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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접속’이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인터넷의 속도가 빠르지만 그때는 동영상을 볼 수 없었고, 음악을 다운 받는 것도 시간이 꽤 걸렸습니다. 당시에는 천리안, 유니텔, 나우누리, 하이텔과 같은 접속의 창구가 있었습니다. 이런 창구를 통해서 동창을 만나고, 취미가 같은 사람이 만나고, 나이가 같은 사람이 만나고, 종교가 같은 사람이 만나고, 직업이 같은 사람이 만났습니다. 주인공들은 컴퓨터를 통해서 서로의 의견을 나누었습니다. 아름다운 음악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주인공들은 가상의 공간에서 만나다가 현실의 공간에서 만나는 것으로 영화는 끝났습니다.
당시에 저도 천리안이라는 통신을 이용해서 가톨릭 동아리에 참여했었습니다. 지금은 페이스북, 트위터, 카톡, 텔레그램과 같이 전 세계의 모든 이들과 연결이 되는 접속의 창구가 있습니다. 현대인의 특징은 ‘접속’의 일상화인 것 같습니다. 자동차도 내비게이션이 있어서 운전하기가 수월해졌습니다. 스마트폰과 컴퓨터를 이용해서 우리가 원하는 정보를 얻을 수 있고, 코로나19와 같은 상황에서는 영상으로 미사를 볼 수도 있습니다. 미주지역의 사제 모임도 화상으로 했습니다. 접속하기만 하면 서부에 있는 사제도, 남부에 있는 사제도, 동부에 있는 사제도 쉽게 얼굴을 볼 수 있고, 대화할 수 있었습니다.
접속에는 부정적인 요인도 있습니다. 해킹이 있습니다. 제가 아는 신부님도 핸드폰이 해킹되었다고 합니다. 신부님의 번호로 광고 문자가 대량으로 발송되었다고 합니다. 많은 항의 전화를 받아야 했고, 본의 아니게 사과를 해야 했다고 합니다. 컴퓨터에 바이러스가 심어지기도 합니다. 원하지 않는 광고를 봐야하고, 잘못하면 금전적인 피해를 입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이 피해를 입었던 보이스 피싱도 있습니다. 저도 보이스 피싱에 속을 뻔했습니다. 다행히 마지막 단계에서 눈치를 챘습니다. 아이들이 게임에 접속하기도 합니다. 나중에 감당할 수 없는 요금이 청구되기도 합니다. 접속의 시대를 피할 수 없다면, 지혜로운 접속, 슬기로운 접속을 하면 좋겠습니다. 찾아보면 영적으로 도움이 되는 곳이 많습니다. 가톨릭 굿뉴스도 신앙에 도움이 되는 접속 창구입니다.
많은 사람들을 영적으로 이끌어 주었던 ‘헨리 나웬’신부님이 있습니다. 신부님은 하버드 대학을 졸업했고, 많은 보수와 명예가 보장되는 교수직을 제안 받았지만 장애인들을 위한 공동체로 가셔서 장애인들을 위해서 사셨습니다. 사람들이 신부님께 어째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직을 포기하시고, 이렇게 힘든 일을 하느냐고 물어보았을 때, 신부님은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하느님은 제가 높은 곳을 찾고 높은 곳에 있을 때는 잘 보이지 않았는데, 낮은 곳을 향해 내려오니까 더 잘 볼 수 있었습니다.” 저는 신부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들은 어쩌면 엉뚱한 곳에서 진리의 보물을 찾으려고 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사업에 실패하고, 작은 마트에서 일하는 형제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분 역시 제게 이런 말씀을 하였습니다. “제가 장사를 잘하고, 돈을 많이 벌었을 때는 하느님을 별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일이 힘들어지고 부도가 나니까, 사람들을 미워하고 자신을 원망하면서 오히려 하느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형제님은 물질적으로는 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오히려 지금은 마음이 더 편안하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기도하니까 미웠던 사람도 용서하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권력을 향해서 날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욕망을 향해서 날아가는 사람에게는 좀처럼 보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오늘 미가 예언자도 바로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진리의 길에서 벗어나, 악을 일삼는 자들은 사랑이신 하느님을 결코 볼 수 없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그런 이야기를 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님이 눈앞에 있어도, 진리와 정의가 눈앞에 있어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순수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이 보였고, 그들은 주님과 함께하는 참된 행복의 삶을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께 기도로 접속하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당신은 재앙과 재난을 보시고, 손수 나서시려 살피고 계시나이다. 힘없는 이가 당신께 몸을 맡기고, 당신은 친히 고아를 돌보시나이다. 하느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당신과 화해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화해의 말씀을 맡기셨네.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 만군의 주님, 저의 임금님, 저의 하느님! 행복하옵니다. 당신 집에 사는 이들! 그들은 영원토록 당신을 찬양하리이다.” (조재형신부)
2020년 가해 연중 제15주간 토요일
<옳은 말만 하는데 재수 없는 사람>
복음: 마태오 12,14-21
제가 말로 살아가는 사람이지만 아무 말도 해줄 수 없는 분들이 계십니다. 바로 극도의 어려움을 겪고 계신 분들입니다. 그분들에게 용기를 드리려 해도, “당신이 나처럼 죽음 직전에 있나요?”, “당신이 나처럼 가난하나요?”, “당신이 나처럼 자녀를 잃어 보셨나요?”라고 말할 것 같아 입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런 때조차 “그래도 용기를 내셔야죠!”라고 말한다면 저는 그분들에게 재수 없는 사람이 됩니다. 왜 그럴까요? 말은 ‘끌어 올리는 말’이 있고 ‘밀어 올리는 말’이 있기 때문입니다. 끌어 올리려고 하는 말은 재수 없고, 밀어 올리려고 하는 말은 용기와 희망을 줍니다.
듀크 신학대학교에서 만난 앤지와 퍼시라는 커플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대해 말하다가 퍼시가 앤지에게 대학교 때부터 좋은 이웃이 되어주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이번엔 앤지가 퍼시에게 “그러면 당신의 이웃은 누구야?”라고 되물었습니다. 그 후 몇 주간 퍼시에게서 앤지의 질문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결국, 앤지와 퍼시는 아파트를 떠나 리치몬드 처치 힐 중심가에 있는 오래된 도심지로 이사했습니다. 처치 힐은 1970~80년대를 거치면서 쇠퇴한 소위 할렘가였고 흑인들만 거주했으며 많은 이들이 알코올과 약물에 의존하는 삶을 사는 그야말로 비참한 곳이었습니다.
퍼시와 앤지는 먼저 어린이들에게 다가갔습니다. 퍼시는 농구공을 들고 아이들에게 농구를 시작했고 아이들과 어른들의 이름을 외웠습니다. 조금씩 처치 힐 사람들은 그를 친구로 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다른 백인들처럼 그들을 범죄자로 보지 않고 이웃으로 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동네 아이들은 퍼시의 뒤를 따라왔고, 퍼시와 앤지는 아이들에게 간식을 주고 비디오 게임을 하게 해주었습니다. 어느 날은 15명이나 퍼시의 귀가를 기다리며 문 앞에서 기다리기도 했습니다.
어느 날 아이들은 퍼시와 앤지가 자신들의 숙제를 도와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날 밤 퍼시와 앤지는 아이들의 숙제를 도와주는 것이 좋은 이웃이 되어주는 것이라고 믿고 집을 개방하여 아이들이 원할 땐 언제든지 그 집에 올 수 있게 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며 아이들에게 파티도 열어주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 지역 주민들은 퍼시와 앤지를 좋게 보지 않았습니다. 이상한 백인 커플이 자신들의 동네에 들어와서 아이들에게 헛된 꿈을 심어주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한 아이의 엄마는 퍼시를 자신들을 감시하기 위해 파견된 사복경찰로 오해하였습니다. 그러나 퍼시와 앤지는 굽히지 않고 자원봉사자까지 구해 더 많은 아이를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2002년 CHAT이라는 비영리단체를 만들었습니다. 현재 CHAT은 상주직원 45명과 자원봉사자 수백 명, 운영예산 25억 원의 기관으로 성장했고 지난 13년 동안 아이들 공부방을 시작으로 처치 힐의 분위기를 완전히 바꿔놓았습니다.
[참조: ‘유쾌함의 기술’, 앤서니 T. 디베네뎃, 유튜브 ‘책한민국’]
앤지와 퍼시는 소위 사회적 ‘루저’(Looser)가 되어버린 동네의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살고 있던 백인사회에 속해있으며 그들에게 설교만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당신들도 우리 백인들의 도시처럼 될 수 있습니다. 용기를 내세요.”
그들은 말했을 것입니다.
“재수 없어!”
퍼시와 앤지 커플은 말은 자신의 위치에 따라 용기를 줄 수도, 재수가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같은 내용의 말이라도, 높은 위치에서 마치 밧줄을 내려주며 잡고 올라오라고 하는 말이 있는가 하면, 아래로 내려가 자신의 등을 밟고 올라서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위에서 하는 말은 재수 없고, 밑에서 하는 말은 힘과 희망이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어떤 부류의 말씀이었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바리사이들의 박해를 받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없애기로 결의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으로서 그들의 박해에 대해 “감히 하늘의 왕에게 이런 대접을?” 하며 분개하지 않으셨습니다. 숨고 숨어서 가장 가난하고 가장 박해받는 분이 되셨습니다. 분명 올바름을 선포하셨지만, 그 말씀은 사람들을 끌어올리는 말이 아닌, 사람들을 떠받쳐 올려주시는 말씀이셨습니다. 그러니 그분의 말씀은 희망과 용기를 주시는 말씀이셨습니다.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
저는 말을 많이 하므로 재수 없는 잔소리만 하는 사람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처럼 핍박을 받지도 않고 그렇다고 가난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니 어떤 분들에게는 의미가 없는 말을 하는 것 같습니다.
영화 ‘패치 아담스’(1998)는 의대의 엄격한 규율을 깨고 환자들의 눈높이를 맞춰 그들에게 웃음을 주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결국 자신의 이상에 꼭 맞는 병원을 설립한 헌터 아담스의 실화를 영화화한 것입니다. 힘없이 축 늘어져 있는 아이들에게 용기를 내라고 하지 않고 웃음을 주기 위해 우스꽝스러운 분장을 하여 밑바닥까지 내려갔던 그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많이 남아있습니다.
나의 말이 잔소리가 되지 않고 누군가에게 힘이 되려면 내 목소리가 그들의 위가 아니라 아래에서 들리게 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내가 그들보다 낮은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말에 힘은 그 내용보다 그 말을 하는 사람의 위치가 결정합니다.
2020년 07월 18일 토요일
[녹] 연중 제15주간 토요일 또는
[백] 복되신 동정 마리아
입당송
시편 17(16),15 참조
저는 의로움으로 당신 얼굴 뵈옵고, 당신 영광 드러날 때 흡족하리이다.
본기도
하느님,
길 잃은 사람들에게 진리의 빛을 비추시어
올바른 길로 돌아오게 하시니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모든 이가
그 믿음에 어긋나는 것을 버리고 올바로 살아가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말씀의 초대
미카 예언자는 불의를 꾀하고 잠자리에서 악을 꾸미는 자들에게 주님께서 재앙을 내리시리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고쳐 주시고는, 당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신다(복음).
제1독서
<그들은 탐이 나면 밭과 집을 차지해 버린다.>
▥ 미카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2,1-5
1 불행하여라, 불의를 꾀하고 잠자리에서 악을 꾸미는 자들!
그들은 능력이 있어 아침이 밝자마자 실행에 옮긴다.
2 탐이 나면 밭도 빼앗고 집도 차지해 버린다.
그들은 주인과 그 집안을, 임자와 그 재산을 유린한다.
3 그러므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보라, 내가 이 족속을 거슬러 재앙을 내리려고 하니
너희는 거기에서 목을 빼내지 못하고 으스대며 걷지도 못하리라.
재앙의 때이기 때문이다.
4 그날에는 사람들이 너희를 두고서 조롱의 노래를 부르고
너희는 서럽게 애가를 읊으리라.
‘우리는 완전히 망했네. 그분께서 내 백성의 몫을 바꾸어 버리셨네.
어떻게 우리 밭을 빼앗으시어 변절자들에게 나누어 주실 수 있단 말인가?’
5 그러므로 너희를 위하여 제비를 뽑고 줄을 드리워 줄 이가
주님의 회중에는 아무도 없으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10(9),1-2.3-4ㄱㄴ.7-8ㄱㄴ.14(◎ 12ㄴ)
◎ 주님, 가련한 이들을 잊지 마소서.
○ 주님, 어찌하여 멀리 서 계시나이까?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어 계시나이까? 가련한 이는 악인의 교만에 애가 타고, 그들이 꾸민 흉계에 빠져드나이다. ◎
○ 악인은 뽐내며 탐욕을 부리고, 강도는 악담을 퍼부으며 주님을 업신여기나이다. 악인이 콧대를 세워 말하나이다. “하느님은 벌하지 않는다. 하느님은 없다!” ◎
○ 저주만 퍼붓나이다. 그 입은 거짓과 위협으로 가득 차 있고, 그 혓바닥 밑에는 재앙과 환난이 도사리고 있나이다. 마을 은밀한 곳에 숨어 앉아, 죄 없는 사람을 몰래 죽이려 하나이다. ◎
○ 당신은 재앙과 재난을 보시고, 손수 나서시려 살피고 계시나이다. 힘없는 이가 당신께 몸을 맡기고, 당신은 친히 고아를 돌보시나이다. ◎
복음 환호송
2코린 5,19 참조
◎ 알렐루야.
○ 하느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당신과 화해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화해의 말씀을 맡기셨네.
◎ 알렐루야.
복음
<예수님께서는 예언을 이루시려고 당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셨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14-21
그때에 14 바리사이들은 나가서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를 하였다.
15 예수님께서는 그 일을 아시고 그곳에서 물러가셨다.
그런데도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랐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모두 고쳐 주시면서도,
16 당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셨다.
17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18 “보아라, 내가 선택한 나의 종, 내가 사랑하는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내가 그에게 내 영을 주리니 그는 민족들에게 올바름을 선포하리라.
19 그는 다투지도 않고 소리치지도 않으리니
거리에서 아무도 그의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20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
21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 기도
주님,
교회가 바치는 예물을 굽어보시고 받아들이시어
주님을 믿는 이들에게 성덕을 더해 주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시편 84(83),4-5 참조
주님 제단 곁에 참새도 집을 짓고, 제비도 둥지를 틀어 거기에 새끼를 치나이다. 만군의 주님, 저의 임금님, 저의 하느님! 행복하옵니다, 당신 집에 사는 이들! 그들은 영원토록 당신을 찬양하리이다.
<또는>
요한 6,56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리라.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거룩한 선물을 받고 비오니
저희가 이 성찬의 신비에 자주 참여하여
나날이 구원의 은혜를 누리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바리사이들은 나가서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를 하였다.” 이미 유다교의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없애려고 마음먹습니다. 그 결과는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장 비천한 모습으로 죽음을 맞으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과 죽음을 넘어선 부활은 지금 우리가 고백하는 믿음의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사야서의 예언처럼 하느님의 아드님으로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선포하셨고, 사람들은 그것에 희망을 두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사람들 가운데에 오셔서 평화로운 방법으로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그 복음은 예수님의 활동을 통하여 더욱 잘 드러납니다.
한 분이신 예수님께서 계셨고 하나의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그분의 업적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다른 의미로 다가옵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구원자이고 희망이었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거짓말쟁이이며 신을 모독하고 군중을 선동하는 인물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이들에게 그 말씀은 기쁜 소식이었지만, 들으려 하지 않는 이들에게 그 말씀은 그저 지나가는 말일 뿐입니다. 예수님의 활동은 하늘 나라를 드러내는 표징이었지만 말씀을 듣지 않는 이들에게는 선동일 뿐입니다.
믿음은 말씀을 들은 이들의 결단입니다. 그렇기에 믿는 이들은 말씀을 통하여 위로를 받고 말씀에 희망을 둡니다. 이미 우리는 결단을 통하여 믿음의 삶을 살아갑니다. 그리고 이 믿음은 분명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