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생(현상) antibiosis; 자연계에서 일어나는 생물 종간의 생존 투쟁
항생 물질(제) antibiotic; 다른 미생물을 격퇴하기 위해 미생물이 만들어 내뿜는, 일종의 화학무기.
항미생물제 antimicrobial; 세균, 진균(곰팡이), 바이러스 같은 미생물(microbe)에 듣는 약들. 작용하는 미생물에 따라 항균제(antibacterials), 항진균제(antifungals), 항바이러스제(antivirals), 항기생충제(antiparasitics)로 나뉜다.
- 할머니 무슨 약 드세요?
- 이름은 몰라. ‘마이신’ 같이 생긴 약인데…
이름 모를 항생제 ⓒ 박지욱
진료실에서 어르신들이 말씀하시는 ‘마이신’처럼 생긴 약은 보통 캡슐(capsule) 형태의 약이란 뜻이다. 캡슐 약이 모두 마이신도 아니고 모든 마이신들이 캡슐 약은 아니지만, 어르신들은 ‘캡슐=마이신’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
2000년에 시행된 의약분업 이전에는 약국에서 자유로이 항생제를 구입할 수 있었는데, 항생제들의 이름이 ‘OOO마이신’인 경우가 많았던 데다가, ‘마이신’은 캡슐 약이 많았던 탓에 캡슐은 마이신이자 항생제로 인식된 경우도 많아 보인다.
팔자도 어렸을 적에 의료 보험이 없었던 탓에 편도선염 정도는 약국에서 산 ‘마이신’ 캡슐로 해결한 기억이 난다. 어떤 경우에는 약효가 빨리 나오라고 캡슐을 까서 물에 개어 먹거나, 심지어는 상처에 직접 발라주는 경우도 자주 보았다. 이런 목적에 쓰기위해서라도 사람들은 캡슐형 마이신을 더 원했을 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항생제의 대표 선수는 페니실린인데, 왜 ‘실린’이 아닌 ‘마이신’이 항생제의 동의어로 쓰였을까?
최초의 항미생물제(antimicrobial)은 독일 과학자 에를리히(P Ehrlich)가 1907년에 내놓은 살바르산(Salvarsan)으로도 불린 ‘약품 606호’다. 에를리히는 조직(tissue) 염색에 대한 남다른 열정이 있었는데, 조직이나 세포가 특정 물질에 염색되는 염색약이 지닌 강력한 조직 결합력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세포나 조직과 강력히 결합하는 능력이 있다면 단세포 생물인 병원균과도 결합할 수 있지 않을까? 결합해서 혹시 죽일 수도 있지 않을까? 정상 세포라면 정상 미생물이라면 염색약이 몸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가만히 내버려둘 리가 없지 않을까? 다시 말하면 염색약에 물든 미생물이라면 이미 산 목숨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미생물을 물들이는 염색약이라면 미생물을 죽이는 약이 되기도 할 것 아닌가?
에를리히는 먼저 ‘신경’을 파랗게 물들이는 메틸렌 블루를 이용해 ‘신경통’ 치료를 시도했고 효과를 확인했다. 하지만 부작용 때문에 약으로 쓰기는 어려웠다. 대신에 메틸렌 블루가 말라리아 원충을 물들일(죽일) 수 있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주변에 말라리아를 앓는 환자가 없는 바람에 약으로 시험을 해보지는 못했다.
다음으로 에를리히는 비소(arsenical) 성분이 함유된 아톡실(Atoxyl)이라는 염색약이 파동편모충(trypanosoma)라는 기생충을 염색했고, 이를 이용해 감염된 쥐를 치료하는데 성공했다. ‘염색=살상’이라는 진리가 이번에도 통했다.
하지만 아톡실은 사람에게 쓰기에는 위험한 약품이었고, 좀 더 안전한 약으로 만들기 위한 개량 작업을 시작한다. 하나 만들고 시험해보고 실패하고, 두 개 만들고 실패하고, …. 그렇게 605번이나 실패한 다음에서야 사람의 파동편모충 감염증을 치료할 수 있는 약을 얻었다. 이것이 바로 ‘약품 606호(compound 606)’다.
에를리히는 그 무렵에 발견된, 매독균이 트리파나조마(파동편모충)와 매우 닭은 사실을 알고 ‘약품 606호’를 매독 치료제로 시험해보았다. 운이 좋았던 것일까? 매독의 치료제로도 효과가 아주 좋았다(1907년). 이제부터는 효과는 의심스럽고 부작용이 많은 수은 대신에 매독은 ‘606’이 치료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약품 606호’는 명실상부한 최초의 ‘항미생물제(antimicrobial)’가 되었고, ‘살바르산’이라는 상품명으로 널리 쓰였다. 살바르산은 ‘구원(salvare) + 비소(arsenical)+물질(-an)’의 합성어이다.
붉게 염색된 파동편모충 ⓒ 위키백과
25년 후인 1932년에는 역시 독일 과학자인 도마크(G Domagk)는 체내에서 활동 중인 병원균을 죽이기 위한 방법을 연구했다. 그는 세균의 힘을 빼 인체의 면역계가 쉽게 제압할 수 있도록 할 물질을 찾기 시작했다. 도마크 역시 에를리히처럼 염색약을 연구하여 ‘포론토질(Prontosil)’을 합성했다.
‘606’이 매독치료제라면, 프론토질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보는 연쇄상구균(streptococcus) 감염에 잘 들었다. 1935년에 발매되기 시작한 ‘프론토질’은 ‘606’을 이어 대표적인 항미생물제로 쓰였다. 아마 당시에는 606 혹은 프론토질이 항미생물약의 대명사로 쓰이지 않았을까?
프론토질을 연구해보니 프론토질이 체내에 들어오면 장내미생물이 이를 설파닐아미드(sulfanilamide)라는 물질로 변형시키고 그것이 실제적인 약효 성분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렇다면 굳이 프론토질이 아니라 설파닐아미드를 바로 투여하면 될 것이 아닌가? 이후로 1948년까지 5,000여 종의 ‘설파계’ 항미생물제가 개발되었다. 재미난 사실은 이렇게 많은 설파계 물질들 중 일부는 당뇨병치료제(설포닐우리아), 이뇨제(푸로세마이드), 항암제가 되었다.
한편, 프론토질 개발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도마크의 강연을 들은 플레밍(A Fleming)은, 이제 합성 항미생물제들이 세상에 쏟아져 나올 텐데, 몇 년 전에 자신이 발견한 사실, 즉 곰팡이가 만들어내는, 자연산 항생물질(페니실린)은 별로 소용이 없을 것으로 예단하고 연구를 중단하고 말았다.
플레밍이 포기한 이 ‘자연산’ 항생제는 후세의 과학자들이 재발견하여 쉽게 대량생산하는 길을 발견한 덕분에 플레밍은 페니실린의 발견자로 역사에 이름을 남길 수 있었다.
페니실린(penicillin)는 1941년에 영국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패혈증에 걸려 목숨이 위독한 환자에게 시험적으로 써보았다. 환자는 이미 설파계 약물도 듣지 않는 상태라 사실상 희망이 없던 환자였는데 페니실린을 맞고 기적적으로 회복되었다. 이제 606, 프론토질, 설파의 뒤를 이어 페니실린이 항미생물제의 대명사로 등극한 순간이다.
도마크 ‘합성법’이 ‘자연산’ 옹호자인 플레밍의 기를 죽였다면, 페니실린의 대성공은 자연에 존재하는 미생물로부터 항생물질을 얻으려는 과학자들에게 큰 용기를 주었다. 그 중에는 미국의 농학자인 왁스먼(S Waksman)도 있었다.
왁스먼은 자연에 있는 미생물들이 자신의 생존에 방해가 되는 다른 미생물들과 생존 투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화학물질을 내뿜는다는 사실을 알고 이것에 ‘항생 물질(antibiotic)’이라는 이름을 처음 붙인 사람이다.
왁스먼은 합성보다는 흙 속에 흙 속에 사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토양 미생물들의 ‘화학 무기’를 뒤지는 쪽이었다. 그러다가 세균의 일종인 스트렙토마이세스(streptomyces)가 분비하는 ‘자연산’ 항생제 스트렙토마이신(streptomycin)을 얻었다(1943년). 스트렙토마이신은 당시에 큰 문제가 되었던 결핵의 특효약이 되었다.
스트렙토마이신의 성공은 많은 연구자들을 미생물에 매달리게 했고 이후로 네오마이신, 카나마이신, 겐타마이신, 토브라마이신, 에리스로마이신, 린코마이신, 리파마이신, 그리고 페니실린보다 더 좋은 테라마이신 등등의 항생제 탄생에 기폭제가 되었다.
캡슐형 볼펜 ⓒ 박지윽
그러다 보니 대세는 ‘OO실린’으로 불리는 페니실린의 후예들보다는 ‘OO 마이신’들이었다. 특히 일부 마이신들은 알약으로도 나와 약국에서 자유롭게 사고 팔 수도 있었고, 그러다 보니 자가 처방 및 투약도 가능했다. 그러면서 어느새 마이신은 항생제를 일컫는 일반 명사가 되었고, 마이신을 담은 캡슐들은 항생제를 뜻하는 이름으로 자리를 잡은 것으로 보인다. 필자가 사는 제주에서는 ‘마이신 닮은 약’이라면 항생제가 아니라 캡슐을 뜻한다. 물론 이것은 순전히 필자의 주관적인 추리다.
여하튼, 606에서 시작해 프론토질, 페니실린, 마이신으로 불린 항생제의 지존들, 앞으로는 어느 약이 항생제의 대명사로 불릴 지 무척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