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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 1. 고전 12:13절에 대한 칼빈의 해석
이지끼을
고전 12:13절,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고전 12:13절에는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라는 말씀이 있는데
개혁주의 신학자들과 목회자들 대부분은
이 말씀 중의 세례를 (물)세례가 아니라 성령세례로 이해합니다.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라는 말씀을
"다 한 성령께서 인도하신 세례(물세례)를 받아" 라고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다 한 성령세례를 받아" 라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특히 Anthony Hoekema 와 같은 신학자는 고전 12:13절의 세례를 성령세례로 이해하고
이 성령세례를 중생과 동일시 합니다.
"To approve that the body of Christ is one, Paul here affirms:
"We were all baptized with one Spirit into one body."
What this means is plain as daylight: all Christians have been Spirit-baptized.
Being baptized with the Spirit is here described as identical with regeneration-
with the sovereign act of God whereby we are made one with Christ
and incorporated into his body - Anthony A. Hoekema [Saved By Grace, page 49]
이 글에서 Hoekema는 성령세례가 중생과 동일하다는 것 뿐만 아니라
성령세례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고,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 속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성령세례가 중생과 같다는 것은 성령세례로 중생한다는 말입니다.
Hoekema와 같은 개혁주의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이,
고전 12:13절에서, 성령세례로 중생한다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은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전 12:13절 b)라는 말씀 때문입니다.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라는 말씀이 성령의 내주하심 을 의미하고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우리가 중생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라는 말씀이 중생을 의미하는데
고전 12:13절의 "세례"를 성령세례로 이해하므로
둘을 합쳐서 성령세례로 중생한다는 이해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전 12:13절의 "세례"가 성령세례 (baptism with the Holy Spirit)가 아니라
성령에 의한 세례 (water baptism by the Holy Spirit)라면,
고전 12:13절은, 성령에 의한 세례(물세례, water baptism)로 중생한다
곧 성령께서 인도하신 세례를 받아 중생한다는 말씀이 됩니다.
다시 말해서,
고전 12:13절의 "세례"가 세례(물세례)라면
고전 12:13절은 성령세례로 중생(성령의 내주하심)한다는 말씀이 아니라
성령에 의한 세례(물세례)로 중생(성령의 내주하심)한다는 말씀이 됩니다.
성령세례로 성령의 내주하심(중생)이 있다는 말은 성령세례로 구원을 얻는다는 말이고
성령에 의한 세례(물세례)로 성령의 내주하심(중생)이 있다는 말은
성령에 의한 세례(물세례)로 구원을 얻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 두 구원론은 다릅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세례 (baptism with the Holy Spirit)로 중생한다고 이해하는 사람의 구원론과
성령에 의한 세례 (water baptism by the Holy Spirit)로 중생한다고 이해하는 사람의 구원론은 같지
않습니다.
칼빈은 고전 12:13절의 세례를 성령세례가 아니라 세례(물세례, water baptism)로 이해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고전 12:13절의 "세례"를 성령에 의한 세례(물세례, water baptism) 로 이해하는 칼빈의 구원론은,
고전 12:13절의 "세례"를 성령세례로 이해하는 개혁주의 신학자들의 구원론,
곧 칼빈의 신학을 따르는 개혁주의 신학자들의 구원론과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알기로, 사도들과 교부들은 세례로 중생한다고 이해하였습니다.
그리고, 칼빈과 같은 종교개혁가들은 중세 카톨릭의 신학을 부정하면서
기독교 역사상 유례가 없는 새로운 신학을 했던 것이 아니라
성경과 교부들의 신학, 곧 초기신학으로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칼빈은 사도들과 교부들의 신학을 따랐다고 할 수 있습니다.
칼빈이 고전 12:13절의 "세례"를 성령세례가 아니라 물세례로 이해했던 것을 보면
칼빈의 이해는 사도들과 교부들의 이해와 같습니다.
그런데 칼빈의 신학을 따르는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고전 12:13절의 "세례"를 성령세례로 이해하여 "성령세례"로 중생한다는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칼빈은 사도들과 교부들의 신학으로 돌아 가려고 했었고
이런 칼빈의 신학을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따르고 있습니다.
그러면 개혁주의 신학자들의 구원론이 사도들과 교부들의 구원론과 같아야 합니다.
그런데 같지 않습니다.
사도들과 교부들은 세례로 중생한다는 이해를 하였는데
칼빈의 신학을 따르는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성령세례로 중생한다고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세례로 중생한다고 이해하던 사도들과 교부들의 구원론과
성령세례로 중생한다고 이해하는 개혁주의 신학자들의 구원론은 다릅니다.
그러면
이들 사이에서 칼빈은 어떤 역활을 한 것입니까?
위에서 말씀드렸듯이
고전 12:13절의 세례를 성령에 의한 세례(물세례)로 이해하는 사람의 구원론과
고전 12:13절의 세례를 성령세례로 이해하는 사람의 구원론이 다른 것인데
어찌하여 칼빈의 신학을 따르는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고전 12:13절의 세례를, 성령에 의한 세례(물세례)로 이해한 칼빈과 달리,
성령세례로 이해하게 된 것입니까?
제가 보기에 칼빈은 세례에 관하여 성경과 교부들의 신학을 따르면서
세례에 관한 자신의 이해를 추가하였습니다.
칼빈의 신학을 따르는 사람들은 바로 칼빈이 추가한 부분을 따르는 것입니다.
칼빈의 신학을 따르는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바로 칼빈이 추가한 부분을 근거로,
곧 칼빈의 말을 근거로, 고전 12:13절의 "세례"를 성령에 의한 세례(물세례)가 아니라
성령세례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칼빈의 말을 근거로
칼빈이 "성령에 의한 세례(물세례)"로 이해한 고전 12:13절의 "세례"를 "성령세례"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로 중생한다고 이해한 사도들과 교부들의 구원론이
성령세례로 중생한다는 구원론으로 바뀐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도들과 교부들의 구원론이 칼빈을 거치면서 달라진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게 되었는지 칼빈이 쓴 글들을 보며 말씀드리겠습니다.
다음은 고린도전서 12장 13절에 대한 칼빈의 주석입니다.
(칼빈의 글을 A-H 로 나눈것, 그리고 강조와 밑줄은 제가 한 것입니다.)
A Verse 13
13.For we are all baptized by one Spirit.
Here there is a proof brought forward from the effect of baptism.
“We are,” says he, “engrafted by baptism into Christ’s body,
so that we are by a mutual link bound together as members,
and live one and the same life.
Hence every one, that would remain in the Church of Christ,
must necessarily cultivate this fellowship.”
칼빈은 고전 12:13절을 세례(Water Baptism)에 대한 말씀으로 이해하여
우리가 성령에 의해 세례를 받아 (baptized by one Spirit)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임을 받는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임을 받아서 상호연결(mutual link)로 묶인 멤버들이
되었으니, 이 교제를 발전시켜야 한다고 칼빈은 말합니다.
칼빈은, 우리가 성령에 의해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임을 받는다고 하였는데
우리가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 접붙임을 받는다는 것은,
곧 교회에 속하게 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 접붙임을 받기 때문입니다.
곧 세례를 받아 예수 그리스도께 속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 3:27절
For as many of you as have been baptized into Christ have put on Christ. - KJV
for all of you who were baptized into Christ have clothed yourselves with Christ. -NIV
여러분은 모두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고, 그리스도를 옷으로 입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 새번역
세례를 받아, 또는 세례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 속하게 되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 속하게 되는 것입니다.
위에 소개한 Hoekema의 글에서 Hoekema는
성령세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 속하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칼빈은 세례(water baptism)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임을 받는다고 합니다.
곧 세례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 속하게 된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칼빈의 구원론과 Hoekema의 구원론은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B He speaks, however, of the baptism of believers, which is efficacious
through the grace of the Spirit, for, in the case of many, baptism is merely
in the letter — the symbol without the reality; but believers, along with the
sacrament, receive the reality. Hence, with respect to God, this invariably
holds good — that baptism is an engrafting into the body of Christ,
for God in that ordinance does not represent anything but what he is prepared
to accomplish, provided we are on our part capable of it.
이 부분에서 칼빈은, 바울이 믿는 자들의 세례에 대해 말한 것이라고 하고
세례는 성령님의 은혜로 효과가 있고,
효과가 있는 세례는 믿는자들에게만 해당된다고 말합니다.
믿는 자들은 이 세례와 함께 실체(reality)를 받는다고 합니다.
곧 믿는 자들만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의 몸(교회)에 접붙임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믿는 자들은 이 세례와 함께 실체를 받는다"는 칼빈의 말로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막 16:16) 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해 보면
믿는 사람이 세례를 받을 때 그 실체, 곧 구원을 받는다는 말씀이 됩니다.
C The Apostle, also, observes here a most admirable medium, in teaching that
the nature of baptism is — to connect us with Christ’s body.
Lest any one, however, should imagine, that this is effected by the outward
symbol, he adds that it is the work of the Holy Spirit.
세례의 본질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에 연결시키는 것이라고 하고
외적인 상징에 의해 효과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도록
바울이 이는 성령님의 일이다 라고 덧붙였다고 칼빈은 말합니다.
칼빈은 세례를 통해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 곧 교회에 연결되는 것이라고만 말하는데
그리스도께 속하게 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 속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령님께서 세례를 통해 우리를 그리스도께 속하게 하시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에 속하게 되는 것입니다.
D Whether Jews or Greeks. He specifies these instances, to intimate
that no diversity of condition obstructs that holy unity which he recommends.
This clause, too, is added suitably and appropriately, for envy might at that
time arise from two sources — because the Jews were not willing that
the Gentiles should be put upon a level with them; and, where one had some
excellence above others, with the view of maintaining his superiority,
lie withdrew himself to a distance from his brethren.
칼빈은 이 부분에서,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어떤 다양한 조건들도 거룩한 통합(holy unity)을 방해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인종이나 신분등의 조건으로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임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임을 받아 한 몸이 되기 때문입니다.
제가 보기에 이 부분까지, 칼빈이 세례(Water Baptism)에 대해 잘 설명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다음 부분은 현재의 일반적인 해석과 다릅니다.
E We have all drunk in one Spirit.
It is literally, “We have drunk into one Spirit,”
but it would seem that, in order that the two words
ἐν (in) and ἑν (one) might not immediately follow each other,
Paul intentionally changed ἐν (in) into ἐις (into) as he is accustomed frequently to do.
바울이, 문자적으로는,
“We have all drunk into one Spirit,”
(우리 모두는 한 성령 안으로 마시고 있다) 이라고 기록하였지만
바울이 말하고자 한 것은
" We have all drunk in one Spirit."
(우리 모두는 한 성령 안에서 마시고 있다) 이었다.
두 단어, ἐν (엔 in) 과 ἑν (헨 one)을 붙여서 ἐν ἑν (엔 헨)으로 쓸 수 없으니까
바울이 앞에 있는 전치사 ἐν (엔 in) 을 ἐις (에이스 into) 로 의도적으로 바꾸어
ἐις ἑν (에이스 헨)으로 기록했다고 칼빈은 말합니다.
현재 쉽게 접할 수 있는 헬라어 성경들 중에는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라는 구절에 ἐις (에이스)가 있는 헬라어성경도 있지만
ἐις (에이스)가 없는 헬라어 성경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다음은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라는 구절에 ἐις (에이스)가 없는
헬라어 성경의 고전 12:13절 입니다.
καὶ γὰρ ἐν ἑνὶ πνεύματι, ἡμεῖς πάντες εἰς ἓν σῶμα ἐβαπτίσθημεν,
Also for in one Spirit we all into one body were baptized
εἴτε Ἰουδαῖοι εἴτε Ελληνες, εἴτε δοῦλοι εἴτε ἐλεύθεροι,
weather Jews or Greek weather slaves or free
καὶ πάντες ἓν πνεῦμα ἐποτίσθημεν
And all one Spirit we were made to drink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라는 말씀에 대한 헬라어 원문은
καὶ πάντες ἓν πνεῦμα ἐποτίσθημεν 이고, πάντες 와 ἓν 사이에 ἐις 가 없습니다.
And all one Spirit we were made to drink
ἐις 가 없으므로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라는 의미입니다.
"성령 안으로 마시게 하셨다", 는 의미도 아니고 "성령 안에서 마시게 하셨다"는 의미도 아닙니다.
그러니까, 칼빈이 참고했던 헬라어 성경에는
πάντες (판테스) 와 ἓν (헨) 사이에 εἰς (에이스)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칼빈이 보았던 헬라어 성경의 고전 12:13절 이 부분은 다음과 같습니다.
καὶ πάντες εἰς ἓν πνεῦμα ἐποτίσθημεν
εἰς 는 into (~ 안으로)의 의미이므로
"또 다 한 성령 안으로 마시게 하셨느니라" 라는 의미가 됩니다.
그런데 "성령 안으로 마신다" 라는 말은 이해할 수 없는 말입니다.
그래서 칼빈은, 바울이 εἰς (에이스 into) 라고 기록하였지만, 원래는 ἐν (엔 in)이었다
그런데, 두 단어, ἐν (엔 in) 과 ἑν (헨 one)을 붙여서 ἐν ἑν (엔 헨)으로 쓸 수 없으니까
바울이 앞에 있는 전치사 ἐν (엔 in) 을 ἐις (에이스 into) 로 의도적으로 바꾸어
ἐις ἑν (에이스 헨)으로 기록했다고 칼빈이 말한 것입니다.
즉, 바울이 의도한 말은
πάντες ἐν(in) ἓν πνεῦμα ἐποτίσθημεν(판테스 엔 헨 프뉴마 에포티스데멘) 이었지만,
실제로는 πάντες εἰς(into) ἓν πνεῦμα ἐποτίσθημεν(판테스 에이스 헨 프뉴마 에포티스데멘) 으로
기록하였다고 칼빈이 말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바울이 문자적으로는 "우리가 한 성령 안으로 (into) 마시게 되었다" 라고 기록하였지만
원래 바울이 의미하고자 했던 말은 "우리가 한 성령 안에서 (in) 마시게 되었다" 라는 말이었다고
칼빈은 이해한 것입니다.
F Hence his meaning seems rather to be, that we are made to drink through the
influence, as he had said before, of the Spirit of Christ,
than that we have drunk into the same Spirit.
칼빈은, 바울이 의미한 것은 우리가 성령 안으로 마시게 되었다는 말이라기 보다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성령의 영향으로 인해 마시게 되었다는 말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성령 안으로(into) 마시게 되었다"는 말이라기 보다는
"우리가 성령 안에서 (in) 마시게 되었다" 라는 말이고
이 말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성령의 영향으로 마시게 되었다" 는 의미라고 칼빈이 말한 것입니다.
G It is uncertain, however, whether he speaks here of Baptism or of the Supper.
I am rather inclined, however, to understand him as referring to the Supper,
as he makes mention of drinking, for I have no doubt that
he intended to make an allusion to the similitude of the sign.
There is, however, no correspondence between drinking and baptism.
Now, though the cup forms but the half of the Supper, there is no difficulty
arising from that, for it is a common thing in Scripture to speak of the
sacraments by synecdoche. (752)
Thus he mentioned above in the tenth chapter (1 Corinthians 10:17) simply
the bread, making no mention of the cup.
칼빈은 세례나 성찬 중, 바울이 어떤 것을 의미했는지 확실치 않지만
자기 생각에는 바울이 성찬을 의미한 것 같다고 말합니다.
세례는 마시는 것과 관계가 없고 성찬의 반은 마시는 것과 관계가 있으니
synecdoche에 의해, 성찬의 반인 마시는 것으로 성찬 전부를 의미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전 10:17절에, cup(잔)에 대한 언급없이, 빵 만으로 성찬을 언급했던
것이라고 합니다.
H The meaning, therefore, will be this — that participation in the cup has an eye
to this — that we drink, all of us, of the same cup.
For in that ordinance we drink of the life-giving blood of Christ,
that we may have life in common with him — which we truly have,
when he lives in us by his Spirit.
He teaches, therefore, that believers, so soon as they are initiated by
the baptism of Christ, are already imbued with a desire of cultivating
mutual unity, (753) and then afterwards, when they receive the sacred Supper,
they are again conducted by degrees to the same unity, as they are all refreshed
at the same time with the same drink.
이 부분에서 칼빈은 성찬 중 잔에 참여하는 것은 같은 잔을 마시는 것이고
또한 생명을 주는 그리스도의 피를 마시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생명과 같은 생명을 우리가 얻게 되는데
그 생명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성령으로 우리 안에 거하실 때 우리가 갖게 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so soon as they(believers) are initiated by the baptism of Christ 라는 말은
믿는 자들이 그리스도의 세례로 initiated 된다는 말인데
“We are,” says he, “engrafted by baptism into Christ’s body"
(우리는 세례로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임을 받는다) 라는 칼빈의 말로 생각해 보면
initiated 된다는 말은, 세례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일원이 된다는 말입니다.
또한, 칼빈은 세례를 그리스도의 세례(the baptism of Christ)라고 합니다.
곧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세례입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세례는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세례입니다.
그러므로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라는 말씀은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세례를 주셔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 속하게 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칼빈은, 바울이, 믿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세례로 교회의 일원이 되자마자
상호 통합(mutual unity)를 배양하려는 열망으로 가득 차 있게 되고
그리고 그 후에 성찬을 받을 때, 그들이 모두 같은 잔으로 동시에 새로워지기 때문에
다시 같은 통합(the same unity)으로 단계적으로 인도된다 가르친다고 말합니다.
위의 말에서 칼빈은 생명을 주는 그리스도의 피 (the life-giving blood of Christ) 라고 하였는데
칼빈이, 성찬과 관련하여 말한 것이므로, 새 생명을 준다는 의미라기보다
생명을 유지시키는 그리스도의 피 라고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께 속하게 되면 새 생명을 얻게 되는데
이 생명은 성찬을 통해서 유지되는 것이라고 칼빈이 말한 것입니다.
곧 생명을 주는 그리스도의 피를 마시므로 그 생명을 유지한다고 칼빈이 말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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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말씀드린대로
현재 대부분의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은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전 12:13절) 라는 말씀을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이해합니다.
Hoekema는 이 말씀을 그의 책 Saved By Grace, 48 page 에서
"- and we were all given the one Holy Spirit to drink" 라고 썼는데
εἰς 에 해당하는 into 가 없습니다.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Hoekema와 같은 개혁주의 신학자들과 목회자들 대부분은
이 말씀을 성령의 내주하심, 곧 중생이라고 이해합니다.
그런데 칼빈은 이 부분을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라고 읽지 못하고
"또 다 한 성령 안에서 마시게 되었다"라고 이해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칼빈이 참고했던 헬라어 성경에는
πάντες 와 ἓν 사이에 εἰς 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NIV를 보면 "and we were all given the one Spirit to drink." 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라는 의미이고, εἰς 에 해당하는 into가 없습니다.
그런데, NKJV 을 보면 "and have all been made to drink into one Spirit." 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또 다 한 성령 안으로 마시게 하셨느니라" 라는 의미이고 εἰς 에 해당하는 into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칼빈 당시의 헬라어 성경에는,
곧 제네바 성경(AD 1560)과 킹 제임스 성경(AD 1611)등의 원본이었던 헬라어 성경에는
고전 12:13절의 이 말씀에 εἰς (into) 가 있었던 것입니다.
헬라어 성경 고전 12:13절의 이 말씀에 εἰς (into) 가 있었으므로
칼빈은 위와 같이 나름대로 해석해 낸 것입니다.
만약에 칼빈이 πάντες 와 ἓν 사이에 εἰς 가 없는 헬라어 성경을 참고했었더라면
그래서 칼빈이, 이 말씀을 "또 다 한 성령 안으로 마시게 하셨느니라" 가 아니라
Hoekema와 같은 개혁주의자들 처럼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라고 읽었더라면
이 말씀이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성령님의 내주하심(요 4장 13-14절, 요 7장 37-39절)이라는 것을 알았을 것 같습니다.
요한복음 4장 13-14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요한복음 7장 37-39절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그랬다면, 칼빈은 고전 12:13절을,
우리가 다 한 성령에 의해 세례(물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임을 받았고
또 다 한 성령의 내주하심(중생)을 얻게 되었다 라고 이해하였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칼빈의 신학을 따르는 개혁주의자들은 현재, 성령세례로 중생한다는 주장이 아니라
성령에 의한 세례(water baptism)로 중생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곧 성령께서 인도하신 세례를 받아 중생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사도들과 교부들의 구원론과 칼빈을 따르는 개혁주의 신학자들의 구원론이 같을 것입니다.
그런데 위에서 말씀드렸듯이
칼빈이 참고했던 헬라어 성경에는, πάντες (판테스)와 ἓν (헨) 사이에 εἰς (에이스)가 있었기 때문에
칼빈은 고전 12:13절의 이 말씀을 "성령님의 내주하심'으로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고전 12:13절은 성령께서 인도하신 세례를 받아 성령의 내주하심을 얻게 되었다는 말씀인데
칼빈은 고전 12:13절에서, 세례가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이어진다는 생각을 할 수 없었습니다.
이와 같이, 세례를 받아 성령의 내주하심을 얻는다는 이해가 없으면
행 2:38절 베드로의 말씀에 있는 "성령의 선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할 수 없게 됩니다.
Hoekema와 같은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고전 12:13절의 세례를 성령세례로 이해하므로
이들에게 성령세례에 관한 말씀이 되는 고전 12:13절과
세례에 관한 말씀인 행 2:38절은 병행구절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고전 12:13절의 세례를 성령에 의한 세례로 이해하는 칼빈에게는
고전 12:13절과 세례에 관한 말씀인 행 2:38절이 병행 구절이 됩니다.
행 2:38절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위의 고전 12:13절 주석에서 칼빈은 성령님의 은혜에 의해 효과가 있는 세례는 믿는 자들의 세례이고
믿는 자들은 이 세례와 함께 실체(reality)를 받는다고 하였습니다.
He speaks, however, of the baptism of believers, which is efficacious
through the grace of the Spirit, for, in the case of many, baptism is merely
in the letter — the symbol without the reality; but believers, along with the
sacrament, receive the reality.
베드로의 행 2:38절 말씀에서
믿는 자들이, 세례와 함께 받는 실체는 죄사함과 성령의 선물입니다.
세례에 관한 구절들인 고전 12:13절과 행 2:38절을 비교하면
성령의 선물(행 2:38절)은 성령을 마시는 것(고전 12:13절)입니다.
그런데,
성령을 마시는 것(고전 12:13절)이 성령의 내주하심을 의미하므로
성령의 선물(행 2:38절)은 성령의 내주하심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행 2:38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받으면
죄사함과 성령님의 내주하심을 얻을 것이다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성령께서 인도하시지 않으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받을 수 없습니다.
Hoekema는 자신의 책 Saved By Grace, 129 page에서, 회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The Bible speaks of repentance as both the work of God and the work of man."
(성경은 회개를 하나님의 일이자 사람의 일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Sinners must repent, to be sure, but God must enable them to do so" 라고 합니다.
(죄인은 반드시 회개해야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하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인도하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회개의 세례"를 받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사함과 성령의 선물, 곧 죄사함과 성령의 내주하심을 얻는 것입니다.
그런데, 칼빈은 이 "성령의 선물"을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칼빈이 참고한 헬라어 성경의 고전 12:13절에
καὶ πάντες ἓν πνεῦμα ἐποτίσθημεν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이라고 쓰여져 있었던 것이 아니라
καὶ πάντες εἰς ἓν πνεῦμα ἐποτίσθημεν
(또 다 성령 안으로 마시게 하셨느니라) 이라고 쓰여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칼빈은
고전 12:13절의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라는 말씀을
"또 다 한 성령 안에서 (성령의 영향으로) 성찬을 받는 것"으로 이해하였습니다.
행 2:38절과 고전 12:13절에 대한 칼빈의 이해를 비교하면
행 2:38절의 "성령의 선물"은
고전 12:13절에 대한 칼빈의 이해 중, "성령의 영향으로 성찬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칼빈은 행 2:38절의 "성령의 선물"을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행 2:38절의 "성령의 선물"을 "성령의 영향으로 성찬을 받는 것"이라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대신, 칼빈은, 행 2:38절 "성령의 선물"을
오순절에 성령세례로 인해 12사도들이 받았던 "성령의 은사" 로 이해하였습니다.
"Ye shall receive the gift of the Spirit.
Because they were touched with wondering when they saw the apostles suddenly begin
to speak with strange tongues, Peter saith that they shall be partakers of the same gift
if they will pass over unto Christ." (칼빈 주석 행 2:38절)
이 글에서 같은 선물(the same gift)은 방언 말함(speaking with strange tongues)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칼빈은 "성령의 선물"(행 2:38절)을
"성령의 은사"로, 특히 방언의 은사로 이해했습니다.
" if they will pass over unto Christ." 라는 말은 "그들이 예수께로 넘어 가면" 이라는 말인데
칼빈이 세례와 관련하여 이 말을 한 것이므로
"세례를 통하여 예수께 속하게 되면,
또는 세례를 통하여 예수께 접붙임을 받게 되면" 이라는 의미로 칼빈이 말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Peter saith that they shall be partakers of the same gift
if they will pass over unto Christ." 라는 칼빈의 말은
세례를 받아 예수께 속하게 되면 같은 은사를 받을 것이라고 베드로가 말했다는 의미입니다.
칼빈은, 고전 12:13절에서 "성령님의 내주하심"을 읽어 낼 수 없었기 때문에
행 2:38절의 "성령의 선물"을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성령의 은사"로 이해했던 것입니다.
행 2:38절은 세례에 관하여 중요한 구절입니다.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사도행전에 세례에 관하여 모두 9번 기록하였는데
그 중 첫번째가 바로 2장에 기록된 베드로의 행 2:38절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9번의 세례 모두 다 그리스도의 세례(the baptism of Christ)이므로
2장 이후에 기록된 8번의 세례 중 어떤 세례도 행 2:38절의 세례와 다르지 않습니다.
모두 같은 세례이고 한 세례(엡 4: 5절, one baptism)입니다.
누가는 사도행전 2장에서, 베드로의 말씀으로, 세례가 어떤 것인지 알려 주었습니다.
행 2:38절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베드로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회개의 세례를 받으면, 죄사함과 성령의 선물을 얻는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 후에 기록된 8번의 세례는, 베드로의 말씀이 보여 주는 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받아서, 죄사함과 성령의 선물을 얻는 회개의 세례로 이해하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베드로의 행 2:38절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면
그 이후 사도행전에 기록된 8번의 세례에 대해 바르게 이해할 수 없게 됩니다.
칼빈은 행 2:38절을 바르게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칼빈은 고전 12:13절에서 "성령의 내주하심"을 읽어낼 수 없었고
그로 인해 베드로의 행 2:38절 말씀 중 "성령의 선물"을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세례에 관한 첫번째 기록인 행 2:38절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했으므로
이후 8번의 세례에 관한 기록들도 바르게 이해했다고 볼 수 없습니다.
게다가, 세례로 성령의 은사를 받는다고 했으므로
칼빈은 성령세례에 관하여도 바른 이해를 했다고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방언의 은사와 같은 성령의 은사는 성령세례를 통해서 받는 것이므로
세례로 성령의 은사를 받는다는 말은 세례로 성령세례를 받는다는 말과 같기 때문입니다.
세례는, 성령세례와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내주하심과 관계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회개의 세례를 받아
죄사함과 성령의 내주하심(성령의 선물)을 얻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칼빈은 세례로 성령의 은사(성령세례)를 받는다고 이해하여
세례가 성령세례와 관계가 있는 것으로 이해한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 10장, 그리고 19장에는, 세례의 경우와 성령세례의 경우가 함께 기록되어 있는데
이 부분들에 대한 칼빈의 이해를 보면
칼빈이 고전 12:13절에서, 세례가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이어진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 채
사도행전에 기록된 세례에 대해, 어떤 이해를 하였는지 알 수 있고
성령세례에 대해서도 어떤 이해를 하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세례와 성령세례에 관한 개혁주의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의 이해에,
칼빈이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2장, 10장 그리고 19장에 기록된 세례에 대해, 그리고 성령세례에 대해
칼빈이 어떻게 이해하였는지 하나씩 말씀드리겠습니다.
첫댓글
다음의 웹사이트를 보면
ἓν (헨)이 εἰς ἓν(에이스 헨)으로 변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https://greeknewtestament.net/1co12-13
4 세기 헬라어성경에는 ἓν (헨)만 있는데
1624년 헬라어 성경에는 εἰς ἓν(에이스 헨)으로 기록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4세기 이후에 εἰς (에이스) 가 추가된 것입니다.
그래서 칼빈은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라고 읽지 못하고
"다 한 성령 안으로 마시게 하셨느니라"라고 읽었던 것입니다.
곧 "또 다 한 성령의 내주하심을 얻게 되었다" 라고 읽지 못하고
"또 다 한 성령의 영향으로 성찬을 받게 되었다" 라고 이해했던 것입니다.
지금은 주말이니 저의 다음글은 월요일에 올려 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