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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24일(종려 주일)
요한복음 19:31~37
우리가 예수의 죽음에 주목하는 이유
하늘사랑교회 주일예배 설교문
김규태 목사
우리는 만물이 생동하는 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계절은 희망을 향해 나아가는데, 우리의 신앙은 죽음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사순절(四旬節)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묵상하고, 그 안에 머물러 있는 40일간의 여정입니다.
지금도 이 지구상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어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과연 인류가 태어난 이후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 세상을 살다가 죽었을까요?
그런데도 우리 기독교인들은 2천 년 전, 저 조그마한 유대 땅에서 태어나 33년간의 짧은 인생을 살다간 예수님의 죽음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과연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가 예수님의 죽음에 주목하는 이유는 그분의 삶이 특별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정말 특별한 삶을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때로 배고픔을 느끼셨고(마 4:2), 피곤함을 느끼셨습니다(요 4:6). 또한, 예수님은 흔들리는 배 위에서 팔베개를 베고 주무셨고(막 4:38), 슬픔에 겨워 눈물을 흘리셨습니다(요 11:35).
예수님은 저와 여러분이 당하는 고통과 연약함을 똑같이 당하셨습니다. 그분은 완전한 인간으로서 이 세상을 사셨기에 우리의 연약함을 충분히 동정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예수님의 삶이 얼마나 경이로웠는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분은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셨고,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주셨으며, 갇힌 자에게 놓임을 허락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수많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셨고,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으며, 영과 육의 모든 질병을 치료해 주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삶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겸손과 낮아짐의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분은 당시의 사람들이 꺼리던 죄인과 세리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의 죽음에 주목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그분의 죽음이 특별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죽음과 관련하여 우리에게 몇 가지 의미 있는 단서들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이 단서들은 예수님의 죽음이 특별한 것임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이 죽으신 날 때문입니다.
31절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날은 준비일이라 유대인들이 그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 그 안식일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두지 아니하려 하여 빌라도에게 그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 하니”
예수께서 죽으신 날은 안식일을 준비하는 날이었습니다. 더군다나 이번 안식일은 유대인의 큰 날, 곧 유월절이 겹치는 날이었습니다. 일 년에 한 번 있는 유월절이 안식일과 겹치는 특별한 날에, 시체를 나무에 그대로 달아놓는다는 것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문제였습니다.
율법에 따르면,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자였기 때문입니다(신 21:22~23). 그래서 유대인들은 나무에 달아 놓은 시체들을 속히 처리해 달라고 총독 빌라도에게 요구했습니다.
둘째, 예수님의 다리가 꺾이지 않은 것 때문입니다.
33절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께 이르러서는 이미 죽으신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유대인들이 빌라도에게 요구한 것은 단지 예수님의 시체를 십자가에서 내려달라는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죽은 이의 다리를 꺾어서 그 죽음을 확인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에 쇠뭉치로 죽은 사람의 다리를 부러뜨리는 일은 흔한 일이었습니다. 이러한 행위는 사람의 죽음을 확인하려는 목적이 있었지만, 아직 죽지 못한 사람의 죽음을 촉진하려는 목적도 있었습니다.
군인들은 예수와 함께 못 박힌 다른 두 사람의 다리를 꺾었습니다(32절). 그러나 예수께 이르러서는 이미 죽으신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않았습니다(33절). 이미 예수께서 완전히 죽은 상태였기 때문에 굳이 다리를 꺾을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셋째,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피와 물이 나온 것 때문입니다.
34절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한 군인이 창으로 예수님의 옆구리를 찔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의 몸에서 피와 물이 나왔습니다. 예수님은 기절하신 것이 아니라 완전히 죽으셨습니다.
왜 이와 같은 사실이 중요합니까? 훗날 예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을 때, 어떤 이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실제로 죽은 것이 아니라 고통으로 잠시 기절했다가 다시 깨어난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만약 그들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무덤 입구를 가로막아 두었던 육중한 돌은 어떻게 옮겨졌을까요? 또한, 무덤 입구를 굳게 지켰던 로마 병사들은 어떻게 처리될 수 있었을까요? 로마 병사들은 예수님의 처형을 정확하게 집행했습니다. 그들은 이 일에 책임감을 느꼈고, 조금의 소홀함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기절한 것이 아니라 완전히 죽으셨습니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몸이 완전히 죽으셔야 몸의 부활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부활은 몸의 부활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목격하고 증언하고 있는 사람은 예수님이 사랑하시던 제자 요한이었습니다. 36절과 37절에서,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죽음이 구약 성경의 예언과 관련되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출애굽기와 민수기와 시편에서는 “그 뼈가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리라.”라고 예언하였습니다(출 12:46; 민 9:12; 시 34:20).
또한, 예수님보다 500년 전에 활동했던 스가랴 선지자는 “그들이 그 찌른 자를 보리라”라고 예언하였습니다(슥 12:10). 이러한 구약 성경의 예언들이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완전히 성취되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죽음에 주목하는 이유는 그분이 죽으신 목적이 특별했기 때문입니다.
과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목적이 무엇이었습니까? 로마서 5장에서, 사도 바울은 예수께서 죽으신 목적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7~8).”
예수님은 죄인 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의인을 위하여 죽으신 것도 아니고, 선인을 위하여 죽으신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어주심으로, 하나님은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해 주셨습니다(롬 5:8).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제작된 <용서>라는 제목의 영화가 있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주인공의 약혼자가 한 고등학생에 의해서 살인을 당합니다. 그런데 그녀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 학생의 미래를 생각해서 그를 용서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끔찍한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자기가 조건 없이 용서했던 그 아이가 다시 사람을 죽였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녀는 형사와 마주 앉게 됩니다. 그때 형사가 이렇게 말합니다. “에이, 대책 없는 용서는 죄악입니다.”
그 후 주인공의 생각이 바뀝니다. “내가 뭔가 큰 실수를 했구나. 그 아이를 다시 범죄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은 것은 나의 대책 없는 용서였구나.”
기독교의 기초는 사랑입니다. 그러나 그 사랑은 대안이 없고, 대책이 없는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실 때 “그냥 없던 거로 하자. 손 털고 없던 일로 해 줄게”라고 대책 없이 우리를 용서하신 것이 아닙니다. 용서가 처벌까지 면해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출처: 송태근, 「기도 학당」 (국제제자훈련원, 2023); 「생명의 삶 플러스」 (두란노, 2024년 3월호), 271쪽에서 재인용.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우리에게 증거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복음을 듣게 되었을 때, 이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기독교 신앙은 십자가를 바라보는 신앙입니다. 예수님이 내 죄를 용서해 주시기 위해 피 흘려 죽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요한복음 3장에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4-15).”
광야에서 있었던 구리 뱀 사건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인도를 받고 이집트를 나와 가나안 땅으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길로 인해 마음이 상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은 먹을 것도 없고, 마실 물도 없다며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민 21:5).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원망을 들으시고 진노하셨습니다. 그리고 광야에 불 뱀들을 보내셨습니다. 이 불 뱀들로 인해 하루에 몇천 명씩 죽어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때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놋으로 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높이 매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그 뱀을 쳐다보는 자는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모세가 장대 위에 높이 든 놋 뱀은 훗날 온 인류를 구원하실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豫表) 합니다.
아무리 잘난 사람도, 아무리 많이 가진 사람도, 아무리 선한 일을 행한 사람도 갈보리 십자가 위에 높이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으면 절대로 구원받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순종하는 자에게는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흘리신 피와 물이 곧 나를 위한 것임을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가까이에서 목격했던 사도 요한이 우리에게 그분의 죽음을 참되게 증언하고 있는 목적이 이것입니다. 우리가 그 증언이 참인 것을 알고, 우리로 예수님을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35절).
사랑하는 여러분, 저와 여러분을 위해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으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에게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끝으로, 저는 여러분에게 한 분의 이야기를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매일 밤 8시부터 다니엘기도회를 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어느 성도님이 간증했습니다. 그분의 간증은 저에게 특별한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왜냐하면, 간증하신 성도와 그의 딸 이야기는 바로 저의 이야기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저희는 아들에게 투여할 수 있는 약 가운데 가장 센 약을 투여하고, 중환자실에서 죽을 시간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눈물로, 눈물로, 호소하던 저희의 기도가 응답 되었습니다.
병원에서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아들은 중환자실에서 일반병실로, 그리고 퇴원을 강행해, 산소 호흡기를 달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날부터, 기도로, 눈물로, 지새운 지 16년째입니다.
우리 아이가 혼수상태에서 깨어났지만, 90%의 뇌세포가 죽어 앞을 보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며, 누워서 지내야만 합니다. 그래도 우리 가족이 “주님 안에서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고 있습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어제도 아들의 상태가 안 좋았던지, 아들이 새벽에 피를 토했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아멘”합니다. 병원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하였기에, 오늘도 우리는 이 아이를 붙들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내 아들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지 않고 죽어가는 영혼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낮에 큰아들 면접 보는 대학에 다녀왔습니다. 딴에는 우리 가족의 경제 상황이 좋지 않기에,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대학으로 하향지원한 눈치입니다. 이번 대학은 너무 하향지원을 했나 봅니다. 자기 생각에는 4년 장학금을 노렸었나 봅니다.
아들이 대학 근처를 가면서, “휴~”하고 한숨을 내쉽니다. 면접을 보고 나온 이후, 여기는 아닌 것 같다고 다른 대학을 가야겠다고 말합니다. 동생 문제로, 네 살 때부터 응급실을 다니는 부모 때문에 많은 것을 포기했던 큰애가, 대학도 부모의 가정형편을 먼저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다양합니다. 우리 가족은 고통으로 본다면, 매우 강한 강도로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은 너무나 동일합니다. “아들아, 내가 너를 사랑한단다. 딸아, 내가 너를 사랑한단다.”
하나님은 ‘위로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위로는 나의 것으로 가득 차 있을 때는 아무리 좋은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만지시고, 또 만지시고, 벗기시고, 또 벗기신 영혼은 하나님의 신음에도 곧바로 반응합니다.
감사합니다. 주님! 오늘도 주의 은혜 안에 거합니다. 주님만이 소망 되십니다. 주님만이 위로자 되십니다. 그래서 오늘도 “할렐루야!” 합니다.
우리를 비롯한 많은 분이 고난 가운데 하나님을 만납니다. 우리는 신앙의 끝자락에서 손길을 내미시는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래서 오늘도 “할렐루야!”입니다.
-출처: https://www.facebook.com/share/p/7edpTPuVSxEpENvZ/?mibextid=oFDknk
사랑하는 여러분, 혹시 절망 가운데 계십니까? 누구에게 말할 수 없는 극심한 고통의 시간을 보내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만일 여러분이 십자가를 바라본다면, 십자가는 여러분에게 구원을 선물로 주실 것입니다. 현실을 이기게 하는 능력을 주실 것입니다.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는 의지를 선물해 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우리는 지금 사순절 기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이 기간에 더 깊이 십자가의 사랑을 묵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새롭게 발견하게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