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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4 장 천하경영(天下經營)의 방법(方法)
①
"절... 기억하시나요? 오늘 새벽에 만화루에서 ㅂ었지요."
"......!"
느닷없는 방문객. 그것도 아름다운 여인이다.
"기녀 수월에게 물어서 공자님이 계신 곳을 알게 됐어요."
황보수선이었다.
마침 약방의 문을 닫아걸던 백육호였다. 황보수선의 방문을 받은 그는 당황을 금치 못했다.
"무슨 일로 이 누추한 곳까지......?"
"공자님께 드릴 말씀이 있어 찾아왔어요. 잠시 들어가도 좋을까요?"
황보수선은 맑은 눈으로 백육호를 빤히 바라보며 대담하게 말했다.
"아... 아니오. 워낙 누추한 곳이라... 이곳보다는 근처의 다원(茶院)이 좋을 것 같소."
몹시도 허둥대는 백육호였다.
황보수선의 흑백이 분명한 눈망울은 그런 백육호를 놓치지 않고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후 두 사람은 연인처럼 나란히 밤길을 걸었다. 육화탑을 끼고 도는 한적한 오솔길은 몹시 운치가 있었다. 월광이 두 사람을 은은히 비추고 있었다.
"공자님의 성함은 무척 특이한 것 같더군요?"
"그건... 선친께서 유별나신 분이셨소이다."
"아! 그럼 작고하셨나요?"
황보수선의 음성이 한층 낭랑해졌다.
"예, 오래 전에 운명하셨소이다. 모친도 소생이 어릴 적에 타계했지요."
모친에 관한 것만큼은 사실이었다. 백육호는 어머니의 사랑을 받아본 것은 고사하고 그녀의 얼굴조차 기억에 남아있지 않았다.
"가슴 아픈 일이군요. 제가 공연한 것을 물었어요."
"아니오. 워낙 오래 전 일이라 이젠 담담할 뿐이오. 그런데 소저께서는......?"
"참, 아직 제 소개도 하지 않았네요. 전 황보세가 출신으로 황보수선이라 해요."
쿵!
백육호의 심장에서 북소리가 울리는 듯했다. 그는 눈썹을 부르르 떨며 내심 중얼거렸다.
'역시... 그랬었군. 그래서... 이 여인을 보는 순간 그렇게... 당황했었어.'
쇠뭉치로 한 대 얻어맞은 듯한 충격 속에서 백육호는 심란한 눈길을 허공으로 돌려버렸다.
"왜 그러시나요? 혹... 언제 절 보신 적이라도 있나요?"
황보수선은 고운 얼굴에 의혹의 빛을 띠며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아... 아니오. 나 같은 위인이 그럴 기회가 있었겠소? 더구나 무림세가의 금지옥엽을 어찌 감히? 다만 고귀한 소저께서 갑자기 나 같은 놈을 찾아와 좀... 당황했을 뿐이오."
늦은 시간의 다원은 한산했다.
백육호를 알아본 다원 주인의 깍듯한 안내로 두 남녀는 이층의 전망좋은 자리에 마주 앉았다.
향기로운 김이 오르는 우슬차(牛膝茶)를 찻잔째 두 손으로 감싸쥐고 한 모금 맛을 본 황보수선이 낮게 탄성을 발했다.
"아! 정말 좋은 차예요. 우슬차는 이곳 항주에서만 맛볼 수 있는 건가요?"
"우슬차를 내놓는 곳은 많으나 유독 이곳의 우슬차는 특별하지요. 주인장에게 특별히 제조법을 알려 주었지요."
황보수선은 탄복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어쩜 공자님은 의술뿐 아니라 다도(茶道)에도 밝으시군요?"
"과찬이시오. 내게 의술을 전해준 스승께서 워낙 우슬차를 즐기셔서 소생은 어깨너머로 배웠을 뿐이오."
황보수선은 커다란 눈으로 백육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아련한 그리움 같은 것이 안개처럼 어려 있었다. 백육호는 잠시 그녀의 눈을 마주 보다가 그만 시선을 돌려버리고 말았다.
"공자님의 성(姓)은 정말 백씨(百氏)인가요?"
백육호는 흠칫했다.
"그럼... 소생이 거짓 성씨를 쓸 이유라도 있단 말이오?"
백육호는 짐짓 반박했으나 어색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의 뇌리에 육노인이 평소에 윽박질렀던 말이 떠올랐다.
'이놈아, 거짓말을 하려면 사람의 눈을 똑바로 보지 마라! 네놈의 어설픈 표정을 보고 누가 속아넘어 가겠느냐!'
'그렇소. 그건 나도 동감이오.'
백육호는 낮게 한숨을 쉬었다.
황보수선의 눈이 반짝 빛났다. 그러나 백육호는 그것을 알지 못했다.
"별 의미가 있어 여쭌 것은 아니에요. 다만 특이한 성이라 혹시나 해서 여쭌 거예요."
황보수선은 찻잔을 섬섬옥수로 받쳐들고 한 모금 마셨다. 그런 그녀의 자태는 너무나 아름다웠다. 더구나 창문을 통해 흘러드는 교교한 달빛으로 인해 그녀의 모습은 마치 선녀가 잠시 속세로 하강한 듯 싶었다.
백육호는 목이 탔다.
이럴 때는 우슬차가 아니라 독한 술을 한 잔 마시고 싶어진다. 그러나 찻집에서 술을 찾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그는 그 침묵을 참아내기가 힘들었다.
다행히 황보수선이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공자님을 찾아온 것은 다름이 아니라 어머님의 병환에 대해 상의 드리고 싶어서랍니다."
백육호는 고개를 들었다.
"자당께서 환우 중이신가요?"
"예, 십 년 전 심적인 타격을 받으신 후로 병을 얻어 자리보전하게 되셨답니다."
백육호는 진지한 표정으로 귀를 기울였다.
"처음에는 충격에서 벗어나면 곧 회복되리라 했는데 도리어 날이 갈수록 그 정도가 심해졌어요. 이제는 실어증(失語症)으로 하루 종일 한 말씀도 하시지 않게 됐어요. 그동안 부친께서는 천하의 명의란 명의는 모두 모셔와 진맥을 시켜 보았으나 아무런 효험도 보지 못했어요. 물론 사해팔황(四海八荒)에서 구해온 온갖 진귀한 약재들도 소용없었어요. 이제는... 가족들마저 알아보지 못하고 하루 종일 누워만 계시니 답답한 노릇이에요."
"......."
"그러던 중 오늘 새벽 공자님이 남궁소협을 회생시키는 것을 보고 부랴부랴 찾아왔어요. 공자님, 제 어머님을 구해주세요. 아마 이 상태라면 어머님은 석달을 넘기시기 힘들 것 같아요."
황보수선의 음성은 촉촉히 젖어있었다.
백육호는 난감했다. 그는 더욱 술이 마시고 싶었다. 마침내 그는 점원을 불렀다.
"이곳에서 술을 팔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지만 꼭 한 잔 마시고 싶으니 주인장께 말씀드려 주겠소?"
점원은 군말 없이 사라지더니 잠시 후 술은 물론 간단한 안주까지 챙겨들고 돌아왔다.
"주인어른께서 얼마든지 술을 드시라고 하셨습니다."
"고맙다고 전해주게."
백육호는 병째로 벌컥벌컥 술을 들이켰다.
"......."
황보수선은 그런 백육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백육호의 얼굴에는 그늘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제가 너무 무리한 부탁을 드린 것 같군요."
"아니오......."
두 병째 술병을 잡아가던 백육호의 손이 허공을 저었다.
"소저, 내가 고칠 수 있는 병이라면 당연히 보아드려야 마땅한 일이오."
황보수선은 소리라도 지를 듯이 기뻐했다.
"그럼, 저와 함께 무한(武漢)으로 가시겠어요?"
"소저께서 먼저 가시오. 난 이곳 일을 정리한 후 곧 출발하겠소."
"저희... 집을 알고 있나요?"
"아, 그건... 천하의 황보세가를 찾아가는 것이 어렵겠소이까?"
백육호는 재빨리 술병을 입에 처박았다. 황보수선의 얼굴에는 잔잔한 미소가 떠올랐다.
②
구천마교와 사사련은 무림군왕성을 주축으로 하는 백도세력과 끝까지 싸우겠노라 천명했다.
뒤이어 그들은 천하에 산재한 흑도의 방파들을 통합하여 삽시에 삼만이 넘는 거대한 연합세력을 구축하는데 성공했다.
백도에서도 새로운 움직임이 일어났다.
소림과 무당을 중심으로 명문대파가 결맹을 한 것이다. 그들은 십정회(十正會)라 일컬어졌다.
십정회는 수 차례 무림군왕성과 백도의 대동단결을 도모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무림군왕성은 십정회를 인정하지 않고 자신들만이 유아독존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한 것이다.
결국 백도무림은 양분되고 말았다.
그에 비하면 구천마교와 사사련이 손을 잡고 결성한 흑도연합은 일사불란한 전열을 마쳤으며 무림의 백년흥망이 달린 대회전을 차질없이 준비해 나가고 있었다.
이렇게 되자 흑백(黑白) 어느 쪽에도 기울지 않았던 강호의 제파들은 은연중 흑도연합 쪽에 승산을 두게 되었다. 아무래도 분열된 백도무림의 힘이 흑도연합에 미치지 못한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하루가 다르게 무림상황은 급박하게 진행되었다.
③
남궁청운은 치를 떨었다.
만화루에서의 고초는 그의 생애에 큰 오점(汚點)을 남겼다.
그는 지금까지 단 한 번의 좌절도 없이 승승장구해왔다. 그런데 만화루의 참패로 인해 자존심이 여지없이 구겨지고 만 것이다.
더구나 태자당의 인원은 고작 팔 명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결국 태자당은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되버린 것이다.
"운아(雲兒), 시간이 없다. 더 이상 머뭇거리다가는 백도무림을 놈들에게 고스란히 넘겨주게 될 지도 모른다."
무림군왕성주 남궁혁의 얼굴에는 우려의 빛이 역력히 나타나 있었다.
군왕성의 후원에 위치한 잠풍각(潛風閣).
남궁청운은 여전히 고집을 꺾지 않고 있었다. 지금 그곳에는 그들 부자 외에도 남궁소연과 총관인 신산(神算) 소손방이 두 시진이 넘도록 숙의를 거듭하고 있었다.
"아버님, 백도무림을 양분시킨 것은 십정회입니다. 대다수 백도인들은 본성의 뜻을 따르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분란을 일으킨 십정회와 굳이 손을 잡을 필요가 어디 있단 말입니까?"
남궁청운은 부친의 설득에 한 치의 양보도 하지 않았다. 남궁혁은 그를 타일렀다.
"운아, 상황을 똑바로 보아야 한다. 무림개사 이래 흑도의 무리들이 오늘날처럼 단결을 보인 적이 없었다. 그들의 힘은 본성의 힘만으로는 당할 수가 없다. 더구나 십정회가 탄생한 후 속속 백도인들이 본성에서 이탈해 가고 있다. 이것은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니다."
그렇다.
본래 무림군왕성의 영향권에 들어있던 백도제파들 가운데 여러 방파들이 이탈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사천의 명문인 신도문은 공공연히 십정회에 동참한다고 선언하기까지 했다.
그것은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키고 있었다.
"물론 소자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일시적으로 상황이 안 좋다고 본성이 십정회와 손을 잡는다면 향후 이보다 더한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세세만년 무림을 이끌어가야 할 본성의 위신은 땅에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남궁혁은 혀를 찼다.
"허허! 운아야, 당장 감당할 수 없는 겁란이 코앞에 이르렀거늘 너는 어찌 자존심만 내세우려 하느냐? 먼저 흑도의 기세를 꺾은 후 논의해도 될 일이 아니냐?"
남궁혁은 마침내 언성을 높였다. 평소 남궁청운의 도도한 성품과 타협을 모르는 고집에 대해 잘 알고 있었으나 때가 때인 만큼 이번만은 그대로 넘어갈 일이 아닌 것 같았다.
'허! 내 운아를 잘못 키웠구나. 그저 야심만으로 뭉친 편협한 인간이 되버렸지 않은가?'
남궁혁은 거인(巨人)이었다.
그가 무림군왕성을 불멸의 문파로 키운 것은 무공도 무공이려니와 대인다운 풍도와 포용력이 크게 작용했다. 그는 남궁청운이 계속 고집을 부리자 가슴이 답답해졌다.
"총관의 생각은 어떤가?"
그는 고개를 돌려 소손방에게 물었다. 소손방은 깊이 고개를 숙였다.
"소인도 소성주님의 의견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십정회에 속한 자들이 어떤 자들입니까? 본성이 수많은 동지들을 희생시켜가며 무림평화를 위해 뜨거운 피를 흘릴 때 그들은 뒷전에서 방관하며 헐뜯던 자들입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본성에 반기를 들다니... 속하의 생각 같아서는 도리어 그들부터 응징하고 싶습니다."
한쪽 눈을 검은 안대로 가린 소손방의 음성에는 분노가 서려 있었다.
남궁혁은 의아한 느낌이 들었다.
'알 수 없는 일이야. 남궁세가를 일으켰고 본성의 창건에서 오늘날까지 모든 대소사가 총관의 신산지계(神算之計)에서 비롯되었거늘.... 늘 냉정하고 침착했던 총관이 어찌하여 최근 들어 갑자기 과격한 행동을 일삼고 심지어는 부화뇌동(附和雷同)하는 모습을 보인단 말인가?'
남궁혁은 눈을 가늘게 하며 가라앉은 음성으로 물었다.
"총관, 설마 그럴 생각은 아니겠지?"
소손방은 외눈에 번쩍 살기를 드러냈다.
"성주님, 소인이 언제 복안없이 나선 적이 있었습니까?"
남궁혁은 어이가 없었다.
"그래? 그럼 어디 총관의 복안을 들어볼까?"
평소의 남궁혁이라면 소손방이 하는 말은 무엇이든 신뢰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그렇지가 못했다. 그는 소손방이야말로 화약(火藥)과 같다는 느낌이 들곤 했다. 그는 과거의 소손방이 아닌 듯했다.
"먼저 본성을 배반하려는 무리들을 단속해야 합니다. 더 이상의 이탈자가 나타난다면 본성이 와해되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흠, 그래서?"
소손방은 외눈으로 힐끗 남궁청운을 일별한 후 차갑게 말했다.
"당금 무림에서 흑백을 불문하고 존경을 받는 인물은 황보세가입니다. 만일 신주수사 황보일학마저 십정회와 손잡는다면 본성은 명분이 급격히 퇴색하고 맙니다. 뿐만 아니라 신주수사의 의제(義弟)인 검존이 이끄는 철검장(鐵劍莊)마저 십정회에 가담할 것이 불을 보듯 뻔합니다. 그렇게 되면 눈치만 보고 있던 다른 문파들도 다투어 십정회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권력에 민감한 만금대인도 등을 돌릴 것이 분명합니다. 그것은 곧 본성의 붕괴를 뜻하는 것입니다."
"......!"
남궁혁의 안색이 침중해졌다. 분명 소손방은 무림정세를 읽는 눈이 정확했다. 오죽하면 그의 별호가 신산(神算)이겠는가!
유화적(宥和的)으로 매사를 처리하는 것을 선호하는 남궁혁이었으나 그의 정세분석에는 절로 고개가 끄덕여질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의 마음도 편치는 않았다.
천신만고 끝에 천하제일가(天下第一家)를 만들어낸 그였다. 지금 와서 모든 것을 버린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으음. 자네의 판단이 정확하네. 그럼 대책도 생각해 두었을 테지. 그건 무엇인가?"
"일단 가장 중요한 변수인 황보세가를 확실히 붙잡아두는 방법이 있습니다."
"오! 그게 무엇인가?"
남궁청운은 반색을 하며 물었다.
"간단합니다. 바로 두 가문이 사돈을 맺는 것입니다."
"사돈? 그럼... 운아와 수선이가 부부지연을 맺게 하자는 건가?"
남궁혁은 놀라 눈을 크게 뜨며 반문했다.
이때 묵묵히 듣고만 있던 남궁청운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미 소손방과 사전논의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렇습니다. 마침 소성주님도 벽월선자 황보수선 낭자에 대해 호감을 갖고 계시니 문제가 될 것은 없습니다. 게다가 황보낭자의 무예도 용봉칠영에 들 정도로 출중하니 이를 두고 일석이조, 아니 일석삼조라 할 것입니다. 물론 철검장을 위시한 다른 방파들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끼치지 않겠습니까? 후후후......."
왠지 음침하게 느껴지는 소손방의 웃음소리가 방안 공기를 흔들었다.
"안돼요! 그건."
이때 내내 입을 다물고 있던 남궁소연이 느닷없이 반대하고 나섰다.
"안되다니? 그게 무슨 소리냐?"
남궁청운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었다.
"수선언니에게는 이미 정인이 있어요. 그것도 아주 오래된......."
"하하하! 비천검 철무영 말이냐? 나도 알고 있다. 그러나 두 집안 사이에 친교가 두텁다고는 하나 그자는 황보소저의 마음을 완전히 얻지는 못했다."
남궁소연은 딱하다는 듯이 말했다.
"철공자가 아니에요. 수선언니의 마음속에 있는 정인은 철공자도 알고 있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철공자도 적극적으로 언니에게 구애하지 못하고 있는 거예요."
"뭣이?"
남궁청운의 안색이 험하게 변했다.
"그자가 누구냐?"
"그건 나도 몰라요. 하지만 내가 한 말은 모두 사실이에요. 직접 언니에게서 들었으니까요."
"......!"
남궁청운은 적지 않은 충격을 받은 듯했다. 그러나 곧 가슴을 펴며 말했다.
"좋다. 네 말이 사실이라 해도 난 그녀를 아내로 맞이할 것이다. 그것은 결코 사사로운 일이 아니라 무림을 위한 대사(大事)이기 때문이다."
남궁소연은 입술을 삐죽였다.
"오라버니는 지금 억지를 쓰는 거예요. 무림을 앞세워 언니에게 강제로 구애에 응하도록 하려는 거예요. 안 그래요?"
"시끄럽다! 네가 뭘 안다고 나서는 거냐?"
남궁청운은 노갈을 터뜨렸다. 남궁소연은 그만 입술을 깨물며 시선을 돌려버렸다.
"그만 두거라. 이유야 어쨌든 벽월선자는 무림에서 첫손 꼽히는 명문의 규수다. 운아가 그 아이를 마음에 두고 있다면 나 역시도 기쁜 일이다. 다만 그 아이에게 오랫동안 연정을 쌓아온 정인이 있다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좀더 명확히 알아볼 일이다."
남궁청운은 깊이 고개를 숙였다.
"아버님, 이번 일만큼은 아버님께서 힘을 써 주셔야겠습니다. 혼례는 인륜지대사인데 설마 모른 척하시지는 않겠지요?"
남궁혁은 너털웃음을 흘렸다.
"허허! 네가 애비에게 도움을 청한 것이 얼마만이더냐?"
남궁혁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오냐, 아들의 혼사에 애비가 나서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냐? 내일이라도 황보가주를 만나 의중을 떠보도록 하겠다. 황보가주도 애비의 청혼을 소홀히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감사합니다. 아버님."
비로소 환한 미소를 띠우는 남궁청운이었다.
반면 남궁소연은 어깨를 늘어뜨렸다. 황보일학의 평소 성품으로 볼 때 무림군왕성주의 청혼을 뿌리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황보수선이 겪어야 할 고통은 같은 여인의 입장에서 안타깝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아무리 재색을 겸비한 수선언니라 해도 부친의 명을 거역할 수는 없을 거야. 아! 여인이란 결국 천하를 경영하는 남자들의 손에 달려있는 것이란 말인가?'
남궁소연은 공연히 비참한 기분이 들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버님, 소녀는 그만 가보겠어요."
남궁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기실 태자당의 일원이자 용봉칠영에 속하는 딸이었으나 아무래도 이번 일에는 별 소용이 닿지 않는 것 같았다. 그는 남궁소연이 사라지기를 기다려 소손방에게 물었다.
"그래, 다음의 비책은 또 무엇인가?"
"당금 무림의 형세는 적어도 삼 개월 이상은 유지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그동안 각 세력간에는 이익과 여러 가지 상관관계로 인해 몇 차례 이합집산(離合集散)과 합종연횡(合從連橫)이 일어날 것으로 사료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조직 못지않게 수많은 자금이 소요됩니다."
"흐음, 그래서?"
"성주님께서는 황보세가와 함께 천하상계의 거목인 만금대인을 반드시 묶어둬야 할 것입니다. 흑도의 무리들은 필요한 자금을 얼마든지 약탈로 보충할 수 있지만 본성이나 십정회는 그렇지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남궁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맞는 말일세. 그렇다면 만금대인은 또 어떤 방법으로 묶어둔단 말인가?"
"똑같은 방법입니다. 오직 혈연(血緣)만이 안심하고 그를 묶어둘 수 있습니다."
"혈연?"
"그렇습니다. 마침 만금대인의 장자인 옥선공자가 소연아씨에게 연정을 품고 있다고 하니 이것이야말로 하늘의 뜻이 본성에 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남궁혁은 흠칫 놀랐다. 그는 남궁청운을 똑바로 주시하며 물었다.
"운아, 그게 사실이냐?"
"그렇습니다. 호사붕은 이미 오래 전부터 소연을 열렬히 사모하고 있습니다. 저에게도 수 차례 도와달라는 말을 했을 정도입니다. 소자의 생각도 총관과 같습니다. 기왕 이렇게 된 바에야 소자와 황보낭자, 소연과 호사붕의 혼례를 한꺼번에 치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남궁혁은 너털웃음을 쳤다.
"허허허! 공동혼례를 치른단 말이냐? 그렇게는 할 수 없다. 엄연히 혼례에는 따라야 할 법도가 있거늘, 최소한의 시차라도 두고 성대한 혼례를 치뤄야 할 것이다. 그건 우리 가문의 예법이기도 하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남궁혁은 기분이 좋아졌다. 처음에는 남궁청운과 총관 소손방의 주장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으나 그들의 설명을 듣는 동안 그의 생각이 바뀌게 되었다.
어쨌든 그도 인간이었다.
피땀 흘려 이룩한 무림군왕성의 지위를 지킬 수만 있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두 사람의 뜻대로만 된다면 십정회도 어쩔 수 없이 대세에 이끌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화제를 돌렸다.
"총관, 그 일은 그렇다치고 흑도연합에 비해 본성의 세력이 현재 열세에 놓여있지 않은가?"
소손방은 외눈을 번쩍이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일거에 우위에 설 수 있는 방안이 있습니다."
"뭣이? 그래, 어떤 방안인가?"
남궁혁은 침을 삼켰다.
"당금 무림은 크게 삼분(三分)되어 있습니다. 백도와 흑도, 그리고 오랫동안 하오문으로 분류되어 주목을 끌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가장 많은 인원과 방대한 조직을 지니고 있는 녹림(綠林)이 있습니다."
남궁혁은 눈을 부릅떴다.
"아니? 녹림과 손을 잡으란 말인가?"
그는 마땅치 않은 표정을 지었다. 녹림은 이른바 도적들의 무리가 아닌가? 무림군왕성이 어찌 도적의 무리들과 손을 잡는단 말인가? 그것은 그의 자존심이 허락치 않는 일이었다.
"녹림은 현재 한 걸출한 인물에 의해 일통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그들의 힘은 과거와 다릅니다. 흑도연합에 비해도 조금도 밀리지 않을 정도입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소손방은 틈을 주지 않고 얘기했다.
"다만 그들은 명문출신이 아니기 때문에 열등감을 지니고 있습니다. 만일 그들에게 무림을 평정한 후 떳떳이 강호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 정식 문파의 호칭과 더불어 신분을 보장한다는 밀약을 해준다면 반드시 우리편에 설 것입니다. 자칫 흑도연합 쪽에서 먼저 그들에게 선수를 친다면 우리로서는 양면에 적을 맞이하는 셈이 되고 맙니다."
"으으음!"
남궁혁은 신음을 흘렸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그도 오래 전부터 녹림이 무시할 수 없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다만 대의명분을 내세워 살아온 일생이었다. 아무리 힘들다 해도 한낱 도적무리들에게 손을 잡자고 할 정도로 낯이 두껍지가 못했던 것이다.
"아버님,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방금 전 아버님께서 말씀하셨듯이 무엇보다 우선해야 할 것은 무림평화를 구축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설혹 녹림과의 연합을 취한다 해도 본래의 목적이 순수하다면 우리를 비난할 자는 없을 것입니다. 또한... 무림평화가 달성된 후에 녹림과의 밀약을 없었던 일로 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뭣이? 파약(破約)을 하란 말이냐?"
남궁청운은 눈을 부릅떴다. 평생을 광명정대하게 살아온 그였다. 신의(信義)를 목숨보다 중히 여기는 그에게 아들의 거침없는 말은 충격이었다.
'이... 이 녀석은 패도(覇道)의 길을 가기로 작정했단 말인가? 내게 어찌하여 이런 자식이 태어났단 말인가?'
그는 눈을 지그시 감아버렸다. 잠시 후 그는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운아야, 녹림에 관한 것은 총관과 상의하여 진행하도록 하거라. 이번 일에 애비는 관여하지 않겠다."
남궁청운의 얼굴에 기쁨의 빛이 떠올랐다.
"알겠습니다. 아버님은 심려 마십시오. 그저 소자와 소연의 혼례에 신경써 주시면 됩니다. 머지않아 좋은 소식을 보고 드리겠습니다. 안 그렇소? 총관?"
"후후후! 물론입니다. 소성주님."
남궁청운과 소손방은 손발이 척척 맞아 들어가는 것 같았다. 잠시 후 그들은 예를 취한 후 물러갔다.
그런데 그들이 회랑을 걸어가며 주고받는 대화가 남궁혁의 귓전으로 들어왔다.
"소성주님, 이제부터 천하경영은 소성주님께서 직접 관장하셔야겠습니다. 소인이 충심으로 보필하겠습니다."
"고맙소, 총관. 사실 따지고 보면 오늘날의 곤경은 아버님의 우유부단함으로 인한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오. 나는 결코 아버님과 같은 전철을 밟지는 않을 것이오."
"물론 그러셔야지요. 후후......."
남궁혁은 몸을 일으켜 창가로 다가갔다. 창문을 열자 한 조각 편월(片月)이 눈에 들어왔다.
'얼마 전 만월이던 것이 저리도 작아졌구나.... 하지만 머지않아 다시 풍성함을 되찾겠지. 이것이야말로 만고의 진리거늘.... 어찌하여 너는 그것을 모른단 말이냐? 운아야.......'
남궁혁의 얼굴에는 고뇌의 빛이 떠올랐다. 잠시 후 그는 입술을 달싹였다.
"흑야혼((黑夜魂), 있느냐?"
"네! 주군."
어디선가 무심한 음성이 들려왔다.
"네가 할 일이 생겼다."
"하명하십시오."
남궁혁은 입술을 움직였다. 그는 전음입밀로 몇 가지 지시를 내렸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
즐독입니다
즐감요~~
잘~감상~~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
감사...
즐~감하고 갑니다.
잘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백육호 가 정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