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번 봉인된 두루마리를 펴다
- 가톨릭 민주주의의 꿈
묵시 5,1-10; 루카 19,41-44
연중 제33주간 목요일; 2020.11.19.; 이기우 신부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 교우들에게 권고와 당부를 마친 사도 요한은 이들 모두에게
자신이 파트모스 섬 동굴에서 본 환시를 전해 주면서 신앙 교육을 시도합니다.
그 환시는 과거에 예수님께서 선포하셨던 하느님 나라가
지금은 물론 장차 어떻게 실현될 것인가 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환시에서 이 내용을 상징하는 아이콘이 하나 있으니, 그것은 두루마리였습니다.
두루마리는 양의 가죽을 무두질해서 그 위에 문자를 기록한 양피지로서
둘둘 말아서 보관하면, 적은 부피로 많은 양의 정보를 오래 보관할 수 있었던 것이,
사도 요한 당시까지 고대인들이 정보를 전수받고 계승하는 방식이자 수단이었습니다.
구약성경도 이 두루마리에 적혀 보관되었고, 그래서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실 때
나자렛 회당에서 이사야의 예언이 기록된 두루마리를 받아 읽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은 하느님의 오른손에 안팎으로 글이 적힌 두루마리 하나가
들려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하면서, 그 두루마리가 무려 일곱 번이나 봉인되어 있었다고 했습니다.
아무나 뜯어 볼 수 없었다는 뜻이겠습니다. 사도 요한은 천사 역을 하던 원로
한 사람의 추천으로 그 사람은 바로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님이시라고 증언하였습니다.
그분이야말로 하느님의 구원계획이 적혀 있는 두루마리의
일곱 봉인을 뜯고 그 내용을 만천하에 발표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고 계셨습니다.
두루마리의 내용은 첫째, 예수님께서 세상에서 공적으로 벌이신 활동,
하느님 나라를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에게 체험시키고 깨닫게 만든 사랑과
희생의 활약상이야말로 이미 하느님의 두루마리에 적혀 있었던 내용이었습니다.
비록 그로 말미암아 어린양처럼 살해되시는 운명을 겪으셨으나,
그 피로 모든 종족과 언어와 백성과 민족 가운데서 사람들을, 특히 믿는 이들을 속량하시어
하느님께 바치셨기 때문에 속량되어 자유를 되찾은 이들이 한 나라를 이루고 사제들이
되게 하시어 온 땅을 다스릴 것이라는 내용이 둘째였습니다.
말하자면 하느님 나라가 시작되었고, 마귀의 손아귀에서 해방된 그 나라의 일꾼들이
그 나라를 계승하여 이어나갈 것이라는 선언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편지를 받아 읽는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 신자들에게는
임무를 부여하는 사령장인 셈이고, 재신임을 부여하는 신임장이기도 한 것이지요.
이 두루마리를 받아 봉인을 뜯고 천상 어전에서 발표할 때, 스물네 원로가 가지고 있던
금대접에서 향기가 가득 했다고 하는데 이는 성도들의 기도라고 하였습니다.
말하자면 소아시아의 일곱 신자들은 물론 이 사명을 계승하는 온 땅의 성도들이 지상에서
현세동안 하느님 나라를 계승할 수 있도록 천상에 계신 성도들이 기도로써
통공을 이루고 성원하리라는 다짐인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과 지도자들에게도 이런 기회가 먼저 주어졌으나
이들을 의인화하여 상징하는 예루살렘은 이 기회를 알아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살해하려고 십자가에 못박는 죄악을 저질렀습니다.
이 슬프고 답답한 미래를 내다보신 예수님께서 당신의 운명 때문이라기보다는
예루살렘으로 상징되는 이스라엘의 운명 때문에 슬피 우셨습니다.
일곱 번이나 봉인된 두루마리는 아무나 펼 수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만 펴기에 합당하셨습니다. 이는 다시 말하면
그분이 선포하신 복음 진리만이 하느님 나라의 현실을 실현시킬 수 있다는 뜻입니다.
예루살렘은 이 사실을 알지 못해서 기회를 놓쳤고
끝내 멸망당했고 성전도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그 이후 2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성전은 다시 세워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두루마리의 일곱 봉인을 다 뜯고 나자
그리스도의 인호를 받고 환난을 이겨낸 14만 4천 명에 의해서
새 예루살렘이 세워지고 이곳이 새 하늘과 새 땅의 중심이 되리라고 예언하였습니다.
가톨릭교회의 역사는 그 구체적인 전개과정이며,
이 땅의 교회가 겪고 있는 역사 또한 그렇습니다. 이런 점에서 최근 교황청에서
국제신학위원회 명의로 발표된 ‘공동합의성’ 문서는 시의적절한 시사점을 던져 주고 있습니다.
즉, “교회의 공동합의적 삶은 특히 정의와 연대성과 평화의 표징 안에서
민족들의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삶을 진흥시키는 데에 봉사한다.”는 것이고,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개별 인간뿐만 아니라 사람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들도 구원”하시는 분이므로, “권위주의적이고
기술 지배적인 시류의 위험 속에서 민주주의적 참여 절차가 구조적인 위기를 맞고
그 원리들과 영감을 주는 가치들이 불신의 대상이 되는 상황에서, 대화를 실천하는 것,
그리고 평화와 정의를 건설하는 공통되고 효과적인
해결책을 찾는 것은 절대적으로 우선되어야 할 일들”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는, 가난한 이들의 부르짖음과 땅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라는 명령은 하느님 백성의 우선적 임무이며 모든 사회적 행위의 기준”
이라는 것이며, “이제 사회의 선택과 계획 수립에서,
가난한 이들이 특전적 위치와 역할을 지니고,
부의 보편적 사용과 연대성의 우선성이 강조되며,
우리 공동의 집을 돌볼 의무가 절박하게 요청되어야 할 것”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 같은 전망은 정치적, 경제적 그리고 생태적 차원에서
가톨릭교회가 세상의 빛이 될 수 있는 길을 매우 구체적으로 밝혀주고 있다고 할 것입니다.
일곱 번 봉인되었다가 예수님께서 펼쳐 보이신 두루마리를 해석하는
이 한 자락이 이 땅에서도 실현되기를 기도합니다. 가톨릭 민주주의의 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