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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8월 20일 금요일 성 베르나르도 아빠스 학자 기념일
제1독서 : 롯기 1,1.3-6.14ㄴ-16.22
복 음 : 마태 22,34-40
그때에
34 예수님께서 사두가이들의 말문을 막아 버리셨다는 소식을 듣고
바리사이들이 한데 모였다.
35 그들 가운데 율법 교사 한 사람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물었다.
36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
37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38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39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40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신학생 때, 신학교에서는 1주일에 한 편의 영화를 상영했습니다.
영화 상영을 담당하는 신학생이 몇 편의 영화 목록을 신부님께 제출하면
그중에서 한 편을 선택해주십니다.
그런데 그때 담당 신학생이 ‘사랑의 블랙홀’이라는 영화를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제목 그대로 올리면 ‘미성년자 관람 불가’의 영화로 생각해서 거절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자비의 블랙홀’이라는 제목으로 제출했고,
그 결과 저를 포함한 신학생 모두가 영화를 아주 재미있게 봤습니다.
영화의 내용은 단순합니다.
일기예보 진행자인 주인공이 어느 마을에 취재를 하러 갔다가
2월 2일 성촉절(Groundhog Day)이 계속 반복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매일 반복되는 2월 2일이 지겹고 힘들어서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하지만,
다음날 다시 살아나 똑같은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런 시간을 보내다가 사랑을 얻기 위해 노력하면서 변하는데
비로소 다음날로 넘어갈 수 있었습니다. 블랙홀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아 블랙홀에 빠진 것 같은 상황이 어쩌면 지금의 우리 삶과 같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랑의 삶이 아닐 때, 미래의 희망을 간직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지요.
주님의 사랑은 바로 미래의 희망을 가질 수 있게 하는 가장 큰 선물입니다.
율법 교사 한 사람이 예수님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율법의 세부 조항을 보면 자그마치 613개나 되었습니다.
이 중에서 어떤 조항이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딱 두 가지의 계명으로 정리하십니다.
즉,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랑’의 계명입니다.
율법은 지켜도 그만, 안 지켜도 그만인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지켜야 할 계명으로, 성경에 보면 율법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생명까지 바치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율법의 근본정신을 ‘사랑’으로 정리해주셨습니다.
사랑에 비추어서 자신의 말과 행동을 똑바로 할 수 있게 되었으며,
이것이 곧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을 맨 앞자리에 둘 수 있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자신의 판단으로 사랑의 실천을 주저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사랑의 행동을 할 때 비로소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런 삶만이 미래에 하느님 나라라는 커다란 희망을 둘 수 있으며,
그 희망을 통해 지금을 더 힘차게 살 수 있습니다.
어떤 순간에서도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마태 22, 36)
한상우 바오로 신부
하느님 사랑을
모르고
살아가는
우리들 삶이다.
계명은
사랑의 길을
우리들에게
일깨워준다.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하느님의 자녀들이다.
사랑을 알게 되는
우리들 시간이다.
사랑이신
하느님을 통해
참된 자유와
참된 감사를 배우게 된다.
사랑은
하느님의 것이다.
우리
삶의 자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뿐이다.
사랑을
반성하지 않고서는
사랑을
제대로 실천할 수 없다.
사랑하지 않고서는
행복할 수 없는
우리들 삶이다.
사랑해야 할
우리들 삶이다.
참된 사랑이
빠져버리면
우리는 더더욱
비참한 존재가 된다.
더 잘 살다
가기위해
우리는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하는 것이다.
삶의 의미는
사랑하는
오늘의 의미이다.
오늘이 사랑이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떨림과 울림에 대한 강의’를 들었습니다.
세상에는 많은 떨림이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의 귀는 울림으로 듣습니다.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것이 사실은 당연한 것이 아닌 축복인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물을 흔하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구 밖에서 인류는 아직 물이 있는 행성을 볼 수 없었습니다.
허블 망원경으로도 찾지 못하였습니다.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공기, 물, 바람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축복입니다.
우리는 지구가 한 바퀴 도는 것을 하루로 여깁니다.
달이 지구를 한 바퀴 도는 것을 1달로 여깁니다.
지구가 태양을 한 바퀴 도는 것을 1년으로 여깁니다.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하지만 지구 밖에 있는
어느 행성도 지구와 같은 시간으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시간의 단위는 오직 지구에서만 사용될 뿐입니다.
우리가 듣는 것은 공기의 떨림을 귀의 고막을 통해서 듣는 것입니다.
우리가 듣는 주파수는 20 헤르츠에서 20,000 헤르츠라고 합니다.
그 외의 떨림을 우리는 듣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것을 우리는 초음파라고 합니다.
박쥐, 돌고래, 그밖에 다른 동물은 우리가 듣지 못하는 떨림을 듣습니다.
우리가 보는 것은 빛의 떨림을 우리의 눈을 통해서 보는 것이라고 합니다.
빛은 파동이면서 입자의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볼 수 있는 빛의 주파수를 가시광선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보지 못하는 광선은 적외선, 자외선, 감마선, 엑스선이 있습니다.
우리가 보지 못하지만 빛의 떨림은 있으며, 우리는 그것을 과학을 통해서 보고 있습니다.
소리와 빛의 떨림을 우리가 듣고 보는 것이 울림입니다.
울림에는 ‘공명’이 있습니다. 반딧불이는 어느 순간 모두가 같이 반짝인다고 합니다.
그 모습은 참 아름답습니다. 수컷들이 암컷에게 잘 보이려고 그렇게 한다고 합니다.
저는 그것을 야광봉이나 라이터 응원에서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보고야 믿느냐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다른 떨림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그것은 사랑과 나눔의 떨림입니다. 그것은 희생과 봉사의 떨림입니다.
그것을 듣고 볼 수 있는 사람은 십자가와 죽음으로 얻어지는 부활을 체험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롯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어머님을 두고 돌아가라고 저를 다그치지 마십시오.
어머님 가시는 곳으로 저도 가고, 어머님 머무시는 곳에 저도 머물렵니다.”
늙은 어머니와 함께 하려는 롯의 마음은 사랑의 울림입니다.
흥남부두에서 피난민 14,000명을 자유의 땅으로 탈출 시켰던
마리너스 수사님의 마음도 사랑의 울림입니다.
가난한 이, 굶주린 이, 버려진 이를 위해서
꽃동네를 일군 오웅진 신부님의 마음도 사랑의 울림입니다.
우리들 또한 우리의 삶을 통해서 세상과 이웃에게 떨림을 주어야 합니다.
우리의 떨림이 우리의 이웃을 변화시키면 그것은 공명과 공진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변하는 세상이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주님은 눈먼 이를 보게 하시며, 주님은 꺾인 이를 일으켜 세우시네.
주님은 의인을 사랑하시고, 주님은 이방인을 보살피시네.”
오상선 바오로 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사랑 이야기입니다.
제1독서는 예수님 족보에 들어온 이방 여인 중 하나인 룻 이야기의 시작입니다.
"네 동서는 제 겨레와 신들에게로 돌아갔다. 너도 네 동서를 따라 돌아가거라."(룻 1,15)
기근을 피해 모압 지방에서 나그네살이 하던 나오미는
남편과 두 아들을 잃고 모압 출신의 두 며느리와 남게 됩니다.
그녀는 고향인 베들레헴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하고
두 며느리에게 모압에서 새 삶을 시작하라고 권하지요.
오르파는 모압으로 돌아갔지만 룻은 나오미에게 매달립니다.
그런데 실상 베들레헴으로 돌아온다 해도 룻에게 인간적으로 별 뽀족한 수는 없어 보입니다.
그들은 사회적 약자인 과부인데다 미래를 보장해 줄 아들도 없는 상태였지요.
당장 내일의 목숨을 보장해 줄 재산도 없이 가난하기 그지없는 처지에, 룻은 이방인이기까지 합니다.
"어머님의 겨레가 저의 겨레요, 어머님의 하느님이 제 하느님이십니다."(룻 1,16)
룻은 이스라엘을 자기 겨레라,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자기 하느님이라 고백합니다.
혈연을 넘어 이스라엘 집안의 일원이 되는 것,
그리고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주인으로 받아들여 섬기고 사랑하는 것은 별개가 아니라 하나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정체성이 야훼 하느님에게서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영원히 신의를 지키시네."(화답송)
화답송은 위대한 창조주시면서 약자를 돌보시는 하느님의 신의를 노래합니다.
억눌린 이, 굷주린 이, 잡힌 이, 눈먼 이, 기가 꺽인 이, 이방인,
고아와 과부들은 하느님께서 특별히 마음을 기울여 보호하시는 이들입니다.
하느님은 그들 안에 현존하십니다.
복음에는 예수님을 시험하려는 율법 교사의 질문이 등장합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태 22,37)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테 22,39)
율법 중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인지 묻는 율법 학자의 질문에 예수님께서 답하십니다.
한두 명제를 책 한 권으로 풀어내는 것도 실력이지만,
무수한 조항들의 정수를 뽑아 한두 문장으로 표현하는 것 또한 그에 못지않은 탁월한 능력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모든 조항을 꿰뚫고 계셨으니까요. 그분이 곧 하느님의 말씀이시니 당연합니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마태 22,40)
율법의 다른 조항들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라,
이 두 말씀이 다른 모든 계명들의 골자라는 의미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따로 떼어놓을 수 없는, 모든 사람의 도리입니다.
하느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충실히 섬기는 이는 사람에게 해를 입힐 수 없습니다.
내 곁의 사람인 이웃과 형제가 바로 하느님의 모상이며 현존이기 때문입니다.
또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존중하는 이는 자신이 의식하건 의식하지 못하건
하느님의 마음을 나누어 받은 사람입니다.
생명을 부여받고 이 세상에 태어나 제 몫을 충실히 수행하며 삶을 완성해가는 이에게
하느님과 사람은 통째로 주어지는 선물이지 개별 옵션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사람은 마음과 목숨과 정신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가운데 완성을 향해 나아갑니다.
하느님께 드려야 할 사랑과 사람에게 베푸는 사랑이 조화를 이룰 때
우리는 비로소 존재적 통합에 들어섭니다.
이 두 사랑은 인격과 양심, 신앙이 무르익고 성숙해질수록 자연스레 균형과 질서를 이룹니다.
사랑하는 벗님!
하느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사람을 관대히 사랑하면서,
그 사랑에 충만히 머무르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오늘도 사랑으로 일상을 채워나가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현대인이 묵상을 못 하는 이유는 내가 요리를 못하는 이유와 같다.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 복음에서 율법 교사는 예수님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을 묻습니다.
율법은 613개뿐만 아니라 관습법까지 합치면 수만 가지가 넘었는데
예수님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율법의 ‘정신’이라고 대답하십니다.
많은 율법 가운데 ‘정신’이 되는 율법이 두 개만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사탄은 이것과 관련된 수많은 율법 조항이 생기게 만들어 정작 중요한 정신을 잃게 했습니다.
그리고 율법이 사람이 되신 사랑 자체이신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이는 범죄까지 저지르게 했습니다.
현 시대는 이런 사탄의 계략이 바뀌었을까요? 똑같습니다. 워낙 잘 먹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좋은 정보라도 그것이 소화되어 내 삶의 일부가 되지 않는다면 무용지물입니다.
사탄은 이것을 알아서 좋은 정보들이 소화되지 않도록 엄청나게 쏟아 붓습니다.
사람들은 정보만 수집할 뿐 그것의 정신을 뽑아내어 내 것으로 삼지 못합니다.
학습은 어떻게 이루어질까요? 음식을 먹는 것과 같습니다.
먹고 소화하고 배출하는 것처럼, 입력하고 이해하고 표출하는 것입니다.
배우고 익히고 시험 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정보만 입력하는 것을 공부라고 여기면 그 정보들은
결국 내가 생각 없이 살게 만드는 독이 됩니다.
묵상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우리 뇌의 앞부분을 이용하여 생각하는 작업입니다.
그런데 이 작업은 마치 소가 풀을 뜯고 되새김질을 하는 것처럼 오랜 시간이 필요합니다.
제가 요리를 못하는 것은 재주가 없어서가 아닐 것입니다. 해보지를 못했기 때문입니다.
굳이 요리하지 않아도 항상 남이 해 놓은 음식을 먹을 수 있어 실력을 쌓지 못한 것입니다.
지금 ‘묵상기도’가 되지 않는 이유는 이처럼 이미 정리된 정보들이 너무 많아서
굳이 생각하는 노고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에 가장 큰 일조를 하는 것이 ‘스마트폰’입니다.
스마트폰은 생각 없는 인간을 만들기에 가장 좋은 사탄의 도구입니다.
저는 현대의 ‘666’(그리스도의 적)이 ‘스마트폰’이라 생각합니다.
스마트폰은 정보를 소화할 시간을 주지 않기 위해 이미 정리된 정보를 홍수처럼 쏟아부어
사람이 전두엽을 사용할 시간을 주지 않습니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게 만드는 전두엽을 퇴화시켜버립니다.
예를 들어 아이가 게임을 한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러면 자기가 눈으로 보는 정보는 곧바로 후두엽으로 갑니다. 머리 뒤쪽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 정보가 나의 것이 되어 행동으로 표출이 되려면 전두엽으로 와서 분해되고 소화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럴 시간이 없습니다. 생각하면 늦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습득된 몸의 반응으로 바로 총을 쏘거나 총알을 피해야 합니다.
그렇게 ‘입력-숙고-표출’의 단계에서 ‘입력-표출’의 단계로 간소화되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영화를 본다고 가정해봅시다. 영화의 화면은 너무 빠릅니다.
그래서 한 화면의 내용을 깊이 숙고할 시간이 없습니다.
빨리 다음 화면의 정보를 입력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영화만 보고 산다면 머리가 텅 빈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유다인들이 그랬습니다. 너무 정보가 많아서 하나도 소화할 시간이 없었던 것입니다.
정신도 에너지입니다. 에너지가 여러 곳에 분산되면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야구를 할 때나 테니스를 칠 때 가장 많이들은 말은 “공을 끝까지 봐!”입니다.
보는 것이 어떻게 그 복잡한 동작의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끝까지 보지 않으면 헛스윙을 하거나 빗맞습니다.
지금까지 연습한 모든 것을 하나로 만들 수 있는 말은 “공을 끝까지 보자!”입니다.
이처럼 그것에 통달한 사람들은 거기에서 모든 것이 다 따라올 수 있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말 하나를 찾아내고 오직 그 생각만 합니다.
그렇게 내 전두엽의 작용으로 묵상이 된 것을 단순하게 가르칠 수 있을 때
비로소 그것이 나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뇌는 원래 멀티태스킹이 불가능하게 되어있기에
동시에 주의를 여러 곳으로 분산시킬 수는 없습니다.
멀티태스킹을 한다는 말은 빠르게 주의를 여기에서 저기로 옮긴다는 말과 같습니다.
이것을 반복하다 보면 이것에도, 저것에도 집중할 수 없습니다.
뇌도 다른 것에 할당한 주의를 하나로 끌어오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힘을 쓸 때, “하나, 둘, 셋!” 하는 것과 같습니다.
“셋!”에 힘을 줄 때까지 “하나, 둘!”의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따라서 일을 이것, 저것 분산해서 하는 것은 시간 낭비요, 에너지 낭비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사탄이 우리의 머리를 텅 비게 만들어
심지어 묵상도 하지 못하는 뇌로 만드는지 그 계략을 잘 파악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현대에 주의력을 가장 분산하게 만드는 것이 ‘스마트폰’입니다.
스마트폰은 사용하지 않고 옆에만 두어도 뇌가 힘들어합니다.
그것에 주의를 빼앗기지 않게 에너지를 쓰기 때문입니다.
마치 모기가 물지 않고 윙윙거리기만 해도 신경이 쓰이는 것과 같습니다.
스마트폰은 일할 때는 다른 방에 두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카톡에 답을 하는 것도 시간을 정해놓고 한꺼번에 하는 버릇을 들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생각 없이 살게 됩니다. 왜냐하면, 너무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스마트폰이나 게임, 유튜브 동영상 등을 많이 보면
많은 정보의 홍수 속에 파묻혀 정작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도 못 하는 그런 자녀를 탄생시키게 됩니다.
반면 책을 읽으면 한 주제에 오래 집중하게 만들기 때문에
전두엽이 활성화되어 생각하며 사는 사람이 됩니다.
사탄이 이 세상에서 생각 없이 인생을 허비하며 살게 만들기 위해 쓰는 가장 악랄한 방법이
정보의 홍수에 빠져 멀티태스킹 하며 살게 하는 것임을 잊지 맙시다.
힘들지만 책을 읽으며 천천히 그 주제를 묵상하는 연습을 합시다.
나의 묵상이 단순한 가르침으로 표출되지 않는 한 그 어떤 것도 나의 것이 아닙니다.
저는 수원교구 꾸르실료의 지도를 맡고 있습니다.
꾸르실료는 본래 온전한 교리도 모른 채 신앙생활을 하던
당시 스페인 교회를 바로잡으려는 운동이었습니다.
그래서 교육 안에는 교리를 가르치는 부분도 있습니다.
저는 그분들에게 이미 남이 써 놓은 강의를 그대로 외워서 하지 말고
자기 것으로 만든 다음에 강의를 해보라고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처음 반응은 ‘우리가 어떻게?’였습니다. 하지만 막상 해보니 다들 잘하셨습니다.
지금까지는 입력된 것만 그대로 반복하는 패턴이었다면
이제는 ‘묵상’이라는 것을 할 줄 알게 된 것입니다.
한 주제로 한 시간 이상 생각할 수 있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나의 체험과 연결될 수 있고 그것을 가르칠 수 있다면
그 율법이나 교리가 비로소 나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하면 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 수많은 정보의 공격들을 꼭 끊을 필요가 있습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