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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5 장 추나신공(推拿神功)
①
추나신공(推拿神功).
본시 육노야로부터 전수받은 것은 추나요법(推拿療法)이라 불리는 것이었다. 백육호는 수 차례에 추나요법의 효험을 체험했다. 그래서 그는 동사군도에서 탈출한 이후 틈만 나면 추나요법에 대해 연구했다.
그 결과 육노야의 추나요법을 자신만의 새로운 경지로 끌어올리는데 성공했다. 그것이 바로 추나신공이었다.
추나요법은 본시 환자를 치료하는 외치법(外治法) 중 하나로 이천여 년 전부터 내려온 오래된 요상법이었다.
인간의 맥(脈)과 혈(穴)을 문지르고(推), 때리고(打), 당기고, 찌르고, 틀고, 풀어줌으로써 막힌 기혈을 터뜨리고 인체에 고여 있는 나쁜 피를 풀어주는 요법이었다.
거기에 시술자가 기(氣)를 실어 시술하게 되면 그 효능은 열 배가 더하게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손에 기를 담는 특별한 심법(心法)이 필요하다.
백육호는 추나요법을 한 단계 끌어올리기 위해 추나심법을 고안해냈다.
편월(片月)의 희미한 빛이 비치는 야산.
백육호는 느릿느릿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어찌 보면 일정한 법도도 없이 흐느적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 어찌 보면 술에 취한 자가 비틀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다리 관절이 비정상적으로 뒤틀리며 몸의 중심이 수시로 허물어져 내렸고, 척추 또한 옆으로 기우뚱, 뒤로 기우뚱하며 멋대로 꺾여졌다.
팔은 뼈가 없는 듯이 흐느적거리며 허공을 휘저었으며 고개도 힘없이 툭툭 떨구어지곤 했다.
매일밤 되풀이되는 일이었다.
백육호는 자정(子正)만 넘으면 육화탑이 있는 산으로 올라가 그런 행위를 반복했다. 그 행위는 꼬박 한 시진이 넘어야 끝나곤 했다.
연후 그는 가부좌를 틀고 앉아 격탕된 기혈을 다스리는 토납법(吐納法)을 시행했다.
'기(氣)는 만물의 근원이다. 죽은 자의 몸이 미세한 차이지만 가벼워지는 까닭이 무엇이냐? 바로 기가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인간 뿐 아니라 살아있는 생명체에는 모두가 기가 존재한다. 도랑에 고인 썩은 물에는 기가 존재하지 않으나 계곡을 흐르는 옥수나 흐름을 멈추지 않는 강물, 망망대해의 바닷속에도 기가 존재한다. 기란 무궁무진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호흡하는 대기 중에도 기가 존재한다. 그 기를 흡수하게 되면 상상할 수도 없는 힘을 얻게 된다.'
흔히 말하는 인간의 잠재력은 무릇 기에서 비롯된다. 그 기의 힘을 자신의 의지로 운용할 수 있게 하려면 적절한 법도를 익혀야 한다.
백육호는 추나심법을 통해 그 기를 운용하는 법을 깨달았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강호인들이 연마하는 심법과는 사뭇 달랐다.
지금까지 그는 자신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지 못했다.
얼마전 사사련의 환사객들을 통해 처음으로 무공을 시전한 적이 있었다. 다만 그는 환사객의 무공이 어느 정도인지 몰랐기에 자신의 능력 또한 비교할 수가 없었다.
행장은 이미 꾸려놓았다.
백육호는 약방문에 당분한 휴업(休業)한다는 방문을 적어 놓았다. 이웃사람들에게도 그가 돌아올 때까지 약방을 돌봐달라는 당부를 해놓았다.
그는 무명천으로 용명검을 감싼 후 어깨에 메었다. 그밖에 몇 가지 물건을 허리춤에 감싼 후 길을 떠났다.
황보수선의 부탁대로 그녀의 모친을 진료하기 위해 정든 처소를 등진 것이다.
"정말 그가 호자(虎子)란 말인가?"
사마을지의 손에는 방문(榜文)이 들려 있었다. 방금 전 그림자조차 비치지 않는 그의 수하 환령으로부터 전해받은 것이다.
그것은 백육호가 길을 떠나기 전 약방문에 내건 것이었다.
<당분간 휴업(休業)하니 양해해 주기 바람.
-의원(醫員) 백육호(百六號).>
방문의 내용은 지극히 간략했다.
그러나 사마을지의 날카로운 눈은 방문의 말미에 적혀있는 서명에 못박혀 있었다.
"백육호라....... 이건 결코 일반적인 이름이 아니다. 사연이 있어도 한참 있는 것이지. 과연 그란 말인가?"
어둠 속에서 환령의 의혹에 찬 음성이 들려왔다.
"군사, 설마 그가 동사군도에서 사라진 백육호와 동일인이란 뜻입니까?"
사마을지의 눈이 번쩍 빛났다.
"왜 아니겠느냐? 바로 그다."
"군사!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그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아니... 설사 그렇다해도... 그것이 대세에 영향을 줄 일이라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누가 그렇다고 하더냐? 아무리 완벽한 대계(大計)라도 한 치의 틈이 생기면 걷잡을 수 없이 구멍이 커지게 된다. 더구나 그가 바로 태화천(太華天)의 후예라면 보통 일이 아니다."
환령의 음성은 더욱 가라앉았다.
"하오면... 삭초제근(削草制根) 해야겠지요."
"물론이다. 하지만 아직 모습을 드러낼 때가 아니다. 따라서 직접적으로 나설 순 없다. 방법이 있다면 남의 손을 빌릴 수밖에."
"차도살인(借刀殺人)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바로 그렇다."
"그럼... 누구를?"
"살막(殺幕)."
사마을지의 짤막한 말이 떨어진 순간 환령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저... 전설이 되어 버린 살수집단이 아직 살아있단 말입니까?"
잠시 뜸을 두고 환령의 회의에 찬 음성이 뒤를 이었다.
"설사... 그렇다해도 명분 없는 청부는 받지 않는다는 그들이 아닙니까?"
사마을지의 눈이 가늘어졌다.
"살막의 이십오대 막주는 노부와 함께 한림원(翰林院)에서 청운의 꿈을 꾸던 동문이었지. 그도 역시 중도에 붓을 꺾어야만 했던 아픔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그럼... 일전 군사께서 언급하셨던 한림삼수(翰林三秀) 중 한 분이 살막의 막주란 말입니까?"
"그렇다. 썩어빠진 세상이 한림원의 걸출한 인재 세 명을 풍진강호로 내몰았었지......."
"......."
"계획을 바꾸어야겠다. 백육호란 의원의 등장이 새로운 변수로 떠올랐다. 노부는 이 길로 살막으로 가겠다. 너는 예정대로 건친왕부를 들른 후 녹림으로 가도록 해라."
"존명!"
환령의 음성이 멀어져갔다.
"......."
사마을지는 망연한 눈길을 황혼에 고정시키고 있었다.
날마다 뜨고 지는 해다. 그러나 요즘 들어 자신의 인생도 황혼과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지금 그가 있는 곳은 낙도서원에서 수백 리 떨어진 곳이었다. 한적한 객점의 창가에 서서 타오르는 노을을 바라보고 있는 자신이 유난히 초라하게만 느껴지고 있었다.
②
백육호는 짜증이 났다.
"정말 그대들을 죽여야만 길을 갈 수 있단 말이오?"
"네놈의 오만은 남궁청운을 능가하고도 남음이 있구나."
관도를 가로막고 선 인물들은 구천마교의 사대봉공 중 살아남았던 두 명의 봉공과 백팔전사들이었다.
그들은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백육호의 앞을 가로막았다. 길을 가던 행인들은 그들의 흉흉한 기세에 질려 모두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백육호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난 그대들과 아무 원한이 없는데 이처럼 길을 막으니 날더러 살인을 하라는 것인가? 좋소, 정 살기가 귀찮다면 그대들의 뜻을 이루게 해줄 수도 있지."
백육호는 앞으로 걸어갔다. 너무도 유유한 그의 모습에 앞을 가로막는 마졸들은 섬뜩했다.
차창!
그들은 일제히 병장기를 뽑아들었다.
"뭣들 하느냐? 저 애송이 의원을 쳐죽여라!"
백육호와 앞에 있던 두 명의 마졸이 폭갈을 터뜨리며 덮쳐왔다.
"죽어랏!"
쐐애액!
두 자루의 장도가 곧바로 날아왔다. 백육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다만 어깨에 메고 있던 무명천으로 감싼 물체를 슬쩍 움직였을 뿐이었다.
"크윽!"
두 마졸은 피를 토하며 거꾸러졌다. 그들의 턱에 용명검의 자루가 박혔던 것이다.
백육호는 태연히 걸어갔다. 단지 검자루만으로 두 명을 해치운 그는 여전히 무심한 표정이었다.
"안되겠다! 구환진(九 陣)을 펼쳐라!"
스스슥!
백팔전사들이 빠르게 움직였다. 그들은 아홉 명이 일조로 둥근 원진을 펴 백육호를 포위했다. 언뜻 보기에는 단순한 진세 같았으나 아홉 명이 일조를 이루고 그 뒤를 다시 방위에 따라 아홉 명이 느리게 움직이고 있었다.
구환진은 구천마교가 흔히 펼치는 전술 중 하나였으나 그 무서움은 차륜전법(車輪戰法)이라는 데 있었다. 즉, 많은 수로 소수의 강적을 만났을 때 펼치면 위력을 발휘하는 것이었다.
"......."
백육호는 걸음을 멈춘 채 냉정한 눈으로 그들의 진세를 둘러보았다. 그의 눈에는 강한 흥미가 떠올라있었다.
'구궁(九宮)을 교차하여 펼쳤다. 그로써 두 진이 상호보완적인 조화를 이루고 있다. 전방의 진에 허점이 드러나면 즉시 후방의 진이 자리를 메운다. 단순한 것 같지만 장기전에 돌입할 경우 자칫 진력이 고갈되기 쉽다.'
백육호의 뇌리에는 한 노인의 청수한 모습이 떠올랐다. 어린 시절 그에게 학문(學問)과 각종 잡학(雜學)을 가르쳐 주었던 용선생(龍先生)이었다.
용선생은 그에게 학문은 물론 기관지학(機關之學), 천문지리(天文地理), 기문둔갑(奇門遁甲) 등을 세세히 가르쳐 주었었다.
당시는 몰랐으나 세월이 흐를수록 용선생의 가르침이 새삼 떠올랐다. 그는 구환진을 보는 순간 저절로 진법의 허점을 간파할 수 있었다. 그 모두가 용선생 덕분이었다.
"쳐라!"
"죽어라!"
위이잉!
이윽고 공격이 시작되었다. 아홉 명의 마졸들이 전후좌우에서 동시에 공격해왔다. 특이한 것은 그들이 끊임없이 회전하면서 공격을 가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가 막으려 들면 먼저 공격했던 자는 사라지고 뒤쪽에서 그의 공격을 맞받아쳐왔다. 만일 그 공격을 받으려 치면 전후좌우에서 일시에 공격이 떨어지게 되어 있었다.
'추나십이수(推拿十二手)를 시험해 볼 좋은 기회다.'
백육호는 쌍수를 교차시켰다.
추나십이수.
얼마 전 그가 창안한 무공이었다. 추나심법을 통해 얻은 일종의 금나수(擒拿手)였다. 도합 십이식으로 이루어진 추나십이수는 장법(掌法)으로 사용할 수도 있었다.
치고, 당기고, 퉁기고, 밀고, 꺾고, 찌르고, 누르고, 돌리고, 잡고, 긁고, 틀고, 붙이는 열두 가지 동작이 다양한 변화(變化)를 일으키며 연속동작으로 전개할 수 있는 것이었다.
"으악! 크악!"
비명이 꼬리를 물었다. 백육호는 마치 나비처럼 구환진 사이를 누비며 양손을 움직였다. 그의 손은 밀어쳤다가 원을 그리는가 하면 때로는 수도로 뻗었다가 손가락으로 구부려 잡아채거나 손등, 주먹, 팔꿈치가 연달아 눈부신 변화를 일으키며 마졸들의 요혈을 가격했다.
"으으... 저럴 수가?"
구천마교의 봉공은 눈을 부릅떴다.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장면이었다. 백육호는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진세 사이를 누비며 백팔전사의 면전에 붙었다 떨어졌다. 그때마다 수하들은 외마디 비명과 함께 날아가거나 피를 토하며 거꾸러졌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겨우 눈 몇 번 감았다 떴을 정도였다. 바닥에는 즐비하게 백팔전사가 누워 있었다. 그들은 죽었는지 살았는지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으으......."
봉공은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그는 비로소 사사련의 호법 추도남이 한 말이 조금도 과장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너무 늦은 감이 있었다.
쩡!
그는 허리춤에서 판관필을 뽑았다. 그는 옆에서 넋을 잃고 있는 또 한 명의 봉공에게 외쳤다.
"삼제(三弟), 협공하세."
삼봉공의 안색이 흐려졌다. 그는 주춤거리며 회의에 찬 어조로 말했다.
"대형, 아무래도 무리인 것 같습니다......."
대봉공은 눈알을 부라렸다.
"뭣이? 이대로 물러나잔 말이냐?"
"그... 그게 아니라......."
"못난 놈! 저놈은 괴물이 아니다. 필경 진력이 손상되었을 터, 우리가 전력으로 합공하면 승산은 충분할 것이다."
"그... 럴까요?"
삼봉공은 마지못한 듯 허리춤에서 삼첨극(三尖戟)를 뽑았다. 끝이 세 갈래로 갈라진 단창(短槍)이었다.
"죽어랏!"
대봉공의 판관필이 여덟 개의 환영을 뿌리며 백육호의 요혈을 찔러갔다. 동시에 삼봉공의 단창은 백육호의 등을 노리며 쇄도해 갔다.
그들이 동시에 펼치는 합격술은 오랜 시간 동안 연마한 것이라 위력이 절륜했다.
그러나 백육호는 미끄러지듯 방위를 이동했다. 그러자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공격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헉!"
두 마두는 대경실색하며 급급히 공세를 회수했다. 그때였다. 눈앞에 신형이 어른거리는가 싶더니 갑자기 손이 허전해졌다.
"헉!"
삼봉공은 경악에 찬 눈으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없었다. 삼첨극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가 넋을 잃는 순간 갑자기 심장이 화끈하며 무엇인가 무자비하게 파고들었다.
"으아악!"
삼봉공은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벌렁 쓰러졌다. 그의 가슴에는 자신의 애병인 삼첨극이 깊숙이 박혀있었다.
"셋째......!"
대봉공은 대경실색하며 부르짖었다.
"왜 자꾸 날 귀찮게 하는 것이오."
백육호는 무심히 말하며 그에게 다가갔다.
"그... 그걸 몰라서 묻느냐? 너는 우리의 숙적인 남궁청운을 도왔을 뿐더러 사사련의 환사객들을 죽였다. 그것은 우리와 같은 하늘을 이고 살지 않겠다는 뜻이 아니냐?"
백육호는 피식 웃었다.
"그렇다면 앞으로도 귀하들은 날 계속 추격하겠구려?"
"물론이다. 네놈이 아무리 강하다해도 삼만이 넘는 동지들을 모두 죽일 수는 없을 것이다!"
대봉공은 이미 승산이 없다는 것을 자인한 듯했다. 그의 얼굴에 기는 꺾였으나 눈에서는 원독의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흐흐.... 이 하늘 아래 숨쉬는 것을 포기해야 할 것이다. 네가 아무리 잘났다해도 혼자일 테니까."
"어이가 없군."
백육호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았다.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기에 수월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남궁청운을 치료하는 일에 나서려 하지 않은 게 아닌가?
무림의 일이란 한번 뛰어들면 좀처럼 발을 뺄 수가 없는 법이었다.
대봉공은 그가 침묵하자 음침한 웃음을 흘렸다.
"흐흐! 왜 두려우냐?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목을 길게 늘이고 부복한다면 목숨만은 살려둘 의향도 있다."
착각도 큰 착각이었다. 대봉공은 그가 구천마교와 사사련의 힘을 두려워한다고 생각한 듯했다.
백육호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골치 아프군. 의원이 환자를 구하는 것도 마음대로 할 수 없다니. 산다는 것이 왜이리 피곤하단 말인가? 저 하늘의 구름처럼 가고 싶은 곳을 마음대로 갈 수도 없단 말인가?"
그는 고개를 돌려 대봉공을 바라보았다.
"귀하는 아직도 날 죽일 생각이오?"
"나... 나는......."
대봉공은 더듬거리며 뒷걸음질쳤다. 그의 눈에는 공포의 빛이 가득 떠올라 있었다. 수중의 판관필은 바닥에 거꾸로 박혀 있었다. 손을 뻗기만 하면 잡을 수 있는 거리였다.
하지만 자신이 없었다. 판관필을 잡는 순간 백육호의 수도가 그의 목을 쳐버릴 것 같았다.
"하하하! 그럼 소생은 이만 가보겠소."
백육호는 빙글 몸을 돌리더니 유유한 걸음으로 걸어갔다.
"......!"
대봉공은 멍하니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상대방의 모습은 언덕 너머로 사라져버렸다. 완전히 시야에서 자취를 감춘 후에야 그는 길게 한숨을 토해냈다.
"대체... 저놈은 어디서 나타났단 말인가?"
그는 바닥에 즐비하게 널려있는 시신들을 바라보며 자신이 아직도 살아있다는 것이 도무지 실감나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③
- 흑련사(黑聯社).
구천마교와 사사련을 주축으로 한 흑도연합을 일컫는 말이다.
흑련사는 급격히 팽창했다. 그들은 흑도의 거의 모든 방파를 끌어들였으며, 심지어는 흑백지간에 놓여있는 여타의 방파들마저 자신들의 예하로 귀속시켰다.
그로 인해 흑련사는 걷잡을 수 없이 방대한 세력을 형성했으며 나날이 그 규모가 커져만 갔다.
반면 백도무림은 상대적으로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특히 무림군왕성과 십정회의 반목으로 그 전열을 채 갖추지 못한 탓으로 곳곳에서 파죽지세와 같은 흑련사의 공세에 백도무림은 패퇴를 거듭하고 있었다.
흑련사는 중원무림을 일통(一統)하려는 야심을 공공연히 드러내고 있었다.
이에 무림군왕성과 십정회는 힘을 합치기는커녕 사사건건 반목하고 있어 뜻있는 인사들의 개탄을 자아내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하나의 변수가 발생했다.
녹림(綠林)의 등장!
수백 년간 강호의 하류배로 취급받아 왔던 녹림의 무리들이 활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한 걸출한 인물에 의해 통합되어 강호상에 급부상한 것이다. 수백만 녹림도를 통합한 인물은 녹림대종사(綠林大宗師)였다.
그는 사분오열되어 오합지졸이나 다름없던 녹림도에 일사불란한 지휘체제를 도입하여 단숨에 정예군단으로 탈바꿈시켜 놓았다.
더욱 놀라운 것은 백도무림을 대신하여 그들이 흑련사의 횡행을 저지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같은 변화에 무림인들은 당혹을 금치 못했다.
의당 흑련사에 맞서 무림정기를 수호해야 할 무림군왕성과 십정회는 수수방관하고 있는데 한낱 도적떼로 알았던 녹림이 대신 나서자 가치관에 혼돈이 온 것이었다.
그야말로 무림의 상황은 판단할 수 없을 정도로 난측하기만 했다.
무한(武漢).
백육호가 이곳에 온 지도 열흘이 지났다.
그는 황보세가에 무사히 도착했으며 황보수선의 모친인 운하설(雲河雪)을 진료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운하설은 차도를 보이고 있었다. 백육호는 추나요법과 약물요법을 병행했다. 그때문인지 운하설은 차츰 정신이 명료해졌으며 생기(生氣)를 되찾아갔다.
물론 완전히 정신이 돌아온 것은 아니었다. 오랫동안 의식을 잃고 실어증을 앓아온 그녀였기에 비록 눈을 떴으나 대화를 하지는 못했다.
그래도 조금씩 식사를 하게 되었고, 이따금 주위 사람들에게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이기도 했다. 그로 인해 황보세가는 잃었던 활기를 되찾아갔다.
황보수선은 물론 부부간의 정이 남다른 신주수사 황보일학도 모든 것이 백육호 덕분이라며 수없이 치하했다.
그러나 정작 백육호는 부담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는 더 이상 추나요법을 쓰지 않아도 될 정도로 운하설의 병세가 호전되자 약방문을 작성했다.
황보세가를 떠나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 날은 백육호가 황보세가에 온 지 열하루째 되는 날이었다.
저녁이 되자 여러 사람이 모였다. 그들은 황보일학 부녀와 마침 이곳을 방문한 철검장(鐵劍莊)의 철자성 부자, 금적수재 당세곤을 비롯하여 옥선공자 호사붕 등이었다.
공교롭게도 거의 동시에 그들이 방문한 것이다.
검존(劍尊) 철자성은 황보일학의 의제였다. 따라서 수시로 황보세가를 드나들었으므로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그러나 당세곤과 호사붕은 처음으로 황보세가를 찾아온 것이다. 본래 인품이 후덕한 황보일학은 그들을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그런데 식탁의 분위기는 왠지 어색하기만 했다.
백육호는 담담한 표정으로 묵묵히 식사를 했다. 반면 황보수선과 철무영의 안색은 눈에 띌 정도로 딱딱해 보였다.
황보일학과 철자성도 그리 좋은 표정이 아니었다. 당세곤 역시 무엇이 불만인지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오직 호사붕만이 만면에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하하하! 무림인이라면 누구를 막론하고 기뻐할 경사가 아닙니까? 여러분, 안 그렇습니까?"
호사붕은 대소를 터뜨렸다.
며칠 전 일이었다.
무림군왕성에서 용비천군 남궁혁이 사람을 보내 청혼을 해왔다. 그것은 황보수선을 군왕성의 며느리로 맞이하겠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공개적으로 이루어졌다. 따라서 강호에 금세 소문이 퍼지게 되었다.
철자성은 더 이상 침묵을 참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번쩍 들었다.
"형님, 청혼을 받아들이실 겁니까? 사실 소제가 형님을 찾아온 것은 바로 그 일 때문입니다."
철자성은 호사붕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신중해야 합니다. 이번 일은 단순하게 처리할 일이 아니라고 봅니다. 뭐라고 말씀 좀 해보십시오, 형님!"
황보일학은 고뇌에 찬 눈으로 맞은편에 앉아 있는 황보수선을 바라보았다.
"아우, 내 어찌 그것을 모르겠나? 그래서 더욱 노심초사하고 있는 것이네. 본래 나는 혼례만큼은 딸아이가 원하는 대로 할 생각이었네. 하지만 군왕성이 공개적으로 청혼을 해왔으니 참으로 난감하게 되었네."
이때였다. 호사붕이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아니, 노선배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당금 무림의 영웅 중에서도 영웅인 남궁당주의 배필이 되는 것인데 어찌하여 난감하다고 하시는 겁니까?"
당세곤이 식탁을 탕, 치며 나섰다.
"그게 무슨 말버릇이오? 이 자리에는 강호의 대선배님들이 두 분이나 계신데 귀하가 어찌 버릇없이 끼여든단 말이오?"
"......!"
호사붕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벌떡 일어서려다 말고 도로 주저앉으며 사나운 눈으로 당세곤을 노려보았다. 본래 사이가 좋지 않은 두 사람이었다.
철자성이 묵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형님, 소제의 생각은 좀 다릅니다. 아무리 무림군왕성이라 해도 혼사만큼은 당사자의 의견이 가장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러니 수선이 원치 않는다면 정중히 거절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그 말에 줄곧 고개를 떨구고 있던 황보수선의 얼굴에 화색이 감돌았다.
"현제(賢弟), 아직 시간이 있으니 그 얘기는 그만 하도록 하세. 이곳에는 백선생도 계시니 오늘은 즐거운 식사를 나누도록 하세나."
철자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 얘기는 따로 천천히 합시다. 한데 당소협과 호소협은 어인 행차신가? 단순히 지나는 길에 들른 것 같지는 않은데?"
두 청년을 바라보는 철자성의 눈길은 부드럽지 않았다. 그는 당세곤이 자신의 아들인 철무영과 함께 용봉칠영에 속하는 기재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그에게 호감을 갖지 못하고 있었다. 특히 만금대인의 아들 호사붕은 더더욱 호감이 가지 않았다.
"예, 소생이 이곳에 온 것은 평소 흠모하던 황노선배님께 인사를 여쭙는 것과 함께 태자당 일원인 황보소저를 소생의 집으로 초대하기 위해서입니다."
호사붕의 말에 황보수선의 아미가 잔뜩 찌푸러졌다. 호사붕은 그녀의 반응은 개의치 않고 계속 말했다.
"마침 부친께서 작금의 무림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태자당이 분발해야 한다시며 격려의 자리를 만들테니 젊은 인걸들을 초빙하라는 말씀이 계셨습니다."
황보일학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 만금대인께서 그런 말씀을 하셨소? 과연 훌륭한 어른이시로군."
호사붕은 득의에 찬 표정으로 자랑스럽게 떠들었다.
"그래서 소생은 무림군왕성과 흑석보를 거쳐 이곳에 온 것입니다. 이곳에서 황보낭자에게 정식으로 초청의 예를 드린 후에는 철검장으로 갈 예정이었습니다. 이미 철기문과 화산, 금사신궁 등에는 전갈이 가 있을 것입니다."
황보일학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인자한 음성으로 말했다.
"허허! 그랬었군. 그야 좋은 일이 아닌가? 어찌 마다할 일이겠소? 수선아, 너도 참석하도록 하거라."
황보수선은 공손히 머리를 조아렸다.
"예, 그리 하겠어요. 아버님."
그녀는 시선을 호사붕에게로 돌렸다.
"한데 호소협, 남궁당주도 참석하나요?"
"그야 이를 말입니까? 태자당의 영웅들이 모두 모이는 자리에 당주님이 빠져서야 말이 안되는 일이지요. 물론 소연낭자도 참석하실 겁니다."
황보수선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말했다.
"알겠어요. 저도 반드시 가겠어요."
기실 그녀는 마음속으로 한 가지 결심을 굳히고 있었다. 그것은 자신이 직접 남궁청운을 만나 청혼을 거두어 달라고 하려는 것이었다. 그것만이 부친이 번뇌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었다.
"하하! 호형, 소생도 초청자 명단에 들어있소?"
당세곤이 빈정거리며 묻자, 아니나 다를까? 호사붕의 얼굴에는 비웃음이 떠올랐다.
"귀하도 태자당에 속해 있소? 내가 알기로는 태자당 동지들을 암살한 흉수로 지목받고 있는 것 같은데?"
당세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하하! 진실은 언제고 밝혀지는 법이오. 이번 기회에 확실히 누명을 벗기 위해서라도 꼭 갈 생각이오. 그러니 젓가락 하나만 더 준비해 주시구려."
의외로 호사붕은 선선히 응답했다.
"좋소. 어차피 준비할 식탁이니 불청객 하나 끼어든다고 달라질 것은 없소. 굳이 오겠다면 말리지 않겠소."
당세곤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는 호사붕을 예리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다시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 호의에 감사드리오. 내 받드시 가리다."
이때 황보수선이 엉뚱한 말을 던졌다.
"호소협, 그럼 이곳에 계신 백공자님도 함께 가도 되겠지요?"
"아니... 황보소저, 그건......?"
자신과 관련 없는 대화에 설련주(雪蓮酒)의 맛을 음미하며 고개 숙이고 있던 백육호였다. 그는 놀란 나머지 더듬거렸다.
호사붕은 힐끗 그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 물론이지요. 그렇지 않아도 소생이 청하려던 참이었습니다. 백선생은 우리 당주님의 생명의 은인이 아니오? 의당 형제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을 것이오."
"하지만 소생은......."
황보일학이 정색을 하며 말했다.
"백선생, 그리하시오. 선생의 의술 덕분에 아내의 증상도 많이 호전됐으니 수선과 함께 들러보는 것도 좋을 것 같소이다."
백육호는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당세곤은 좌중을 둘러보며 낭랑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거 잘됐구려. 마침 이곳에 철형도 와 계시니 우리 모두 함께 출발하면 되겠구려?"
호사붕은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일어섰다.
"그럼 그렇게 알겠습니다. 소생은 준비할 것도 있으니 먼저 출발하겠습니다."
그는 황보일학과 철자성에게 손을 마주잡는 공수의 예를 표했다.
"아니? 하루 유하지도 않고?"
"아닙니다. 먼저 가서 귀빈들을 맞기 위한 준비를 하는 게 도리일 것 같습니다. 그럼......."
호사붕은 황보일학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날 밤 황보세가를 떠났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황보수선과 철무영, 당세곤도 출발했다. 그 속에는 뜻밖의 초청을 받은 백육호도 포함되어 있었다.
④
무한에서부터 만금장(萬金莊)이 있는 남경(南京)까지는 가까운 거리가 아니었다.
당세곤은 황보수선과 동행한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분이 좋은 듯 연신 빙글거리며 한시도 입을 쉬지 않았다.
반면 황보수선의 관심은 다른 데 가 있었다. 그녀는 당세곤의 말에는 콧대답을 하면서도 여행 도중에 백육호에게 이곳저곳의 명승지를 자세히 설명해주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은 당세곤의 자존심을 건드리기에 충분했다. 뿐만 아니라 철무영도 우울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당세곤은 끈질겼다.
그는 황보수선이 어떻게 대하든 지치지 않고 그녀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었으며 관심을 끌기 위해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하고 있었다.
한편 백육호는 당세곤과 철무영의 표정에서 그들이 황보수선에게 어떤 감정을 갖고 있는지 짐작해낼 수 있었다. 그는 황보수선이 고의로 자신에게 접근하며 이것저것 친절하게 말을 할 때마다 두 청년의 안색이 변하는 것을 몇 번이나 보았다.
그 점은 그를 몹시 불편하게 했다.
"자, 배도 출출하고 하니 객잔에서 요기를 하도록 합시다."
황보수선의 곁에 바짝 붙어 쉴새없이 종알거리던 당세곤이 말고삐를 당기며 제안했다.
양자강변에 위치한 안경(安慶)이란 시진이었다.
강변에는 객점들이 제법 번성하고 있었으며 양자강의 물줄기를 이용한 문물의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곳이었다.
일행은 규모가 꽤 커 보이는 객점에 들었다.
점소이에게 말고삐를 넘기고 안으로 들어서자 빈 자리가 없을 정도로 손님들이 꽉 차 있었다.
"조용한 자리가 없느냐?"
당세곤은 점소이에게 은자를 쥐어주며 물었다.
"헤헤! 그럼 소인을 따라옵쇼."
점소이는 은자를 받자 입이 쩍 벌어지며 그들을 이층으로 안내했다. 이층은 탁 트인 전망을 갖추고 있어 한눈에 양자강이 내려다 보였으며 내부도 제법 고급스럽게 꾸며져 있었다.
그곳에는 꽤 부유해 보이는 상인(商人)들이 삼삼오오 앉아 있을 뿐, 자리가 넉넉히 비어 있었다.
일행은 창가에 자리를 잡은 후 음식을 시켰다.
음식이 나오자 그들은 허기진 배를 채우기 시작했다. 그런데 갑자기 요란한 말발굽소리가 지축을 울렸다.
두두두두두!
"끼럇!"
"......?"
일행의 눈길은 일제히 창밖으로 향했다. 사십여 명의 마상인(馬上人)들이 말을 멈추고 있었다. 그들은 민첩한 동작으로 좌우의 객점들을 향해 흩어졌다.
"호! 상당한 고수들이로군. 어떤 자들일까?"
당세곤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일행은 다시 식사에 열중했다.
우당탕! 쿵쿵!
문득 요란한 발자국 소리가 울렸다. 잠시 후 이층으로 오 인의 남색 무복(武服)을 걸친 무사들이 올라왔다. 그들은 바로 마상인들이었다.
"저들은......?"
철무영의 눈이 번쩍 빛났다. 무사들의 이마에 두른 영웅건에 새겨진 글씨를 본 때문이었다.
- 동(東).
영웅건에는 푸른색 수실로 그런 글자가 수놓아져 있었다.
"아는 자들인가요?"
황보수선이 물었다.
"그렇소. 저들은 황실 소속의 동창(東廠) 무사들이오."
이때였다. 좌중을 날카로운 눈으로 둘러보던 중년무사가 음성을 돋궈 외쳤다.
"모두들 이 그림을 주목하시오!"
곁에 선 한 무사가 한 폭의 초상화를 펼쳐 좌중을 향해 보여주었다.
"이자는 대역죄인이오. 여러분 중에 이자를 본 사람이 있다면 어서 나서시오. 나라에서 후한 상을 내릴 것이오."
초상화를 펼친 무사는 느린 걸음으로 좌석 사이를 돌며 일일이 초상화를 손님들이 잘 볼 수 있도록 보여주였다.
잠시 후 그는 일행이 있는 자리까지 왔다.
"이자를 본 사람 없소?"
무사는 일행을 향해 딱딱하게 물었다.
모두 고개를 저으려는데,
"그자가 무슨 죄를 지었소?"
느닷없는 질문이 나왔다. 일행은 흠칫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 질문은 백육호의 입에서 나온 것이었다.
무사는 눈빛을 번쩍이며 물었다.
"이자를 보았소?"
백육호는 담담히 말했다.
"내가 먼저 물었소."
"뭣이?"
무사의 안색이 급변했다.
그는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을 갖고 있는 동창의 무사였다. 그의 입장에서 본다면 백육호의 태도는 무례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너는 누구냐?"
무사는 초상화를 접으며 날카롭게 물었다. 백육호는 여전히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나라의 녹을 먹는 이라면 당연히 겸손해야 할 터, 귀하는 어찌하여 근본을 잊고 백성을 핍박하는 태도를 취하는 것이오?"
"이... 이 놈이?"
무사의 안색이 푸르댕댕하게 변했다.
한편 백육호는 초상화의 인물을 보는 순간 적지 아니 놀랐다. 초상화의 인물이야말로 언젠가 동사군도에 찾아왔던 동창무사 왕승(王升)이었던 것이다.
그는 사사영을 직접 호송해 왔던 동창 소속의 무사로 당시 동사군도의 수인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겨주었던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대역죄인이 되었다니 백육호는 궁금하기 그지없었던 것이다.
백육호는 그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것은 왕승이 직접 사사영을 호송하고 왔을 뿐 아니라 동사군도의 제왕 조탁과 곽초량에게 사사영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말라고 협박했기 때문이었다.
무사는 손바닥으로 식탁을 탕! 소리나게 내리쳤다.
"이놈! 넌 누구냐? 대역죄인과 무슨 관계라도 있느냐?"
무사는 백육호의 태도에 부쩍 의심이 간 듯 눈에 살기를 돋구었다.
"아무 관계도 없소."
백육호는 여전히 담담히 말했다.
"뭐라고? 그럼 네놈이 감히 날 놀리려 했단 말이냐? 더구나 동창의 부영반 나리께서 직접 납신 자리에서 말이냐?"
무사는 슬쩍 뒤쪽을 쳐다보았다.
역삼각형의 얼굴에 죽 째진 눈을 가진 중년무사를 은연중 가리키는 말이었다.
동창의 부영반.
그 정도 신분이면 왕후장상(王侯將相)이나 고관대작(高官大爵)이라 해도 감히 함부로 대하지 못할 정도다. 그러니 권력으로 백육호의 기를 꺾어보겠다는 의도가 다분히 깔려있는 행동이었다.
그러나 그는 상대를 잘못 택했다. 그의 눈앞에 앉아 있는 사 인은 일반백성이 아니라 강호인이었던 것이다.
이때 황보수선이 고운 눈을 치뜨며 항의했다.
"당신이야말로 국록(國祿)을 먹는 관리가 아닌가요? 어찌하여 양민에게 하대를 하며 윽박지르는 거죠?"
평소에는 온유한 성품에 차분하기만한 황보수선이었으나 오늘따라 그녀의 얼굴에는 차가운 냉기가 감돌았다.
"방금 뭐라고 하였느냐?"
문득 착 가라앉은 음성과 함께 중년무사, 즉 부영반이 다가왔다.
이때였다.
철무영이 일어서더니 부영반을 향해 정중히 포권했다. 그는 부드러운 어조로 설명했다.
"부영반 나리, 서로에게 오해가 있는 듯 싶습니다. 소생은 귀주성 철검장의 철무영이라 합니다. 이분 소저는 황보세가 출신의 황보소저이며 이분은 사천당문의 당세곤 소협입니다. 그리고 이분 백공자는 항주에서 존경받고 있는 명의(名醫)로 감히 소생이 신분을 보장할 수 있습니다. 대역죄인과는 아무런 연고도 없으니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
부영반이란 자는 흠칫했다. 그의 얼굴에 드리워졌던 차가운 기운은 곧 부드럽게 풀렸다.
"알고 보니 무림의 기린아로 일컬어지는 용봉칠영 중에서 세 분이 계셨구려. 이거 몰라보고 결례했소이다. 본인은 상관종무(上官鍾茂)라 하오."
상관종무는 주먹을 모아 포권했다.
"아, 상관대협이셨군요. 혁혁한 명성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뵙게 되니 영광입니다."
"원, 별말씀을 다하시오. 철소협."
철무영의 깍듯한 공대에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상관종무는 친절하게 설명했다.
"다른 분도 아니고 강호에 혁혁한 명성을 지니고 계신 분들이니 설명해 드리겠소이다. 초상화의 죄인은 한때 본인과는 한솥밥을 먹던 처지였으나 갑자기 역천의 죄를 저지른 자올씨다."
"역천의 죄라 하심은......?"
철무영도 이쯤 되자 궁금증이 일어 물었다.
"그자는 동료들을 선동하여 황족의 사저(私邸)에 침입했소이다. 마침 그곳에는 절정무공을 익힌 위사(衛士)들이 황족을 호위하고 있었기에 역도들은 소기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달아났소이다. 동창은 그 사건의 수습을 맡게 되었소이다. 그래서 초상화를 배포하고 그자를 찾으러 나선 것이외다."
백육호는 짚이는 것이 있었다.
'황족이라 함은 아마도 건친왕일 것이다. 왕승은 건친왕부를 습격했다가 도주했을 것이다.'
그는 왕승의 행위를 짐작할 수 있었다. 또한 그가 대역죄를 마다하지 않고 동료들과 함께 그 같은 일을 감행한 이면에는 반드시 피치 못한 사정이 있으리라 여겨졌다.
대영반은 어깨를 들썩이며 덧붙였다.
"그자는 중상을 입고 있소이다. 머지않아 우리들 손에 잡힐 것이오."
철무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요. 상관대인께서 직접 동창의 고수들을 이끌고 나섰으니 천하의 그 누가 잡히지 않겠습니까?"
"하하! 물론이지요. 자, 그럼 이만 가보겠소이다. 아무튼 강호의 영웅들을 만나게 되어 반가웠소이다."
상관종무는 대소를 터뜨리며 돌아섰다.
그가 계단을 통해 완전히 사라지기를 기다려 철무영은 자리에 털썩 앉으며 백육호를 나무랐다.
"백선생, 어째서 동창의 무사들에게 시비를 거는 것이오? 자고로 관리들과는 어떤 일로도 상충하지 말라는 것이 무림의 관례가 아니오? 더구나 보통 관리도 아닌 황궁의 동창무사들에게 무엇때문에 쓸데없는 객기를 부리는 것이오?"
철무영은 그동안 백육호에게 지니고 있던 감정을 이번 기회에 쏟아내려는 듯 날카롭게 추궁했다. 그러자 황보수선이 즉각 나섰다.
"철소협, 그만 하세요. 백공자님이 뭘 잘못했다고 그러는 거예요? 애초부터 잘못은 그들에게 있었어요. 그러니 그만 하세요."
철무영은 그만 얼굴이 굳어지고 말았다.
"소저! 이번 일은 소저가 나설 일이... 아, 아니오! 그만 둡시다!"
철무영은 화가 치민 듯 벌떡 일어나더니 성큼성큼 계단 아래로 내려가 버렸다. 음식은 채 반도 손대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자 당세곤이 빈정거렸다.
"아무리 백선생이 황보소저의 모친을 구했다지만 소저의 관심이 지나친 것 같소이다."
가시가 돋친 말이었다. 그러지 않아도 철무영의 반응에 당혹해 하던 황보수선은 그를 한 차례 흘겨보고는 이내 백육호를 향해 부드럽게 말했다.
"백공자님, 철소협은 공자님을 걱정해서 하는 말이에요. 너무 괘념치 마세요."
백육호는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차갑게 말했다.
"황보소저. 이번 일은 내가 잘못한 것이오. 따라서 철형이 나무라는 것은 당연한 일이오. 공연히 소저가 날 비호할 것 없소이다. 소저의 그런 행동은 날 돕는 것이 아니라 해치는 일이오. 내 분명히 말하거니와 앞으로는 절대로 내 일에 나서지 마시오."
백육호는 말을 마친 후 몸을 일으켰다.
"백공자님. 아직 음식이 남았어요. 왜......?"
황보수선은 얼굴을 붉히며 말끝을 흐렸다. 백육호가 그녀의 말을 듣지도 않고 이미 계단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힘없이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한편 당세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천하제일의 가문과 미색(美色), 재능을 지닌 그녀였다. 강호의 영웅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그녀에게 구애해 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평소의 그녀는 언제나 품위있고 당당한 모습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녀의 모습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한낱 무명의 의원에게 굴욕적인 취급을 받으면서도 말없이 감내하고 있지 않은가?
당세곤은 착잡한 마음을 금치 못했다.
아니, 그는 울고만 싶은 심정이었다. 황보수선의 마음이 이미 저만치 멀어졌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첫댓글 즐독입니다
즐감요~~
감사합니다
잘~감상~~고맙습니다~~~
감사^^
감사합니다.
즐~감하고 갑니다.
잘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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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