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의지 <5회> : 빨치산 이현상부대 운봉해방 작전 / 아침 여는 창
1985년 9월 오자복 대장의 지리산 작전전술 토의 때, 당시 지리산에서 전투에 참여했던 분들의 전투 경험들이 생동감 넘치게 진술 되었다. 다음은 이 회의에 함께 참석했던 운봉의 오태록 목사가 필자에게 보내온 황산전투의 자세한 상황이다.
덕유산의 인민군 정규군 맹봉 연대장 부대가 지리산 빨치산과 연합하기 위해 덕유산 장수군 번암면에 있는 수분 재를 넘어 그리고 운봉과 인접한 사치재를 넘어 온다는 정보를 얻은 황산특공대원들은 미리 매복하고 지키고 있었다.
자정이 지나고 고요한 정막 속에 인민군 연대장 맹봉이 이끄는 부대가 지리산 줄기 덕두봉으로 접근하고 있을 때 매복한 방위특공대원들은 사격명령이 떨어지자 무차별 사격하여 여러 명의 인민군이 황산다리 밑에 쓰러졌고 나머지 인민군은 산산이 흩어져 덕유산 쪽으로 도망하였다.
당시 특공대원 신봉두씨는 특공대원들의 총에 맞아 쓰러진 시체를 점검하기 위해 황산 다리 밑으로 내려가 남자 여자 5명 정도의 시체를 발견했다.
그런데 어슬프른 달빛에 한 남자의 손목에 번쩍이는 것이 보여 확인해 보니 당시에 보기 힘든 자동손목시계였다. 특공대원 신봉두는 그 손목시계를 풀어 자신의 팔목위에 숨겨 차고 당시 운봉경찰지서장에게 보고하였다. 당시 손목시계사실을 보고받은 지서장은 경감이었다.
이때 한 대원이 이 사실을 고발하여 신봉두는 혼이 나고 시계는 뺏겼다고 한다.
빨치산 외팔이가 생포되면서 그의 증언으로 황산다리 밑에서 죽은 자가 인민군 정규연대장 맹봉이란 사실이 밝혀졌다. 이후로 이현상 부대는 전투력이 약화되고 1952년 9월 19일 운봉지서전투에서 참패하면서 전의를 상실, 결국 이현상은 빗점골에서 자살하였다는 차석두 특공대장의 자랑스런 증언이 2군사령관과 참석자들로부터 박수갈채를 받았다.\
운봉지서 주야 7일간의 대혈투ㅡ 남부군 빨치산 참패ㅡ 지리산으로 퇴각
지리산지역 전투에서 이현상 부대가 참패한 유일한 곳이 운봉전투였다. 지리산에서의 군경과 유격전에서 산내, 이백, 아영 등이 다 빨치산에 점령되었는데 운봉만은 예외였다. 당시 우리 군경은 이현상 부대의 기습공격이 공포의 대상이었다.
드디어 이현상은 1952년 9월 19일 운봉해방작전 계획을 세웠다. 작전당시 지리산 인근의 군경초소나 경찰지서 등은 벽돌을 쌓아서 요새를 구축하고 있었고 그 주위를 다시 뾰쪽하게 깍은 목책으로 이중 삼중의 방어막을 쳐 놓았기 때문에 기습공격이 아닌 정면 대결 형식으로는 승산이 적었다.
이 시기 남조선의 각 도당이 모두 지리산 권으로 몰려와 있었고, 당시 남부군 사령관이었던 이현상 역시 지리산으로 거점을 옮겨 온 상태였다. 이 때 이현상 주재로 도당 위원장회의가 개최되었는데 당시 방준표 전북도당위원장은 환자트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나더러(지리산 빨치산대장 최정범)이 회의에 참석하라고 명령했다.
당시 나는 일개 군당의 작전부장에 불과했는데 도당 위원장 같은 고위 지휘관들이 모이는 회의에 참석하라니 의아했다. 알고 보니 그 자리에서 운봉지역의 해방작전을 위한 전략회의도 논의 될 예정이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지팡이를 짚고 절룩거리며 회의에 참석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처음으로 이현상을 보았다. 건장하고 당당한 신체에 날카로운 눈매를 지닌 인물이었다.
“우리가 이번에 수행할 운봉 해방작전은 하루에 끝나지 않을 것이오. 최정범 동무는 남원군당 유격대를 이끌고 남원읍 쪽에서 운봉으로 나오는 길목을 지키시오. 경찰이나 군 지원대가 오면 그들을 차단하는 임무를 담당하시오!”
조직의 위계가 시퍼렇게 살아있었고 눈앞에 말로만 듣던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에게 나는 조심스럽게 한마디 올렸다. “우리가 수행하려는 작전은 정규전이 아니라 유격전입니다.
유격전을 수행할 때는 동쪽에서 소리치고 서쪽을 친다는 이른바 성동격서(聲東擊西) 전략이 유효한 것을 알고 있습니다. 지금 사령관님이 지시하신대로 전투를 펼치면 아무래도 아군의 희생이 많지 않을까 우려됩니다.”
그러자 사령관 이현상이 대답했다. “동무의 말도 옳아요.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우리가 당당하게 세를 과시했을 때 그것이 전선에 미치는 영향도 큰 것이오. 때론 아군에게 미치는 사기와 영향력을 생각해서 정규전처럼 펼쳐야 상대를 교란 시킬 수 있는 것이오.”(지리산 빨치산대장 최정범 일대기 중에서)
이때 운봉지서장 및 특공대원들은 지서 주변에 깊이 2m 넓이 3m 폭으로 방어웅덩이를 파고 방화벽을 설치했으며, 고목이 된 괴목 나무더미 위에 부비추렵(지뢰자동 폭발기)을 설치하여 주야 1주일간의 공방 끝에 빨치산 수십 명을 사상시키고 진지를 사수하는 대 전과를 세웠다.
이현상 부대는 주야 1주일간을 계속 공격했지만 전투력만 크게 손실하고 전의를 잃은 채 결국 지리산으로 후퇴하고 말았다. 이것이 이현상 부대 운봉전투 참패 전말이다.(오태록 목사 증언)
♨출처/남원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