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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이끈다는 것은 단지 고백한다는 것이 아니라 산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전혀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알기로는 교회에 나오지 않으려는 사람들 가운데서 상당수가 예수님께는 나오려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교회 체계에 들어오는 것을 거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원래 그 의미가 단순했던 것들을 복잡하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물론 우리의 종교 제도가 복잡한 것이긴 하지만, 이미 그 속에서 생활하고 있는 우리는 그것에 익숙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불편 없이 생활하고 있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닙니다. 제도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소수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모든 규칙들은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이해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다수입니다.
저는 하나님께 속한 것들이 우리가 그것에 조작을 가하기 전에는 훨씬 쉽고 간단한 것들이었다고 믿고 있습니다.
성령 안에서 산다는 것도 대부분의 보통 사람들이 그것을 실제로 실행할 수 있기 위해서는 쉽고도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면 안 됩니다. 성령 안에서 산다는 것은 수없이 많은 책들을 읽어야만 이해할 수 있는 것이어서도 안 됩니다. 그것은 또한 “조심하십시오. 당신은 그것을 통해 광신적인 신비주의에 빠질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위험합니다”라는 말을 들을 소지가 있는 어떤 것이어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생활방식으로 살기로 한다는 것은 평범한 인간으로서의 우리가 크게 이질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어떤 새롭고 이상한 길로 접어든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길은 평범한 사람들이 걸어갈 수 있는 자연스러운 길입니다. 성령을 따라 산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창세 때부터 모든 사람들에게 기대하셨던 극히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것은 모든 우주의 자연법과 아주 잘 조화를 이룹니다. 그것은 대단히 정상적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을 가진 자의 조상이라고 불렸습니다. 그는 기독교적 삶의 모델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갖고 있었나요? 그 관계는 어떤 종교가 아니라 극히 정상적인 관계였습니다. 그것은 대단히 자연스러우면서도 단순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친분이 있었기 때문에, 다음과 같이 하나님께 말씀드릴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아들을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이러다가는 제 종들 가운데 한 명에게 제 유산을 상속해 줄 수밖에 없겠습니다. 하나님, 어떻게 좀 해 주십시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는 하나님께 이런 식으로 말씀드리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관계는 친밀한 벗들 간의 관계였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벗이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했던 가장 복잡한 의식은 하나님께 희생제물을 드리기 위해 제단을 쌓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일도 그가 자발적으로 한,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제단을 어디에 쌓았나요? 아브라함은 어느 곳에서건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하나님께 특별히 감사를 드리고 싶다고 느꼈을 때는 바로 자기 집 뒷마당에 제단을 쌓았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서는 제단을 쌓는 것조차도 필요 없는 일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영원한 희생제물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면서 지켰던 가장 복잡한 의식이 십자가에서 끝나 버렸습니다. 오늘날 성령 안에서 사는 자들에게는 아무 복잡한 의식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가능한 삶 가운데 가장 자연스럽고 단순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죽고 난 후 몇 백 년이 지난 뒤에 율법이 나타났습니다. 이 율법이 유대교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그 율법은 우리가 보기에 대단히 복잡해 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단순한 것을 좋아하시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런 복잡한 제도를 인간에게 주셨을까 하고 의아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율법의 복잡한 의식들 밑에 감추어져 있던 것은 대단히 단순한 생활방식이었습니다. 단지 정말로 복잡했던 것은 희생제사법과 성전제도였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모든것들을 생략해 버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완전한 희생제물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가르침을 살펴보기로 합시다.
신명기에 나오는 율법의 핵심은 얼마나 간단합니까? 신명기 6:6 이하에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지니라.”
이것이 바로 삶 전체를 위한 말씀이었고, 일상생활을 위한 말씀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그들의 가정과 직업, 들녘에서의 발걸음, 그리고 심지어 침실에서의 행동에까지 영향을 미쳤습니다.
“너는 나의 길을 부지런히 가르치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어디서 가르쳤겠습니까?
“주일학교에서요?”
아닙니다.
“매주 주일 아침 열 시에요?”
아닙니다.
말씀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항상 가르치라는 말씀입니다!
아시다시피, 하나님께서는 심지어 율법시대에도 그 마음속에 종교가 아니라 삶의 방식을 생각하고 계셨습니다. 백성들은 이것들을 자신들의 자녀들에게 가르쳐야만 했습니다.
누가 가르쳤습니까? 주일학교 교사들이 아니라 부모들이 가르쳤습니다. 그것은 교실과 책과 교사가 있어야만 하는 복잡한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아버지와 어머니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는, 극히 정상적인 삶의 일부였을 것입니다.
언제 가르쳤습니까? 계속 가르쳤습니다. 주일 아침에만 가르친 것이 아니라 계속 가르쳤습니다.
오늘날에는 주일학교 교육이 매우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어린이들이 집에서 마땅히 받아야 할 교육들을 못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영양부족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일 오전마다 그들을 병원에 입원시켜야 합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산소호흡을 시켜 주어야 하고, 전문의를 동원해서 성경비타민 주사를 놓아주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집에서는 도무지 그런 것들을 섭취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기독교 교육을 전담할 분들을 길러내기 위해 사람들을 신학교에 보냅니다. 신학교 역시 병원과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사람들이 모두 건강하고 절대로 병에 걸리는 일이 없다고 하면, 의사나 병원 그리고 의과대학이 필요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여러 기구들은 온갖 영적인 병들을 치료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일을 해 주어야 할 가정들이 제구실 못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린이들에게 숟가락과 젓가락을 사용하는 방법은 가르쳐 주지만, 기독교적 삶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는 도무지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저는 지금 어떤 종교 제도 속에서 그들을 가르치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제가 말하려는 것은 어린이들이 우리가 사는 모습을 봄으로써 기독교인의 삶을 산다는 것이 과연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된다는 점입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많은 가정에 있어서 부모들이 신앙 고백은 곧잘 하면서도, 어린이들을 이끌어 주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끈다는 것은 단지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산다는 것입니다.
어린이들은 그들이 싸워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배우기 위해 주일학교에 가야 합니다. 왜요? 그 아이들의 아빠와 엄마가 집에서 툭하면 싸우기 때문입니다. 아빠가 직장에서 쓰던 볼펜을 마음대로 집에 가지고 와서 쓰기 때문에, 아이들은 주일학교에 가서 도둑질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배워야만 합니다.
아빠와 엄마가 툭하면 화를 내고 난폭해집니다. 아이들은 화를 내면 안 된다는 것을 어디 가서 배워야 합니까? 주일학교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문제를 더욱 심각하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주일학교 선생님들도 일주일 내내 화를 잘 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일에만은 화를 내지 않습니다.
우리 중 수많은 사람들이 종교 제도에만 얽매여 있습니다. 그것은 실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놀고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우리들의 영적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주일 예배가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의 생활입니다. 교회 건물 안에서의 일주일에 두 시간씩의 생활이 아니라, 사무실과 가정에서의 평일 동안의 생활이 가장 중요합니다.
여러분이 성경책을 옆에 끼고 교회에 예배드리러 오는 것을 보면서, 주님은 천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가서, 좀 쉬어도 되겠다. 그들이 여기서는 잘 행동할 거야. 그러니 낮잠이나 좀 자자. 하지만 그들이 교회 건물 밖으로 나올 때를 대비하고 있어야 해!”
“오, 안녕하세요, 형제님!” 당신이 도착하면 목사가 인사를 합니다.
“목사님께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여러분이 주일에 입는 가장 좋은 옷을 입고 대답합니다.
목사는 혼자서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 사람들은 얼마나 영적인가!” 하지만 집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누가 알겠습니까?
당신이 교회에서 사람들과 함께 앉아 손을 모으고 있다고 해서, 하나님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에 대해 그것보다 더 많이 알고 계십니다.
심지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계시가 있기 전에, 사람들이 율법 아래 있을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 가르쳐야만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아침에 일어났을 때부터 저녁에 잠자리에 들 때까지의 모든 생활에 걸친 것이어야 했고, 본보기를 통한 계속적인 가르침의 과정이어야 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것 같은 종교적 기구나 교회 제도가 아니라, 가정이 기독교 생활의 중심이었습니다. 우리는 교회로 하여금 이 모든것들을 자기의 원래 위치로 돌려놓도록 해 줄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율법에 있어서 유일하게 복잡한 의식은 희생제사법과 성전제도였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그 일들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단번에 모든것을 충족시키는 영원한 희생제물을 드리심으로써 모든 의식들을 폐기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내내 의도하셨던 바는 종교가 아니라 삶의 방식이었습니다.
이제 신약성경을 살펴봅시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가르치셨습니까?
여러분은 주님께서 사람들에게 “주일 오전 10시에 내게 와서, 나의 말을 들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찾아볼 수 있습니까?
당신은 그분이 “우리는 예루살렘 중앙 공원 앞에 있는 땅을 조금 살 계획이다. 그래서 우리의 사무실들을 가장 좋은 위치에 둘 것이고, 우리 교회 건물은 본부 건물 다음에 위치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상상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주님이 유대교의 회당보다 훨씬 더 큰 60,000명이나 모이는 교회를 계획하셨다는 이야기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분은 결코 “우리가 우리들만의 교회 건물을 지을 수 있는 땅을 구하기 위해 기도회를 열자”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교육 방법은 처음부터 혁신적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주님께 “주여, 어디 계시니이까?”라고 물었을 때, 그분은 “자, 여기 안내책자가 있다. 그것의 뒤쪽을 참조해 보면, 매주일 아침 내 교회에서 나의 설교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아닙니다. 단지 그분은 “와 보라”고 말씀하셨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집을 가지고 계시지 않았기 때문에, 돌아가실 때까지 3년 동안 그분 뒤를 사람들은 계속 따라다녀야 했습니다. 본부 건물을 짓기 위해 주님을 기다리고 있던 자들은 아직도 계속 기다리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결코 정해진 주소를 가져보신 적이 없으니까요.
그분은 집회 계획을 갖고 계시지도 않았습니다. 성경 공부 모임도 없었고, 기도회도 없었으며, 주일 아침 예배도 없었습니다. 주님은 주일 아침에 종을 치시고는 교회 문간에 서서 “안녕하세요? 별고 없으셨죠? 좋은 예배가 되시길 바랍니다”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 사이에서 살기 위해 오신, 대단히 단순하고 자연스러운 분이셨습니다. 그분은 사람들 사이에서 친히 살아가심으로써 그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보여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분은 어떻게 가르치셨습니까?
아침에 일어나셨을 때, 그분은 사람들을 가르치셨습니다. 팔레스타인의 길을 걸으실 때도 가르치고 계셨습니다. 그가 앉아 계시면, 사람들이 그분 주위에 몰려들었고, 그러면 그분은 그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이것이 하루 24시간의 삶의 방식이었습니다. 그분은 단지 자연스럽게 사셨을 뿐입니다. 그분이 한 사람을 발견하시면 바로 그 사람과 함께 사셨고, 천 명의 사람들을 발견하시면 천 명의 사람들과 함께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그들에게 “내게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있다.”
우리는 말합니다. “저를 바라보지 마십시오. 성경을 바라보십시오. 성경을 따라가십시오.”
우리가 하는 말의 뜻은 “저는 시도해 보았지만, 그것을 할 수 없었습니다. 당신은 그것을 하실 수 있는지 해 보십시오”라는 뜻입니다.
바울도 예수님과 같은 방법으로 가르쳤습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와 나를 따르는 자들이 되었다”라고, 그는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도 나를 본받는 자 돼라.”
오늘날 우리들이 가르치는 것은 대개 위와 같은 형편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우리의 됨됨이를 닮아 가기보다는 단지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을 알아 가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바울이 가르치셨던 대로 가르친다는 것은 개념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나누는 것을 뜻합니다. 그분들은 사람들이 그들의 인격을 닮도록 만들기 위해 자신들의 생명을 전달해 주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말했습니다. “너희는 모든 사람에게 읽히는 그리스도의 편지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편지입니다. ‘살아 있는 성경’(Living Bible)이라는 현대판 성경이 따로 있어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우리들 자신이 그리스도의 살아 있는 편지가 되어야 할 텐데 말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가르쳐야 합니까?
우리의 사랑, 우리의 기쁨, 우리의 평안이 모든 사람들에 의해 읽힐 수 있어야 하고,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당신이 갖고 계신 것 중에 우리가 갖고 있지 못한 것이 도대체 무엇이지요?”라고 물을 수 있게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분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이 그분을 보게 될 때, 그들도 역시 그분을 원하게 될 것입니다.
언젠가 한 무리의 사람들이 저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초(超) 성경적 계시를 믿으십니까?” 저는 그들에게 우리들 모두가 그것을 믿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도대체 그 외에 무엇으로부터 우리의 교회 제도가 나올 수 있었단 말입니까? 그것은 성경 속에 없습니다. 당신은 성경 속에서 그것을 찾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제도가 정말로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라면, 그것은 초성경적 계시가 아니면 안 됩니다.
베드로, 바울, 야고보 - 그들 중 누구도 오늘날 우리가 갖고 있는 것과 같은 제도를 가져본 적이 없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어디에 있건 상관하지 않고 가르쳤습니다. 그들은 길을 가면서도 가르쳤습니다. 어디를 가건 모든 곳에서 가르쳤습니다. 해변에서도, 감옥에서도, 기회가 있는 대로 말입니다.
그들은 새벽 네 시에 세례를 주기도 했습니다. 몇 시인가 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결코 교회의 다음 예배 시간을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언제건 충분히 좋은 시간이었고, 어느 장소이건 좋았습니다.
어떤 사람의 집이건, 빌립보 간수의 경우처럼 한밤중이건, 에티오피아 내시의 경우처럼 사막 한가운데이건, 도무지 이런 것들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문제가 되었던 것은 종교 제도가 아니라, 생명이었습니다.
저는 지금 우리의 종교를 주일을 제외한 다른 날로 옮겨야 한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아니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말하고 있는 것은 오히려 그것보다도 훨씬 심각한 어떤 것에 대해서입니다. 저는 우리의 종교를 폐지해 버릴 필요가 있다고 믿습니다.
성령 안에서 산다는 것은 종교 제도에 의해 인도함을 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임재해 계신 하나님에 의해 인도함을 받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은 삶 전체를 통괄하는 것으로서, 우리 속에 내재되어 있는 계속적인 인도 체계입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아 사는 사람이 될 때에, 우리는 정상적인 사람이 됩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바에 대한 예를 들도록 하겠습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만드셨을 때, 그들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대단히 단순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으로 그들을 방문하시는 장면을 상상해 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아담아! 하와야! 잘들 지냈느냐?”
“오, 안녕하세요? 저희들은 잘 지내고 있어요. 주님도 안녕하시죠?” 그들이 대답합니다.
“그래, 잘 지내고 있다. 아담, 넌 뭘 하고 있지?”
“예, 딸기밭에 물을 주고 있습니다.”
“딸기가 잘 자라느냐?”
“그럼요, 아버지. 아주 아름답게 자랍니다. 벌써 한 광주리나 따서, 하와가 그것으로 딸기잼을 만들었는걸요.”
“그래?”
“예, 정말 맛있어요!”
이것이 하나님과 그들이 교제한 방법입니다. 그들은 삶의 평범한 것들을 통해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하고 있는 모든 일들에 대해 관심을 보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계속 그들의 복지에 대해 관심을 써 주십니다. “하와야, 너는 어떠냐?”
“훌륭해요. 아버지, 이 동산은 정말 멋져요. 온도도 딱 알맞고요. 모든것이 너무나 아름다워요. 여기서 사는 것은 정말 안락해요.”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교제가 이런 식이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우리는 평범한 생활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직 종교 제도를 통해서만 하나님과 교제하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이름을 부르셨을 때, 아담이 “하와! 어서 오르간에 앉아요. ‘만물들아, 여호와의 권능을 송축할지어다……’를 연주해 줘요”라고 말했을 것으로 우리는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는 그것보다 훨씬 단순했고, 자연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하신 것은 그 나라가 온 세상으로 퍼져나가 사람들의 삶 전체를 변화시키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람들이 중생하여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오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하루 24시간 내내 성령 안에서 살면서, 하나님께서 태초부터 의도하셨던 그분과의 계속적인 교제를 누릴 수 있게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처음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계획하셨던 대로, 결국 인간은 삶의 모든 부분에 있어서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게 될 것입니다.
주님과 동행하십니까?
후안 까를로스 오르띠즈
도서출판 바울
1. 나는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가, 아니면 교회 제도를 따르고 있는가?
묵상 답변
이 질문은 신앙의 중심이 어디에 놓여 있는지를 정직하게 드러내게 합니다. 나는 예수님의 인격과 삶의 방식, 그분의 시선과 태도를 따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아니면 익숙한 예배 형식과 교회 문화, 역할과 직분에 안주하고 있는가를 돌아보게 됩니다. 교회 제도는 예수님을 따르도록 돕는 도구여야 하지만, 어느 순간 그것이 목적이 되어 버리면 우리는 예수님 없이도 ‘종교 생활’을 잘해 나가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와서 보라”고 하셨지, “제도를 먼저 이해하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지금 나의 신앙은 살아 계신 분을 따르는 관계인지, 아니면 안전한 틀을 유지하는 습관인지 성찰하게 됩니다.
2. 나의 신앙은 주일에 머무르는가,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살아 움직이는가?
묵상 답변
설교는 신앙의 가장 중요한 자리가 예배당이 아니라 일상의 삶이라고 말합니다. 나는 주일 예배 시간에는 경건하지만, 가정과 직장, 관계 속에서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예배당 안의 나만 보시는 분이 아니라, 월요일 아침의 나, 피곤하고 예민한 순간의 나, 선택의 기로에 선 나를 아십니다. 진짜 신앙은 특정 시간에 ‘켜지는 모드’가 아니라, 삶 전체를 관통하는 방향성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은 예배 시간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평범하고 반복적인 하루 속에서 더욱 절실합니다.
3. 나의 가정은 신앙을 가르치는 공간인가, 신앙의 공백이 드러나는 공간인가?
묵상 답변
신명기의 말씀처럼, 하나님은 신앙을 가정 안에서 자연스럽게 전수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가정에서 신앙 교육은 교회에 위임되어 있고, 삶의 현장에서는 그 흔적을 찾기 어렵습니다. 아이들은 말보다 삶을 통해 배웁니다. 부모가 화해하는 모습을 보지 못하면서 용서를 배우고, 정직하지 않은 모습을 보면서 정직을 배우기는 어렵습니다. 이 질문은 부모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모든 공동체 구성원에게 해당됩니다. 나는 누군가에게 신앙의 본보기가 되는 삶을 살고 있는가, 아니면 말과 삶이 분리된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는가를 깊이 돌아보게 합니다.
4. 나는 ‘가르치고 있는 사람’인가, 아니면 ‘본보기가 되는 사람’인가?
묵상 답변
예수님과 바울의 가르침은 정보 전달이 아니라 생명 전달이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무엇을 하라고 말하기 전에, 어떻게 사는지를 먼저 보여주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설명은 잘하지만, 함께 살아 주지는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는 누군가에게 “성경을 보라”고 말하면서, 정작 나 자신을 따라오라고 말할 수 없는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은지 성찰하게 됩니다. 참된 가르침은 말의 정확성보다 삶의 진실성에서 나옵니다. 공동체는 지식을 공유하는 공간이기 이전에, 서로의 삶을 통해 그리스도를 배우는 자리여야 합니다.
5. 나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편지’로 읽히고 있는가?
묵상 답변
바울은 성도들을 “모든 사람에게 읽히는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말했습니다. 이는 우리가 세상 속에서 복음의 해설서로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나의 태도, 말투, 선택, 관계 맺음 속에서 사람들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추측하게 됩니다. 만약 성경을 한 번도 읽어 보지 않은 사람이 나의 삶을 읽는다면, 그들은 그리스도를 매력적으로 느낄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보게 됩니다. 완전함이 아니라 방향성이 중요합니다. 사랑, 기쁨, 평안이 조금이라도 흘러나오고 있다면, 그것이 이미 하나님의 편지의 일부일 수 있습니다.
6. 나는 종교적으로 ‘잘하고 있는 사람’인가, 성령 안에서 ‘살아 있는 사람’인가?
묵상 답변
설교는 종교를 더 잘 운영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종교를 넘어 생명으로 돌아가자는 외침입니다. 성령 안에서 산다는 것은 규칙에 의해 관리되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자연스럽게 반응하는 삶입니다. 에덴동산에서의 하나님과 인간의 교제처럼, 삶의 사소한 부분까지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나는 신앙을 점검표처럼 관리하고 있지는 않은지, 아니면 하나님과 동행하는 기쁨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지를 돌아보게 됩니다. 성령의 인도는 우리를 비정상적인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가장 정상적인 사람으로 회복시키십니다.
“교회를 더 잘 다니자”가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더 잘 살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