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통신 68/200121]대한大寒 날씨 이야기
어제는 24절기 중 마지막인 대한大寒이었다. 말하자면 절기 상으로는 겨울이 갔다는 것이고, 이번주 설 연휴만 지나면 ‘봄이 선다’는 입춘立春이 닥칠 것이다. ‘춥지 않은 소한小寒 없고, 포근하지 않은 대한 없다’거나 ‘소한의 얼음 대한에 녹는다’는 속담이 맞기는 했으나, 이 새벽, 대한의 날씨, 아니, 올 시한(겨울)의 날씨에 대해 “단단히” 한마디 하고 싶다. 세상에, 정말로 겨우내 내 좋아하는 눈이 단 한번도 내리지 않은 이 겨울이 너무나 유감스럽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쩌랴? 하늘의 일인 것을.
비가 보름도 넘게 내리거나 살을 에는 추위가 계속 되면, 어릴 적 어린 마음에 하늘을 욕하곤 했다. “참, 징그럽네. 하늘도 무심하네. 어쩌자고 그렇게 비만 내려준대” 하면, 어머니가 그랬다. “아가(아들이 환갑을 넘었어도 한번 아가는 영원히 아가였던가?), 눈에 안보인다고 하늘을 욕하면 안된다. 우리가 농사 짓고 사는 게 모두 하늘 덕분이다” 엊그제에도 마을회관에서 과부할머니들과 점심을 먹다 날씨이야기를 꺼냈다. “아니, 이렇게 눈 안오는 겨울을 본 적이 있다요?” “없었을 거여. 날씨가 푹혀서 좋긴 헌디 큰일임만. 농사 때문이라도 눈이 와야 헌디. 허기사 엊그제 비가 한 사흘 와 물은 쬐깨 저수지에 모였을 테지만” “아니, 저는 낭만적으로도 스트레스가 팍팍 쌓이고 짜증이 나요. 시방. 욕까지 나올라고 허는디” “그리도 그린갑다 히야지. 어쩔 거시여” 그때 평생 하늘만 쳐다보며 죽어라고 농사만 짓다 가신 어머니가 생각나 또 한번 울컥 했다. ‘그려, 날씨가 먼 죄간디. 욕허먼 안되지’ 속으로 되뇌었다.
그러나, 그러나 말이다. 내 고향 임실은 전북에서도 제법 고지대인 셈인지, 겨울에 한번은 강원도 빼고는 상당한 폭설이 내렸었다. 중앙일간지 1면에 사진으로 한번은 장식했던 내 고향, 폭설 소식에 무조건 전라선 열차를 타고 눈 구경 욕심에 고향에 달려왔더랬는데, 참말로 흑흑이다. 말치재 신작로에서 거의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눈길을 걸으며, 세상은 온통 은세계銀世界, 봉천 들판을 바라보며 이육사李陸史 시인의 ‘광야曠野’의 초인超人을 꿈꾸었었다.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끊임없는 광음을/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지금 눈 내리고/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큰 소리로 읊조리고 나면 그동안 대처大處에서 쌓인 스트레스가 한번에 풀렸건만. 이제 내 고향에 40년만에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리려 돌아왔건만, 무설無雪의 고향이 어찌 황당하지 않으랴.
그리고 눈이 내리는 아침은 축복처럼 어디서나 누군가에게, 또는 같이 이마를 맞대고 빌고 싶지 않던가? 그때 애송愛誦한 시가 일제강점기 요절한 고월古月 이장희의 ‘눈은 내리네’였다. <이 겨울의 아침을/눈은 내리네//저 눈은 너무 희고/저 눈의 소리 또한 그윽함으로/내 이마를 숙이고 빌까 하노라//님이여, 설운 빛이/그대의 입술을 물들이나니/그대 또한 저 눈을 사랑하는가//눈은 내리어/우리 함께 빌 때러라> 아내여, 그대 또한 저 눈을 사랑하리라. 눈 내리는 아침에 이마를 같이 맞대고 기도하며 아침을 맞는다면 얼마나 좋고 행복할까? 하기야, 우리는 지난해 3월, 알프스산맥에서 눈을 실컷 본 업보業報일까? 해발 4000m가 넘는 마테호른 정상의 만년설을 밟으며 원없이 하이킹을 한 때문에, 올해는 눈을 보여주지 않은 걸까? 그때는 백범 선생이 좋아했다는 한시漢詩<답설야중거踏雪野中去 불수호란행不須胡亂行 금일아행적今日我行蹟 수작후인정 遂作後人程//눈 쌓인 길을 걸을 때면/이리저리 어지럽게 걷지 말라/오늘의 내 발자국이/뒤따라오는 사람의 이정표가 될지니>도 떠올렸건만. 고향집 옆 야산, 낙락장송 소나무 가지가 눈의 무게를 못이겨 신새벽 처어척 찢어지는 소리를 듣고 싶다. 청솔가지를 조선낫으로 처억척 쳐다가 사랑방 아궁이에 몰아넣으면 불티가 티익틱 장난이 아니게 튀던 모습을 잊을 수 없는데. 손바닥이 처억척 달라붙던 그 문고리조차 그리운 것을. 시청각視聽覺을 두루 갖춘 겨울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계절인 것을.
그러나, 내년 겨울, 내명년 겨울에도 이렇게 눈이 오지 않는다면 참말로 어찌 할까? 두려움에 온몸이 떨린다. 인간들이 부른 ‘지구온난화’ 공해公害의 참사慘事일 터, 초록별의 온 지구인들이 이를 극복할 방안에 대해 머리를 맞댈 일이다. 한시바삐. the sooner the better. 춘하추동, 삼한사온, 계절의 다름이 우리나라처럼 뚜렷한 나라가 없었기에 몇 천년을 아무 생각없이 즐기기만 했던 천연의 기후가 이렇게 망가져도 되는 것일까? 우리는 또 그렇다치자. 우리 아들과 손자세대의 세상은 날씨부터가 이보다 더 얼마나 무섭게 변해버릴까?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친다. 아, 하늘이시여! 어리석은 중생들을 굽어살펴 주시라. 평생을 하늘만 바라보고 조심조심, 간당간당 사시다 간 우리 어무이의 말씀처럼 하늘을, 하늘님을, ‘지랄같은’ 날씨를 욕하지 않을 터이니, 제발 적선하고 굽어살펴 주시라. 펄펄 눈을 내려주시라. 1월이, 2월이 가기 전에, ‘눈맛’ 좀 보게 해주시라. 눈 한번 오지 않는다는 외국에 사는 아들부부, 1년에 한번 눈맛과 우리를 보러 오도록, 겨울은 마땅히 눈이 내려야 할 일이지 않는가. 나무관세음보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