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트럼프 대통령의 연설을 들었습니다. 주된 내용은 미국의 영광, 미국 우선, 미국의 승리였습니다. 일자리를 찾아오고, 기업을 돌아오게 하고, 미국의 자부심을 되찾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피부색에 관계없이 모든 미국인은 위대한 국기 앞에 애국심으로 모이자고 하였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의 연설은 그의 재임기간 동안 정책으로 실현되었습니다. 중국과는 엄청난 관세를 부과하면서 무역 전쟁을 시작하였습니다. 한국에는 감당하기 어려운 방위비 분담금을 요구하였습니다. 아직 협상중이지만 한국에는 큰 부담이 되고 있습니다. 독일에서는 미군을 철수한다고 합니다. 독일과 사전에 논의 하지 않고 철수 한다고 하니, 독일도 난감한 입장이라고 합니다. 멕시코에는 장벽을 세운다고 합니다. 비용을 멕시코 정부에 요청한다고 하니, 멕시코에서도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합니다. 미국의 영광, 미국의 승리, 미국의 자부심도 좋지만 주변국과 더불어 살아가야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있습니다. 최강의 경제력과 군사력으로 미국 우선을 이끌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 앞에서는 소용이 없었습니다.
2020년의 절반은 코로나19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코로나19는 미국의 영광, 미국 우선, 미국의 승리, 미국의 자부심만으로는 막아낼 수 없었습니다. 미국이 가장 큰 피해를 보고 있습니다. 유발 하라리는 코로나19 이후의 세상을 두 가지로 예측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정부의 통제와 감시가 강화되는 사회입니다. 모든 국가는 자국의 안전과 이익을 위해서 담을 쌓는 사회입니다. 여행은 줄어들고, 무역은 통제되고, 지구촌의 경제는 위축되는 사회입니다. 모두가 각자도생(各自圖生)을 추구하지만 또다시 찾아오는 감염병을 막기는 어려울 거라고 합니다. 바이러스는 문을 닫기 전에 이미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협력과 연대로 치료약을 개발하고, 백신을 만드는 것입니다. 서로의 문을 열면서 검사하고, 격리하고, 치료하는 것입니다. 서로를 신뢰하면서 여행도하고, 무역도 함께하는 것입니다. 바이러스는 문을 굳이 닫지 않아도 격리와 치료를 통해서 사라질 것입니다. 상부상조(相扶相助)하기에 또다시 찾아오는 감염병을 이겨낼 수 있을 거라고 합니다. 대한민국은 코로나19를 극복하는 모델이 되었다고 합니다.
제 얼굴에 점이 있습니다. 그냥 보면 잘 보이지 않습니다. 안경테에 가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방송에 나오는 얼굴도 아니고, 생활하는데 불편이 없기에 친구처럼 지내고 있습니다. 우리의 몸은 세포로 이루어져있습니다. 우리가 의식하지는 못하지만 우리의 몸에는 함께 사는 이웃들이 세포만큼이 많다고 합니다. 어떤 것은 우리의 건강에 도움을 주기도 합니다. 어떤 것은 피해를 주기도 합니다. 어떤 것은 도움도, 피해도 주지 않는다고 합니다. 나의 몸에 들어온 이웃들을 쫓아내기보다는 적당한 운동과 긍정적인 생각으로 내 몸의 면역력을 키워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약물을 이용해서 무리하게 쫓아내려하면 부작용이 생기기도 하고, 몸의 면역력이 약해질 수도 있다고 합니다. 지구는 태양을 중심으로 돌고 있습니다. 지구는 태양에서 나오는 빛을 받아서 아름답고 푸른 별이 되었습니다. 태양이 지구로부터 받는 것은 없지만 지구는 태양으로부터 모든 것을 받고 있습니다. 우주는 이렇게 쫓아내거나, 거부하지 않으면서 서로를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 인간도 지구라는 커다란 몸에 잠시 머물고 있는 건지 모릅니다. 지구는 강한 면역력으로 인간이 주는 피해를 온전히 감수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에 대해서 몇 가지 말씀을 해 주십니다. 하느님 나라는 지금 여기에서 시작된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는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하느님 나라는 가능성의 나라입니다. 최고의 능력을 가진 사람들만이 가는 나라는 아닙니다. 지금 부족한 사람도, 지금 잘못한 사람도 함께 할 수 있는 나라라고 말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가능성을 두 가지 비유를 통해서 말씀해 주십니다. 하나는 누룩의 비유입니다. 누룩은 아주 작은 양이지만 빵을 커다랗게 만들어 줍니다. 하느님 나라는 그 시작은 비록 작을지라도 끝은 아주 풍요로울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다른 하나는 겨자씨의 비유입니다. 작은 겨자씨는 자라면 새들이 깃들고, 사람들이 쉴 수 있는 큰 나무가 된다고 하십니다. 하느님 나라도 그럴 것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모든 생명은 아주 작은 씨앗에서 출발합니다. 커다란 코끼리도 그 시작은 눈에 보이지 않는 크기의 정자와 난자의 만남입니다. 우리 모두는 무한한 가능성을 품고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도움이 함께하면 가능성은 현실이 되고, 꿈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암에 걸렸지만 완쾌된 사람들은 대부분 한결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을 봅니다. ‘결코 암과 싸우려고 하지 않았다. 암을 없애려고 하지 않았다. 암을 미워하고 저주하기 보다는 오히려 내안에 들어온 손님으로 맞이하였다. 나의 삶이 암이 들어 올 수 있도록 원인을 제공한 면도 있기에 친구처럼 지내려고 하였다.’ 이런 마음가짐이 암을 치유할 수 있는 힘이 되었다고 이야기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고통을 주고, 죽음에 이르게 하는 암과 친구가 된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암과 투쟁하고 싸우면 싸울수록 더 힘든 상황에 이르는 것도 보게 됩니다. 적과의 동침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걱정도 되고, 힘들게 만들어 놓은 공동체가 깨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을 합니다. “성령께서는 나약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성령께서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성도들을 위하여 간구하시기 때문입니다.” 넘어진 동료를 일으켜 세우고 함께 갈 수 있는 용기가 있다면, 버림받은 이들, 잘못한 이들을 품어줄 수 있는 관대함이 있다면 우리는 이미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사는 것입니다.
“주님, 당신은 자비롭고 너그러우신 하느님, 분노에는 더디시나 자애와 진실은 넘치시나이다. 저를 돌아보시어 자비를 베푸소서. 성령께서 몸소 말로 다 할 수 없이 탄식하시며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해 주십니다. 그때에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 (조재형신부)
2020년 가해 연중 제16주일
<모든 고통을 성장통으로 만들 수 있다면>
복음: 마태오 13,24-43
오늘 복음의 밀과 가라지의 비유, 겨자씨의 비유, 누룩의 비유는 하늘 나라에 관한 설명입니다. 하늘 나라에 관한 비유는 또한 심판의 비유이기도 합니다. 내가 가라지인지 밀인지 빨리 구분해서 가라지 같으면 밀로 돌아오라는 경고의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내가 밀인지 가라지인지 구별할 수 있을까요?
제2차대전 때, 헤럴드 레셀이라고 하는 청년이 공수부대원으로 전투에 참여했다가 폭탄에 맞아서 두 팔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불구가 된 그는 참으로 낙심하고 좌절하면서 하느님 앞에 기도합니다.
“하느님, 나는 쓸모없는 사람입니다. 나는 쓸모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원망의 기도를 하는 그의 귀에 분명히 들려주셨습니다.
“그래도 잃은 것보다 얻은 것이 많지 않으냐?”
레셀이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자기에게는 아직 생명이 있고, 두 눈이 있고, 두 귀가 있고, 두 발이 있습니다. 정말 잃은 것보다 얻은 것이 아직도 많습니다. 생각을 바꾼 그는 의사에게 부탁해서 의수를 만들었습니다. 또 열심히 타이프치는 것을 연습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지내온 생활을 잘 정리하여 책으로 엮었습니다. 이것이 일약 베스트셀러가 되고, 영화화되었습니다. 더욱이 그 영화에서는 자기가 직접 조연으로 출연했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영화가 ‘우리 생애 최고의 해’(The Best Years of Our Lives)이고 그는 1946년도 아카데미상 최우수 조연상을 받았습니다.
어느 기자가 물었습니다.
“당신은 신체적 조건으로 인하여 절망하지 않았습니까?”
그는 결연히 대답했습니다.
“아닙니다, 나의 육체적인 장애는 도리어 가장 큰 축복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언제나 잃어버린 것을 계산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것, 얻은 것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그 은혜에 감사하며 그것을 사용할 때에 하느님께서는 잃은 것의 열매를 크게 보상해주십니다. 더 많은 가능성이 그 앞에 열리게 될 것입니다.”
어떻게 밀과 가라지인지 구별할 수 있느냐면 나에게 닥치는 모든 고통에 대한 나의 자세로 구별할 수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러셀은 가라지가 아닌 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성경 본문을 조금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밀과 가라지의 비유는 이해가 조금 어려운 면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구조를 보면 밀과 가라지의 비유를 이해할 수 있도록 중간에 ‘겨자씨의 비유’와 ‘누룩의 비유’가 끼어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밀과 가라지의 비유 – 겨자씨의 비유 – 누룩의 비유 – 밀과 가라지의 비유 설명’의 순서로 구조가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샌드위치 구조에서는 그 중간에 끼인 것이 바깥에 감싼 것을 설명해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시 말해 겨자씨의 비유와 누룩의 비유는 밀과 가라지의 비유의 보충설명인 것입니다.
겨자씨는 처음엔 작고 볼품없지만, 밭에 심어지면 큰 나무가 되어 새들이 깃들어 쉬게 합니다. 이는 ‘포용력’을 상징합니다. 아담은 죄를 짓고 포용력을 잃어 하와를 배척합니다. 카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반면 하느님은 가라지까지 끝까지 당신 밭에 두십니다. 예수님도 유다를 그렇게 하셨습니다. 하늘 나라는 이 포용력을 배운 이들의 것입니다. 나무가 새를 가리지 않듯, 하늘 나라 백성은 좋고 나쁜 사람을 가리지 않고 양식을 내어줍니다. 에제키엘서를 알았던 유다인들은 그 말씀의 뜻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내가 손수 높은 향백나무의 꼭대기 순을 따서 심으리라. 가장 높은 가지들에서 연한 것을 하나 꺾어 내가 손수 높고 우뚝한 산 위에 심으리라. 이스라엘의 드높은 산 위에 그것을 심어 놓으면 햇가지가 나고 열매를 맺으며 훌륭한 향백나무가 되리라. 온갖 새들이 그 아래 깃들이고 온갖 날짐승이 그 가지 그늘에 깃들이리라.”(에제 17,22-23)
누룩의 비유는 무엇일까요? 누룩은 밀가루 서 말에 들어가 그 밀가루를 온통 부풀어 오르게 합니다. 누군가를 포용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삼구’(三仇)입니다. 뱀은 사람 안에서 세속-육신-마귀를 크게 만들어 돈 때문에, 욕망 때문에, 교만 때문에 이웃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합니다. 밀이 밭에서 영양분을 먹으며 포용력을 키우기 위해 하는 일은 바로 삼구를 죽여 복음삼덕을 자라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을 받으시고 광야에 나아가 하신 일이 그것입니다. 그렇게 우리 모두를 당신 품에 안으셨습니다. 그러니 누룩은 우리 삼구를 죽이는 성령을 상징합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밀은 자신에게 닥쳐오는 모든 고난을 자신을 죽이는 도구로 삼습니다. 그래서 겸손해지고 더욱 큰 포용력을 가지게 됩니다. 모든 고통을 사랑의 성장을 위한 성장통으로 삼는 것입니다.
영화 ‘양철북’(1979)에는 이미 3살 때 누구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 하는 오스카라는 아이가 나옵니다. 그는 이웃을 심판하기 위한 양철북을 들면서 성장하기를 거부합니다. 이때가 가라지일 때입니다. 그러나 그 때문에 엄마도 죽고 아빠도 죽고 삼촌도 자신 때문에 죽습니다. 그리고는 양철북을 집어 던집니다. 자신도 죄인임을 알았기에 이제 포용할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이때부터 자신 안에 누군가를 쉬게 할 수 있는 밀로 성장하기 시작합니다.
밀과 가라지는 성장에 달려있습니다. 포용력의 성장입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이웃에게 더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으로 성장하기를 거부한다면 가라지입니다. 끝까지 고집부린 그 사람의 미래는 참담할 것입니다.
조각가 미켈란젤로가 한번은 훌륭한 조각 예술품을 만들기 위해 커다란 대리석 덩어리를 망치와 정으로 쪼고 있었습니다. 그때 어떤 사람이 다가와서 “그 좋은 대리석을 이처럼 많이 깨어버리면 낭비가 아닙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미켈란젤로는 “이 대리석이 깨어져 나갈 때야 비로소 조각은 살아나게 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아픔 없이 성장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그것이 성장통입니다.
칼 융은 “모든 정신질환은 정당한 고통을 회피한 대가다.”라고 말했습니다. 정당한 고통이란 포용력을 증가시키기 위해 세속과 육신과 교만에 대한 욕구가 깎여져야 하는 고통입니다. 성장통을 즐겨 받을 줄 알아야 가라지가 아닌 밀이 됩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예수님께 유일하게 ‘고통과 멸시’를 청했습니다. 겸손해지기 위해서입니다. 밀은 모든 고통을 성장통으로 만듭니다. 그렇게 멈추는 일 없이 성장합니다. 밀과 가라지는 고통에 대해 내가 선택한 태도에 의해 결정됩니다.(전삼용신부)
2020년 07월 19일 일요일
[녹] 연중 제16주일
(농민 주일)
대영광송신경교중
한국 교회는 주교회의 1995년 추계 정기 총회의 결정에 따라 해마다 7월 셋째 주일을 농민 주일로 지내고 있다. 이날 교회는 농민들의 노력과 수고를 기억하면서 도시와 농촌이 한마음으로 하느님의 창조 질서에 맞갖게 살도록 이끈다. 각 교구에서는 농민 주일에 여러 가지 행사를 마련하여 농업과 농민의 소중함과 창조 질서 보전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있다.
오늘 전례
▦ 오늘은 연중 제16주일입니다. 교회는 주일마다 함께 모여 주님의 파스카를 경축합니다. 말씀과 생명의 빵 안에 계시는 성자를 알아뵙고, 그분을 참된 예언자요 목자로 모시어, 영원한 기쁨의 샘에 이르게 해 주시는 하느님께 감사드립시다.
입당송
시편 54(53),6.8
보라, 하느님은 나를 도우시는 분, 주님은 내 생명을 떠받치는 분이시다. 저는 기꺼이 당신께 제물을 바치리이다. 주님, 좋으신 당신 이름 찬송하리이다.
본기도
주님, 주님의 종들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주님의 은총을 인자로이 더해 주시어
믿음과 희망과 사랑으로
언제나 깨어 주님의 계명을 충실히 지키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말씀의 초대
지혜서의 저자는,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너그럽게 심판하시고, 아주 관대하게 통솔하신다고 고백한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성령께서 말로 다할 수 없이 탄식하시며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해 주신다고 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는 씨를 뿌리는 사람, 겨자씨, 누룩과 같다며 비유를 들어 말씀하시고, 제자들에게는 밭의 가라지 비유를 설명해 주신다(복음).
제1독서
<하느님께서는 지은 죄에 대하여 회개할 기회를 주십니다.>
▥ 지혜서의 말씀입니다.
12,13.16-19
13 만물을 돌보시는 당신 말고는 하느님이 없습니다.
그러니 당신께서는 불의하게 심판하지 않으셨음을 증명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16 당신의 힘이 정의의 원천입니다.
당신께서는 만물을 다스리는 주권을 지니고 계시므로
만물을 소중히 여기십니다.
17 정녕 당신의 완전한 권능이 불신을 받을 때에만 당신께서는 힘을 드러내시고
그것을 아는 이들에게는 오만한 자세를 질책하십니다.
18 당신께서는 힘의 주인이시므로 너그럽게 심판하시고
저희를 아주 관대하게 통솔하십니다.
당신께서는 무엇이든지 원하시는 때에 하실 능력이 있으십니다.
19 당신께서는 이렇게 하시어
의인은 인자해야 함을 당신 백성에게 가르치시고
지은 죄에 대하여 회개할 기회를 주신다는 희망을
당신의 자녀들에게 안겨 주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86(85),5-6.9-10.15-16ㄱ(◎ 5ㄱ)
◎ 주님, 당신은 어질고 용서하시는 분이시옵니다.
○ 주님, 당신은 어질고 용서하시는 분, 당신을 부르는 모든 이에게 자애가 넘치시나이다. 주님, 제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애원하는 제 소리를 들어 주소서. ◎
○ 주님, 당신이 만드신 민족들이 모두 모여 와, 당신 앞에 엎드려, 당신 이름에 영광을 바치리이다. 당신은 위대하시며 기적을 일으키시는 분, 당신 홀로 하느님이시옵니다. ◎
○ 주님, 당신은 자비롭고 너그러우신 하느님, 분노에는 더디시나 자애와 진실은 넘치시나이다. 저를 돌아보시어 자비를 베푸소서. ◎
제2독서
<성령께서 말로 다 할 수 없이 탄식하시며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해 주십니다.>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
8,26-27
형제 여러분, 26 성령께서는 나약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올바른 방식으로 기도할 줄 모르지만,
성령께서 몸소 말로 다 할 수 없이 탄식하시며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해 주십니다.
27 마음속까지 살펴보시는 분께서는 이러한 성령의 생각이 무엇인지 아십니다.
성령께서 하느님의 뜻에 따라 성도들을 위하여 간구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환호송
마태 11,25 참조
◎ 알렐루야.
○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아버지, 찬미받으소서. 아버지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셨나이다.
◎ 알렐루야.
복음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3,24-43
그때에 예수님께서 비유를 들어 군중에게 24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자기 밭에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에 비길 수 있다.
25 사람들이 자는 동안에 그의 원수가 와서 밀 가운데에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다.
26 줄기가 나서 열매를 맺을 때에 가라지들도 드러났다.
27 그래서 종들이 집주인에게 가서, ‘주인님,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가라지는 어디서 생겼습니까?’ 하고 묻자,
28 ‘원수가 그렇게 하였구나.’ 하고 집주인이 말하였다.
종들이 ‘그러면 저희가 가서 그것들을 거두어 낼까요?’ 하고 묻자,
29 그는 이렇게 일렀다.
‘아니다. 너희가 가라지들을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
30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수확 때에 내가 일꾼들에게, 먼저 가라지를 거두어서 단으로 묶어 태워 버리고
밀은 내 곳간으로 모아들이라고 하겠다.’”
31 예수님께서 또 다른 비유를 들어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밭에 뿌렸다.
32 겨자씨는 어떤 씨앗보다도 작지만, 자라면 어떤 풀보다도 커져 나무가 되고
하늘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
33 예수님께서 또 다른 비유를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누룩과 같다.
어떤 여자가 그것을 가져다가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었더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
34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이 모든 것을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를 들지 않고는 그들에게 아무것도 말씀하지 않으셨다.
35 예언자를 통하여 “나는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리라.
세상 창조 때부터 숨겨진 것을 드러내리라.”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36 그 뒤에 예수님께서 군중을 떠나 집으로 가셨다.
그러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와,
“밭의 가라지 비유를 저희에게 설명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37 예수님께서 이렇게 이르셨다.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사람의 아들이고, 38 밭은 세상이다.
그리고 좋은 씨는 하늘 나라의 자녀들이고 가라지들은 악한 자의 자녀들이며,
39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악마다.
그리고 수확 때는 세상 종말이고 일꾼들은 천사들이다.
40 그러므로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태우듯이,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41 사람의 아들이 자기 천사들을 보낼 터인데,
그들은 그의 나라에서 남을 죄짓게 하는 모든 자들과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을 거두어, 42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43 그때에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또는>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3,24-30
그때에 예수님께서 비유를 들어 군중에게 24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자기 밭에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에 비길 수 있다.
25 사람들이 자는 동안에 그의 원수가 와서 밀 가운데에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다.
26 줄기가 나서 열매를 맺을 때에 가라지들도 드러났다.
27 그래서 종들이 집주인에게 가서, ‘주인님,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가라지는 어디서 생겼습니까?’ 하고 묻자,
28 ‘원수가 그렇게 하였구나.’ 하고 집주인이 말하였다.
종들이 ‘그러면 저희가 가서 그것들을 거두어 낼까요?’ 하고 묻자,
29 그는 이렇게 일렀다.
‘아니다. 너희가 가라지들을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
30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수확 때에 내가 일꾼들에게, 먼저 가라지를 거두어서 단으로 묶어 태워 버리고
밀은 내 곳간으로 모아들이라고 하겠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보편 지향 기도
<각 공동체 스스로 준비한 기도를 바치는 것이 바람직하다.>
1. 교회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교회의 머리이신 주님, 주님 말씀의 씨앗을 뿌리는 교회를 이끄시어, 교회가 연대의 힘으로 이웃과 함께하며, 구원의 기쁜 소식을 널리 전하게 하소서.
2. 우리 나라의 평화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인자하신 주님, 저희에게 주님 사랑의 은총을 베풀어 주시어, 저희가 이기심을 버리고 가난하고 약한 이들을 먼저 돌보며,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어 가게 하소서.
3. 농민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생명을 주관하시는 주님, 지구 온난화에 따른 기후 변화로 더욱 어려움에 놓인 농민들을 돌보시어, 그들이 긍지와 보람을 가지고 주님의 창조 사업에 참여하게 하소서.
4. 가정 공동체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사랑이신 주님, 모든 가정 공동체를 보살펴 주시어, 오늘날 가정들이 살아가는 길에 언제나 사랑과 존중, 그리고 진심 어린 조언이 함께하게 하소서.
예물 기도
하느님, 구약의 제사들을 하나의 제사로 완성하셨으니
하느님의 종들이 정성껏 바치는 이 예물을 받으시고
아벨의 제물처럼 강복하시고 거룩하게 하시어
존엄하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봉헌하는 이 제사가
인류 구원에 도움이 되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감사송
<연중 주일 감사송 6 : 영원한 파스카의 보증>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저희는 주님 안에서 숨 쉬고 움직이며 살아가오니
이 세상에서 날마다 주님의 인자하심을 체험할 뿐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보장받고 있나이다.
주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일으키셨으니
성령의 첫 열매를 지닌 저희에게도
파스카 신비가 영원히 이어지리라 희망하고 있나이다.
그러므로 저희도 모든 천사와 함께 주님을 찬미하며
기쁨에 넘쳐 큰 소리로 노래하나이다.
영성체송
시편 111(110),4-5
당신 기적들 기억하게 하시니, 주님은 너그럽고 자비로우시다. 당신 경외하는 이들에게 양식을 주신다.
<또는>
묵시 3,20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으리라.
영성체 후 묵상
▦ 세상의 밭에는 밀과 가라지가 섞여 자라지만, 수확 때가 되면 가라지는 불 속으로 들어가고 맙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어떤 씨앗보다 작지만 자라면 큰 나무가 되는 겨자씨 같은 존재, 밀가루를 온통 부풀어 오르게 하는 누룩 같은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종말에 의인들은 하느님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이 거룩한 신비의 은총으로 저희를 가득 채워 주셨으니
자비로이 도와주시어
저희가 옛 삶을 버리고 새 삶을 살아가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오늘의 묵상
‘밀과 가라지.’ 성경을 잘 읽지 않는 사람들도 한 번쯤은 들어 보았을 내용입니다. 마태오 복음만이 전하는 이 비유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생각하게 만듭니다. 이 비유의 의미는 예수님의 설명으로 명확해집니다. 밭은 세상이며,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사람의 아들이고, 좋은 씨는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반면에 원수는 가라지를 뿌리고, 가라지는 악한 자의 자녀들입니다.
종들이 묻습니다. “가라지들을 거두어 낼까요?” 그러나 주인은 수확 때가 될 때까지 기다리라고 합니다. 수확은 종말을 나타내는 비유인데, 특히 종말에 있을 심판을 나타냅니다. 주인은 그때까지 밀과 가라지가 같이 자라도록 둡니다.
오늘 복음은 밀이나 가라지에 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비유는 주인의 자비, 곧 하느님의 자비를 강조하는 이야기입니다. 아직 종말은 오지 않았고 지금 우리는 밀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는 시간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수확 때까지 기다리는 주인은 자비로운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지금 우리의 행실에 따라 심판하시는 분이 아니시라 심판을 미루시는,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제1독서인 지혜서는 말합니다. “의인은 인자해야 함을 당신 백성에게 가르치시고, 지은 죄에 대하여 회개할 기회를 주신다는 희망을 당신의 자녀들에게 안겨 주셨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지금 우리에게 가능성의 시간을 주십니다. ‘아직’ 죄를 뉘우치고 회개할 수 있는 시간입니다. 종말 때까지 변화할 가능성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이 시간은 나뿐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도 주어집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