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님께서 은총으로 주신 새 천년이 우리 앞에 활짝 열렸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는 이미 5시간 전에 새 천년으로 들어갔습니다.
남태평양의 키리바티 공화국과 통가라는 나라는 지구상의 모든 나라보다 가장 먼저 새 천년을 맞았습니다. 새 천년이라고 해서 우리가 천년 전체를 사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천 년 대에서 2천년대로 넘어가는 역사적 전환점의 첫 부분을 살게 되었다는 것은 대단히 큰 의미가 있습니다. 이 시간이 주는 역사적 엄숙함과 감회를 맛볼 수 있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새 천년은 <무지개 빛>을 띄고 사람들에게 나타났습니다. <새 천년>을 <뉴 밀레니엄>이라고 합니다. 밀레니엄이란 말은 단순히 천년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천년왕국>을 말할 때도 밀레니엄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천년왕국이 무엇입니까? 모든 고통과 시련이 끝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시는 낙원을 천년왕국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밀레니엄이란 말을 쓸 때는 그런 평화의 낙원이 오기를 기다리는 심정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전 세계 인류는 금빛 환상을 가지고 새 시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연 새 천년은 얼마나 아름다운 선물을 우리에게 가져다 줄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앞에서도 통가 공화국이 우리보다 다섯 시간 먼저 새 천년을 맞았다고 말씀드렸는데, 인상적인 것은 통가에서는 시계가 자정을 가리키는 역사적인 순간에 엄청난 성가대가 <헨델의 메시야 중의 할렐루야>를 찬양했습니다. 새 천년을 할레루야의 찬양으로 맞는 그 광경은 매우 인상적이었고, 감동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과연 새 천년은 온 지구상의 인류가 하나님을 향하여 찬양하게 될까요? 죄악과 우상 숭배는 다 사라지게 될까요? 전쟁과 기근, 가난과 외로움, 질병과 고통은 사라질까요? 한숨과 신음 소리, 눈물과 탄식이 멈추게 될까요?
우리는 그 해답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새 천년 그 자체는 결코 낙원이 아님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새 천년에도 여전히 어려움과 시련이 우리 앞에 있을 것입니다. 새 천년 자체가 낙원은 아닙니다. 우리는 어떻게 앞날을 살아나가면 좋겠습니까? 본문은 새 천년을 시작하는 우리가 명심할만한 충고를 줍니다.
첫째로 우리는 잠잠히 하나님만 신뢰해야 하겠습니다.
당시 유다 왕국은 북방의 강대국인 앗수르의 위협을 받고 있었습니다. 이 말씀이 선포되던 당시 북 왕국은 이미 앗수르에 의해 멸망했거나, 멸망당할 위기에 있었습니다. 이것을 본 남 왕국 유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남 왕국이 발견한 대책은 남쪽의 강대국인 애굽을 의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애굽이 그들에게 도움이 되었습니까? 본문 앞부분인 7절을 보십시오. <애굽의 도움이 헛되고 무익하니라 그러므로 내가 애굽을 가만히 앉은 라합이라 일컬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애굽은 거대한 라합처럼, 마치 공룡처럼 거대하였으나, 막상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다는 말씀입니다.
게다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애굽을 의지하는 그들의 불신앙적 태도는 하나님께 합당치 않았습니다.
1절 이하를 보세요.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화 있을진저 패역한 자식들이여 그들이 계교를 베푸나 나로 말미암아 하지아니하며 맹약을 맺으나 나의 신으로 말미암아 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 그들이 바로의 세력 안에서 스스로 강하려 하며 애굽의 그늘에 피하려 하여 애굽으로 내려갔으되 나의 입에 묻지 아니하였으니 죄에 죄를 더하도다. 그러므로 바로의 세력이 너희의 수치가 되며 애굽의 그늘에 피함이 너희의 수욕이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신뢰해야 살 것이라는 말씀을 어긴 것이었습니다. 본문 15절 이하를 보세요. <주 여호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가 말씀하시되 너희가 돌이켜 안연히 처하여야 구원을 얻을 것이요 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힘을 얻을 것이어늘 너희가 원치 아니하고 이르기를 아니라 우리가 말 타고 도망하리라 한 고로 너희가 도망할 것이요 또 이르기를 우리가 빠른 짐승을 타리라 한 고로 너희를 쫓는 자가 빠르리니>라고 하셨습니다. 남 왕국 백성들은 하나님을 신뢰하라는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인간적 해결책에 골몰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적을 이기는 방법이 아니라, 소극적으로 도망하는 방법이었습니다. 그게 바로 <말 타고 도망하리라>였습니다. 그러나 <말을 타고 도망하는 방법>으로는 아무 것도 해결되지 못했습니다. 내가 빨리 도망하면 적은 더 빨리 따라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을 신뢰하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은 적을 피하여 간신히 살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한 걸음 더 나가서 적을 이기게 하십니다. 오히려 적을 물리치게 하시는 것입니다.
15절 중간을 보시면 <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힘을 얻을 것이어늘>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면 힘을 얻습니다. 그 힘은 도망하게 하는 힘이 아니라, 적을 무찌르는 힘입니다. 승리하게 하는 힘입니다. 그 예를 홍해 바다 사건에서 볼 수 있습니다.
애굽을 벗어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 군대가 쫓아왔습니다. 이스라엘은 애굽 군대와 홍해 바다 사이에 갇혔습니다. 꼼짝없이 죽든지 다시 끌려가 노예살이를 해야 할 판이었습니다. 백성들이 울부짖습니다. 원망합니다.
그러나 모세는 어떤 태도를 보였습니까?
출애굽기 14장 13절 이하를 보면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신뢰하는 모세를 도우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를 육지처럼 건너 구원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쫓아오던 애굽 군대는 바다 속에 멸망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구원은 피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적을 물리치는 데까지 이른 것입니다.
여러분, 2천년을 사는 첫째 자세는 하나님을 잠잠히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무슨 일을 만나든지, 무슨 일을 시작하시든지 언제나 명심할 일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승리하시길 기원합니다.
둘째로 우리는 조급하지 말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다려야 합니다.
<말을 타고 빨리 도망하려는 이유>는 하나님의 응답이 더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기다리시는 이유는 은혜와 긍휼을 베풀기 위함입니다. 본문 18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저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공의의 하나님이심이라 무릇 그를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때가 차기를 기다리십니다. 그리고 기다리시는 이유는 더 좋은 것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앤드류 머레이> 목사님은 깊은 영성이 담긴 글로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킨 분입니다. 이 분은 1828년부터 1917년까지 살았던 남아프리카의 개혁파 목사님입니다. 머레이 목사님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만일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오래 하나님께서 지체하신다면 그것은 축복을 두 배로 귀하게 만드시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시기 전 때가 차기까지 무려 4천년을 기다리셨다. 우리의 시간은 하나님의 손에 맡겨져 있다. 때가 차면 하나님께서는 신속하게 그의 선택된 백성의 원한을 갚아 주실 것이다. 서둘러 우리를 도우실 것이며 결코 한 순간이라도 지체하지 않으실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우리도 더 좋은 은혜를 주시기 위해 기다리시는 하나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얻기까지 수 십 년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이삭은 처남 집으로 보낸 아들 야곱을 다시 만나기 위해 수 십 년을 기다렸습니다. 요셉은 13년의 고생 후에야 총리가 되었습니다. 모세는 미디안 광야에서 사십 년을 기다린 후에야 쓰임 받는 종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수 백 년을 기다린 후에야 가나안 땅을 얻었습니다. 기다리는 것은 신앙인들에게 전공과목이 되어야 합니다. 잘 기다리는 사람이 잘 믿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때, 카이로스가 될 때까지 조급하지 말고 기다리시길 기원합니다. 그러면서 한 걸음씩 꾸준히 발걸음을 내어 디디시길 기원합니다.
셋째로 우리는 환난의 떡과 고생의 물을 맛있게 먹을 수 있어야 합니다.
집에 있는데 한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그 분을 보는 순간 깜짝 놀랐습니다. 얼굴이 전보다 절반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 분은 우리 노회 안의 어떤 단체에서 회장 일도 보던 분이었고, 어느 교회 살림살이를 도맡아 살다시피한 분입니다. 그런데 너무 많이 상한 모습으로 찾아왔습니다. 몇 년 동안 보지 못했기 때문에 어떻게 지냈느냐고 했더니 그 동안 교도소에서 살았고, 저를 찾아온 그 날이 바로 가석방으로 출소한 날이라고 했습니다. 알고 보니 그 분은 사업을 하다가 부도가 나서 그만 교도소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이사한 것도 모르고 찾아갔다가 여기로 오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 분이 그 고생한 이야기를 하셨는데, 그 중에 기억나는 말이 있었습니다. <교도소 밥도 몇 년을 먹었는데, 앞으로 제가 무슨 고생인들 못 참겠습니까? 저는 뭐든지 잘 할 수 있습니다. 이 교도소가 저에게 문자 그대로 인생을 다시 살게 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목사님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요>라고 했습니다. 그 분은 저와 함께 기도하고 가족을 만나기 위해 가셨습니다.
여러분, 인생을 살다 보면 환란의 떡과 고생의 물을 마시게 됩니다. 환난과 고생은 사람들을 낙심하게 만듭니다. 포기하게 합니다. 그러나 환난의 떡과 고생의 물은 먹고 마시면서 참는 것이 필요합니다.
본문 20절을 보세요. <주께서 너희에게 환난의 떡과 고생의 물을 주시나 네 스승은 다시 숨기지 아니하시리니 네 눈이 네 스승을 볼 것이며>라고 했습니다. 환난의 떡과 고생의 물을 참고 견디면 반드시 우리의 스승이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실 것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어느 교회 저녁예배 시간에 대학 3학년에 다니는 한 여학생이 고개를 숙이고 계속 울고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예배 후 여학생을 불러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왜 우니?> 여학생은 자신이 정말로 좋아하던 남자 친구에게 절교 선언을 당했고, 가정에는 어려운 일이 발생했고, 자신감도 사라졌고, 이 세상에서 자신이 가장 견디기 힘든 시련을 겪고 있다고 말하면서 울먹였습니다. 목사님은 한 영국의 물리학자의 실패를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영국의 한 물리학자가 벌레가 어떻게 고치를 만들고, 고치 속에서 어떻게 나비로 탈바꿈하여 나오는지를 관찰하고 있었습니다. 벌레가 고치 속에 들어간 후 버둥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버둥거리는 모습은 너무 애처로와 보였고 힘들어 보였습니다. 마치 고난 중에 비틀거리는 인생의 모습과 같았습니다. 이 학자는 불쌍한 벌레를 두고 볼 수 없어서 고치를 깨고 벌레를 꺼내 주었습니다.
그러나 밖에 나온 벌레는 처음에는 편안한 것 같았으나, 얼마 후 죽고 말았습니다. 결국 그 벌레는 나비가 되어 보지도 못했습니다. 고치 속의 벌레가 버둥거리는 것은 분명히 힘든 일이지만, 그 고통이 없으면 나비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여학생은 기도를 받은 후 나갔습니다. 그 여학생은 자신의 고치 속의 고단한 삶을 잘 견디었고, 지금은 일리노이 대학교 의과 대학에 다니면서 의료 선교사가 되기 위하여 준비하고 있다고 합니다.
여러분, 2천 년 대에도 우리에게는 환난이 있을 것입니다. 고생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그 떡과 물을 달게 마시면서 기다립시다. 견딥시다. 힘들어도 참읍시다. 하나님께서 환난의 떡과 고생의 물을 먹이심은 우리에게 더 큰 은혜를 베풀려고 하심을 믿읍시다. 비가 많이 오는 곳의 식물이라야 더 푸르게 자랍니다. 안개가 짙은 섬은 에메랄드가 생성되기 가장 좋은 조건이 됩니다. 안개가 깊을수록 에메랄드 같은 심령을 가지게 됩니다. 많이 두드려진 쇠일수록 단단합니다. 우리의 고난이 더 좋은 열매를 맺게 해 주실 줄을 믿습니다.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올 한 해도 우리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에게 다가오실 것입니다. 숨지 않으실 것입니다. 다가 오셔서 우리 인생의 스승이 되실 것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사는 것뿐입니다. 때가 될 때까지 인내하면서 하나님을 묵묵히 신뢰하는 것입니다. 환난의 떡과 고생의 물도 잘 참아 견디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갈 길을 가르치고 인도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옳은 길을 떠나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칠 때 하나님은 우리 귓전에 말씀하셔서 정로가 어딘지를 가르쳐 주실 것입니다. 21절을 보세요. <너희가 우편으로 치우치든지 좌편으로 치우치든지 네 뒤에서 말소리가 네 귀에 들려 이르기를 이것이 정로니 너희는 이리로 행하라 할 것이며>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뒤로 다가 오실 것입니다. 그리고 갈 길을 몰라 좌우로 헤메고 있는 우리 귓전에 속삭이실 것입니다. <틀렸다, 이 쪽이 옳은 길이다. 이 쪽으로 방향을 바꾸라> 그 음성을 듣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찬송합니다. <주의 음성을 내가 들으니 사랑하는 말일세, 믿는 맘으로 주께 가오니 나를 영접하소서> 이 음성 듣는 한 해가 되시길 기원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우리에게 기쁨이 되고 행복이 될 것입니다. <저 장미꽃 위에 이슬 아직 맺혀 있는 그 때에 귀에 은은히 소리 들리니 주 음성 분명하다. 주가 나와 동행을 하면서 나를 친구 삼으셨네. 우리 서로 받은 그 기쁨을 알 사람이 없도다> 이 기쁨을 누리시길 기원합니다.
새 천년을 맞아 첫 예배를 드리기 위해 이 자리에 앉으신 영도중앙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는 겨울 동안 제비가 보이지 않아도 제비가 다 죽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봄이 되면 돌아올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황량한 겨울 들판을 걸으면서 모든 꽃들이 멸종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봄이 되면 다시 피어날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검은 구름이 태양을 가리우고 억수 같은 장대비가 쏟아져도 태양이 사라졌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태양이 그 검은 구름 위에서 영원히 빛나고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태양처럼 언제나 여러분의 머리 위에서 비추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보호자이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인도자이십니다.
다가오는 새해에는 더욱 큰 믿음을 가지고 조급해 하지 말고, 천천히 걸으면서, 어떠한 환난도 견디면서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하여 최후의 승리를 향해 더 가까이 전진하게 되길 기원합니다.
출처:은혜목회정보 출처: 성경 벌레들 글쓴이: 성경 벌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