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2024. 10. 20. 일요일. 약간 흐림
어제 나와 아내는 수원에 내려가서 둘째 사위네와 합류했다(둘째 사위, 작은딸, 유치원생인 외손자 1명).
둘째 사위가 안내하는 수원농업박물관을 방문해서 식물을 관찰했고, 인근에 있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은 뒤에는 과천대공원에 들렀고, 과천 추사박물관도 들렀다.
추사박물관에는 김정희가 먹을 갈아서 붓으로 쓴 한자, 한자로 쓴 문장 글 종류의 사본이 무척이나 많았다.
아쉽게도 내 눈(시력)이 나쁜 탓일까?
완당(阮堂) 김정희가 붓으로 쓴 '한글'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지금껏 추사(秋史) 김정희에 대해서 학교에서 가르쳤고, 김정희의 붓으로 그린 서예를 숱하게 보아왔다.
김정희가 한자는 물론이고 한글로도 서예했다고 여겨던 나는 충격을 받았다.
오로지 한자만 득실벅실거렸다.
추사 김정희(1786 ~ 1856년)는 불과 238 ~ 168년 전의 조선조 후기 사람이다.
추사는 굉장한 양반 가문(추사 김정희의 증조부는 영조대왕의 사위이다) 출신.
추사 외에도 완당....호가 100개 쯤 된다고 한다.
* 추사(秋史), 완당(阮堂), 예당(禮堂), 시암(詩庵), 노과(老果), 농장인(農丈人), 천축고선생(天竺古先生) 등
추사에 관한 자료를 검색하기 시작한다.
중국 한자는 ‘동이인(東夷人)’들이 처음 만들어 한족이 주도했지만, 중국을 다스린 다수 종족의 역사와 문화가 합쳐지면서 완성됐다.
한글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최근에 탄생한 글자다.
* 동이족(東夷族) : 중국 동북방에 분포한 민족을 중국인(漢族)이 부르던 종족명칭.
동시에 인류의 지적 성장, 향상된 사고능력, 과학의 발전, 진보된 사상(인간주의)이 반영된 결과물이다. 특히 개인이 목적의식을 갖고 단기간에 창작한 글자란 점에 주목을 받는다. ‘표음문자’여서 학습이 쉽고 사용에 편리하다. 논리적인 음운체계 덕운에 사용자가 수리적인 사고에 익숙해질 수 있다. 그 때문에 많은 학자가 한글의 우수성을 인정했고, 구조와 제정 방식에 관심이 많다.
조선조 제4대 세종이 1443년에 창제하고, 1446년에 반포한 훈민정음.
조선조 사람은 이 훈민정음을 익혀서 문자에 활용해서, 훈민정음을 크게 발전시켰을까?
훈민정음은 왜 450여 년 만인 1894~1896년, 갑오개혁 때야 비로소 나라글로 인정받았을까?
훈민정음은 공문서 등 국가의 공적인 역할은 못하고, ‘언문’, ‘암글’, ‘중글’ 등의 비칭으로 불리웠다.
조선시대 내내 언문은 주로 여자와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는 긴요하게 쓰였지만
소위 사대부라 불리는 문무 양반들은 주자학에 빠져 훈민정음을 외면하였으며 혹 아쉬우면 부인 몰래 머슴들에게 배웠다고 한다.
한자를 훈장들은 한문이라 부르지 않고 진서(眞書)라 했다.
진서 앞에서 우리 문자는 언문(諺文). 막말로 말하면 '상(쌍)글'이다. 상놈들이나 쓰는 글. 또 '똥글'이라고도 했다.
이 '똥'이 좀 심했던지 '뒷글'이라 하기도 했다. 계집들에게나 소용된다는 '암글'이기도 했다.
한자를 진서라고 높이고 한글을 스스로 언문이라 비하하는 근세조선의 문자 봉건성에도 불구하고 한글이 비천한 이름으로나마 주로 궁궐의 왕실 여인이나 궁녀 그리고 사회 하층의 백성과 천민 그리고 남존여비 체제의 부녀층의 음습한 명맥으로 온갖 핍박과 홀대를 받으며 이어오다가 대한제국 시기에 이르러서야 고종이 국한문 공용을 선포하게 된 것을 생각하면 실로 피눈물이 날 만하지 않은가?
아직 세계 도처에 존속되고 있는 3,000 내지 8,000개 언어는 언어만으로는 이렇듯이 몇 천 개이지만 정작 그 문자는 몇 백 개밖에 없다. 이 가운데 한글이 한국어를 표기할 수 있다는 축복은 얼마나 절절한 노릇이겠는가. 돌이켜보자면 고대 향찰이나 이두문이 근세조선시대까지 구차하게 사용된 것으로 멈췄다면 지금 우리의 문화는 어느 지경이겠는가
훈민정음이 박대받던 사실은 미국 선교사 호머 헐버트( Homer Bezaleel Hulbert)의 회고록에서 나티난다.
그는 1886년 영어교사로 초청되어 입국하였는데 훈민정음을 접하고 그 훌륭함에 놀랐고 동시에 이렇게 훌륭한 문자가 너무나 억울하게 푸대접을 받고 있어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세종대왕께서 1443년(세종25년)에 창제하여 1446년에 자, 모음 28자로 구성된 글자를 반포하니, 이를 일러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 했다.
당시의 사대주의적 유학자들에 의해 언문(諺文).언서(諺書)로 비칭(卑稱)됨은 물론 심지어 반절(反切)・암클・아햇글・가갸글로까지 폄하되어 불려졌다.
한문이 어려워 백성들이 글을 모르니 이를 불쌍히 여겨 만든 훌륭한 훈민정음은 태초부터 이러한 박대를 받아오다 주시경 선생에 이르러서야 처음 ‘한글(《아이들 보이》(1913))’이라 사용되면서 일반화의 길을 걸었다.
이 후 한글은 1933년 조선어학회에서 만든 ‘한글맞춤법통일안’에 의해 현재와 같은 자음(子音)14자, 모음(母音) 10자, 합계 24자의 자모(字母)로 통일되었다. 주지하다시피 한글은 세계에서 사용되는 언어 중 가장 과학적인 글이라고 국내외 언어학자들이 극찬을 아끼지 않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한글날이 다가와도 한글의 중요성은 물론 우리말도 소중히 사용치 않는 것 같다.
한글의 사용을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세력이 있었다.
성리학자는 신분적으로는 양반이고, 경제적으로 유일한 재화이며 생산수단인 토지의 소유자들이었다. 또한 문화적으로 도덕과 학문· 예술을 만들고, 보급하며 감독하는 고위 관리 또는 출세를 고대하는 예비군들이다. 더구나 사대교린 정책을 선택했고, 자의식도 부족했으므로 임금의 한글 창제를 반대했다. 이들은 끝까지 한자와 한문을 고집했다.
성리학자들은 비효율적이고, 학습이 어려운 한자를 고수하면서 왜 훈민정음은 용도폐기했을까?
태생적으로 특권 세력인 그들은 항구적인 권력의 독점과 유지가 필요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백성들을 우민화시키고, 자신들과의 차이점을 강조하고 우월성을 강요할 도구로 ‘한자’라는 기호의 독점이 효율적이었다.
결과적으로 조선은 유추에 근거한 자기 주장이 강한 교조적인 사회, 실생활을 무시하고 관념적인 지식인이 권력을 독점한 체제가 됐다. 또한 성리학과 실체가 불분명한 중국에 사대하는 독특한 나라가 됐다.
한글은 1989년 유엔의 유네스코에서 ‘세종대왕상’을 만들어 해마다 문맹률을 낮추는데 공을 세운 사람이나 단체에 상을 주고 있다.
또 1997년에는 훈민정음을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하였다.
세계문자올림픽 대회에서도 제1회, 제 2회까지 1등 금메달을 획득했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펄 벅(Pearl S. Buck)은 ‘한글은 세계에서 가장 단순한 글자이자 훌륭한 글자’라고 칭찬하였고,
게일(Jams S. Gale) 선교사는 ‘세종대왕은 하나님께서 보낸 선지자’라고까지 극찬하였다.
불과 24개의 자음과 모음으로 11,000개 이상의 문자와 소리를 표현할 수 있는 문자는 세계에서 한글이 유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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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서없이 자료를 수집 중이다.
나중에 정리할 예정.....
2024. 10.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