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폐된 상자가 하나 있다. 그 안에는 고양이 1마리, 그리고 독가스가 든 병이 놓여 있다. 한 시간 이내에 이 병이 깨질 확률은 정확하게 50 퍼센트. 이윽고 다가온 시간. 지금 이 상자 안에 들어 있는 고양이는 죽은 걸까, 살아있는 걸까? 슈뢰딩거의 고양이라고 불리는 이 질문에 대한 평범한 대답은 “그걸 내가 어떻게 알겠느냐”라는 것이겠지만 양자물리학의 세계에서는 이런 대답을 내놓는다고 한다. "우리가 뚜껑을 열어 확인하기 전까지는 상자 안에 살아있는 고양이와 죽어있는 고양이가 중첩상태로 공존하고 있다."
물리학의 물자도 모르는 내가 이 말을 과학적으로 이해할 재주는 요만큼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말을 처음 들었을 때 내 명치끝엔 뭔가 아릿한 자극이 왔었다. 삶과 죽음의 중첩이라니, 이 보다 더 극적으로 시적인 말이 또 있을까?
뚜껑을 열었을 때 살아있는 고양이를 발견했을 때는 환호, 그렇지 못하고 굳어버린 고양이 시신을 받아들었을 때는 절망해야하는 세계관에서 이것은 단순한 양자택일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간이라는 좁은 시점에서 한없이 거대한 자연을 바라보며 펜을 들어야 하는 시인에게 중첩이라는 것은 기쁨과 공포, 천국과 지옥 사이를 끝도 없이 메꾸고 있는 무한의 꺼풀 같은 것이다.
중첩되어 있는 양자의 상태는 관찰을 했을 때 비로소 그 상태가 결정된다고 했던가? 시인이 나열하는 시어 역시 중첩의 사이를 메우고 있는 무한의 한 겹을 꺼내보았을 때 비로소 하나의 말이 된다. 고백하건데 어린 시절의 나에게 그 작업은 행복했던 시간은 아니었던 것 같다. 델포이의 신탁처럼 나에게 내려질 중첩의 꺼풀은 언제나 두렵고 날카롭고 어려운 것들이었다. 중첩의 본질이 그래서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내가 발을 디디고 있는 사바세계의 속성이 그랬던 것이고 그 위에 서 있는 내 심성이 그렇게 물들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병이 조금이라도 나을 기미를 보이는 건 나의 시선이 인간으로부터 자연으로 옮겨올 때다. 인간계보다 한없이 거대하고 드넓은 대자연의 세계. 거칠고 잔인하고 드세기로 따지자면 인간계가 범접조차 하기 힘든 크기다. 그리하여 내가 그린 자연의 모이란 필연적으로 상처와 회의와 피로를 가져오기 마련이다. 하지만 자연이라는 이름은 좋게 말해 중구난방이고 심하게 말하자면 자아 분열적이다. 뚜껑을 여는 내 존재마저도 중첩되어 뚜껑을 열 때마다 희한한 모습으로 열리는 꼴이라고나 할까? 분열의 중첩의 꺼풀을 헤치면서 손을 베어 본적은 없는 것 같다.
그것은 아마도 자연은 나에게 그 무슨 의도와 지향도 내비치지 않는 완벽한 중립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을 몰랐던 어린 시절의 내가 바라보는 자연은 말을 타고 내달려야 하는 광야가 아니면 폭풍의 언덕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광야엔 풀이 솟고 언덕위의 바람은 잦아들었다. 사실 자연은 변한 것이 없다. 그 어디에도 나를 다치게 할 의도가 없다는 걸 뒤늦게 발견한 늙은 내가 있을 뿐. 죽은 고양이와 산 고양이가 중첩되어 있다면 굳이 죽은 고양이를 선택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이제 서야 알게 되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