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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리 골드스미스가 작곡한 Patton match, 이 곡은 영화 <패튼 대전차군단>의 메인 테마입니다. 제리
골드스미스는 <빠삐용> 등의 주제곡을 작곡한 헐리우드의 명 영화음악가이기도 합니다.
* 영화 <패튼 대전차군단>의 한장면, 북아프리카에서 독일군과의 전투 장면
[ 전쟁의 달인이자 말썽꾸러기 장군,조오지 패튼 이야기 ]
평생 줄리어스 시저를 존경하고 고대 로마군을 동경했던 사나이. 전쟁기간 내내 숙적 롬멜과의 중세기 기사들 같은 1:1 결투의 기회가 찾아오기를 염원했던 기인. 미국인이면서 전혀 미국인답지 않은 권위주의와 독재적인 성품. 수다스런 다변과 모진 독설. 누구와도 타협하지 않는 완고함. 전공에 대한 끝없는 탐욕...
이런 인간적인 약점들로 인해 그 누구보다 적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위해서라면 목숨을 바쳐도 좋다고 할 만큼 그를 사랑했던 부하들은 더욱 많았던 인물-그 사람이 바로 이 미 육군사를 통털어 가장 위대했던 지휘관 중 한사람이었다고 평해지는 ‘’조오지 S. 패튼‘ 장군이었습니다.
* 패튼의 사관생도 시절
조오지 패튼은 1885년 미국 캘리포니아주 레이크 비니어드에서 태어났습니다. 스코틀랜드에서 이주해 온 그의 가문은 대대로 무인집안이었고 그의 탄생을 누구보다도 기뻐했던 할아버지 스미스 패튼은 남북전쟁 당시 남군 기병대의 대령으로 활약한 인물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할아버지의 옛 부하인 퇴역 기병장교들 사이에서 성장했고, 남들이 사관학교에 들어가서야 배우게 되는 동서고금의 전쟁사와 군사적인 분위기를 일찌감치 온몸으로 체득할 수 있었습니다.
부유한 사업가였던 그의 아버지는 형식적인 학교 교육을 철저히 불신했지만 상류사회의 우아한 교양과 품위를 그에게 물려주었고, 이런 성장배경은 훗날 그가 다른 연합군 장성들로부터 '유럽의 진짜 귀족보다 더 귀족적인 인물'로 평가받게 되는 한 가지 원인이 되었습니다.
* 1970년 우리나라에서 상영 당시(중앙극장) 영화 <패튼 대전차군단> 포스터
만능 스포츠맨이기도 했던 그는 웨스트포인트에 입교한 이후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습니다. 평생 그를 따라 다녔던 비판-독재적이고 비타협적인 성격-은 이미 이때부터 나타나기 시작했음을 알려주는 하나의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그가 생도대장을 맡고 있던 졸업반의 어느 해에 강한 지진이 포토맥 강변을 덮쳤습니다. 막사가 흔들리고 땅이 꺼지자 사관학교는 대혼란에 빠졌습니다.
잠옷바람으로 뛰쳐나온 생도들이 아우성을 치고 있을 때 완벽한 예복 정장을 갖춘 패튼 생도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은 절도 있는 걸음걸이로 그곳에 나타났다.
"생도대 차렷! 동요하지 말라. 지진은 곧 끝날 것이다."
그의 이런 선언이 주효했던지 지진은 곧 가라앉았고, 이 일을 두고 동료 생도들은 이렇게 킬킬거렸습니다. "패튼이 멈추라고 하면 지진도 멈춘다."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기병장교로 임관한 패튼 소위는 퍼싱 장군(1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 총사령관)의 부관으로 멕시코로 파견됩니다. 당시 멕시코의 반군 지도자 판초빌라는 미군들로부터 산적으로 불리우고 있었고, 이 전투에서 패튼은 처음으로 소장하고 있던 리볼버 권총의 상아자루에다 눈금 하나-한 명을 사살했다는 표시-를 그려넣게 됩니다.
자신이 사살한 멕시코 반군의 시체를 자동차 앞 범퍼에다 매달고 요란하게 경적을 울리며 부대로 돌아온 그를 보고 퍼싱 장군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진짜 산적은 우리 부대 안에 있었군, 그래"
* 패튼이 소지하던 리볼버 권총
패튼이 초급장교이던 시절, 미 육군의 기병대는 근대적인 전차부대로 개편되는 전환기를 맞고 있었습니다. 1차 대전 막바지이던 1918년, 소령으로 진급한 패튼은 전차대대를 이끌고 프랑스의 '생 미엘'에서 최초의 전차전을 경험하면서 큰 부상을 입습니다. 하지만 이 전투를 통해 장차 미래의 지상전을 좌우할 가장 핵심적인 병기는 바로 전차이며, 미 육군이 당면한 최대 과제는 현대적인 기계화부대의 확충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실감하게 됩니다.
* 제1차 세계대전 당시의 패튼
패튼과 같은 인물은 평화시에는 주목을 끌지 못하는 법이죠. 1차대전과 2차대전 사이의 시기에 패튼은 그저 곧잘 험담가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문제가 많은 사람일 뿐이었습니다. 미 육군의 실력자 드램 장군에게는 사사건건 대드는 시건방진 부하였고, 부하 장교들에게는 무자비하고 엄격한 상관일 뿐이었습니다.
이런 패튼이 두각을 나타낸 것은 제2군단장으로서 북아프리카 전선에 모습을 나타내면서부터였고, 그 이후 시실리 전투와 제3군 사령관으로서 유럽 본토 전선에서의 활약은 그를 단숨에 미국의 영웅으로 부상하기에 이르렀습니다.
* 시실리 전투시, 메시나로 진격하는 길에 어느 병사와 얘기를 나누는 패튼
그는 근본적으로 평화시의 관리업무보다는 전투에서, 또 방어임무보다는 공격임무에서 더욱 빛을 발휘하는 지휘관이었습니다. "나는 정말 전쟁이 미치도록 좋다. 전쟁에 비한다면 인류의 다른 업적은 모두 티끌처럼 미미할 뿐이다." 이런 파격적인 발언에서도 알 수 있듯, 그는 전통적으로 미국인들이 좋아하는 영웅상-억세고 강하며, 다소는 쇼맨쉽도 겸비한-을 모두 다 갖추고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명령이 자기 마음에 들지 않을 때는 전화선을 일부러 끊어버리고 나서 그런 명령을 받은 바 없다고 딱 잡아 떼었고, 항상 자기식으로 작전을 밀어부쳐 버리는 패튼의 버릇은 직속상관 아이젠하워 장군의 골머리를 앓게 만들었지만, 아이젠하워는 그를 책망할 수가 없었습니다. 패튼의 판단은 대부분 옳았고, 설령 틀렸다 하더라도 번번히 그 특유의 돌파력으로 어떻게든 자신의 몫을 완수해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 전투가 끝나면 반드시 부상병들을 찾아 위로하곤 했습니다
"패튼은 능력만큼이나 운도 기막히게 좋은 친구다. 나는 패튼이 정말 자신의 능력으로 전쟁을 이끌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의 승리가 번번히 기막힌 행운에 의한 것인지 혼란스럽다. 하여간 분명한 것은 패튼에게 그 일을 맡기면 반드시 완수되었다는 것이다." 아이젠하워의 말입니다.
그는 시실리 전투 당시 혁혁한 공을 세웠지만 치명적인 실수를 하는 바람에 군복을 벗게 될 위기에 처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항상 최전방에서 지휘를 하고는, 돌아오는 길에 야전병원에 들러 부상당한 병사들을 위로하곤 하였습니다.
하루는 들렸던 야전병원에서 전투 공포증에 걸려 침대에 앉아 훌쩍거리고 있던 병사 하나를 발견하고 겁쟁이라고 욕을 퍼 부우면서 따귀를 갈겼는데 이를 담당의사가 보고 기자들에게 발설하면서 사건은 일파만파로 커져 버렸습니다.
* 영화에서 병사의 따귀를 갈기는 장면, 따귀를 갈긴 다음에 권총을 빼려고 할 때 의사들이 황급히
말리고 있습니다
그는 따귀를 때린 병사가 속해 있는 사단의 전 병력을 연병장에 모아 놓고 사과를 하는 수모도 겪었지만 미국의 매스컴들이 연일 떠들어대면서 그의 군인 인생은 거의 끝나가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동안 여러 가지 구설수에 오를 때마다 감싸주던 아이젠하워도 이제 더 이상 손을 쓸 수가 없게 되어 버린 것입니다. 시실리 전투가 끝난 후 아이젠하워는 패튼의 옷을 벗기는 대신 직책을 주지 않고 그를 독일군을 기만하는데 써먹습니다. 그를 이름뿐인 제3군 사령관으로 임명하면서 영국에서 어슬렁거리게 하였던거죠.
마치 대륙침공의 선봉부대 사령관인양 독일군을 기만하였는데 여기에 독일군은 완전히 속아 넘어가 버렸습니다.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이 성공적으로 끝났을 때에도 독일군은 패튼이 이끄는 미 제3군이 도버 해협을 건너 깔레 근처로 상륙할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1944년 6월 6일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성공적으로 끝났으나 그 이후 독일군의 격렬한 저항 때문에 연합군은 겨우 두달에 걸친 격전을 겪고 난 후에야 겨우 노르망디 반도를 벗어나 본격적으로 프랑스 깊숙이 진격할 차비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이 때 패튼의 진짜 제3군이 그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하였습니다.
* 쾌속으로 질주하던 유럽 전선
연합군 주력의 남쪽을 담당한 패튼의 제3군은 그야말로 전광석화처럼 독일군을 유린하고 동쪽으로 동쪽으로 독일국경을 향하여 질풍처럼 내닫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전차부대가 너무 적진 깊숙이 달려 들어감에 따라 보급선이 길게 연장되고, 그로 인해 측면이 위협받게 되는 것을 염려한 부하들이 그런 의견을 제시하기라도 하면 패튼의 대답은 한결같았습니다.
"측면? 그건 독일놈들이 결정할 문제일 뿐이다. 자네들은 가솔린이 있는 한 앞으로 달려가기만 하면 돼. 가솔린이 떨어지면 전차에서 내려서 뛰어가!"
패튼의 신화는 지휘관으로서 그가 보여준 여러 가지 장점에서 비롯되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는 그가 보여준 솔선수범과 대담무쌍함입니다. 그는 전투가 벌어지고 있을 때 한시도 안전한 후방의 지휘소에 머무른 적이 없었고, 항상 최전방에서 직접 부대를 지휘했습니다.
패튼의 이런 행동에 대해 군사령관급의 고위 지휘관으로서는 무모하고 무책임한 만용이라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중요한 것은 여지껏 모든 연합군 지휘관 중에서 그런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패튼은 쉴새없이 전선의 이곳저곳을 휘젓고 돌아다니며 특유의 걸쭉한 입담으로 부하들을 독려하고 몰아세웠습니다. 3성 장군(나중에 그는 대장이 된다)이 지휘봉을 휘둘러대며 몸소 전선을 뛰어다니는 패튼의 이런 지휘방식은 부하들의 사기를 크게 고무시켰다는 점 이외에 몇가지 실제적인 잇점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최전방에 나가있던 그로서는 적군의 배치상태나 전황의 진전에 따라 기회가 포착되었을 때, 날카로운 매처럼 부릅뜬 그의 두 눈은 결코 그것을 놓치지 않았던 것이죠. 패튼은 즉석에서 사전에 계획된 작전을 대폭 수정해서라도 시시각각 변화하는 사태에 유연하게 대처했고, 또 휘하의 부대장들에게도 그런 식의 재량권을 폭넓게 인정해 주고 있었습니다.
* 왼쪽부터 아이젠하워, 패튼, 브래들리
두 번째는 패튼과 제3군이 전 연합군의 사기를 크게 고무시켜 놓았다는 것입니다. 지난 몇 달간에 걸친 혈전을 치르면서 겨우 수키로 미터도 전진하지 못했던 뼈저린 경험을 가지고 있던 연합군 장병들에게 있어서, 실제적인 전과야 어찌되었던 간에 하루에도 수십킬로를 질풍처럼 달려나가는 아군의 전차대는 그야말로 옆에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신바람이 나기에 충분했던 것입니다.
종군기자 제임스 윌라드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습니다.
"갑자기 모든 것이 변해 버렸다. 전쟁이 돌연 신바람 나는 축제, 혹은 흥미진진한 스포츠 경기와도 비슷한 것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승리의 무드가 고조되고, 이제 곧 이 지긋지긋한 전쟁도 끝날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된 병사들이 많아졌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치의 땅에 며칠씩이나 못박혀 있던 지지부진한 악전고투를 생각하면 그 어느 쪽이 진정한 전쟁의 모습인지 아리송할 지경이었다."
공세적인 성격만큼 정치적으로 능란하게 처세하는 데는 서툴렀던 패튼은 종전이 가까워짐에 따라 점점 더 정치적인 접촉의 필요성이 늘어난 소련군과의 관계에서 번번히 불화를 빚었습니다. 그는 거의 병적일 정도로 공산주의를 싫어했고 그런 속마음을 굳이 감추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베를린 점령을 소련군에 양보하고 미 제3군의 전선을 체코국경에서 멈추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는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분통을 터뜨렸고, 소련군과의 마찰을 빚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하라는 상관들의 당부에는 이런 극언도 서슴치 않았습니다.
“우리 미국처럼 위대한 나라는 그따위 사소한 문제로 골치를 썩지 않아도 될 권리가 있다. 소련놈들이 정 그렇게 무서우면 소련도 점령해 버리면 될 게 아닌가? 나에게 2개군을 맡겨주면 당장에 점령해 보이겠다.” 패튼의 말이었습니다.
* 전쟁이 끝난 후 잠시 귀국했을 당시, 뉴욕 맨해튼에서의 열광적인 환영 퍼레이드 장면
마침내 1945년 5월 독일이 항복하자 이 철두철미한 군인은 할 일이 없어졌습니다. 게다가 군인이라기보다는 정치인에 더 가까운 독일 남부의 바바리아 지구 군정 사령관 임무를 수행하고 있던 이 시기에 그는 정치적으로 자살행위나 다름없는 치명적인 실언을 하고야 맙니다.
“나치는 신념에 따라 행동했던 사람들이다. 그것이 옳은 것이든 혹은 그른 것이든, 나는 이처럼 자신의 이념에 충실한 사람들을 존경한다.”
“전후 독일의 빠른 재건과 치안 회복을 위해서는 행정 경험이 있는 구 나치당 관료들은 다시 중용하는 것도 나름대로 현명한 방법이 될 수 있다.”
그의 이런 발언들은 20세기의 인간이라기 보다는 로마시대의 전사에 가까웠던 그의 개인적인 성품으로써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말이지만, 나치의 가공스런 악행과 유태인 대학살을 지켜 보았던 전 유럽인들과 미국인들을 분노시켜 놓기에 충분했습니다.
* 웨스트포인트에 있는 패튼의 동상
이처럼 거듭되는 실언으로 인해 그를 아끼던 아이젠하워 장군도 더 이상 패튼을 감싸주는데 한계가 있었고, 마침내 군정사령관직을 박탈당하고 사냥으로 우울한 심경을 달래고 있던 이 전쟁 영웅의 최후는 의외로 빨리 다가왔습니다.
1945년 11월의 어느 날, 패튼은 자신의 쓸쓸한 심정을 이렇게 일기에 남기고 있습니다.
"봉급 받는 만큼 하는 일이 없다는 건 참으로 괴로운 일이다."
60세의 생일을 맞은 1945년 12월 9일 아침, 그는 운전병과 부관을 데리고 독일 도시 만하임으로 사냥을 떠났습니다. 길가에는 폭격으로 부서진 폐허가 즐비했고, 운전병 우드링크 일병은 장군이 그것을 바라보고 이렇게 말했다고 증언합니다.
"저것 보게. 처참한 광경 아닌가? 저 밑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깔려 죽었을까?"
불과 1년 전만 하더라도 "전쟁이야말로 인간의 가장 위대한 활동"이라고 찬미하던 장군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온 것은 자신의 운명을 예견했기 때문이라고 우드링크는 지금도 믿고 있습니다. 이날 아침, 고속도로 위에서 패튼이 탄 자동차는 트럭과 정면으로 충돌했고, 중상을 입은 장군은 열흘 뒤인 12월 21일 하이델베르크 병원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우쭐한 영웅심리와 이기적인 독선을 빼버리면 아무것도 아닌 자"라는 혹평과 "미국 역사를 통털어 가장 위대한 군인 중의 한 사람"이라는 칭송의 극단을 오가던 한 인간의 죽음이었습니다.
* 부하들과 함께 묻혀있는 룩셈부르크의 패튼 묘지
* 영화 <패튼 대전차군단>의 유명한 도입부 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