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은 반만년 역사 중에 유일하게 황제를 모시며 살았던 구한말 우리나라 이름이며 일본과 중국, 러시아라는 세계 열강의 틈바구니 속에서 나라의 생존을 위해 1897년 고종이 황제국 임을 선포하고 우리나라가 근대적 의미의 주권 국가임을 세계에 천명한 역사적 사건 속에서 태어난 국가다. 대한제국임을 천명했던 덕수궁 주변의 정동 시간여행을 해 보려한다.
코스: 시청역 3번 출구- 대한성공회 서울대성당- 경운궁양이재-고종의길- 구 러시아공사관-이화학당-신아일보사별관- 정동제일교회- 배재학당 역사박물관- 덕수궁 대한문- 환구단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건물은 성공회 3대 주교였던 마크 트롤로프신부와 영국 건축가 아서 딕슨의 설계로 건축되었다. 건축 양식은 로마네스크 양식에 한국전통기법이 어우러진 독특하고 아름다운 건물로 화강석과 붉은 벽돌로 지어졌으며 건축적 가치를 인정받아 서울시 유형문화재 35호로 지정됐다.
반원형 제단의 벽면에는 예수그리스도와 여러 성인(왼쪽부터 성스테파노, 성 사도 요한, 성모 마리아, 성 이사야, 성 니콜라스)들의 모자이크가 있다. 모자이크 제단화는 조지 잭크(영국)가 디자인하여 11년(1927-1938년)에 걸쳐 시실리 전통에 따른 채색각석으로 제작하였다.
벽면 중앙에는 파이프오르간이 설치되어 있다. 이 파이프오르간은 영국 해리슨&해리슨사가 2년 10개월의 제작기간에 걸쳐 1985년에 설치된 예배용 파이프오르간으로 20개의 음전과 1.450개의 파이프로 여러 가지 맑고 풍부한 음색을 표현한다.
성당내부에는 열 두 사도를 상징하는 돌기둥이 서 있다.
세례자요한성당 (지하성당) 은 2대 교구장 단아덕 주교 기념채플이며, 성당바닥에는 3대 교구장 조마가 주교의 유해가 동판 아래 안장되어 있다. '트루에 오르겔'이 있으며 매일 성찬례를 드린다. * 지금은 장례 미사 중이다.
대한성공회 선교 초기부터 주교 집무실로 사용하였다가, 현재 주교좌교회 사목단 집무실로 사용하고 있다.
경운궁 양이재는 1905년 대한제국의 황족과 귀족 자제 교육을 전담하던 수학원으로 사용되었던 건물로, 경운궁(덕수궁의 옛 이름)을 중건할 때 궁 안에 건립한 건물이 1920년경 성공회가 매입하여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덕수궁 돌담을 사이에 두고 영국대사관이 자리하고 있다.
'고종의 길'은 덕수궁 돌담길에서 정동공원과 러시아공사관까지 이어지는 총 120m의 길로 1896년 아관파천 이후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 당시 러시아공사관에서 덕수궁을 오갈 때 사용한 길로 추정된다. '고종의 길'은 미국공사관에서 측량한 결과를 토대로 작성한 1896년 도면과 1900년대 초 촬영한 옛 사진 등 관련 자료를 검토하여 조성하였다.
'고종의 길'에서 이어진 러시아공사관으로 들어서는 문이다.
구 러시아공사관은 1895년 을미사변으로 친일전부가 들어서고 궁궐에 감금된 상태로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있던 고종이 왕태자와 함께 경복궁을 떠나 이곳으로 피신한 아관파천의 현장이다.
구 러시아공사관은 지하1층, 지상 1층과 본관, 본관 동북쪽에 있는 3층 탑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6.25전쟁으로 인해 탑과 일부 외벽 일부를 제외한 건물 전체가 폭격을 맞아 사라지고 남은 건물을 보수하여 지금은 탑만 남아있다.
러시아공사관 정원이 마치 십자모형이다.
이화학당은 1886년 미국 선교사 스크랜튼 여사에 의해 설립된 여성전문 교육기관으로, 우리나라 여성 교육의 시초이자 상징이 되는 교육기관입니다.
구 신아일보사 별관은 1930년대에 미국 싱거미싱회사 사옥으로 쓰였다가 1969년 신아일보사에 매각되어 신문사 별관으로 사용되었던 곳이다. 이후 1980년 5공화국의 언론 기관 통폐합 조치로 신문사는 경향신문에 강제 통합 폐간되었고 건물은 신아기념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재미있는 건 신아기념관은 1층 레스토랑 정면 하얀문으로 들어서야 된다.
싱거미싱사는 우리나라에 재봉틀을 보급해 의복 문화에 영향을 주었다. 일제 강점 말기에 미국과 일본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추방되었으며, 건물은 적산으로 분류되었다가 8.15 광복 후 다시 싱거미싱사가 사용하다가 1969년 신아일보사에 매각되었다.
정동제일교회는 한국 감리교단을 대표하는 교회가운데 하나로, 1885년 아펜셀러 목사가 자신의 정동 사택에서 성찬식을 거행한 것을 시초로 했으며, 종교적인 의미를 넘어서 다방면으로 진보적인 공간이다.
1897년 처음으로 봉헌 예배를 드렸던 벧엘 예배당은 한국개신교 최초의 서양식 예배당으로 1977년 사적 256호로 지정되었다. 또한 이곳애서 유관순 열사의 장례식을 치르기도 하였던 역사 깊은 곳이다.
1918년 하란사가 설치한 한국 최초의 파이프오르간이다.
아펜젤러와 네 명의 선교사(언더우드, 게일, 스크랜튼, 레이놀즈)가 함께 번역하고 서명한 신약전서다.
이 성찬기 세트는 아펜젤러가 지방순회 전도여행을 다니며 성찬식과 세례식 때 사용한 것으로 포도주잔과 떡 상자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배제학당을 설립한 헨리 게하르트 아펜젤러는 미국 북감리교 선교사로 1885년 인천을 통해 입국하였다. 그는 선교에 앞서 한국을 이끌어갈 지도자들을 양성할 목적으로 이곳 정동에 배재학당을 세우과 신앙과 지식을 겸비한 인재들을 양성하였다. 그는 정동교회를 설립하였고, 성경을 한글로 번역하여 한국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아펜젤러는 44세가 되던 해인 1902년 성경번역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목포로 가던 중 군산 앞바다에서 충돌 사고로 인해 그가 탄 배가 침몰하면서 정신학교 여학생을 구하려다가 바다에서 빠져나오지 못하였다. 이 동상은 아펜젤러가 타고 있던 배의 모습을 추상화하여 동상의 받침대로 만들었다.
배재학당 역사박물관
배재학당은 1886년 미국 선교사 아펜젤러가 설립한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 근대식 중등 교육기관입니다. 배재학당 역사박물관으로 새롭게 태어난 배재학당 동관은 1916년 준공한 유서 깊은 근대 건축물로 서울시 기념물 제16호로 지정 되어있습니다.
아펜셀러의 아들인 헨리 닷지 아펜셀러가 대강당을 신축하면서 가지고 온 연주회용 그랜드 피아노로 1911년 독일 블뤼트너사에서 제작하였으며 대한민국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연주회용 그랜드 피아노다.
배재학당 학생들이 당시 사용하였던 의자다.
덕수궁 대한문에서 이루어지는 수문장 교대식
환구단은 중국의 황제가 유교의 예법에 따라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장소다. 아관파천 이후 고종은 1897년에 경운궁으로 환궁하면서 조선왕실의 별궁인 남별궁을 훼철하고 그 자리에 환구단을 지어 이 곳에서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낸 후 대한제국 황제로 즉위하게 되고, 이 때부터 환구단은 대한제국의 자주 독립과 평안을 기원하는 장소로 부상하게 된다.
석고는 광무 6년 고종황제의 즉위 40주년을 기념하여 세운 조형물로 3개의 돌북은 하늘에 제사를 드릴 때 사용하는 악기를 형상화한 것이다.
석고의 몸통에는 용 무늬가 조각되어 있는데, 이 용 무늬는 조선말기의 조각을 이해하는 좋은 자료로서 당시 최고의 조각 중 하나로 평가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