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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 8,12-17
12 형제 여러분,
우리는 육에 따라 살도록 육에 빚을 진 사람이 아닙니다.
13 여러분이 육에 따라 살면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힘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 것입니다.
14 하느님의 영의 인도를 받는 이들은 모두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15 여러분은 사람을 다시 두려움에 빠뜨리는 종살이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자녀로 삼도록 해 주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이 성령의 힘으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는 것입니다.
16 그리고 이 성령께서 몸소,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우리의 영에게 증언해 주십니다.
17 자녀이면 상속자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상속자입니다.
그리스도와 더불어 공동 상속자인 것입니다.
다만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누리려면 그분과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
복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 13,10-17
10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어떤 회당에서 가르치고 계셨다.
11 마침 그곳에 열여덟 해 동안이나 병마에 시달리는 여자가 있었다.
그는 허리가 굽어 몸을 조금도 펼 수가 없었다.
12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를 보시고 가까이 부르시어, “여인아, 너는 병에서 풀려났다.” 하시고,
13 그 여자에게 손을 얹으셨다.
그러자 그 여자가 즉시 똑바로 일어서서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14 그런데 회당장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셨으므로 분개하여 군중에게 말하였다.
“일하는 날이 엿새나 있습니다.
그러니 그 엿새 동안에 와서 치료를 받으십시오.
안식일에는 안 됩니다.”
15 그러자 주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위선자들아,
너희는 저마다 안식일에도 자기 소나 나귀를 구유에서 풀어 물을 먹이러 끌고 가지 않느냐?
16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딸인 이 여자를 사탄이 무려 열여덟 해 동안이나 묶어 놓았는데, 안식일일지라도 그 속박에서 풀어 주어야 하지 않느냐?”
17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니 그분의 적대자들은 모두 망신을 당하였다.
그러나 군중은 모두 그분께서 하신 그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두고 기뻐하였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여인아, 너는 병에서 풀려났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열여덟 해 동안이나 병마에 시달려 허리가 굽은 여인’의 인생을 바꾸어 놓으십니다.
“여인아, 너는 병에서 풀려났다.”
(루카 13,12)
그 여인이 치유를 간청하거나 믿음을 고백했던 것도 아니었지만, 예수님께서는 한 마디의 ‘말씀’과 ‘안수’로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날은 ‘안식일’이었습니다.
회당장은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주신 예수님께 대한 분노를 안식일에 몰려든 군중들에게 뒤집어씌우고 율법 위반으로 단죄합니다.
신명기(5,12-15)와 탈출기(20,8-18)에 따라 안식일에 노동할 수 없다는 구실로 말입니다.
그러나 그 여자가 한 일은 치유를 받았을 뿐, 노동을 한 것은 없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하신 활동도 ‘말씀’과 ‘안수’ 밖에 없었고. 치유 자체는 하느님의 권능에 기인한 것이었습니
그럼에도 회당장은 치유를 하느님이 이루신 해방으로 보지 않고, 인간적 노동으로 간주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치유를 하셨지만, 회당장은 그것을 율법 위반으로 간주했습니다.
그러나 안식일의 정신은 탈출기(20,8-11)에 따르면, 선행을 멈추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악행을 멈추고 죄와 질병으로부터 해방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곧 안식일은 장차 있을 휴식의 표상으로, 죄의 짐을 지지 말고 선행을 쌓아 미래의 안식을 누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회당장은 병마에 묶여있던 여인처럼, 문자(율법)에 묶여있고 질투(어둠과 죽음)에 묶여 있었습니다.
사실 그가 ‘안식일에 병을 고쳐서는 안 된다’고 한 것은 예수님을 비난하기 위한 구실이었을 뿐, 그가 비난하는 진짜 이유는 예수님께서 찬양받는 것에 대한 질투였습니다.
그는 질투에 묶여 눈이 멀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를 위선자라고 질책하십니다.
"위선자들아,
너희는 저마다 안식일에도 자기 소나 나귀를 구유에서 풀어 물을 먹이러 끌고 가지 않느냐?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딸인 이 여자를 사탄이 무려 열여덟 해 동안이나 묶어 놓았는데, 안식일일지라도 그 속박에서 풀어주어야 하지 않겠느냐?"
(루카 13,16)
이처럼 유대인들이 안식일이더라도 가축을 사용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듯이,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날인 ‘안식일’에 아브라함의 병든 딸을 고쳐주시는 것을 당연한 일, 아니 반드시 해야 할 일로 여기셨습니다.
생명을 바로 세우고 살리는 일, 그것은 바로 하느님이 제정하신 안식일의 정신이었습니다.
이토록, 예수님께서는 치유를 통하여 안식일의 정신을 실현하시고, 하느님의 구원을 선포하십니다.
오늘 우리도 이를 본 군중처럼, “그분께서 하신 그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두고 기뻐”(루카 13,17)하며, ‘허리 펴진 여인’처럼, 우리 주님 “하느님을 찬양”(루카 13,13)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안식일일지라도 그 속박에서 풀어주어야 하지 않겠느냐?"
(루카 13,16)
주님!
꺾인 제 영혼에 당신 손을 얹으소서.
악행을 멈추고, 죄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허리를 펴고, 하늘을 올려다보게 하소서.
무거운 등짐을 내려놓고, 하늘을 우러러 찬양하게 하시고,
당신 안에서 새롭게 창조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정신차리고, 영의 불은 끄지 않는>
우리말에서 정신과 관련한 말들을 한번 생각나는 대로 모아봤습니다.
정신 나간 놈.
요즘 정신이 없어!
정신을 쏙 빼놓네.
그런 썩어빠진 정신을 가지고 뭘 할 수 있냐!
이것이 정신과 관련한 부정적인 표현이라면 좋은 의미의 표현과 사용도 있습니다.
제정신이 들다.
정신을 차리다.
정신 차려!
정신일도 하사불성(精神一到 何事不成: 정신을 한곳에 모으면 안 되는 일이 없다.)
우리가 잘못 사는 것은 정신없이 사는 경우와 정신이 있긴 있는데 그 정신이 썩어빠진 정신이거나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사는 경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신없이 살거나 썩어빠진 정신으로 살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면,
그때 우리는 썩어빠진 정신은 몰아내고 정신을 차리거나 제정신이 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우리는 만족하지 말아야 합니다.
고작 정신 차리고 제정신 드는 것으로 만족 말고,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 되게 하는 주님의 영을 모셔 들여야 합니다.
사실 제정신 차리는 것은 온전한 인간이 되게 하는 것으로 그치지만, 주님의 영을 모셔 들이면 우리는 하느님 자녀가 되게 한다는 뜻으로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여러분은 사람을 다시 두려움에 빠뜨리는 종살이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자녀로 삼도록 해 주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라틴말 Spiritus나 영어 Spirit을 우리말로 번역하면 ‘얼’이 되고, 한자어로 번역하면 ‘정신’ 또는 ‘영’으로 번역이 됩니다.
그러니까 한자어에서는 인간 안에 있는 Spirit은 정신이라고 하고, 인간 밖에 있는 Spirit은 악령이든 더러운 영이든 영이라고 쓰며, 하느님에게서 오는 영은 이런 잡령들과 구분하여 Holy Spirit 그러니까 거룩한 영 또는 성령이라고 하지요.
그리고 당연히 하느님에게서 오는 성령만이 우리를 하느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게 하고, 부모와 자식의 끈으로 단단히 묶어줘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해 준다고 바오로 사도는 얘기합니다.
그러므로 거듭 얘기하면 나간 정신을 차리는 것이나 잃었던 정신을 돌아오게 하는 것이나 썩어빠진 정신 대신 제정신이 들게 하는 것도 우리가 해야 할 바이지만, 우리가 진정 신앙인이라면 우리를 하느님 자녀가 되게 하는 성령, 하느님을 우리 아빠 아버지가 되게 하는 성령을 모셔 들여야 합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는 이렇게도 얘기합니다.
“주님께서 일하는 은총을 주신 형제들은 충실하고 헌신적으로 일할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영혼의 원수인 한가함을 쫓아내는 동시에 거룩한 기도와 헌신의 영을 끄지 않도록 할 것입니다.
현세의 다른 모든 것들은 이 영에 이바지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오로 사도의 가르침대로 성령을 모셔 들이고, 프란치스코의 가르침대로 성령의 불을 끄지 않는 오늘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사람이 희망이다>
선한 것은 선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런데 마음이 비딱한 사람은 아무리 선한 것이라도 트집을 잡게 됩니다.
그는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의 행동을 취합니다.
그래서 자기 마음대로 의견이나 행동을 갖다 붙입니다.
가끔은 전혀 사실과는 다른, 진실과는 거리가 있는 자기 생각을 사실처럼, 진실처럼 얘기하는 이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권위 있는 가르침도 고집을 더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마에 시달리는 여자에게 손을 얹어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그러자 회당장이 분개하여 군중에게 말했습니다.
“일하는 날이 엿새나 있습니다.
그러니 그 엿새 동안에 와서 치료를 받으십시오.
안식일에는 안 됩니다.”
그러나 그는 아마도 자기가 병에 걸렸으면 자기 위치를 내세우며 병을 낫게 해 달라고 매달렸을 것입니다.
자기 병은 중하고 남의 병은 하찮게 여길 사람입니다.
그가 마음을 열어 주님의 능력을 받아들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사실 안식일 법은 훌륭한 법입니다.
원래 안식일 제도는 사람들에게 자유와 해방을 가져다주는, 쉬게 하고 안식을 취하게 하는 제도였습니다.
그것을 지키는 일은 장려할 일입니다.
그러던 안식일 제도가 사람을 짓누르는 짐으로 변해 병자를 치유하는 일까지 금해 버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짐을 벗겨 주십니다.
‘자기 소나 나귀는 안식일에도 구유에서 풀어 물을 먹이면서 열여덟 해 동안 병마에 시달린 이는 안식일이라 하여 풀어줄 수 없단 말이냐?’
한마디로 ‘사람이 짐승만도 못하냐?’고 하셨습니다.
모든 법이 그렇듯이 법은 어디까지나 법입니다.
그 법이 인간 위에서 인간을 지배해서는 안 됩니다.
만일 어떤 법이 인간 위에 군림한다면 그 법은 마땅히 거부되어야 합니다.
법은 인간을 위한 것이고 사람이 희망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낙태 반대운동을 하고 사형제도 철폐를 주장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생명을 어느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습니다.
법을 함부로 무시해서도 안 되지만 인간의 존엄을 해친다든지 이웃 사랑을 규제한다면 그 법은 존재의 의미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율법을 알면서도 안식일에 드러내 놓고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안식일은 은총의 날이요, 삶의 멍에로부터 해방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규범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규범은 하느님의 법 앞에서 자유로워야 합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지식으로 율법을 해석하고 인간의 전통에 집착하면 인간을 향한 예수님의 사랑과 연민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망신을 당하게 됩니다.
따라서 내가 아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의 사랑은 온갖 규범과 판례를 뛰어 넘습니다.
내가 잘한다고 하는 것이 그만 다른 사람을 옭아맬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마음을 바로 해야 하겠습니다.
주일미사 참례를 의무이기 때문에, 계명을 지키기 위해 참례한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지요?
우리는 주님을 흠숭하고 찬미하며 감사하기 위해 미사참례 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그건 설득이 아니라 설교다>
누군가 “신부님 강론은 설득이 아니라 설교입니다”라고 하면 기분이 어떨까요?
어쩌면 오늘 복음은 강론이 단순한 설교가 아닌 설득이 되려면 어떤 것이 필요한지 잘 알려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열여덟 해 동안 병마에 시달려 허리를 조금도 펼 수 없었던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인아, 너는 병에서 풀려났다.”
그러자 회당장이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시는 것을 보고는 분개하여 군중에게 말합니다.
“일하는 날이 엿새나 있습니다.
그러니 그 엿새 동안에 와서 치료를 받으십시오.
안식일에는 안 됩니다.”
이것은 회당장의 설교입니다.
예수님은 더욱 설득력 있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위선자들아,
너희는 저마다 안식일에도 자기 소나 나귀를 구유에서 풀어 물을 먹이러 끌고 가지 않느냐?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딸인 이 여자를 사탄이 무려 열여덟 해 동안이나 묶어 놓았는데, 안식일일지라도 그 속박에서 풀어주어야 하지 않느냐?”
그러자 예수님의 적대자들은 모두 망신당하고 군중은 그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두고 기뻐하였습니다.
이렇게 오늘 복음은 회당에서 회당장과 설교로 대결을 벌이는 구도이고 결국 예수님께서 승리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설교는 설득적이었고 회당장의 설교는 말 그대로 설교에 그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설교는 무엇이 다를까요?
바로 구체적인 비유를 들어 설명하신다는 게 다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예수님께서 비유를 통하지 않고서는 말씀하지 않으셨다는 구절을 너무도 쉽게 간과합니다.
그러나 비유가 없으면 그 설교는 설득력을 잃습니다.
재러드 포글은 대학교 3학년 당시 몸무게가 192킬로그램에 달했고 ‘커다란 사람들을 위한 옷가게’에서만 구할 수 있는 가장 큰 사이즈인 XXXXXXL의 셔츠를 입었습니다.
바지의 허리 치수는 60인치나 되었습니다.
재러드의 아버지는 인디애나폴리스의 의사였는데, 벌써 몇 년째 아들에게 몸무게에 관해 경고했지만, 아무런 효과도 거두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병원에서 부종을 앓고 있다는 진단을 받고는 몸무게를 줄이기로 결심합니다.
당시 서브웨이 샌드위치는 “서브웨이 샌드위치 일곱 개에 함유된 지방은 도합 6그램도 안 됩니다”라고 홍보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재러드는 서브웨이 샌드위치를 먹으며 다이어트를 해 보기로 합니다.
점심으로는 야채 서브 샌드위치를 먹고, 저녁으로는 6인치짜리 터키 샌드위치를 먹었습니다.
이렇게 ‘서브웨이 다이어트’를 시작한 지 3개월 후, 그는 처음으로 저울 위에 올라섰고 무려 50킬로그램이 빠진 150킬로가 되었습니다.
나중에 80킬로그램까지 빠집니다.
이 사실을 알아낸 광고 회사는 ‘지금 우리 손 안에 엄청난 스토리가 굴러 들어왔어!’라며 기뻐하였습니다.
그러나 광고 회사 사장의 제안에 본사 마케팅 부장은 시큰둥하였습니다.
마케팅 부장은 샌드위치는 맛으로 경쟁해야지 몸에 좋다고 말해봐야 소용없다는 견해였습니다.
그러나 광고 회사는 공짜로 이 광고를 만들어주겠다는 제안과 샌드위치를 먹는 것이 전부가 아닌 운동과 의사의 지도가 있어야 한다는 문구를 넣는다는 끈질긴 설득으로 재러드의 사연을 광고로 내기로 합니다.
결과는 어땠을까요?
초대박이었습니다.
『스틱』이라는 책에 소개된 사연입니다.
스토리는 정말 엄청난 힘을 발휘합니다.
책 『스틱』에는 설득력 있는 표현을 하는 여섯 가지 방법이 나와 있습니다.
단순해야 하고, 의외성이 있어야 하며, 구체적이어야 하고, 믿을 수 있어야 하며, 감정을 건드려야 하고, 스토리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여섯 가지 조건을 다 채우는 것이 비유입니다.
예수님은 비유 말씀을 통해 이 여섯 가지 딱 달라붙는 메시지를 전달할 줄 아셨습니다.
그래서 비유를 통하지 않고는 말씀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얼마 전에 어떤 분이 누군가와 싸우고 미워하고 한 것에 대해 말했습니다.
저는 용서하라기보다는 비유를 통해 말씀드렸습니다.
“바다의 수심에 따라 물고기가 사는 종류가 다른 것을 아시죠?
만약 내가 어떤 물고기와 문제가 있다면 나는 그 수심에 있는 것입니다.
같은 수준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부의 그물에 걸린 물고기들입니다.
그러면 더는 바다의 물고기들에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싸우면 같은 수준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쉽게 이해하였습니다.
상대가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의 비유를 들어주는 것은 내가 그 수준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합니다.
비유를 들 수 있다는 말은 다른 수준에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만이 하느님 나라를 체험하셨기에 그것에 대한 설명은 이 지상의 비유로만 표현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말이 단순한 설교가 아닌 설득이 되기 위해 우리도 비유를 통하지 않고서는 말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주님께서 우리의 고통을 지켜보시며 함께 하십니다>
혹시라도 18년 동안 혹독한 병고에 시달려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예수님 시대 당시 평균 수명이 고작 4~50세 였으니, 18년을 병고에 시달렸다면 거의 인생의 절반 가량을 병마와 싸웠다는 말입니다.
병과 관련해서 나름 많은 고초를 겪었다고 자부하는 저는 어린 시절 3년여, 젊은 시절 7년여, 한 십년 병치레를 해보니... 정말이지 신체는 물론이고 마음이며 정신, 영혼이며 멘탈이 탈탈 털리는 느낌이었습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지푸라기라도 잡아보자는 심정에. 이 병원 저 병원 순례를 다녀보지만 차도는 없고... 쌩고생들 하고 계시는 환자들의 그 심정 백이십퍼센트 이해가 갑니다.
18년 세월 동안 병마에 사로 잡혀 허리를 조금도 펴지 못한채 살아왔던 한 여인이 오늘 마치도 기적처럼, 동화의 한 장면처럼 인생 역전을 이룹니다.
이렇게 사는 바에야 차라리 죽는 게 더 낫다는 심정에 세상 울적한 나날을 보내고 있던 여인을 예수님께서 눈여겨 보십니다.
수많은 사람들을 제쳐놓고 오직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가십니다.
그녀의 아픈 부위에 친히 당신 손을 대십니다.
말씀 한 마디로 그녀의 오랜 질병, 끔찍한 질병을 낫게 하십니다.
여인은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하면서 감격해합니다.
눈에서는 감사의 눈물이 쉼없이 흘러내립니다.
순식간에 고질병의 치유라는 평생 소원을 이룬 여인의 모습에 예수님도 흐뭇해하십니다.
회당 내 군중들도 함께 기뻐합니다.
그러나 유일하게 한 사람, 회당 내에서 자칭 가장 거룩한 사람, 가장 하느님 가까이 있다고 자부하던 사람, 회당장만이 볼멘 목소리로 외칩니다.
“일하는 날이 엿새나 있습니다.
그러니 그 엿새 동안에 와서 치료를 받으십시오.
안식일에는 안 됩니다.”
오늘 우리는 어느 편에 서 있습니까?
하느님께서 선물로 주신 은총으로 고통 중에 있는 이웃들에게 치유를 선물하고 있습니까?
그게 아니라면 오랜 고통에시 해방된 이웃의 모습에 함께 기뻐하고 있습니까?
혹시라도 눈에 불을 켜고 율법의 잣대를 들이대며 이웃을 심판하고 있지 않습니까?
오늘도 모질고 긴 병고에 시달리고 계신 분들, 부디 힘내시길 빕니다.
이 혹독한 고통, 반드시 끝이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반드시 우리에게 다가오시고 손수 우리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주실 것입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일>
안식일에는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분명히 십계명에 들어 있는 계명인데, 신명기를 보면, 일을 하면 안 되는 이유가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주 너의 하느님이 너에게 명령한 대로 안식일을 지켜 거룩하게 하여라.
엿새 동안 일하면서 네 할 일을 다 하여라.
그러나 이렛날은 주 너의 하느님을 위한 안식일이다.
그날 너의 아들과 딸, 너의 남종과 여종, 너의 소와 나귀, 그리고 너의 모든 집짐승과 네 동네에 사는 이방인은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하여 너의 남종과 여종도 너와 똑같이 쉬게 해야 한다.
너는 이집트 땅에서 종살이를 하였고, 주 너의 하느님이 강한 손과 뻗은 팔로 너를 그곳에서 이끌어 내었음을 기억하여라.
그 때문에 주 너의 하느님이 너에게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령하는 것이다.”
(신명 5,12-15)
안식일은 단순히 ‘쉬는 날’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남을 쉬게 해 주는 날’입니다.
‘내가 일을 안 하는 것’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일을 안 시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아들과 딸, 종들, 이방인들에게 일을 안 시키는 날, 심지어 가축들에게도 일을 안 시키는 날이 안식일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일’은 ‘생계를 위한 노동’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 주셨다고 해서 회당장이 화를 낸 것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일’을(생계를 위한 노동을) 하셨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만일에 예수님께서 생활비를 벌기 위해서 병자를 고쳐 주셨다면, 그래서 병자를 고쳐 주신 다음에 치료비를 받았다면, 그것은 안식일을 안 지키신 것이 되고, 회당장이 화를 낸 것은 옳은 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서 병자를 고쳐 주신 것도 아니고, 치료비를 받으신 것도 아닙니다.
병자에게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베풀어 주셨을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을 본래의 정신대로 지키신 것이 됩니다.
그런데 회당장은 왜 예수님께 화를 내지 않고 군중에게 화를 냈을까?
예수님께 직접 화를 낼 용기가 없어서 그랬거나, 치료를 받는 것마저도 ‘일’로 생각했기 때문에 그랬을 수도 있습니다.
병원에 입원해 있는 환자의 경우에는 요일이 아무런 의미가 없을 때가 많습니다.
중병에 걸려서 사경을 헤매는 경우라면, 날짜도, 요일도 아무런 의미가 없고, 고통에서 벗어나기만을 갈망하게 됩니다.
만일에 그런 병자에게 가서 주일을 잘 지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사랑도 없고 인정도 없는, 글자 그대로 무자비한 율법주의자가 될 뿐입니다.
안식일은 ‘생계를 위한 노동’을 하지 않는 날이라는 말에 대해서 이런 질문을 할 수도 있습니다.
하루 벌어서 하루 먹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어떻게 하란 말인가?
일을 못하면 굶어야 하는데, 안식일이라는 날이, ‘일을 못해서 굶주리는 날‘로 되어버리는 것이 하느님의 뜻인가?
탈출기에서 ‘만나’가 내릴 때의 말씀을 보면, 주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제 내가 하늘에서 너희에게 양식을 비처럼 내려 줄 터이니, 백성은 날마다 나가서 그날 먹을 만큼 모아들이게 하여라.
... 엿샛날에는, 그날 거두어들인 것으로 음식을 장만해 보면, 날마다 모아들이던 것의 갑절이 될 것이다.”
(탈출 16,4-5)
하느님께서는 아무 대책도 없이 안식일에는 일하지 말라고 명령하신 것이 아니라, 안식일 전날에는 이틀 치 ‘만나’를 내려 주시면서 안식일에 일할 필요가 없게 해 주셨습니다.
“안식일에는 일하지 말고 그냥 굶어라.”는 결코 하느님의 뜻이 아닙니다.
오늘날의 우리 현실에서, 정말로 먹고살기 위해서 주일에도 일을 해야만 하는 사람들의 경우에, 그 사람들이 주일에 쉬지 못하고 주일을 지키지 못하는 것은 그 사람들 자신들의 탓이 아니라, 사회와 공동체의 책임입니다.
주일에는 일을 하지 않아도 먹고사는 데에 지장이 없게 해 주는 것은 공동체가 나서서 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십계명에 규정되어 있는 안식일이 단순히 일을 안 하고 쉬는 날이 아니라 ‘거룩하게’ 지내는 날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아무 일도 안 하는 것만으로 주일을 지키는 것은 아닙니다.
주일 하루를 온전히 ‘거룩하게’ 지내야 주일을 지킨 것입니다.
“나는 미사 참례를 했으니 주일을 지켰다.” 라고만 생각하고, 그 나머지 시간은 거룩하지 않게, 즉 세속 사람들과 다르지 않게 속된 오락을 하면서 놀았다면, 주일을 지킨 것이 아닙니다.
또 한 가지, 십계명에서 “엿새 동안 일하면서 네 할 일을 다 하여라.” 라는 말씀을 무심코 지나칠 때가 많은데, 이 말씀에서 “네 할 일”이라는 말은 생계를 위한 노동만을 가리킬 뿐입니다.
하느님 뜻을 거스르는 일은 ‘네 할 일’에 포함될 수 없습니다.
신앙인이라면, 그 엿새도 주님의 뜻을 실천하면서 ‘거룩하게’ 지내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주 5일 근무제’를 시행하면서 엿새가 아니라 닷새만 일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틀 동안 무엇을 하면서 쉬는가? 그냥 세속 사람들처럼 놀기만 하는 것은 아닌가?”도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 전주교구 금암동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예닮의 여정 - 하느님의 자녀로서 자유로운 삶>
"암사슴이 시냇물을 그리워하듯,
내 영혼, 하느님을 그리나이다."
(시편 42,1)
어제 강론 시 인용했지만 저에게 가벼운 충격이자 새로운 깨달음이었습니다.
무려 강론에 사랑이란 단어가 112회나 사용되었다는 것이 한편 부끄러웠고, 사랑이 빠진 인생이 얼마나 아무것도 아닌 것인가 하는 깨달음이 깊이 각인된 날이기도 합니다.
기도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판단의 잣대입니다.
자유롭게 하는 사랑, 생명을 주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그러합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을 대하니 저절로 참 많이 나눴던 사랑의 고백, 예닮기도를 바치고 싶습니다.
이런 사랑의 고백기도는 늘 반복하여 바쳐도 늘 새롭고 좋습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찬미합니다.
감사합니다.
기뻐합니다.
차고 넘치는 행복이옵니다.
이 행복으로 살아갑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늘 나라 천국이옵니다.
곳곳에서 발견하는
기쁨, 평화, 감사, 행복이옵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임을 깨닫나이다.
끊임없는 찬미와 감사의 삶중에
당신을 만나니
당신은 우리를 위로하시고 치유하시며
기쁨과 평화, 희망과 자유를 선사하시나이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당신과 함께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이제 당신을 닮아
온유와 겸손, 인내의 사람이 되는 것이
제 소망이오니 간절히 청하는 제 기도를 들어주소서.
당신께 영광이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
벌써 5년째 참 많이 나눴던 예닮기도 전문입니다.
명칭도 감사기도에서 행복기도로 이어 예닮기도로 바뀌었습니다.
우리의 영원한 사랑의 대상, 예수님은 이런 분입니다.
이런 사랑의 예수님의 진면목은 오늘 복음에서 유감없이 발휘됩니다.
등굽은 여자를 치유해주시는 장면에서 회당장의 첫눈에 들어온 것은 율법의 잣대 였지만, 예수님께는 사랑의 잣대였습니다.
열여덟해 병마에 시달리던 등굽은 여자가 상징하는 바, 온갖 세상 짐들 무게에 짓눌리며 살아가는 모든 불쌍하고 가련한, 참으로 해방과 자유가, 안식이 필요한 민초들이요 바로 이것이 안식일의 참된 취지이겠습니다.
이미 루카복음 앞부분에서 공생애가 시작될 때 선포된 주님의 사명이 실현되기 시작된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예나 이제나 계속되는 부자유하고 무지한 인간의 내적 현실이요 예수님이 아니고는 누가 우리를 참으로 해방과 자유의 길로 이끌 수 있겠는지요!
등굽은 병마에 시달리던 여자가 상징하는 바 우리 약한 인간 모두들입니다.
“여인아. 너는 병에서 풀려났다.”하시고 그 여자에 손을 얹으시자 그 여자는 즉시 똑바로 일어서서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하니 얼마나 멋지고 통쾌한 장면인지요!
그대로 부활의 기쁨에 주님을 찬양하는 치유받은 여인이요,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을 상징합니다.
똑같은 주님께서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온갖 근심과 걱정, 두려움과 불안으로 마음의 등 굽은 우리를 똑바로 일으켜 주십니다.
여전히 안식일법의 잣대에 사로잡힌, 안식일법의 참된 취지를 망각한 회당장에 대한 주님의 질책은 오늘날의 법지상주의자들에 대한 회개의 촉구이기도 합니다.
안식일에도 소나 나귀를 풀어 물을 먹이는 실례를 예시하면서 회당장의 위선의 무지를 꾸짖습니다.
“위선자들아,
아브라함의 딸인 이 여자들 사탄이 무려 열여덟 해 동안이나 묶어 놓았는데, 안식일일지라도 그 속박에서 풀어 주어야 하지 않느냐?”
안식일법 넘어 병마에 시달리는 여자의 절박한 현실을 깊이 통찰한 연민 가득한 주님의 해방과 치유의 활동입니다.
안식일법의 근본취지도 이런 모두의 해방과 자유, 안식에 있는데 회당장은 이를 까맣게 잊었던 것입니다.
적대자들은 망신을 당했고 마음이 순수한 민초들은 모두 그분께서 하신 그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두고 기뻐하니 새삼 민심이 천심임을 입증합니다.
예수님을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의 세 스타일- 친밀함, 연민, 부드러움-이 잘 드러납니다.
그러나 이제부터가 중요합니다.
오늘 복음을 잘 보완하는 제1독서 바오로 사도의 말씀이 고맙습니다.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로서 참으로 자유롭게 살게 하는 성령의 은총입니다.
성령은 사랑입니다.
파스카 예수님의 치유활동은 성령을 통해 오늘도 영원히 계속됩니다.
“하느님의 영의 인도를 받는 이들은 모두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여러분은 사람을 다시 두려움에 빠뜨리는 종살이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자녀로 삼도록 해 주시는 성령을 받았습니다.
이 성령의 힘으로 우리는 ‘아빠! 아버지!’하고 외치는 것입니다.
이 성령께서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우리의 영에게 증언해 주십니다.
자녀이면 상속자입니다.
그리스도와 더불어 하느님의 공동상속자인 우리들입니다.”
‘그리스도와 더불어 하느님의 공동상속자’
얼마나 영예스러운 우리의 신원인지요!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 예수님과 깊어가는 일치와 더불어 날로 하느님의 자녀로서 자유로운 삶을 살게 하십니다.
"주님께 바라는 너희가 모두,
굳세게 굳세게 마음들을 가져라."
(시편 31,25)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사제관을 나와사 엘리베이터의 내려가는 버튼을 눌렀습니다.
평상시에는 주로 계단으로 오르내리지만, 이날은 양손 가득히 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참을 기다렸음에도 엘리베이터는 오지 않는 것입니다.
짐의 무게를 점점 느끼게 되면서 누가 엘리베이터 버튼을 이렇게 오래 누르고 있냐면서 불평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너무 짐이 무거워서 짐을 바닥에 잠시 내려놓은 뒤, 엘리베이터가 오지 않았던 이유를 알 수 있었습니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지 않은 것입니다.
눌렀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눌러지지 않아서 꼼짝하지 않고 가만히 있던 것입니다.
이렇게 버튼도 제대로 누르지 않고는 엘리베이터를 누가 잡고 있을 것이라면서 남 탓을 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사실 우리는 습관적으로 남 탓을 하곤 합니다.
나의 역할보다 남의 역할이 더 크지 않을 텐데, 늘 ‘누구 때문에’를 외치곤 했습니다.
버튼을 누르지 않으면 엘리베이터가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어떤 변화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강조하신 사랑 실천도 남이 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내가 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나’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남을 보지 않고 온전히 주님의 뜻을 따를 수 있게 됩니다.
남 탓으로 불편한 마음을 만들 것이 아니라, 나의 사랑으로 우리 모두 편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먼저 완벽한 사랑을 직접 보여주셨습니다.
그 사랑은 어떤 것보다도 우선되었습니다.
유다인들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율법보다 사랑의 계명이 더 우위에 있다는 것을 밝히십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어떤 회당에서 가르치고 계셨는데, 열여덟 해 동안이나 병마에 시달리는 여자를 만나게 되십니다.
이 여자는 허리가 굽어 몸을 조금도 펼 수가 없었습니다.
그만큼 큰 고통 속에 있는 분으로,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일분일초라도 빨리 고통 속에서 자유롭게 해 주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날이 마침 안식일이었습니다.
그래서 회당장은 “일하는 날이 엿새나 있습니다. 그러니 그 엿새 동안에 와서 치료를 받으십시오. 안식일에는 안 됩니다.”라고 말하지요.
맞는 말처럼 들리지만, 사랑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랑은 그 어떤 것보다 우선시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나부터가 시작되어야 합니다.
남 탓을 하면서 사랑할 수 없는 이유를 찾는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어떤 경우에도 곧바로 실천할 수 있는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제1독서의 바오로 사도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또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는 향기로운 예물과 제물로 내놓으신 것처럼, 여러분도 사랑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에페 5,2)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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