
변중석 여사는 차남 몽구, 3남 몽근, 장녀 경희, 4남 몽우, 5남 몽헌 다섯을 낳았으며 6남 몽준부터 7남 몽윤, 8남 몽일은 모두 외부 여자가 낳아서 데리고 온 자식인데 첫부인 변중석이 정성껏 키웠다고 한다.
<두 번째 여인 요정(妖精) 마담>
-정주영을 너무나 흠모했던 여인은 너무나 아름다운 미모와 천재였던 요정(妖精)의 마담(Madame)이었는데 결국 정주영의 빚을 모두 갚아주고 스스로 자결하였던 여인이다.
정주영 회장이 사업가들 접대를 위해 자주 찾은 그 요정(술집)은 당시 서울에서 제일가는 요정으로 손꼽히던 곳이었는데, 마담은 천하일색인 데다가 여전(女專/현재 대학)까지 나온 미모와 지성을 겸비한 여인이었다고 한다. 평소 단골손님이었던 정주영 회장의 소박하고 검소한 모습과 친절하고 따뜻한 마음 씀씀이로, 요정 내에서 높은 인기를 누렸는데 말이 청산유수(靑山流水)라는 마담도 정주영 회장 앞에서는 얼굴이 빨개지고 말도 못 할 정도로 수줍어했다고 한다.
그녀는 정주영에게 돈을 보내줄 때마다 당시 정주영의 경리 책임자가 서울에 가서 받아오곤 했는데,
어느 날 요정 마담이 정 회장에게, “한번 꼭 보고 싶다. 이번에는 직접 와 달라. 서울에 꼭 다녀가라. 준비를 좀 많이 했으니 도움이 될 것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정주영은 ‘사업이 망해가고 있어 볼 면목이 없다.’며 직원을 보냈는데, 평소보다 세 배가 넘는 큰돈과 편지를 받았고, 정주영 회장은 그 편지를 읽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그 편지는 연락이 아닌 유서(遺書)였다고 한다.
‘꼭 성공하시고 앞으로 더 큰 일을 많이 하시기를 바랍니다.’는 말과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했습니다.’라는 내용이었다고 한다. 편지를 받은 정 회장은 한걸음에 달려갔지만, 그녀는 벌써 자살한 뒤였다고 한다.
요정 마담은 좋아했던 정 회장을 위해 계속해서 큰 빚을 지면서 내 자금을 댔던 것이라고 한다.
결국, 그 요정 마담은 죽음으로써 정주영을 위한 빚을 모두 안고 세상을 떠난 것이다.
정 회장은 마담의 장례식을 치르고 묘지를 내려오면서 직원과 함께 목 놓아 울었다고 한다.
정 회장은 그녀에게서 받은 마지막 돈으로 밀린 노임을 해결하고 다시 일을 시작하여 성공한다.
<세 번째 여인 김경희>
1950년대, 재벌가 부럽지 않은 집안에서 태어나 공주처럼 자란 여주인공 김경희.
다섯 살 때부터 발레(Ballet)를 배워 예술의 본고장 유럽으로 유학 가는 꿈을 꾸던 그녀는 대입(大入) 전(前), 장난처럼 봤던 방송사 탤런트(Talent/연기자) 시험에 합격한다.
궤도(軌道/방향)를 수정해 연극영화과에 진학, 한창 연기 수업을 하고 있을 때 그녀 앞에 나타난 한 남자 정주영이 마음에 들어 운명처럼 둘은 인연을 맺지만, 그 남자는 대한민국 최고의 기업가로, 무려 서른여덟 살 연상(年上)이고 이미 부인이 있었다. 이어지는 비밀 결혼과 출산, 은둔 생활….
그녀와 만났던 기업가는 바로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 회장이었다.
두 사람은 1973년 처음 만나 딸 둘을 낳았지만, 그 존재는 30년 가까이 철저한 비밀에 부쳐졌다.
그러다가 정 회장이 타계(他界/사망)한 2001년, 김경희가 ‘친자(親子) 확인소송’을 제기해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고, 잠잠해질 무렵인 2006년, ‘정주영 유산상속조정신청’으로 다시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그 와중에도 베일에 가려 있던 김경희 씨가 최근 <일요신문>과 단독으로 만나 그간의 비화(悲話)를 털어놨다.
두 차례, 다섯 시간이 넘는 김경희와의 인터뷰, 김경희가 자비로 출판했지만, 아직 서점에 내놓지 않은 <나의 사랑 정주영>을 토대로, 비운의 인생 비사(祕史)를 재구성했다.
미국에 간 김경희는 정 회장과 만난 지 6년째인 1979년 큰아이를 낳는데 이름은 그레이스 정.
미국에서 몸조리를 끝내고 평창동 어머니 집으로 귀국했을 때야 정주영 회장은 딸 그레이스와 처음 대면한다.
정 회장은 자신과 쏙 빼닮은 그레이스의 이목구비를 보고 너무나 흐뭇해했단다.
큰딸이 태어나고 2년 뒤인 1981년 김경희의 둘째 자식이자 정 회장의 막내딸이 태어나는데 이름은 엘리자베스 정이다.
김경희가 정주영 사후, 회사로부터 받은 돈은 100억! 그러나 관리가 부족하여 가난에 허덕였다니....
<네 번째 여인 북한 통천 이장 집 딸>
통천 이장 집 딸이었던 정주영 회장의 첫사랑은 통천에서도 제일가는 부잣집 딸이었고 두 살이나 더 많은 이장(里長) 집 딸은 경성(지금의 서울)에서 발행하는 동아일보를 유일하게 구독하는 집이었다는데, 정 회장은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하루종일 농사일을 하여 녹초가 된 몸인데도 이장 집에 가서 동아일보와 예쁜 소녀를 만난다는 생각만 하면 20 여리 떨어진 집이지만 100m 달리기 선수처럼 쏜살같이 달려갔다고 한다.
신문을 전달할 때마다 꿈에서 나 볼 수 있는 천사같이 예쁜 그녀의 모습에 소년 정주영은 눈이 부시고 가슴이 울렁거려 얼굴 한 번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는데 당시 그의 나이는 열일곱 살이었다고 한다. 제법 세월이 흐른 후, 정주영 회장은 온갖 고생 끝에 돈을 모아 현대 건설 간판을 걸고 건설업과 자동차 수리업으로 제법 큰 돈을 벌었다고 한다.
그리고는 정 회장은 항상 마음에 품고 있던 첫사랑이 보고 싶어 고향으로 갔다고 한다.
하얀 신사복에 앞이 뾰족한 백(白) 구두도 사서 신고, 멋진 모자도 사서 쓰고 좋은 시계도 사서 차고는 친구 김영주와 함께 들뜬 마음으로 고향 통천(通川)으로 가서 그녀를 만났는데 그녀는 벌써 결혼하여 아이를 둘이나 두고 있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하늘이 무너지는 청천벽력 같은 실망을 느꼈지만, 그녀가 신랑을 소개해 주면서 밥을 차려주었는데 정주영 회장은 가슴이 울렁거려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그 집에서 마련한 사랑방에서 하룻밤을 지내면서 그녀 생각에 잠을 한숨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2000년에 6·15 남북 공동 선언을 성공시키며 정주영은 북한 김정일 위원장의 초청을 받아 6월 28일 판문점을 지나 평양에 갈 수 있었는데 정 회장은 꿈에서도 잊지 못한 그 첫사랑이 너무 보고 싶어서 통일 소 500마리를 이끌고 직접 가서 만나기로 결심을 했었는데 이때는 북한의 협조가 너무 늦어 만나질 못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2년 후 다시 통일 소 501마리를 끌고 북한을 가게 되었는데 자신이 운영하는 회사 사장인 이익치 회장에게 자신이 북한에 가려는 이유는 두 가지라고 했다고 한다.
첫 번째는 국가와 민족의 통일이고 두 번째는 첫사랑 때문이라 했다는데 그곳에서 정 회장은 그가 그토록 보고 싶었던 첫사랑 여인이 안타깝게도 2년 전에 사망했다는 사실을 전해 듣게 된다.
정주영 회장은 ‘몇 년 전에만 만났다면 자신이 만든 자신이 건설한 아산병원에 데려가 고칠 수도 있었을 텐데 내가 너무 늦게 왔다.’며 스스로 자책을 많이 했다 한다.
그리고 그 가족들을 만나 ‘어머님은 훌륭하신 분’이라는 말과 함께 내가 이 세상에서 내가 가장 사랑했던 분이니, 기일 때마다 제사 거르지 말고 잘 모시라고 당부하고 그녀에게 주려고 준비했던 많은 선물을 가족들에게 전하고 김정일 위원장에게는 그간의 사정을 이야기하고 그 후손들을 잘 부탁하고 왔다고 한다.
<북한 금강산(金剛山) 관광>
당시, 북한은 김정일이 정권을 잡고 있던 시기로, 정주영 회장은 자신이 가난하게 자라던 북한에 통일 소 1,001마리를 끌고 가서 북한(北韓) 통천(通川)이 고향인 우리나라의 재벌 정주영(鄭周永) 현대그룹 회장이 앞장서서 이룬 성과라고 할 것이다. 정 회장은 1974년부터 불기 시작한 중동 붐(Boom)을 일으킨 장본인으로, 현대자동차를 설립하고 1976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승용차인 포니(Pony)를 생산하였으니, 박정희(朴正熙) 대통령과 함께 대한민국을 일으켜 세운 신화(神話)의 인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한 후 정주영 회장은 1992년, 제14대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지만, 김영삼(金泳三)에 밀려 낙마(落馬)했고, 김대중(金大中) 시절이었던 1998년 6월과 10월에 소 1,001마리를 북한으로 보내는 신기한 전략을 성공시키게 되는 것이다.
정주영 회장은 고향 북한에서 어릴 때 소를 판 돈을 들고 집을 나와 남한으로 월남(越南)했다고 한다.
그는 아는 사람도, 친척이나 친지도 없었지만, 빈손으로 우리나라 재계(財界)에 뛰어들어 억만장자가 되는 신화(神話)의 인물이었다. 그가 소를 끌고 북한으로 간 것은 북한에서 공산사회에 염증을 느끼고 월남할 때 송아지 판 돈을 들고 도망왔던 반성 때문이었을까?
소(牛) 방북은 2차에 걸쳐 진행되었는데 2차 때 정주영이 직접 소 500마리를 끌고 판문점을 통과하여 북한을 방문하면서 국제적으로 엄청난 관심을 끌었고, 당시 북한으로 가지고 간 소를 ‘통일 소’라 하였다.
그리고 바로 그해(1998년) 김정일을 설득하여 화해가 이루어지면서 약 10년간 북한 금강산 관광사업을 성사시킨다.
나는 금강산 관광이 시작되고 그 이듬해인 1999년에 외금강의 구룡폭포, 만물상과 상팔담 코스를 2박 3일간 관광할 기회가 있었는데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놀라웠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대략 10년 정도 남북의 화해가 이루어지면서 개성공단 설립, 금강산 관광지 개발 투자 등 남북교류가 원활해지며 남북통일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까 희망에 부풀었는데 2008년 7월, 우리나라 관광객이던 여성분이 새벽에 일어나 혼자 금강산 앞바다 해변을 산책하다 북한 초병의 총을 맞고 사망하는 사건이 터지면서 금강산 관광이 중단되고 남북화해 관계가 하루아침에 악화(惡化)되는, 웃지 못할 우리의 아픈 역사이다.
<나의 금광산 관광 사진>
금강산 구룡폭포(九龍瀑布)•삼선봉(三仙峰)•외금강(外金剛) 금강문(金剛門) <1999년 관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