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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드일까요? 거북이는 멈추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느려도 꾸준히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갔습니다. 수행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루에 10시간 앉다가 지쳐서 그만두는 것보다 매일 10분씩 평생하는 것이 낫습니다. 작은 물방울이 모여 큰 바다를 이룹니다. 작은 실천이 모여 큰 깨달음을 이룹니다. 이무소 듣고 얻을 것이 없다는 이 진리를 일상에서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요? 간단합니다. 매 순간 기대를 내려놓는 것입니다. 아침에 눈을 뜰 때 오늘은 좋은 일이 있을 거야라는 기대를 내려놓으십시오. 일을 시작할 때 이번에는 성공해야 해라는 집착을 내려놓으십시오. 사람을 만날 때 이 사람이 나를 이해해줬으면 하는 욕구를 내려놓으십시오. 기대가 없으면 실망도 없습니다. 집착이 없으면 좌절도 없습니다. 욕구가 없으면 결핍도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무감각하게 살라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더욱 생생하게 느끼라는 것입니다. 기대라는 필터 없이 있는 그대로 경험하라는 것입니다. 비가 올 때 비가 오면 안 되는데라고 저항하지 마십시오. 그냥 비를 느끼십시오. 빗방울이 피부에 닿는 감촉 비 냄새 빗소리 판단 없이 경험하십시오. 이것이 수용입니다. 재미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좋다 나쁘다 판단하지 않고 그저 경험하는 것입니다. 수용한다고 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비가 오면 우산을 쓰면 됩니다. 하지만 우산을 쓰면서도 비에 화내지 않습니다. 행동과 감정을 분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의 정수입니다. 행동하되 집착하지 않고 경험하되 매달리지 않습니다. 물처럼 흐르고 바람처럼 지나갑니다. 물은 어떤 그릇에 담기든 그 모양이 됩니다. 네모난 그릇에 담으면 네모가 되고 둥근 그릇에 담으면 둥그러집니다. 하지만 물 자체는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유연할 수 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적응하되 본질은 지킵니다. 형식은 바뀌어도 중심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대나무를 보십시오. 바람에 휘어지지만 부러지지 않습니다. 속이 비어 있기 때문입니다. 비어 있기에 강합니다. 노자는 말했습니다. 최상에서는 물과 같다.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되 다투지 않고 모든 사람이 싫어하는 낮은 곳에 머문다. 물의 겸손함 물의 유연함 물의 무의자연 이것이 도의 본성입니다. 얻으려 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저절로 옵니다. 강요하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이루어집니다. 애쓰지 않으면 노력 없이 성취됩니다. 정원산은 나무가 자라도록 애쓰지 않습니다. 그냥 물을 주고 햇빛이 들게 하고 해충을 막아줄 뿐입니다. 나무는 스스로 자랍니다. 정원산은 다만 조건을 만들어 줄 뿐입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깨달음을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다만 깨달음이 드러날 수 있는 조건을 만들 뿐입니다. 마음을 비우고 집착을 내려놓고 분별심을 놓습니다. 그러면 본래의 청정한 마음이 저절로 드러납니다. 구름이 거치면 달이 보이듯 번내가 사라지면 지혜가 드러납니다. 이무소 듣고 이 3 글자를 가슴에 새기십시오. 얻을 것이 없다. 이 진리를 깊이 새기십시오. 그러면 당신은 자유로워집니다. 성공의 압박에서 자유롭고 실패의 두려움에서 자유롭습니다. 다른 사람의 평가에서 자유롭고 자신의 기대해서도 자유롭습니다. 새는 날개가 있어서 나는 것이 아닙니다. 집착이 없어서 납니다. 땅을 붙잡고 있으면 아무리 날개가 있어도 날 수 없습니다. 당신도 날 수 있습니다. 집착을 놓으면 날개가 펼쳐집니다. 무거운 짐을 내려놓으면 가벼워집니다. 법정 스님의 씨가 생각납니다. 텅 비워라. 그러면 채워진다. 낮추어라. 그러면 높 가십시오. 아무것도 얻으려 하지 말고 아무것도 버리려 하지 마십시오. 있는 그대로 지금 이 순간에 온전히 경험하십시오. 그것이 바로 깨달음입니다. 특별한 경험이 아니라 평범한 순간입니다. 신비한 죽음이 아닐까 단순한 이 호흡입니다. 이무소 듣고 얻을 것이 없기에 당신은 자유롭습니다. 잃을 것이 없기에 당신은 두려움이 없습니다. 될 것이 없기에 당신은 이미 완전합니다. 이것을 깊이 새기고 매 순간 기억하십시오. 걸을 때 앉을 때 일할 때 쉴 때 항상 이 진리와 함께하십시오. 그러면 어느 순간 당신은 알게 될 것입니다. 수행과 깨달음이 둘이 아니라 하나임을 범부와 부처가 둘이 아니라 하나임을 생사와 열망이 둘이 아니라 하나임을 모든 것이 하나입니다. 하나도 아닙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 무엇 하지만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그 진리 바로 지금 여기에 있습니다. 당신의 다음 호흡 속에 당신의 다음 발걸음 속에 당신의 다음 순간 속에 무소득의 길을 걸으십시오. 얻으려 하지 않는 그 길에서 당신은 모든 것을 얻을 것입니다. 도착하려 하지 않는 그 여정에서 당신은 이미 도착해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지금 어디에 계신가요? 피 안에 계신가요? 고통에 이쪽 언덕에 계신가요? 아니면 깨달음의 저쪽 언덕에 계신가요? 우리는 평생을 강을 건너려 애씁니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무명에서 깨달음으로 유뇌에서 열반으로 하지만 반야심경의 마지막 진언은 우리에게 놀라운 진리를 말해줍니다. 아재아재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봐. 가자 가자. 피아노로 가자. 함께 피한으로 가자. 깨달음이여 이루어지이다. 이 신비로운 주문 속에 모든 수행의 완성이 담겨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으신 그날 새벽의 일입니다. 마지막 선정에서 깨어나신 부처님께서는 동쪽 하늘의 샛별을 보시고 감탄하셨습니다. 기이하고도 기이하다. 모든 중생이 여의 지혜와 덕상을 갖추고 있건만. 다만 망상과 집착으로 인해 깨닫지 못하는구나. 모든 존재가 이미 부처라는 선언입니다. 갈 곳이 없습니다. 이미 도착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깨닫지 못하면 여전히 길을 가야 합니다. 이것이 불교의 아름다운 역설입니다. 이미 도착해 있지만 그것을 모르기에 여행을 떠납니다. 이미 부처이지만 그것을 잊었기에 수행합니다. 원래 자리로 돌아가는 여정 그것이 바로 수행의 길입니다. 아제아제 가자 가자. 이 첫 구절은 수행의 시작을 알립니다. 멈춰 있지 말고 주저하지 말고 지금 바로 걸음을 내딛으라는 것입니다. 찰리 길도 한 걸음부터입니다. 아무리 먼 길이라도 첫걸음을 내딛지 않으면 영원히 도착할 수 없습니다. 어느 수행자가 조주 스님께 물었습니다. 어떤 것이 도입니까? 조주 스님께서 답하셨습니다. 평상시 돈이라 그렇다면 어디로 향해야 합니까? 향하려는 순간 이미 어긋나느니라. 돈은 어디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지금 여기 평범한 이 마음이 도입니다. 하지만 깨닫지 못했을 때는 가야 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갈 곳이 없다는 것을 깨닫기 위해 우리는 긴 여정을 떠나야 합니다. 집을 떠나 세상을 떠돌다가 결국 집으로 돌아옵니다. 하지만 돌아온 집은 예전의 집이 아닙니다. 집은 그대로인데 보는 눈이 달라진 것입니다. 탕자의 비유가 있습니다. 부잣집 아들이 집을 나가 박랑했습니다. 온갖 고생을 다하며 거지가 되어 돌아왔을 때 자기 집 앞에 서 있었습니다. 하지만 너무 초라해져서 감히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알아보았지만 아들이 놀랄까 봐 천천히 다가갔습니다. 먼저 하인으로 들어오게 하고 점차 신뢰를 쌓아가며 마침내 아드림을 밝혔습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본래 부처의 자식이지만 그것을 잊고 헤매고 있습니다. 세상을 떠돌며 온갖 고통을 겪지만 사실은 항상 아버지의 집 근처에 있었습니다. 깨달음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가 알아보지 못할 뿐입니다. 바라재 피아노로 가자. 두 번째 구절은 방향을 가리킵니다. 차 안에서 피안으로 이쪽에서 저쪽으로 하지만 진정한 피아는 어디에 있을까요? 대에 스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생사가 바로 열반이요. 번뇌가 바로 보리니라. 생사와 열반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번뇌와 깨달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차안과 피안도 마찬가지입니다. 둘이 아닙니다. 강을 건너려고 애쓰지만 사실 강은 없습니다. 있다고 생각하기에 강이 보일 뿐입니다. 파도를 보고 바다를 잊어버린 것과 같습니다. 파도와 바다가 따로 있습니까? 파도는 바다이고 바다가 파도입니다. 생별과 불멸도 그렇습니다.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이 곧 생멸하지 않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생멸하는 현상 너머에 생멸하지 않는 본질이 있기 때문입니다. 금강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일체요의법 염옹한 포영 여러 역여전 응작여시관 모든 유의법은 꿈과 환상 같고 물거품 같으며 그림자 같고 이슬 같으며 번개 같으니 마땅히 이와 같이 관찰해야 한다. 무상한 것을 무상하다고 보는 것 그것이 바로 피아입니다. 무산한 것을 영원하다고 착각하면 고통입니다. 무상한 것을 무상하다고 알면 자유입니다. 같은 현상을 보는데 보는 마음이 다릅니다. 창과 피하는 차이는 바로 이 마음의 차이입니다. 원효 대사께서 해골물을 마시고 깨달으셨을 때 이렇게 외치셨습니다. 삼기유신 만범유식 세 가지 세계가 오직 마음이요. 모든 법이 오직 인식이다. 세상이 변한 것이 아니라 마음이 변한 것입니다. 마음이 정화되면 세상이 정토가 됩니다. 정토는 서방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깨끗하면 이 땅이 곧 정토입니다. 유마경에서 부처님께서 발을 디드시자 이사바 세계가 보배 장엄으로 가득 찬 정토로 변했습니다. 세계가 변한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의 청정한 마음으로 보니 원래 정토였던 것이 드러난 것입니다. 바라순환책 함께 피안으로 가자. 세 번째 구절은 함께함을 말합니다. 혼자 가는 길이 아니라 모두 함께 가는 길입니다. 이것이 대승불교의 정신입니다. 나만 깨달으면 그만이 아니라 모든 존재와 함께 깨달아야 합니다. 도살의 서원이 그렇습니다. 중생이 다 제도되기 전에는 나도 성불하지 않으리라. 자비의 극치입니다. 자신의 해탈을 미루고 중생을 먼저 구제하겠다는 원력입니다. 하지만 여기에도 깊은 지혜가 숨어 있습니다. 나와 남이 따로 있으니까 중생과 부처가 따로 있습니까? 모두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반 존재의 고통은 모든 존재의 고통이고 한 존재의 기쁨은 모든 존재의 기쁨입니다. 인드라망의 비유가 있습니다. 우주는 거대한 그물이고 그물의 각 교차점에 보석이 달려 있습니다. 하나의 보석이 빛나면 그 빛이 다른 모든 보석에 반사됩니다. 모든 보석이 서로를 비추고 서로에게 비춰집니다. 하나가 전체이고 전체가 하나입니다. 당신이 깨달으면 온 우주가 깨달습니다. 당신이 미소 지으면 온 세상이 미소 짓습니다. 당신의 평화가 세상의 평화이고 당신의 자유가 세상의 자유입니다. 그렇기에 수행은 이기적인 행위가 아닙니다. 가장 이타적인 행위입니다. 자신을 깨끗이 하는 것이 세상을 깨끗이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마음에 평화를 가져오는 것이 세상에 평화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마하트마 간디는 말했습니다. 당신이 보고 싶은 변화가 되라. 세상을 바꾸려 하기 전에 먼저 자신이 변해야 합니다. 세상을 비판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돌아봐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내 눈에 들보는 보지 못하고 어찌 형제의 눈에 티끌을 보느냐. 자신의 큰 잘못은 보지 못하면서 남의 작은 잘못은 쉽게 봅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하지만 수행자는 다릅니다. 남을 보기 전에 먼저 자신을 봅니다. 남을 고치기 전에 먼저 자신을 고칩니다. 손가락으로 남을 가리키면 세 손가락은 자신을 가리킵니다. 함께 가는 길은 서로를 끌어 주고 밀어 주는 길입니다. 앞선 이는 뒤처진 일을 기다려 주고 뒤처진 이는 앞선 일을 따라갑니다. 강한 이는 약한 일을 도와주고 약한 이는 강한 이에게 배웁니다. 상호의존의 진리입니다. 아무도 혼자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두가 서로에게 의지하며 살아갑니다. 꽃은 벌에게 꿀을 주고 벌은 꽃에게 꽃가루를 옮겨줍니다. 나무는 새에게 집을 제공하고 새는 나무에게 씨앗을 퍼뜨려 줍니다. 인간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농부가 없으면 먹을 것이 없고 목수가 없으면 살 곳이 없으며 의사가 없으면 건강을 지킬 수 없습니다.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의 노고 덕분에 살아갑니다. 아침에 입는 옷 한 벌에도 수십 명의 손길이 닿았습니다. 목화를 기르고 시를 뽑고 천을 짜고 옷을 만들고 운송하고 판매한 사람들 보이지 않는 수많은 인연이 지금의 당신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니 어찌 혼자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모든 존재의 도움으로 여기까지 왔는데 이제 홀로 피안에 갈 수는 없습니다. 함께 가야 합니다. 바라스나제 모두 함께 피안으로 가는 것입니다. 모지 사바 깨달음이여 이루어지이다. 마지막 구절은 완성을 선언합니다. 여정의 끝 수행의 완성 깨달음의 성취 하지만 이 완성은 어떤 완성일까요? 완성이란 끝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도착이 아니라 출발입니다. 깨달음을 얻는 순간 진정한 수행이 시작됩니다. 이것을 도노점수라고 합니다. 단각에 깨우지만 점차 닦아야 합니다. 왜 그럴까요? 식사를 깨달았어도 오랜 습기가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거울의 본성은 밝지만 오랜 세월 쌓인 먼지가 있습니다. 한 번 닦는다고 모두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제 닦는 방식이 달라집니다. 전에는 무언가를 얻기 위해 닦았다면 이제는 이미 가진 것을 드러내기 위해 닦습니다. 전에는 목적지를 향해 달렸다면 이제는 이미 죽음이 도착해 있음을 확인합니다. 전에는 부족함을 채우려 했다면 이제는 완전함을 누립니다. 성가에서는 이것을 보고도 속 키우기에 비유합니다. 13개의 그림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소를 찾고 발견하고 길들이고 집으로 데려옵니다. 여덟 번째 그림에서는 소도 사람도 모두 사라집니다. 아홉 번째 그림에서는 본래의 자연으로 돌아갑니다. 10번째 그림에서는 저작거리로 나가 중생을 제도합니다. 깨달음의 완성은 세상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산속에 숨어 사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함께 사는 것입니다. 초월하게 벗어나지 않고 해탈하되 떠나지 않습니다. 입전 수수 거리로 들어가 손을 들이운 내 말이 있습니다. 깨달은 이는 세상으로 돌아가 중생과 함께합니다. 술집에도 가고 시장에도 가며 사람들과 섞입니다. 하지만 물들지 않습니다. 연꽃이 진흙 속에서 피어나지만 진흙에 물들지 않듯이 깨달은 이는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물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세상을 정합니다. 연꽃이 더러운 물을 맑게 하듯 보살은 탁한 세상을 맑게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깨달음의 완성입니다. 자신만 깨끗해지는 것이 아니라 주변을 깨끗하게 하는 것입니다. 자신만 자유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도 자유롭게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후에도 45년간 중생을 제도하셨습니다. 편안히 열반에 드실 수도 있었지만 고통받는 중생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없으셨습니다. 자부심이 저절로 우러나온 것입니다. 진정한 자비는 노력하는 것이 아닙니다. 본성이 그러한 것입니다. 해가 빛을 내려고 애쓰지 않듯 깨달은 이는 자비를 베풀려고 애쓰지 않습니다. 저절로 흘러나옵니다. 아재아재 바라아재 바라승아재 모지 사바 이 진언을 외우면 신비한 힘이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진정한 힘은 주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의미를 깊이 새기고 실천하는 데 있습니다. 가자. 지금 바로 걸음을 내딛으십시오. 더 이상 미루지 마십시오. 내일부터 수행해야지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내일은 결코 오지 않습니다. 오는 것은 항상 오늘입니다. 지금 이 순간 호흡을 의식하십시오. 지금 이 순간 마음을 관찰하십시오. 지금 이 순간 자비심을 일으키십시오. 그것이 바로 수행입니다. 거창한 것이 필요 없습니다. 특별한 장소도 특별한 시간도 필요 없습니다. 지금 여기 이 순간이 가장 완벽한 수행의 시간이고 장소입니다. 걸으면서 수행하고 앉아서 수행하며 일하면서 수행하고 쉬면서 수행합니다. 말할 때도 수행이고 침묵할 때도 수행입니다. 깨어 있을 때도 수행이고 잠들 때도 수행입니다. 생활이 곧 선이고 선이 곧 생활입니다. 둘이 아닙니다. 이것을 생활선이라고 합니다. 성철 스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일상 생활이 바로 신성한 것이니 따로 구할 것이 없다. 밥 먹고 일하고 자는 것 이 평범한 일상이 바로 신성한 수행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평범한 일상이 신성해질 수 있을까요? 마음가짐의 차이입니다. 깨어있는 마음으로 하면 모든 것이 수행이 됩니다. 차 한 잔을 마시더라도 온전히 차를 마시십시오. 향을 맡고 무언가를 느끼고 맛을 음미하십시오. 과거를 생각하지 말고 미래를 걱정하지 마십시오. 지금 이 순간 차 마시는 이 경험에 완전히 빠져 드십시오. 그것이 바로 일미3매입니다. 한 가지 맛에 몰입하는 산매입니다. 무엇을 하든 그것에 온전히 집중하십시오. 설거지를 할 때도 걸레질을 할 때도 빨래를 할 때도 온전히 몰입하십시오. 빨리 끝내고 다른 일을 해야지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지금하고 있는 바로 그 일이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과거에 부처님을 모셨던 스님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부처님을 모실 때는 무엇을 하셨습니까? 스님이 답했습니다. 방 찍고 빨래했지. 그럼 부처님께서 특별한 가르침을 주셨습니까? 밥 짓고 빨래하라고 하셨지. 평범함 속에 비범함입니다. 특별함을 추구하지 말고 평범함을 깊이 살아 가십시오. 그 속에 모든 진리가 있습니다. 아지아지. 계속 나아가십시오.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고 다시 찾으십시오. 완벽하려 하지 마십시오. 완벽함은 환상입니다. 우리는 모두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하지만 그 불완전함이 아름답습니다. 깨진 그릇을 금으로 이어붙이는 일본의 킨츠기처럼. 우리의 상처와 결정은 우리를 더 아름답게 만듭니다. 실수했다고 자책하지 마십시오. 실수는 배움의 기회입니다. 넘어진 곳에서 일어나면 그곳이 새로운 출발점입니다. 부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넘어지지 않는 자는 일어설 필요가 없지만 넘어진 자는 반드시 일어서야 한다. 넘어지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넘어진 채로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바라지. 피아노를 향해 계속 나아가십시오. 때로는 길이 보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어둠 속을 걷는 것 같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계속 걸으십시오. 동굴 속을 걷다 보면 처음에는 칠흑 같은 어둠입니다. 하지만 눈이 적응하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계속 걷다 보면 멀리서 빛이 보입니다. 출구의 빛입니다. 수행의 기회도 그렇습니다. 처음에는 캄캄합니다. 무엇이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계속하다 보면 조금씩 밝아집니다. 어느 순간 빛을 봅니다. 견성 본성을 보는 순간입니다. 그 순간은 찰나이지만 영혼이 남습니다. 한 번 본 것은 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본다는 것과 설다는 것은 다릅니다. 진리를 아는 것과 진리로 사는 것은 그런가 하더라. 그래서 개성이야. 보이는 것을 삶으로 옮겨야 합니다. 깨달은 것을 실제로 없잖아. 함께 가십시오.
더 깊이 갈 수 있습니다. 상가 즉 수행 공동체가 중요한 이유입니다. 혼자 수행하면 눌러서 뭐라는 거야? 함께 수행하면 서로 격려하고 북돋아줍니다. 간 사람이 쓰러지면 다른 사람이 일으켜 세웁니다. 한 사람이 길을 잃으면 다른 사람이 방향을 알려 줍니다. 한 사람이 좌절하면 다른 사람이 희망을 줍니다. 부처님께서는 산보를 말씀하셨습니다. 불법 승 부처님과 가르침과 수행 공동체 이 세 가지가 모두 중요합니다. 부처님은 길을 보여 주시고 법은 가는 방법을 알려주며 승은 함께 가는 동반자입니다. 셋 중 하나라도 없으면 여정은 어려워집니다. 혼자서 깨달을 수는 있지만 혼자서 계속 나아가기는 어렵습니다. 사람은 사회적 존재입니다. 서로에게 의지하며 살아갑니다. 고독한 수행자의 이미지가 있지만 진정한 수행자는 고립되지 않습니다. 세상과 단절된 것이 아니라 세상과 더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산속의 수행자도 세상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누군가 지어준 옷을 입고 누군가 만든 그릇을 쓰며 누군가 공양한 음식을 먹습니다. 완전히 독립적인 존재는 없습니다. 모지사바 이루어지이다. 이 말은 기원이자 선언입니다. 깨달음이 이루어지기를 그리고 이미 이루어졌다는 선언입니다. 이것이 불교의 아름다운 역설입니다.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이미 이루어졌습니다. 가야 할 길이 있지만 이미 도착해 있습니다. 수행해야 하지만 이미 부처입니다. 이 역사를 이해하는 것이 깨달음의 핵심입니다. 시간이라는 개념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과거 현재 미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 지금 이 순간에 있습니다. 금강경에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과거 신불가득 현재 심불가득 미래심 불가득 과거 마음도 얻을 수 없고 현재 마음도 얻을 수 없으며 미래 마음도 얻을 수 없다. 왜냐하면 마음은 매 순간 변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수행하는 주체는 누구입니까? 깨달을 사람은 누구입니까? 이 물음을 깊이 파고들면 결국 아무도 없습니다. 고정된 나라는 존재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허무주의로 빠지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없지만 이 순간의 경험은 생생합니다. 자아는 환상이지만 삶은 실제합니다. 이 미묘한 균형을 이해하는 것이 중도입니다. 믿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습니다. 생겨난다고도 할 수 없고 사라진다고도 할 수 없습니다. 중론에서 용수 보살께서는 팔부를 말씀하셨습니다. 생기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으며 끊어지지도 않고 영원하지도 않으며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으며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는다. 모든 극단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진리는 양극단 사이에 어딘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양극단에 모두 초월한 곳에 있습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곳 생각으로 가닿을 수 없는 그곳 하지만 직접 체험할 수 있는 그곳 화두를 드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임오군. 이것이 무엇인가 대답할 수 없는 물음입니다. 하지만 그 물음과 함께 읽다 보면 어느 순간 물음이 사라지고 답도 사라지며 물음을 던진 자마저 사라집니다. 그리고 남는 것은 말할 수 없습니다. 경험해야만 압니다. 마치 물의 맛을 말로 설명할 수 없듯이 깨달음도 말로 전할 수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연꽃을 드셨을 때 대중은 침묵했지만 가섭 존자만 미소 지으셨습니다. 이심전심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한 것입니다. 말이 필요 없었습니다. 선의 전통이 그렇게 이어져 왔습니다. 이심전심 분리문자 글자에 의지하지 않고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경전을 무시하라는 뜻이다. 뜻은 아닙니다. 경전은 손가락이고 진리는 달입니다. 손가락이 달을 가리키면 달을 봐야지. 손가락을 봐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손가락이 없으면 어디를 봐야 할지 모릅니다. 경전은 길잡이입니다. 지도입니다. 하지만 지도가 영토는 아닙니다. 지도를 보고 직접가 봐야 합니다. 아재아재 바라아제 바라승아재 모지 삼아 이 지난 속에 모든 수행의 길이 압축되어 있습니다. 가는 것 방향 함께함. 그리고 완성 하지만 진언을 밝힐 것 천 번 만 번 외운다고 해서 저절로 깨닫는 것은 아닙니다. 진언의 의미를 새기고 그대로 살아야 합니다. 가라고 하면 가고 함께 가라고 하면 함께 가며 이루라고 하면 이루어야 합니다. 실천 없는 신앙은 공허합니다. 깨달음 없는 수행은 맹목입니다. 자비 없는 지혜는 냉정합니다. 지혜 없는 자비는 맹목입니다. 국제 원상의 이 두 날개로 날아야 합니다. 한쪽 날개만으로는 날 수 없습니다. 지혜로 진리를 보고 자비로 중생을 품습니다. 관세음보살의 이름이 그것을 말해 줍니다. 관은 소리를 관찰한다. 중생의 고통의 소리를 듣고 즉시 구제하러 갑니다. 천두의 섬과 1000개의 눈으로 모든 방향의 중생을 구제합니다. 우리도 작은 관세음보살이 될 수 있습니다. 주변 사람들의 고통에 귀 기울이고 도울 수 있는 일을 찾아 행동하는 것입니다.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외로운 이웃에게 말을 건네고 힘든 친구에게 위로의 손을 내밀고 길 잃은 이에게 방향을 알려 주는 것 이런 작은 행동 하나하나가 보살의 실천입니다. 지장보살의 서원을 기억하십시오. 지옥이 비지 않으면 성불하지 않으리라. 가장 고통받는 존재들이 있는 곳으로 내려가겠다는 원력입니다. 우리도 그럴 수 있습니다. 편안한 곳에 머물지 않고 필요한 곳으로 가는 것입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는 곳 고통이 있는 곳 어둠이 있는 곳 촛불 하나가 어둠을 밝히듯 작은 실천 하나가 세상을 바꿉니다. 나 하나쯤이야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나 하나가 시작입니다. 간디의 말을 기억하십시오. 바다는 물방울의 집합이다. 물방울 하나하나가 모여 바다를 이룹니다. 당신의 작은 실천이 큰 변화를 만듭니다. 아제아재 지금 바로 시작하십시오. 더 이상 망설이지 마십시오. 준비가 다 될 때까지 기다리면 영원히 시작하지 못합니다. 완벽하게 준비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시작하면서 배우는 것입니다. 걸으면서 길이 만들어집니다. 안토니오 마차도의 시처럼 나그네요. 길은 없다. 길은 걸으면서 만들어진다. 정해진 길이 없습니다. 각자의 길이 있습니다. 부처님의 길이 있고 조사들의 길이 있으며 당신의 길이 있습니다. 남의 길을 그대로 따를 수는 없습니다. 영감을 받을 수는 있지만 자신의 길은 스스로 걸어야 합니다. 당신만의 방식으로 수행하십시오. 당신만의 속도로 나아가십시오. 비교하지 마십시오. 남이 빨리 간다고 초조해야 할 필요 없습니다. 영주가 아닙니다. 먼저 도착하는 사람에게 상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각자의 시간표가 있습니다. 어떤 꽃은 봄의 피고 어떤 꽃은 여름에 피며 어떤 꽃은 가을에 핌니다. 모두 다 아름답습니다. 당신도 당신의 때에 꽃 피울 것입니다. 서두르지 마십시오. 하지만 게으르지도 마십시오. 꾸준히 성실히 진실하게 걸어가십시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바라재 방향을 잃지 마십시오. 세상에는 수많은 유혹이 있습니다. 잠깐의 즐거움 순간의 만족 덧없는 쾌락 이런 것들이 우리를 길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하지만 깊은 기쁨은 다릅니다. 표면적인 즐거움이 아니라 내면에서 우러나는 평화입니다. 순간의 흥분이 아니라 지속되는 고요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의 모든 즐거움을 다 합쳐도 열반의 즐거움에 16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한다. 진정한 행복은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외부 조건이 좋아서 행복한 것이 아니라 마음이 편안해서 행복한 것입니다. 많이 가져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집착이 없어서 자유로운 것입니다. 이것을 깨닫는 순간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더 이상 밖에서 행복을 찾지 않습니다. 안에서 평화를 발견합니다. 그렇다고 세상을 등지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에 살되 세상에 물들지 않습니다. 연꽃처럼 진흙에서 피어나되 진흙에 물들지 않습니다. 입새와 출세의 조화입니다. 세상에 들어가되 세상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함께 살되 휘둘리지 않습니다. 이것이 보살의 길입니다. 속세를 떠나지 않으면서 속세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중생과 함께하되 중생의 번뇌에 빠지지 않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중심이 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흔들리는 배 위에서도 중심을 잡으면 넘어지지 않습니다. 명상이 그 중심을 잡아줍니다. 매일 자신과 만나는 시간 고요 속에서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 이것이 중심을 잡아줍니다. 아침에 일어나 명상으로 하루를 시작하십시오. 밤에 자기 전 명상으로 하루를 마무리하십시오. 하루 중 틈틈이 호흡을 관찰하십시오. 이런 작은 실천이 쌓여서 삶이 변합니다. 갑자기 성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깨어나는 것입니다. 바라승아제 혼자 가지 마십시오. 함께 가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주변을 돌아보십시오. 당신 옆에도 길을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손을 내밀어 보십시오. 함께 걸으십시오. 가족이 그렇고 친구가 그렇고 직장 동료가 그렇습니다. 모두가 각자의 짐을 지고 걷고 있습니다. 서로 도우며 갈 수 있습니다. 때로는 당신이 도움을 주고 때로는 당신이 도움을 받습니다. 주는 것과 받는 것이 순환합니다. 강물이 흐르든 주고받으며 흘러갑니다. 집착하지 마십시오. 내가 이만큼 해줬는데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베푼 것을 기억하지 마십시오. 받은 것은 감사의 역이 돼. 갚아야 한다는 부담을 느끼지 마십시오. 은혜를 다음 사람에게 전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페이 임포워드 은혜를 앞으로 전하는 것입니다. 내게 베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