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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소문을 후원 결의서로 바꾸시는 하나님 (스2-6)
2026년 7월 28일 (화요일)
찬양 : 나의 안에 거하라
본문 : 에스라 6:1-22절
☞ https://youtu.be/aFRtsWvO4Qk?si=hdcOIKV97msyoZjV
어제는 중보기도 세미나 교재 편집을 부지런히 마치고 오후에 아내와 오랜만에 바닷가 옆 카페에 가서 차를 한 잔 마시며 잠시지만 나들이를 하고 왔다. 30분간 차를 마시고 왔을 뿐이지만 가고 오는 모든 시간 아내와 함께 후반전도 나아갈 수 있음에 하나님께 감사했고 참 행복했다.
이날 주님은 어떤 말씀으로 인도하실까?
오늘 본문 에스라 6장은 무려 16년 동안 중단되었던 성전 재건 공사가 마침내 완공되고, 이스라엘 공동체가 감격스러운 봉헌식과 유월절을 지키는 영적 승리의 장면이 기록되고 있다.
방해로 인해 16년간 중단되었던 상황이 말씀을 따라 일어서서 방해를 딛고 나아갈 때 벌어진 놀라운 승리의 장면 오늘 본문이 주는 가장 큰 감동이다.
5장에서 닷드내 총독이 올린 상소문으로 인해 16년 전처럼 자칫 공사가 다시 중단될 수 있었던 위기가 있었다. 그러나 말씀에 의지한 그들을 하나님께서 도우셔서 중단되지 않고 위대한 승리로 역전되는 것을 본문을 보여준다. 1-2절
‘이에 다리오 왕이 조서를 내려 문서창고 곧 바벨론의 보물을 쌓아둔 보물전각에서 조사하게 하여 메대도 악메다 궁성에서 한 두르마리를 찾았으니 거기에 기록하였으되’
상소문으로 인해 하나님이 개입하시자 이 사건은 고레스왕의 칙령을 다시 찾는 것으로까지 확대되어 결국 하나님의 감동으로 생긴 고레스 칙령을 확인하여 역사적인 팩트임을 증명하여 유다 백성들의 성전재건을 적극적으로 돕는 전화위복이 되었다.
다리오 왕은 고레스 왕의 칙령을 확인하고는 구체적이고 강력한 명령을 내려 성전을 완벽하게 짓도록 전폭적으로 지원하도록 했다. 7절
‘하나님의 성전 공사를 막지 말고 유다 총독과 장로들이 하나님의 성전을 제자리에 건축하게 하라.’
첫 번째 명령은 성전 건축을 막지 말라는 명령이었다. 그 주변의 닷드내 총독과 그 관리들로 방해하지 말라는 구체적 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그것 뿐 아니다. 이어서 놀라운 지원을 명령한다. 8절
‘내가 또 조서를 내려서 하나님의 이 성전을 건축함에 대하여 너희가 유다 사람의 장로들에게 행할 것을 알리노니 왕의 재산 곧 유브라데 강 건너편에서 거둔 세금 중에서 그 경비를 이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주어 그들로 멈추지 않게 하라.’
두 번째 명령은 성전 건축에 드는 모든 경비를 강 서쪽 즉 이스라엘 주변에서 거두는 세금에서 신속하고 끊임없이 주어 공사가 지체되지 않도록 하라는 것이다. 그야말로 기가막힌 반전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이 믿음의 사람들에게 베푸신 축복은 실로 놀랍다. 9절
‘또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 곧 하늘의 하나님께 드릴 번제의 수송아지와 숫양과 어린 양과 또 밀과 소금과 포도주와 기름을 예루살렘 제사장의 요구대로 어김없이 날마다 주어’
매일 하나님께 드릴 번제물과 제사에 필요한 모든 것을 제사장의 요구대로 날마다 공급하도록 한 것이다. 그야말로 완벽한 승리가 아닐 수 없다. 성전 건축의 재개 정도가 아니라 예배가 드려질 모든 환경을 완벽하게 만든 것이다.
더 나아가 이 명령을 지키지 않을 때 강력한 처벌을 경고한다. 11-12절
‘내가 또 명령을 내리노니 누구를 막론하고 이 명령을 변조하면 그의 집에서 들보를 빼내어 그를 그 위에 매어달게 하고 그의 집은 이로 말미암아 거름더미가 되게 하라 만일 왕들이나 백성이 이 명령을 변조하고 손을 들어 예루살렘 하나님의 성전을 헐진대 그곳에 이름을 두신 하나님이 그들을 멸하시기를 원하노라 나 다리오가 조서를 내렸노니 신속히 행할지어다 하였더라’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형벌을 내려 이 명령을 누구도 막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감당하면서 주변의 반대가 우리의 삶을 두렵게 할 때가 종종있다. 그러나 말씀에 의지하여 자신들의 생각을 부인하고 순종할 때 벌어진 이 놀라운 장면은 큰 위로와 소망이 된다.
이런 다리오 왕의 조서를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얼마나 감동했을까?
방해꾼이라 여겼던 닷드내 총독이 왕의 명령을 신속히 이행하기 위해 최고의 조력자가 되어 성전을 재건하도록 힘쓰는 장면이 눈에 선하게 보인다. 13절
‘다리오 왕의 조서가 내리매 유브라데 강 건너편 총독 닷드내와 스달보스내와 그들의 동관들이 신속히 준행하니’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재개된 성전 재건의 역사를 이렇게 정리한다. 14절
‘유다 사람의 장로들이 선지자 학개와 잇도의 손자 스가랴의 권면을 따랐으므로 성전 건축하는 일이 형통한지라 이스라엘 하나님의 명령과 바사 왕 고레스와 다리오와 아닥사스다의 조서를 따라 성전을 건축하며 일을 끝내되’
<권면을 따랐으므로>
<이스라엘 하나님의 명령과 바사 왕 고레스와 다리오와 아닥사스다의 조서를 따라>
놀랍게도 이런 반전의 역사를 거쳐 기원전 586년에 솔로몬 성전이 무너진 후, 정확히 70년 만인 기원전 516년에 일명 스룹바벨 성전이 세워진다.
백성들은 기쁨으로 봉헌식을 거행하게 되는데 이때 수소 100마리, 숫양 200마리, 어린양 400마리를 바쳤고, 특히 분열되었던 이스라엘 전체의 회복을 상징하며 이스라엘 12지파의 수를 따라 숫염소 12마리로 속죄제를 드렸다.
이 장면을 기록하며 에스라는 이렇게 선포한다. 18절
‘제사장을 그 분반대로, 레위 사람을 그 순차대로 세워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을 섬기게 하되 모세의 책에 기록된 대로 하게 하니라’
이는 제사장과 레위인의 직무가 모세의 책에 기록된 규례대로 되었음을 선포한 것이다. 그야말로 성전 예배의 질서를 온전히 회복했다는 선포다.
그리고 이들은 유월절과 무교절을 통해 스스로를 구별하며 이 모든 일을 이루신 하나님을 향해 자신들을 드렸다. 22절
‘즐거움으로 이레 동안 무교절을 지켰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즐겁게 하시고 또 앗수르 왕의 마음을 그들에게로 돌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신 하나님의 성전 건축하는 손을 힘 있게 하도록 하셨음이었더라.’
참으로 놀라우신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여기 <앗수르 왕의 마음을 그들에게로 돌려>라는 표현이 전체 문맥의 구조상 틀린 것 같은 느낌이다. 바사 즉 페르시아 왕의 마음을 돌려라고 해야 맞는 것 아닌가?
에스라는 여기서 '앗수르 왕'이라는 호칭을 사용함으로써, 앗수르로부터 시작된 이스라엘의 길고 참혹했던 압제와 포로의 역사가 이제 하나님의 은혜로 완전히 끝나고 역전되었음을 신학적으로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 주님은 내게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인가?
믿음의 삶은 방해를 만난다. 첫 번째 방해에 이들은 16년이란 중단의 아픔을 겪었다. 그리고 말씀을 통해 믿음으로 시작된 16만의 새 출발도 방해를 만났다. 그러나 이들은 포기하지 않고 믿음으로 말씀을 따랐고 놀라운 반전과 승리를 이루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성전 재건의 날짜가 정확히 70년 후라는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시는 시간이었음을 깊이 묵상하게 된다.
삶은 영적인 전쟁터이다. 사단은 늘 말씀을 따라 걷는 믿음의 사람들을 다양한 모습으로 방해한다. 그래서 늘 신앙의 삶이 불편하고 거추장스럽게 느낄 때도 있다.
그러나 그 불편한 방해와 영적 전투조차, 정확히 70년 만에 회복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정교한 섭리 안에 있음을 오늘 본문은 증언한다. 사단의 방해는 우리의 걸음을 더디게 하는 것 같지만, 돌이켜보면 그것은 세상의 위협 앞에서도 오직 말씀만을 의지하도록 우리를 정련하는 거룩한 도구였을 뿐이다.
아울러 이 시간은 완벽한 예배의 회복을 이루려는 하나님의 정교한 타이밍이다. 방해하려는 상소문을 최고의 후원 결의서로 만들어 버리는 하나님의 역사를 믿고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온전한 예배자로 이 시간을 선용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오늘 나에게 라마나욧선교회 16년이란 시간은 온전한 예배자로 나를 다듬는 시간이 되었는가? 아니면 세상과 타협하는 시간이 되었는가? 오늘도 들려지는 말씀에 철저한 순종으로 주님을 향한 예배자가 되기를 겸손히 기도한다. 주님
한줄 묵상 :
<우리를 넘어뜨리려는 사단의 치밀한 방해조차, 우리를 온전한 예배자로 정련하여 세우시려는 하나님의 더 치밀한 '은혜의 도구'일 뿐이다.>
적용 질문 :
1. 지금 내 삶을 가로막고 있는 가장 큰 위기나 방해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그것을 '최고의 조력과 은혜'로 바꾸실 것을 온전히 신뢰하고 있습니까?
2. 신앙생활 속에서 겪는 불편함과 더딘 걸음을 단순한 불평거리로 여기고 있습니까, 아니면 나를 온전한 예배자로 빚어가시는 '거룩한 정련의 시간'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3. 내가 지나온 시간은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며 편안함을 추구한 시간이었습니까, 아니면 오직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몸부림친 '거룩한 빚어짐'의 시간이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