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경』의 유심사상
김 영 미 (동국대학교 박사과정)
▒ 목 차 ▒
국문초록
모든 사람은 ‘마음의 움직임’으로 살아가고 있다. 마음의 정의와 작용은 화엄경 십지품에 ‘一心法界’로 서술되고 있다. 십지품에는 三界는 허망하나니 단지 이 마음이 지은 것일 뿐이며, 12緣分도 모두 마음에 의지한 것이라고 하여 유식사상의 근거가 발견된다. 이 문구는 유식학의 唯心과 연결되어 아뢰야식사상으로 전개된다. 유식가들은 심을 ‘阿賴耶’로 의는 ‘末那’라 하며, 식은 ‘六識’으로 구분하여 8식 사상으로 체계화시킨다. 반면, 초기불교에서는『구사론』에 心, 義, 識으로 나누고 있으나, ‘心體一說’로 이름만 다를 뿐 근본적으로 하나라고 하여 六識體一說을 주장한다.
아뢰야는 覺과 不覺의 두가지 뜻을 가지며, 일체법을 能攝하고 所攝하여 생하므로 무명에 덮인 일심이다. 망념을 여의면 覺이고 망식을 일으키면 不覺이 되므로, 아뢰야에 의해 현상계가 상속된다. 진망화합식인 아뢰야는 種子識으로 藏識과 所藏의 성격을 지니기 때문에 轉變하여 현상계를 전개시킨다.
화엄가인 지엄은 일심을 관하는 것는 십이연기 등이 능히 의지하는 것으로 심을 아뢰야심으로 본다. 이에 종밀은 ‘一心法界’를 ‘一眞法界’로 대치하고 있어 일심을 진여인 一眞으로 해석하고 있다. 법장은 緣이 일어나면 차별이 생기고 緣이 사라지면 진여라고 한다. 법장은 二法界로 해석하여 성상을 두지 않으면 이법계이고 사상에 걸림없이 완연하면 사법계라고 한다. 진여인 원성실성 가운데 不變과 隨緣의 뜻이 있고, 의타기에 似有와 無性의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이러한 화엄의 普法은『기신론』의 一心二門에 통하고 있다. 진여는 평등무변하므로 體大라 하고 무량한 공덕을 갖추고 있는 여래장으로 相大라 한다. 또한 일체 세간과 출세간의 因果를 만드는 작용을 하므로 用大라 한다. 마음의 체로 들어가면 진여문이고 마음의 상으로 전개되면 생멸문이다. 진여는 不變과 隨緣의 두가지 뜻이 있으므로 진여를 현상으로 전개시키는 眞如緣起說이 가능하다. 일체는 오직 마음이 만든 것으로 마음은 절대 불변의 부동심이 아닌 수연심을 뜻한다. 그러므로 마음은 미망을 일으키지 않으면 적멸하지만, 緣을 따라 일체법을 만들어내므로 십지품에서 화가에 비유된다.
隨緣의 분별심은 적멸심에서 발생된 변화한 마음으로 연기법에 의해 현상계를 만든다. 능히 緣을 따라 만법을 나타내지만 법에는 자성이 없으므로 청정진여가 反顯하는 것이다. 생한 법은 인연의 임시 결합에 의한 것으로 거짓 화합상이다. 미혹에 의해 ‘有’라고 집착된 환상의 근본은 공하여 차별이 없다. 본래심 가운데는 번뇌가 없고, 번뇌는 생멸상으로 自性이 없어서 생멸법들은 서로 了知하지 못한다. 일체 법은 자성이 없으며, 자성이 없으므로 법의 본성은 공하다.
주제어: 유심, 십지품, 一切唯心造, 아뢰야, 해심밀경
Ⅰ. 서론 ▲ 위로
불교는 마음을 밝히는 종교다. 화엄경은 一心法界를 설한 경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法界는 一心上에 건립된 것이며, 일심과 법계는 둘이 아니다. 일심을 알지 못하면 화엄의 법계를 이해하지 못한다. 일심의 문제는 유식교학의 唯心과도 관련되어 있으므로 불교 교학에서는 매우 중요하다.
화엄경 십지품의 “三界는 허망하나니 단지 이 마음이 지은 것일 뿐”이라는 문구는 유심의 뜻을 한마디로 드러낸 화엄의 유식학적 표현이다. 유식학상의 마음은 화엄의 세계에서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가. 화엄세계의 유심과 유식학상의 화엄은 어떤 모습으로 하모니를 이루고 있는가. 일심에서 삼계의 차별상이 생겨나는데, 이 일심은 어떤 心이며 현상계가 생기는 이유와 과정은 무엇인가. 一心과 唯心과의 관계는 어떠한가. 이러한 문제들은 상당한 궁금증을 일으킨다.
연관된 제경전과 함께 유심사상을 발췌하여 마음의 정의와 종류를 고찰하는 것은 흥미있는 연구가 될 것이다.
Ⅱ. 본론
1. 마음의 정의 ▲ 위로
‘心(citta)’은 華嚴經에서 ‘三界所有 唯是一心’과 ‘三界虛妄 但是心作’의 두 문구로 나타난다. 十住經에서는 ‘三界虛妄 但是心作’으로 되어 있고, 十地經에는 ‘所言三界 此唯是心’이라고 되어 있다. 십지경론에서 보리유지는 ‘三界虛妄 但是一心作’으로 번역하여 心의 의미를 명확히 하고 있다.
그러면 心과 一心, 唯心을 어떻게 정의해야 하는가. 또한, 三界唯心의 마음은 淸淨心인가 染汚心인가?
『入楞伽經』에는 ‘寂滅은 一心이라고 하며, 일심은 이름이 如來藏이다’라고 한다.『圓覺經大疏釋義鈔』에서도 심을 ‘여래장’으로 부른다.『圓覺經』에서는 圓覺이라고 사용하고 있으며,『宗鏡錄』에서는 심을 ‘불성’으로 표현한다.『起信論(mahāāa-śaddhotpāa śātra)』에는 一心을 眞如라 하며,『解深密經』에서는 아뢰야(āaya)또는 아타나(āāa)라고 적혀있다.
마음은 아뢰야식으로 수행단계에 따라서 세 가지로 나누어 성불의 경지에서는 염오의 식이 아타나(āāa)로 변화함을 볼 수 있다. 아타나는 무루의 종자만을 가진 부처의 경지로 이를 相續執持位라 하여 第一義諦인 일심으로 볼 수 있다. 진망화합식으로 무명에 덮인 일심을 아뢰야라고 부른다.
마음의 生滅은 如來藏에 의하여 있는 것이며 이것은 이른바 不生不滅과 生滅이 和合하여 하나도 아니면서 다르지도 아니하다. 이것을 阿梨耶識이라고 이름하는데, 이 阿梨耶識은 覺과 不覺의 두 가지 뜻을 가지고 일체법을 포섭하기도 하고 일체법을 生하기도 한다.
아뢰야는 망념을 여의면 覺이고 망식을 일으키면 不覺으로 일체법을 能攝하고 所攝하며, 아뢰야식에 의해 현상계가 상속된다.
生滅因緣은 중생의 心意識에 의하여 전개된다. 이 뜻은 어떠한가. 阿梨耶識으로서 無明이 있다고 설하고, 그 無明이 있음으로 不覺이며 能見(轉相), 能現(現相)과 경계를 능히 취하고 妄念을 일으켜서 상속해 간다.
이렇게 主觀의 轉識으로 客觀의 現相이 나타나므로 아뢰야가 윤회의 주체가 된다. 아뢰야식은 種子識으로 藏識과 所藏의 성격을 지니기 때문에 轉變하여 현상계를 전개시킨다. 염오의 아뢰야심은『楞伽經에서는 藏識으로 나타난다.
藏識을 이름하여 心이라 하고, 思量하는 성질의 것을 意라고 하며, 능히 모든 대상의 모습을 식별하는 것을 識이다.
심은 여래가 함장된 마음으로 밝고도 밝아서 어둡지 않으며 확실하고 확실하게 항상 알며, 미래의 시간이 다 할 때까지 항상 머무르고 멸하지 않아 佛性이라고 한다. 또한 如來藏이라고도 하며 心地라고도 한다.
이에 대해 화엄가들의 견해는 어떠한가. 지엄은 “의지하고 있는 일심을 관하는 자는 십이연기 등이 능히 의지하는 것이다. 심은 즉 뢰야심이다.”라고 하였다. 종밀은『三聖圓融觀門』에서 ‘一心法界’를 ‘一眞法界’로 대치하고 있다. 그는 일심을 一眞으로 보아 일심을 平等不二하고 圓明具德한 法界性海로 해석하고 있고, 이 뜻은 眞如로 통한다.
心眞如는 곧 一法界의 大總相法門體으로 이른바 心性이 不生不滅한다. 일체제법이 오직 妄念에 依하여 차별이 있으나 만일 망념을 여의면 일체경계의 相도 없다. 그러므로 일체법이 근본으로부터 일어났으니 言說相, 名字相, 心緣相을 여의었다. 필경에는 평등하여 變異가 없고 破壞할 수 없다. 오직 一心이므로 眞如라 이름한다.
一心은 諸法의 本體인 眞如다. 一心은 妄念에 依하여 차별상이 있을 뿐이지 망념이 사라져도 변이되거나 파괴할 수 없다. 법장은 緣이 일어나면 육도의 차별이 생기고 緣이 사라지면 진여라고 한다.
일체중생은 모두 眞에 의해서 연기한 것이다. 본식의 마음은 명언, 유지, 아견 등의 薰에 따라 육도의 몸을 나타낸다. 연기는 헛되이 잠시 있는 것으로서 無를 장애하지 않고 有를 파괴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會攝하면 二門이 있다. 만일 會緣해서 實에 따르면 차별의 상이 없어져서 오직 하나의 진여뿐이다. 만일 섭말해서 귀본하면 육도의 異形도 오직 심에서 생긴 것이다. 전자는 연기가 있지 않기 때문에 진여문이라 하며 후자는 연기를 파괴하지 않기 때문에 생멸문이라 한다. 在와 壞는 둘이 아니므로 유일의 연기다. 二門은 무애한데 이것은 일심이기 때문이다.
일심은 二門을 갖추고 있다. 二門이라고 하나 무애하므로 一門이고, 二相이 없으므로 일심이다. 有를 나타내나 無를 여의지 않으므로, 이때의 유무는 대립적인 관계가 아닌 상호 의존적이어서 함께 존재한다. 진여문 가운데 생멸문이 있으니, 만법을 생하면 현상세계가 벌어지고 멸하면 진여본심으로 귀일한다.
일심의 二門에 대해『起信論』의 자세한 설명을 볼 수 있다. 일심에 의지하는 법은 두 종류의 문으로 心眞如門과 心生滅門이다. 두 종류의 문은 각각 일체법을 총섭하고 있고 진여는 不變과 隨緣의 두 가지 뜻이 있다. 수연의 뜻이 있음으로 진여를 현상으로 전개시키는 眞如緣起說이 가능하다.
삼계는 허위로서 오직 마음이 만든 것이다. 마음을 여읜 즉 육진 경계는 없는 것이다. 이 뜻이 무엇인가. 일체법은 모두 마음 따라 일어나고, 망념으로서 생기며 일체의 분별은 바로 자심을 분별하는 것이다. 마음이 마음을 보지 못하며 가히 얻을 상이 없다. 마땅히 알라. 세간의 일체경계는 모두 중생이 무명 망심에 의하여 住持함을 얻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체법은 거울 속의 상이 얻을 수 있는 체가 없는 것과 같이 오직 마음일 뿐 허망한 것이다. 마음에서 생기면 곧 여러 가지 법이 생기고, 마음에서 멸하면 곧 여러 가지 법도 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일체법은 마음을 따라 일어나며 영상과 같이 실체가 없다. 적멸경지에서 일어난 생멸법은 마치 눈이 화로에 닿으면 녹아버리듯이 空의 경지에 들어가면 사라진다.
망계로 존재하는 이 有는 연기로 일어나니 즉 無라. 망계로 미혹하여 취한 연기로 분별을 여읜 것이다. 종종의 지분이 생함이 환과 같아 성취도 아니고 비록 종종의 상을 나타내나 허망한 분별이라 곧 무라. 저 상은 곧 허물이니 모두 마음의 얽매임에서 생긴 것이다. 허망하게 계교하는 사람은 깨닫지 못해 인연으로 일어나는 법을 분별한다. 이 모든 망계한 성품들은 모두 인연으로 생기는 것이다. 망계하여 있는 가지가지의 연기 중에서 분별한 것이다.
허망하게 생겨난 법계는 12인연에 의해 임시로 화합된 것에 불과하다. 平川 彰은「여래장사상とは何か」에서 연기에는 인의 힘과 생겨나는 힘이 있으므로 일심에서 연기가 가능하다고 한다. 그러므로 삼계를 만들어내는 심은 본심에서 출발한 중생적인 심의 모습 또는 현상세계를 향하고 있는 마음으로 설명된다.일심에서 일어난 연기는 假有이므로 제법은 무자성이고 무아다.『瑜伽論』권46 '本地分中菩薩地'에서는
諸法 가운데 法無我性이란 일체 언설사 가운데에서 일체 言說自性의 法이 존재하지 않는다.
라고 한다. 삼계가 평등한 진여임을 체득한 성자의 유심은 곧 일심일 것이다. 그러나, 무명으로 덮인 중생들의 마음은 진여문과 생멸문이 있다. 마음을 如來性이 함장된 면으로 보면 ‘如來藏’이라 하고, 眞妄和合識의 견해로 보면 ‘阿賴耶’이라 한다.
일심은 참되고 如如하므로 ‘眞如’라 하고, 제법의 근원이므로 ‘法界’라 한다. 부처의 본성이므로 ‘佛性’또는 ‘佛’이라 이름하며, 깨달음 경지는 圓明하므로 ‘圓覺’이라고도 한다. 생멸이 멸하였기에 ‘寂滅’이라는 뜻도 통하며, 모든 유정의 본래의 진실한 마음이므로 ‘本來心’이나 ‘眞心’이라 한다.
2. 심의종류 ▲ 위로
마음에서 만법이 생함을 살펴보았다. 마음은 하나로 보아야 하는가, 여럿으로 보아야 하는가.
초기불교에 등장하는 마음은 ‘心體一說’로서 구사론에 마음을 心, 義, 識으로 나누고 있으나, 이름만 다를 뿐 근본적으로 하나라고 하여 六識體一說을 주장한다. 심은 집기의 뜻으로 신, 구, 의로 조성된 업을 마음에 보존하며, 의는 사량으로 마음속의 인식대상을 집착하여 번뇌를 야기시킨다. 식은 요별로 주관과 객관을 인식함을 말한다. 이 셋은 작용의 측면에서 셋으로 구분되나, 체는 하나이다.
소승의 心體一說은 대승불교의 유가유식파에 의해 心體別說로 전환된다. 유식에서의 심은 阿賴耶識을 말하고 의는 末那識이며 식은 六識을 칭하여 8식 사상으로 조직화된다. 제8 아뢰야식은 조성한 업종자를 집취하고 보존하고, 제7 말나는 아집과 법집 등의 망심의 작용을 일으켜 染汚의 번뇌를 야기하며, 제6 의식은 요별작용을 한다. 또한 이 마음의 작용을 심왕과 심소로 나누어진다.
첫째는 심소는 항상 심왕에 의지하여 작용을 연기하며, 둘째로 심소는 항상 심왕과 더불어 상응하면서 활동한다. 셋째, 심소는 항상 심왕에 소속되고 계속된다.
마음을 본체와 작용에 따라 설명한다. 마음을 주관인 能取와 객관인 所取로 나누는데, 능취는 견분이고 소취는 상분이다. 견분이 상분을 바라보니, 오직 식 뿐이라는 이론이 성립된다.
세친은 心을 相應心과 不相應心의 두종류로 나누고 있다. 상응심은 無常의 妄識이며 허망한 분별심인데, 불상응심은 常住하는 第一義제로서 자성청정심이다.상응심은 오온에 따라 일어나는 일체의 번뇌심을 말하고 불상응심은 제일의제로서 상주불변하는 청정심이다. 심은 법을 의미하므로 二種心을 법장은 二法界로 해석하고 있다. 만약에 성상을 두지 않으면 이법계요. 사상에 걸림없이 완연하면 사법계이다. 이사가 합해도 무애하여 둘이면서 둘이 아니고, 둘이 아니면서 둘인 것이 법계이다.법계는 무애자재하여 진속에 두루하여 不一不二하다. 본성의 법은 이법계이고 사상에서는 사법계이나, 체가 하나이므로 걸림이 없는 것이다. 이러한 화엄의 普法은 기신론의 一心二門에 통하고 있다. 二門은 진제와 속제로 나눈다.
저 성을 깨뜨리는 종에서는 유가 세제이고 무가 진제이다. 지금 이종에서는 망은 있고 리가 없음으로 세제를 삼고, 상이 적정하고 체가 드러나 있음으로 진제를 삼았다.
진제는 제일의제로 진심을 가리키고, 세제는 속제로 차별상의 분별법을 말한다. 이에 법장은 더 세분화하여 일심을 법상교학의 체계를 근저로 十重의 唯識觀으로 나누고 있다. 십중 유식관은 유식교학에서의 허망한 三界를 만들어내는 唯心의 열 가지 중층성을 세분화하는 견해를 말한다.
법장은 법상유식의 교의를 기본으로 처음의 4重은 아뢰야식연기로, 가운데의 3중은 여래장연기로, 마지막의 3중은 화엄법계연기로 정리하고 있다. 법장에 의하면 진여인 원성실성 가운데 不變과 隨緣의 뜻이 있고, 의타기에 似有와 無性의 두 가지 의미가 있다고 한다. 변계소집에 情有와 理無를 설하고 不變, 無性, 理無를 本三性이라 하고, 末三性이라고 하여 수연과 사유와 정유를 본말이라는 용어로 설명하고 있다. 삼성은 원융하여 무장애라고 하니, 만약 圓敎에 의지하면 性海는 두렷이 밝아 법계에 연기하며 무애 자재하다. 一즉 一切요 一切 즉一이라. 主伴이 圓明한 고로 十心이라 한다. 또 본각을 불변의 진실상과 항사묘용의 변화상인 二相으로 나눈다.
다시 본각이 염을 따라 두 가지 상을 나타내나, 그것들은 본각과 서로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어떤 것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智淨相이고, 둘째는 不思議業相이다. 智淨相은 법력의 熏習에 의하여 여실히 수행하여 방편이 구족된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화합식의 상이 파괴되고, 상속심의 상이 멸하여, 법신이 나타난다. 智가 淳淨해진 때문이다. 이 뜻은 무엇인가. 일체의 심식의 상은 이 모두가 무명으로서, 무명의 상은 覺性을 여의지 않는다. 무너지는 것도 아니며, 무너지지 않는 것도 아니다. 마치 큰 바다의 물이 바람으로 말미암아 파동할 때, 물의 상과 바람의 상은 서로 떨어져 있지 않다. 그러나, 물은 움직이는 성질이 아니므로 만약 바람이 止滅하면 움직이는 모습은 바로 멸하지만, 물의 濕性은 무너지지 않는다.
일심은 대해이고 생멸상은 파도와 같아서, 대해와 파도는 같지도 다르지도 않다. 중생의 심식은 대해에 바람이라는 연으로 인해 파도가 치는 것과 같다. 무차별 본체인 대해와 생멸상인 파도는 不一不二의 관계이다. 염정을 따르는 본각의 체는 훼손되지 않고 연에 따라 무명이 생한다.
상속심이 멸한 법신을 갖춘 중생의 육도 윤회가 가능한 것이다. 대해에 바람의 연이 소멸하여 파도는 사라지나, 물의 근본 자성인 습성은 멸하지 않는다. 중생의 본성은 적멸한 법신세계이니 “不生不滅이 生滅과 화합하나 非一非異이다.” 진여가 생멸이라는 인연에 화합한 것은 일심 그 자체도 아니지만 일심과 다르지도 않다. 그러므로 법장도 삼계는 허망하여 단지 이 한마음이 만든 것이라고 정의한다.『搜玄記』에 마음을 十甚深으로 나누고 있는데, 권4에 의하면 담천의 해석에 의해 十甚深義가 된다고 한다. 이 十甚深중에서 제9와 제10은 일체 제불은 다만 일승으로 생사 해탈을 얻는다.”고 하여 일승으로 귀본됨을 볼 수 있다. 이 뜻을『起信論』에서는 세 종류로 나눈다.
義라고 하는 것에는 세 종류가 있다. 무엇이 셋인가. 첫째는 체대로 일체법의 진여를 말한다. 평등하여 증감이 없는 연고이다. 둘째는 상대로서 여래장을 말한다. 무량한 성품의 공덕을 구족하고 있기 때문이다. 셋째는 용대로서 능히 일체 세간과 출세간의 선의 인과를 생하기 때문이다.
진여는 평등무변하므로 體大라하고 무량한 공덕을 갖추고 있는 여래장으로 相大라 한다. 또한 일체 세간과 출세간의 因果를 만드는 작용을 하므로 用大라 한다. 마음의 체로 들어가면 진여문이고 마음의 상으로 전개되면 생멸문이다. 여기서의 여래장은 能攝藏으로 진여가 무량한 성공덕을 구족함을 뜻한다.
종밀은 일진법계의 일심에서 진여문과 생멸문이 열리고 제법을 성립시키며 여기에는 緣起門과 性起門이 있다고 정리한다. 연기문을 染緣起와 淨緣起로 나누고, 다시 淨緣起를 分淨과 圓淨으로 나누고, 다시 分淨은 성문과 연각과 權數의 셋으로, 圓淨은 돈오와 점오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징관에 의해 4종법계로 더 세분화하고 있다.
心은 만유를 융통하여 곧 4종법계를 이룬다. 一은 事法界이니 界는 分의 의인바 일일차별의 분제가 있기 때문이다. 二는 理法界니 界는 性의 義인바 사법이 무진하나 동일성인 까닭이다. 三은 理事無碍 法界니 성과 분의 의를 갖춘 것인바 성분은 무애한 까닭이다. 四는 事事無碍法界니 일체 분제의 사법이 一一如性으로 융통하여 중중으로 끝이 없는 까닭이다.
事法界는 차별상을 말하고 理法界는 계의 본성으로 理를 가리킨다. 理事無碍法界는 理와 事가 걸림 없음을 의미한다. 事事無碍法界는 차별 분제의 사법의 성이 중중무진하게 융통됨을 말한다. 4종법계로 세분화되나 理와 事가 무애하게 융통한다.
이상으로 초기불교에 등장하는 마음은 ‘心體一說’로 하나이고, 유식가들은 심을 ‘阿賴耶’로 의는 ‘末那’라 하며, 식은 六識으로 하여 8식 사상으로 체계화된다. 세친은 마음을 相應心과 不相應心로 나누고 있고, 종밀은 일심에서 진여문과 생멸문이 있고 여기에는 緣起門과 性起門이 있다고 한다.
법장은『기신론』을 인용하여 마음에 진여문과 생멸문을 시설하며, 법으로 일으킬 때는 理法界와 事法界로 구분하고 있다. 징관은 마음을 4종법계로 더 세분화하고 있으며,『기신론』에는 일심에 二門과 三大를 시설하고 있다.『금강삼매경론』에는 진속불이의 일심이 설해져 있다. 그러나 여러 갈래의 물줄기가 하나의 바다에 모이듯이 현상계로 벌어질 때의 마음은 이문, 삼대, 팔만사천법으로 나타나지만 본체로 귀의하면 일심진여뿐이다.
3. 경에 나타난 유식사상 ▲ 위로
유식사상의 근거는『화엄경』의 十地品에서 발견된다. 이 문구는 “三界는 허망하나니 단지 이 마음이 지은 것일 뿐이며, 12緣分도 모두 마음에 의지한 것이다"라고 하여 12연기의 順忍을 얻는 것을 설하지만, 연기관 못지않게 유심관을 고찰하는 것이 중요하다. ‘心(citta)'은 일체법의 근원으로 삼계가 마음을 의지해 있고 생사윤회가 마음으로 인하여 지어졌음을 의미한다. 즉, 마음이 滅하면 生死도 滅함이니 삼계는 마음 작용의 결과인 것이다. 여기서의 ‘依’라는 단어의 의미를 분석한다면, ‘의지하다’의 뜻으로 보았으면 한다. 因의 의미로 볼 수도 있지만, 마음 자체가 일으켰다기보다는 마음의 의지한다는 관점으로 해석된다. 마음은 不動이기 때문이다. 마음을 眞如라고도 부르는데,「眞如凝然 不作諸法」으로 定義하고 있으므로 마음의 불변성을 나타내었다고 보인다. 그러면 부동의 마음에서 어떻게 삼계가 일어나며, 원인은 무엇인가.
미한 망상에서 허공이 있게 되고 허공을 의지해서 세계가 성립되고 생각이 엉겨서 국토가 이루어지고 깨닫고 아는 것이 중생으로 존재한다. 허공이 대각가운데서 생겨나니 그것은 마치 바다에 한 물거품 같네. 또 저 먼지 같은 유루국들은 모두 저 허공에서 생긴 것이다.
『수능엄경』에 의하면 미혹한 중생들의 미한 망상으로 인해 허공이 있게 되고, 생각이 엉겨 국토가 형성된다. 본마음의 부동경지에 그대로 있었으면 중생과 허공은 생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無’를 ‘有’로 착각한 중생의 미망이 만든 것이니 만법은 ‘識’에서 기인된 것이다. 일승의 불법은 모두 일종이며 일미인데 어떻게 천차만별의 차별상이 벌어지는가? 이에 대한 답은「菩薩明難品」의 緣起甚深에서 찾을 수 있다.
心性은 하나인데 어찌하여 능히 가지가지의 果報를 낳느냐? 혹은 善趣에 이르고 혹은 惡趣에 이르고, 혹은 諸根을 갖춘 자가 있고, 갖추지 못한 자도 있으며, 혹은 善處에 태어나고, 혹은 惡處에 태어나며, 端正·醜陋·苦樂의 不同이 있느냐? 業은 마음을 알지 못하고, 마음을 업을 알지 못한다...因은 緣을 알지 못하고, 연은 인을 알지 못한다. 智는 法을 알지 못하고, 법은 지를 알지 못한다.
심성은 하나인데 어찌 차별된 과보가 생기는가에 대한 답으로 인과 연을 서로 알지 못한다고 한다. 일체의 법은 서로 알지를 못한다. 빠른 물의 흐름이 흘러 그치지 않지만 앞의 흐름과 뒤의 흐름이 서로 아는 일이 없는 것과 같다. 중생은 天上·人間·地獄·餓鬼·畜生등의 차이를 보이나, 일심에서 일으킨 것으로 근본이 공한 것이다. 일체법은 인연으로 일어난 생멸법이므로, 연기된 相이지 연기의 體는 아니다. 바다를 의지한 물거품과 물거품이 서로 因이 되지 못하듯이, 생멸법들은 서로의 의지체가 되지 못한다. 그러면 허망한 법은 어떤 원인으로 일어나는 것일까?
비유하면 큰 바다의 물결은 맹렬한 바람 때문에 일어난다. 큰 파도는 깊은 바다를 쳐서 끊어질 때가 없음같이 장식의 바다도 경계의 바람에 움직여 온갖 식의 물결이 오르고 뛰며 구르고 생긴다.…중략…意등의 일곱 가지 識도 응당 그러함을 알라. 바다에서 파랑이 일 듯이 마음과 함께 화합해 생긴다. 바닷물이 움직여 갖가지 파랑이 구르듯이 장식도 갖가지 식이 생긴다.
이 구절에서 중요한 해답을 볼 수 있다. 식은 마음과 함께 화합하여 생한다는 구절이다. 즉 적멸심이 경계의 인연과 화합하여 생멸법으로 변화한다. 적멸심의 체상은 변화 없이 변화가 일어난다.
마치 청정한 물에 붉은 물감을 섞으면 우리 눈에는 붉은 물로 보이는 것과 같다. 물 자체가 붉게 변한 것이 아니라, 붉은 물감이라는 인연으로 인해 붉은 물로 보이는 것이다. 물과 붉은 물감이 함께 화합한 것으로, 물은 여전히 청정수이다. 인연을 받아들여 변화한 듯이 보인다. 그러면, 물은 맑은 물인가 붉은 물인가. 體에서의 물은 맑고, 相에서의 물은 붉다. 體는 물의 청정한 본질이고, 相은 현상계로서 계탁된 분별경계이다.
비유하면 마치 깨끗한 마니보주가 만약 푸른색과 결합하면 제청이나 대청의 마니보주의 형상과 비슷해지는데, 제청이나 대청의 마니보주라고 잘못 집착하여 받아들이기에 유정을 미혹시켜 어지럽게 하며...중략...만약 황금과 결합하면 황금의 형상과 유사해지는데, 진짜 황금의 형상으로 잘못 집착하여 받아들이기 때문에 유정을 현혹하여 어지럽게 하는 것과 같다.
이처럼 마니보주의 색은 유식의 변계소집과 의타기로 설명된다. 색은 마음속의 영상을 마음 밖의 존재로 변계소집한 것으로, 의타기의 인연이 사라지면 원성실성이 현전하게 된다. 변계소집은 범부의 미망으로 나타낸 경계를 말하는 것으로 能遍計, 所遍計, 所執性의 셋으로 나누어진다. 의타기성은 연기에 의하여 생하는 환화 허망법을 말한다. 일체법은 인연화합에 의하여 존재하는 假有이다. 법에는 自性이 없기 때문에 연기한다.
원성실성은 원만하게 성취된 진실체로서 진여를 가리킨다. 결국 변계소집성은 相無性이며, 의타기성은 生無性이고 원성실성은 勝義無性이다. 일심은 법계에 연기하면서도 스스로는 물들지 않는다.
비록 다시 연을 따라 染淨을 이룰지라도 항상 自性清?을 잃지 않는다. 단지 自性清?을 잃지 않는 연고로 말미암아 능히 연을 따라 染淨을 이룬다.
이 구절은 義湘의 ‘自性은 스스로의 상이 없으며 인연을 따라 응하는 것’으로「不守自性隨緣成」과 같은 뜻이다. 마치 마니보주와 같아서 스스로의 색이 없으므로 만색을 함용할 수 있으며, 만색을 펼쳐 보이나 그 자체는 물들지 않음을 말한다. 앞에 일어난 인연에 물들지 않음으로 뒤의 인연을 받아들일 수 있다. 능히 緣을 따라 만법을 나타내나, 법에는 자성이 없으므로 청정진여가 反顯하는 것이다.
이는「수미정상게찬품」의 유심구로 연결되니, '만일 삼세의 모든 부처를 알고자 한다면 응당 법계의 본성을 관하여, 일체는 오직 마음이 만든 것인 줄 알아야 한다'고 한다. 제불의 본래 모습이 법계의 본성이라는 것이다. 이때의 마음은 부동심이 아닌 연에 따르는 수연심을 뜻한다. 그러므로 마음은 미망을 일으키지 않으면 적멸 부동인데, 이 부동은 고정불변이 아니다. 緣을 따라 일체법을 만들어낸다. 화엄경에서는 ‘화가의 비유’로 설명한다.
화가가 자기의 마음은 능히 알지 못하지만 마음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과 같이 모든 법의 성품도 이러하다. 마음이 화가와 같아서 능히 모든 세간을 그려내니, 오온이 마음을 따라 생겨 만들지 못하는 법이 없다. 마음과 같이 부처도 그러하고 부처와 같이 중생도 그러하다. 응당 부처와 마음의 체의 성품이 다함이 없음을 알라.
세간, 오온, 중생, 부처가 마음이 만들어낸 것이다.『60華嚴經』에서의 ‘만일 중생이 삼세 일체불을 알고자 한다면 응당 마음이 모든 여래를 만들었음을 관하라’에서 중요한 단어는 ‘造’다. ‘造’라는 단어가 없다면 心卽佛로 되는데, 心造佛은 무슨 의미인가. 佛이 마음에 의지하여 기인되었음을 뜻한다.
마음에서 생기된 佛의 性은 空이고, 相은 幻임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한가지의 의문이 일어날 수 있다. 환의 因은 무엇이고, 망법이 환과 같다면 망법이 因이 될 수 있는가?
모든 환사는 망혹의 인이 되지 않는다. 환은 모든 나쁜 허물을 내지 않고 또 모든 환사는 분별이 없기 때문이다...중략... 이 망혹 법은 오직 어리석은 범부의 마음이 집착한 것일 뿐이므로 모든 성자에게는 없다.
‘환’이라는 것은 중생의 눈에 병이 난 것과 같아서, 스스로 분별하는 허물된 습기의 힘으로 ‘없는 것’을 ‘존재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미혹에 의해 ‘有’라고 집착된 환상의 근본은 공하여 차별이 없다.
화가가 여러 가지 채색을 써서 허망하게 다른 상을 그리지만 대종은 차별이 없다. 대종 가운데 색이 없고 색 가운데 대종이 없지만 대종을 여의고 색을 얻을 수도 없다. 마음가운데 그림이 없고, 그림 가운데 마음이 없으나 마음을 떠나서는 그림을 얻을 수도 없다. 저 마음은 항상 머물지 않고 무량하여 사의하기 어렵다. 일체 색을 나타내 보이지만 각각 서로 알지 못한다.
본래심 가운데는 번뇌가 없고 일어난 번뇌는 생멸상으로 自性이 없어서 생멸법들은 서로 알지 못하는 것이다. 일체 법은 자성이 없으며, 자성이 없으므로 법들은 서로 了知하지 못한다. 이에 유식가들은 마음은 인식하는 주체인 견분으로, 그림은 인식되는 대상인 상분으로 설명한다. 현상은 마음의 본체가 대상을 인식하는 작용을 일으킨 것이다. 그러므로 대종을 여읜 색은 있을 수 없다. 색은 대종에서 일어난 客觀으로, 主觀인 마음의 그림자다. 客觀은 主觀의 幻影에 불과한 것으로, 허망한 分別로 만들어낸 세계이다.
환사의 주술과 같이 능히 갖가지 일을 나타내는데, 중생의 업력으로 국토를 사의 할 수 없다. 비유하자면 많은 사람이 형상을 채색할 때 환사의 그리는 바는 마치 일찰나에 마음의 화가가 그리는 것이다. 중생 몸이 각기 다른 것은 마음의 분별을 따라 일어난 것이고 이와 같이 찰나의 갖가지가 다 업으로 말미암지 않음이 없다.
찰나생멸하고 무상한 법을 실체가 있다고 집착함으로 인해 생사는 반복되고 있다. 중생들 각자의 몸과 환경이 차이가 있는 것은 제각기 다른 업을 지었기 때문이다. 화가가 자기 마음대로 그림을 그리듯이, 현재의 삶도 마음에 의해 그려지는 것이다.
마음이 모든 세간 짓는 줄을 아는 이가 있다면 이 사람 부처를 보아 부처의 참 성품 알게 된다. 마음이 몸에 있지 않고 몸도 마음에 있지 않지만 모든 佛事를 능히 지어 자재함이 未曾有하다. 만일 어떤 사람이 삼세의 일체 부처님을 알려면 마땅히 법계의 성품이 모든 것이 마음으로 된 줄을 알라.
마음과 부처와 중생은 차별이 없이 다함이 없다. 세간이 마음이 만든 것임을 아는 이는 참된 부처의 성품을 안다. 이 구절은 필자에게 의문을 일으킨다. 세간은 일심에서 일어난 법으로, 그때의 마음은 적멸심에서 생기된 분별심으로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김이 서린 유리창을 통해 산하대지를 본다면 흐리게 보일 것이다. 유리창에 햇빛이 비추어 김이 사라지면 산하대지는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즉 산하대지 자체에 선명함과 흐림이 있는 것이 아니고 보는 사람의 안목에 따라 현상계는 달라 보인다. 무명이 없는 성자에게는 일심법계이고, 염오의 무명을 지닌 중생에게는 망심세계이다. 마음에서 ‘有’라고 보여 일어난 망법계는 궁극에 괴로움을 초래한다. 본마음에서 물거품처럼 생한 세간은 成, 住, 壞, 空하여 변화하고 사라지게 된다.
물거품이 꺼지고 나면 허공도 본래 없는 것이므로 어찌 삼계가 있겠는가. 근원으로 돌아가면 성품에는 둘이 없지만 방편으로는 여러 문이 있다.
모든 존재는 달라지기 때문에 무자성이다. 일체 법이 공하기 때문에 무자성법 또한 없는 것이다. 결국 공에서 일어난 법 또한 공이다. 미혹한 중생은 이런 진리를 등지고 적멸경지에서 벗어나 쉴 새 없이 분별을 일으키니 온갖 법이 생한다. 중생들은 각자 업의 주인공이므로 다른 몸을 만들어낸다. 무차별인 일심에서 시작되었지만, 각자의 업으로 인해 천차만별의 중생세계가 벌어진다. 중생세계의 형상은『화엄경』의 법계도에 의하면 삼천대천세계로 단계적으로 설명된다.
모든 법이 허깨비와 같고, 아지랑이와 같고, 물속의 달과 같다. 허공과 같고, 메아리와 같고, 건달바성과 같고, 꿈과 같고, 그림자와 같고, 물속의 영상과 같고, 화한 것과 같다.
삼계는 창조자가 따로 있어서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저장된 업으로 스스로 만들어 실제로 착각한 것에 불과하다.
마음이 일어나면 갖가지 현상이 생겨나고 마음이 사라지니 해골과 둘이 아니다. 부처님께서 ‘三界唯心’이라 하셨으니 어찌 나를 속인 것이겠는가.
생멸심이 사라지면 속제가 바로 진제이니 삼계는 오직 마음에 건립된다. 결국 만법은 오직 하나의 식에서 비롯된다.
이에 이르기를 내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三界唯心 萬法唯識의 가르침을 들었다. 좋고 나쁨은 나에게 있는 것이지 그 본질이 물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중생계는 외부의 一切諸法에 의해 차별되어 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心識에 따른 것이다. 이 뜻은『해심밀경uc0에서 더욱 뚜렷해진다.
세존이시여, 모든 삼마지의 관에서 행하는 바 영상은 이 마음과 다름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불타가 자씨보살에게 말하였다. 선남자여, 마땅히 다름이 없다. 무슨 까닭인가 하면 그 영상은 오직 식이기 때문이다. 선남자여, 내가 설한바 식의 소연은 오직 식으로 현현한 것이기 때문이다.
삼마지에서 관하는 영상조차도 마음에서 일어난 식일 뿐이다. 모든 영상은 진리를 벗어나 인연으로 화합된 의타기의 상분이다. 견분이 상분을 실체라고 착각하기 때문에 만법이 생겨난다.
Ⅲ. 결 론 ▲ 위로
화엄경에 나타난 유식사상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첫째, 一切唯心造의 顯現된 중생의 마음은 ‘분별심’이다. 적멸심에서 분별식을 일으켜 현상계를 만든다. ‘삼계는 오직 마음일 뿐이요, 만법은 오직 식일 뿐이니, 마음 밖에 현상이 없는데 어찌 따로 구하겠는가’라는 유심구에 만법은 분별심의 결과이다.
둘째, 분별된 마음은 법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마음을 항상 일으키나 마음을 볼 수는 없다. 마음 작용의 결과인 나타난 법으로 알 수 있다. 또한, 마음이 고정불변의 체상이 아니라는 뜻이다. ‘일체법은 오직 식’이라는 말은 마음에서 식을 일으키지 않으면 일체법이 없다는 뜻이다.
셋째, 분별심은 마음에서 연기법에 의해 일어난다.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기 때문에 저것이 일어나므로’ ‘인연’의 임시 결합에 의해 법이 생한다. 일체법은 연기에 의해 나타나므로 거짓 화합상이다.
넷째, 깨친 마음은 자성청정심인 적멸심이다. 원효는 悟道하여 ‘마음이 일어나므로 갖가지 법이 일어나고, 마음이 사라지므로 땅막과 무덤이 둘이 아니라’고 했다. 깨침의 경지는 정토와 예토가 둘이 아닌 평등경지이므로 적멸과 분별이라는 두 법이 없다. 성인들의 마음은 자성청정심 일색이 될 것이다. 識을 智로 변화시킨 자비심의 一心이 아니겠는가.
다섯째, 분별심은 적멸심에서 발생된 변화한 마음이다. 한줄기의 강을 상류와 하류로 나누듯이, 하나의 마음을 작용유무에 따라 적멸심과 분별심으로 분류한 것이다. 상류의 청정한 물은 내려오면서 물들어 하류에서는 오염수가 된다. 분별심은 적멸심의 오염 상태이다.
여섯째, 분별상의 근본은 무자성 空이다. 어리석은 사람들이 전도된 착각 때문에 모든 영상에 대해 오직 식일 따름이라는 진실 그대로 알지 못하고 전도되게 이해하는 것이다. 중생들은 공에서 일어난 환화상을 실체로 여긴다. 그러나 몽환은 깨고 나면 모든 것은 사라진다. 공에서 시작되어 공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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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Vijñptimāratāiddhi Theory of Avataṃaka-sūra
by Kim, Young-Mi
Everyone lives in terms of the movement of mind. The definition and action of mind is illustrated as one true realm of reality(一眞法界) in Ten stages chapter(十地品) of Avataṃaka-sūra(華嚴經). In Ten stages chapter(十地品), Trailokya(三界) is so empty and hollow that it actually exists through the mind. The same Dharma also applies to dvāaśāṅa pratῑyasamutpāa (12因緣分). Vijñptimāratāiddhi(唯識) is based on the idea.
The idea is connected to mind only in Vijñptimāratāiddhi and developed āaya thought. Idealism family(The Dharmalakṣna sect 法相宗) regards mind as āaya, mentality as manas(意識) and vijñāa as six parijñāa(六識) and advances them to The eight parijñāa thought. On the other hand, citta, manas, vijñāa are categorized in Abhidharmakosabhasya(俱舍論) of the early Buddhism.
However, it just has a different name as Six vijñāa all opinions(六識體一說) fundementally refers to the same thing. āaya(阿賴耶識) contains two different kinds of meanings, that is, Enlightenment and Unenlightened. It is saved as it has every dharma. In addition, āaya causes every Dharma. Therefore, āaya is one mind covered by the avidyā(無明). If you desert the false thoughts, you can experience Enlightenment and if you don't, you should go through Unenlightened. Thus, the present world is maintained by āaya.
Zhiyan(智嚴) as avataṃa family consider One mind as āaya. Zongmi(宗密) explains ‘ind only dharmakṣtra(一心法界)’s ‘ne true realm of reality(一眞法界)’nd interpret 'one mind' as bhūatathatā(眞如) Fazang(法藏) supposes that if you produced by causal conditions, you can be differentiated and if you don't that is Bhūatathatā(眞如). Perfectly accomplished nature of reality(圓成實性) has the meaning of The changeless essence or substance(不變眞如) and its conditioned or ever-changing forms as in the phenomenal world(隨緣眞如). Not having an independent nature(依他起性) has the meaning the apparent(似有)and no self-nature(無性).
Bhūatathatā called the fundamental immutable substance of all things(體大) since it's impartial and boundless and also called the greatness of its attributes or manifestations(相大) because it has unmeasurable Buddhist virtue. Furthermore, it is described as the greatness of its functions and operations within and without(用大) because makes the cause and effect of the household furniture and success between operates.
When enters toward the fundamental immutable substance of mind becomes Bhūatathatā and is opened in form of minds and when and is a The two gates of mind, creation and destruction, or beginning and end. People build up things only with mind which constantly changes its features, so we can't regard mind not as considered as immutable mind(不動心) but as resulting from conditioning causes mind(隨緣心). Consequently, mind holds a calm state unless you stir Deluded and misled(迷妄) and make up every rule following the karma. In Ten stages chapter, it is compared as artist.
Discriminating mind is very unpredictable for it is brought by Calmness and extinction mind. This kind of mind constructs the real world. Similarly, it is able to set up every rule following the karma. Nonetheless, theres' no the true self in dharma. Dharma temporarily exists due to the karma and its characteristics is masked by the falsity. The source of an illusion is so vacant that there's no difference. There shouldn't be concerns and worries in the Original mind. Those negative feelings don't include Svadhava. Every Dharma doesn't also have Svadhava. Therefore, the true nature of the Dharma is absolute void.
Key words:
Vijñptimāratāiddhi, mind only dharmakṣtra, āaya, The universe is mind only, Bhūatathatā
[출처 : 불교문화연구 Vol.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