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부암동
서울시 종로구 부암동 주민 2년차 ‘부암유’의 여름방학숙제는 ‘부암동 탐구생활’이었다. 나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부암동에 반한 상태다. 앞으로도 얼마든지 ‘부암동 타령’을 일삼을 지 모른다. 흡사 나쁜 남자에게 빠져버리고만 여자의 안타까운 행보 같다. 부암동은 나 같은 건 상관없이 느긋하게 ‘마이 페이스’로 일관하는데, 나는 애타게 부암동의 사계절을 마음에 담고, 만날 산책을 하고, 맛집을 탐방하기 위해 동네 소식을 녹색창에 묻기도 한다. 동네 친구와 “부암동 카페 주인들 중엔 왜 그리 ‘베리베리 아티스트 타입’이 많을까. 냉동밥을 전자레인지에 돌려주면서도 어찌 그리 당당할까”와 같은 한탄도 하지만, 다 그때뿐이다.
산책을 할 때마다 반하는 나의 부암동을 이번 기회에 사진으로 기록했다. 내 주요 산책로를 소개한다(참고로 부암동이란 내가 걸어 다니는 모든 반경을 포함하므로 실제 구역은 부암동이 아닐 수 있음).
근대화수퍼
시작점은 ‘근대화수퍼’다. 부암동 옆 동네로 상명대학교 올라가는 길 건너편, 세검정 가는 길목에 있다. 우연히 여덟 명의 젊은 작가들의 단편을 묶은 소설집 『여신과의 산책』에서 이곳의 이름을 발견하곤 반가웠다. 정확히 여길 지칭하는 건지는 아리송하지만. 작가 이지민의 프로필엔 ‘그 시절 삼거리 골목에 있던 ‘근대화 슈퍼’의 ‘근대화’란 말이 근사한 수수께끼처럼 느껴졌다’고 써있다. 맞아, 서촌, 부암동, 평창동 이쪽 동네들이 다 근사한 수수께끼 같은 구석이 있지. 첨단을 달리는 세상의 속도에 아랑곳하지 않는 뚝심 같은 것. 허름한 간판에 적혀있듯, 과거의 이름은 경북상회였던 모양이다. 왼쪽 사진은 8월 초, 오른쪽 사진은 8월 중순의 풍경. 근대화수퍼는 팔리는 물건과 새로 들어온 물건이 순환하면서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송스키친, 클럽에스프레소
조선 후기 다산 정약용이 잠시 쉬면서 경관을 감상하고 <유세검정기>를 쓴 배경이 된 육각 정자 세검정 옆 골목에 위치한 ‘송스키친’.(왼쪽) MBC <커피프린스 1호점>(2007) 이윤정 PD의 차기작으로 기대를 모았으나 시청률이 4~6%를 오갔던 비운의 드라마 MBC <트리플>(2009)의 주요 배경으로 나왔던 곳이기도 하다. 그 드라마의 팬이자, 16부작 모두 ‘본방사수’했던 사람으로서 볼 때마다 추억이 방울방울!
하지만 내 단골집은 부암동의 랜드마크인 로스팅 커피 하우스 ‘클럽에스프레소’(커피상점 Since 1990)(오른쪽)다. 유명 치킨집 ‘치어스’와 함께 평일이건 주말이건, 낮이건 밤이건 늘 사람들이 많은 곳. 아쉬운 점은 둘이 가서 하나 시키면 굉장히 혼난다는 것! 다섯 가지 커피를 무료로 시음해 볼 수 있는데, 원두 구매 고객을 위한 것이었나, 마치 까막눈처럼 저 문장을 그동안 보지 못했네.
동네의 풍류
세검정 뒷길 홍제천 길을 걸으면 이런 풍경을 만난다. 물도, 돌도, 나무도, 새도, 식물도, 바람도, 햇살도 있다.
물 떨어지는 소리가 24시간 들리는 집
홍제천 길에서 자하문 슈퍼를 지나 동네 사람만 아는 지름길 계단을 오르면 백사실 계곡 근처에 빠르게 갈 수 있다. 북한산 줄기, 북악산, 인왕산의 수려한 능선, 평창동 전망이 한눈에 보이는 아담한 계곡으로 주말이면 사람들이 꽤 몰려든다. 그 끝자락에 신기한 지점이 있다. 전체 지형이 바위산인데 앞으론 작은 절이 있고, 사진처럼 집 몇 채가 위에서 아래로 이어진다. 그 옆으로 콸콸콸 물이 떨어진다. 저 집 창문으론 종일 물 소리가 들릴 거다. 홍수 때에는 미친 듯이 들릴 것이다. 어떤 기분일까? 매우 무감해지려나?
백사실 계곡
언젠가 KBS <1박2일>에서 멤버 은지원이 다녀간 이후로 찾아오는 이들이 부쩍 늘었다면서, 일부 ‘부암동 러버’들은 인터넷에 꽤 근심을 털어놓곤 했다. 조용하고 깨끗해서 ‘도롱뇽 집단 서식처’로도 유명한 곳에 쓰레기도 많이 버리고, 사람 때가 타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도심 한가운데 있는 백사실 계곡이 언제까지나 청청구역으로 남길 바라는 건 그저 로망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 그나저나 몇 번을 가도 내 눈엔 왜 도롱뇽이 안 보이는가!
산모퉁이 카페 가는 길
백사실 계곡에서 부암동 산모퉁이 카페 쪽으로 빠져 나오면, ‘여기가 바로 유럽일세’ 싶은 풍광이 펼쳐진다. 클럽에스프레소에서 드라마 <커피프린스 1호점> 촬영지로 유명한 ‘산모퉁이’ 카페 가는 길목과 그 주변이다. 내가 늘 예쁘다고 쓰다듬는 하얀 대문집도 있고, 집집마다 나무들이 아낌없이 뻗어 있다. 자취생의 로망인 ‘햇빛에 빨래 널기’ 신공도 아무렇지도 않게 펼쳐지고.
고진감래, 동양방아간, 환기미술관, 서울미술관
누굴까? 클럽에스프레소 쪽에서 산모퉁이, 백사실계곡, 팔각정까지 가는 길을 아주 심플하게 알려주는 지도를 벽에 그려둔 이는. 그 옆에 적힌 네 글자 ‘고진감래’. 고생 끝에는 정말 낙이 오는 거지, 도롱뇽아? 응? 여기가 약간 비탈이어서 차를 타고 다니는 사람이 많은데, 꿋꿋이 걸어가다 보면 ‘언제 나오는 거야!’ 싶은 순간에 곧 나타난다. 클럽에스프레소 부근엔 오래된 동양방아간이 건재하고 근처엔 환기미술관도 있다. 그나저나 우리집 근처(라고 해도 한 정거장 전이지만)에 커다란 ‘서울미술관’이 갓 생겼다(사진을 아직 못 찍었네). 뭐, 이런 호사가 다 있담. 루루, 나 이제부터 주말이면 슬리퍼 끌고 우아하게 커피 한잔 들고서 갤러리 구경가는, 그런 여자.
친구네 집 마당 ‘도촬’
환기미술관 근처 친구네 집 마당 도둑촬영.(왼쪽) 우리 집은 길가라 창문을 열어두면 차소리 밖에 안들리고, 창문을 닫으면 아무 소리도 안 들린다. 그런데 친구는 아침에 닭소리와 새소리 때문에 기분 좋게 잠을 깨고, 뒤이어 동네의 모든 개들 짖는 소리 때문에 기분을 잡친다고 한다. 에이, 너희 집 마당에는 나무그네도 있으니까 개들을 이해해 줘.
남의 집 풍경.(오른쪽) 예쁘게 놓여졌네, 항아리들이. 정갈하게 자라나는 식물들과 어우러져 우아한 한 폭의 그림이로구나.
예술 돋는 동네
앞서 미술관 얘기도 했지만 부암동엔 젊은 예술가들이 많이 산다(고들 한다). 한적한 골목에 디자이너숍도 있고, 작은 갤러리도 여럿 있다.
그냥 동네 담벼락
쓰레기 버리러 갈 때마다 보이는, 이 동네에선 흔해 빠진 동네 담벼락. 저 넓고 커다란 바위 틈 사이로 엄청난 한기가 밀려와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엔 무지 춥다. 어쨌든 자연을 느끼며 쓰레기를 버리는 부암동 주민의 여유를 자랑하고 싶었어요!
청운중학교 운동장
버스를 타면 부암동 전 정거장에서 귀여운 ‘중딩’ 남학생들이 우루루 내린다. 청운중학교다. 어느 한가한 주말 오전, 청운중학교 운동장에 들어가 앉았는데, 이럴 수가. ‘너희들은 이렇게 엄청나게 스펙터클한 풍경을 매일 아무렇지도 않게 보고 사는 구나’, 그리고 ‘땡볕에 야구부 수고한다, 야’. 특히 내가 좋아하는 부분은 ‘산의 뼈’다. 부암동을 감싸는 인왕산은 바위산이라 나무가 듬성한 부분에 바위가 도드라져 보이는 데, 내 마음대로 뼈라고 부르고 있다. 자연의 감동이 카메라에 채 다 담기지 않아서 안타깝다.
V자 혹은 물구나무서기 나무
아마도 서촌 어디쯤에서 찍은 것으로 기억한다. 나무가 ‘이영차’ 소리를 내며 물구나무서기를 하고 있는 것도 같고, 시크하게 V자를 그리는 것도 같다. 비록 나무는 잘렸지만, 집과 함께 멋진 오브제가 됐다. 저걸 흉물이라고 생각 안하고 보존해주는 주인장 멋져요, 멋집니다.
글/사진 - 유지영 (교보문고 북뉴스) jygetz@kyoboboo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