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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에센파(The Essenes)의 수도지 여리고에서 사해길을 따라 약 7km정도 남쪽으로 내려가면 사해 우측 북단에 드믄드믄 굴이 보이는 황토빛 바위산을 만난다.그곳이 '사해사본'(Dead Sea Scrolls)으로 유명한 쿰란이다.이곳은 사해문서(사본)를 남긴 에센파(the Essenes)의 수도지(修道地)로 전해오고 있다.에센파는 대체로 BC2세기부터 AD2세기 까지 약 400년동안 있었던 금욕주의적인 유대인 수도사 집단들이었다. 에센파 사람들은 당시의 유대교인들의 부패한 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사해주변의 뜨거운 사막지대로 이주했다.그들은 예루살렘을 버리고 이곳 황무지에서 기도와 학습,명상과 자선,시등에만 몰두하는 엄격한 생활을 했으며 모든 재산은 수도원에 헌납하고 완벽한 공동체 생활을 영위했다고 한다.한 이교의 장로인 폴리니(pling)에 의하면 에센파는 돈이나 여인을 갖지 않았다고 했으며,또 역사학자 요세프스는,에센파는 엄격한 규율,추방되는 사람들은 무섭게 매장되는 것,매일 몸을 씻는 것,의식(儀式)의 부정(不淨)에 대한 두려움,에센파 가입을 위한 3년간의 예비기간,그들 내부 문헌에 대한 비밀엄수성 등을 기록 했다.이 에센파는 식물에 대한 특별한 지식을 갖고 있었으며 구약성경을 자세히 연구하여 앞날을 예언하는 것으로도 유명했다.에센파의 숫자는 4000명으로 추산되고 ,에센파는 BC100여년전에 쿰란에 정착했는데 BC31에 있었던 지진으로 파괴되어 이곳을 떠났다가 30년후 다시 돌아와 재건 했다고 한다.이들은 AD68년에 일어난 유대인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하여 진격한 로마의 티도(Titus,vespasian황제때)에 의하여 도륙당하려고 할 때 그들의 소중한 보배인 '성경사본'을 사람의 발길이 잘 닿을 수 없는 절벽 동굴 속에 감추고,숨겼었다.
[쿰란의 동굴 바위] (2)사해사본의 전설 1947년부터 오늘(1996. 8. 9. 정오경) 우리가 바라보며 통과한 사해의 북서쪽 해안의 바위산들에서 많은 성경사본이 발견되었는데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은 와디쿰란(Wadi Qumran)에 있는 11개의 동굴에서 발견된 사본들이 었다.이것은 BC100-AD68년 동안에 키르베트 쿰란(Khirbet Qumran)에 본부를 둔 한 에센 공동체의 잔존 문서들이라 한다.이들은 자신들을 이스라엘의 '의로운 남은 자들'이라고 믿고 유대광야인 이곳으로 들어와서 '악한 시대'가 끝나고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는 결정적인 사건을 대비한 금욕적 수도사들이었다.이들이 남겼으리라 추정되는 성경사본의 발견전설은 다음과 같다.1947년 사해 서쪽지역에서 모하메드 에디브라 라고 하는 한 베두윈(아랍 유목민) 양치기가 잃어 버린 양을 찾든 중 어떤 동굴에 무심코 돌을 던졌다.그러자 무엇인가 깨지는 소리에 놀란 이 양치기는 이 동굴에 마귀가 살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무서워서 도망쳐 버렸다. 다음날 그의 사촌과 같이 다시 동굴에 들어간 양치기는 그 안에서 8개의 항아리를 발견했다.그중 몇 개는 뚜껑이 덮여 있었다.이것들을 바깥으로 가져와 금이 들어 있기를 기대하면서 열어 보았으나 그들이 이해할 수 없는 글자가 쓰여진 가죽뭉치만 있는 것을 보고는 매우 실망했다.모두 7개의 두루마리가 들어 있었는데 양치기는 그것을 칼릴칸도 라고 하는 시리아 정 교인에게 팔아 넘겼다. 칸도는 그중 4개의 두루마리를 예루살렘에 사는 시리아 정교회 대주교에게 보였다.대주교는 4개의 두루마리가 히브리어로 쓰여져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즉각 사들였으며 두루마리가 매우 귀중한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미국으로 건너가 이겔 야딘이라는 교수에게 25만 달라를 받고 팔았고. 그후 이스라엘로 옮겨졌다.이 거래는 야딘의 아버지인 엘리자 슈케닉 교수가 베들레헴에서 나머지 3개의 두루 마리를 이미 사들인 후였다. 이 두루마리들은 현재 예루살렘에 있는 이스라엘 박물관의 고문서고에 보관되어 있다.이들 중 가장 유명한 것은 가로 세로 0.3m,7.2m인 이사야의 두루마리이다.이후 요르단 왕국 암만 박물관장 하딩 교수와 성서 연구소장 드보 신부와 많은 베두윈 사람들은 두루마리의 높은 가치를 알고 사해 서쪽을 뒤지기 시작했다.1952년 이 지역 30개가 넘는 동굴에서 900개가 넘는 두루마리를 발견했으며 쿰란에서 90m 떨어져 있는 4호 동굴에서 가장 많은 필 사본을 발견하였다.그 중에는 가죽과 파피루스에 쓰여진 두루마리 이외에 구리에 쓰여진 것도 두 개 있었다고 한다.에센파 사람들은 역사 속으로 살아졌지만 그들이 남긴 '성서사본'은 2000년이나 보존되어 오늘의 '성경의 정확성'을 보증해 주고 있다.전하는바에 의하면,이사야의 두루마리의 그 긴 문장이 오늘의 성서내용과 꼭 같다는 것이다.이것도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기적이라고 생각한다.이렇듯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고온건조한 지중해성 기후에 의한 사막의 열기가 두루마리의 부패를 방지했던 것이다.
[사해사본이 발견된 쿰란 동굴] (베두윈 양치기소년에 의해 사해사본이 발견된 동굴)
[이스라엘 박물관(사해사본 보관소,1965년 개관)]
(이 건물의 지붕모습은 사해사본이 보존되어 있는 진흙 항아리 뚜껑모양 이라 한다)
[사해사본의 하나] -해설 : 사해사본 발굴의 의미 성경의 원본(Originals)은 아직 발견되지 못했다. 현재 성경의 사본(Copies)은 AD10세기경의 것이 가장 오래된 것이다.그런데 사해사본은 BC 1세기경의 것으로 현재의 것보다 1000여년이나 앞선 사본으로서,2000년동안 성경의 내용이 불변했다는 것을 확증하는 의미를 주고 있다. (3)쿰란의 유적(the ruins of Qumran) 에센 종파의 개인 거처는 수도원 본부근처의 오두막과 천막,또는 동굴이었다.이 수도원 본부가 발견된 후 1951년에서 1956년 사이에 발굴작업이 있었다.이 결과,크고 거칠게 다듬어진 돌로 만든 길이 36m,폭 27m의 건물 터가 발견되었다. 이 건물 북쪽 방향에는 3층 높이의 방어탑이 세워져 있었고, 식당이었던 것으로 보이는 길고 좁다란 방에서 도기 접시들이 발견되었다.식당 옆에 있는 방에는 1600개가 넘는 도자기 그릇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부엌이었던 것같다. 가장 흥미를 끈 것은 긴 의자와 책상이 있는 기록실이었다. 이 곳에서 청동이나 진흙으로 만든 잉크병이 발견되었는데 청동 잉크병에는 잉크가 굳어져 있었다.이 중심 건물 주변에는 이들의 마굿간과 도자기를 굽던 장소,방앗간과 수로를 이용하여 산의 빗물을 끌어서 저장했던 7개 저수지의 흔적이 뚜렸이 남아 있다한다.그리고 이 지역 동쪽에는 약1100개의 무덤들이 모여 있는 공동묘지가 있다고 한다.
[쿰란의 한 유적지]
[기원전 2세기경 쿰란공동체 주거지]
[유대 광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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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