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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8 장 되찾은 이름
①
남궁청운의 무공은 한 단계 더 올라가 있었다.
만화루에서 고초를 겪었을 때에 비하면 그의 무공은 괄목할만한 신장세를 보였다. 평소 무림의 기린아로 촉망받고 자랐을 때만 해도 그는 남다른 자부심으로 스스로의 무공을 과대평가하고 있었다.
그러나 죽음의 고비를 넘긴 후로는 모든 것을 새롭게 보게 되었다. 따라서 무림군왕성으로 돌아간 직후 자신의 무공을 재점검하게 되었다. 그 결과 그의 무공은 한 단계 상승했던 것이다.
"......."
그는 수렵장 안으로 들어선 순간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무공이 극강에 달한 고수만이 감지할 수 있는 본능적인 직감이었다.
'뭔가 잘못됐다. 사냥은 사냥이되... 인간사냥이 벌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든다.'
그는 가슴이 뛰었다.
숲으로 두 마장쯤 들어갔을 때 그는 판단을 내렸다.
그의 뒤를 따르는 열 명의 하인들의 발걸음이 지나치게 가볍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는 일부러 말을 전력으로 달려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인들은 조금도 뒤지지 않고 따라붙었다.
'저자들은 하인이 아니다!'
그는 가슴이 차갑게 식는 것을 느꼈다.
"너희들은 누구냐?"
그는 말을 멈춘 후 돌아서며 물었다. 전광 같은 안광으로 하인들을 하나하나 훑어보는 그의 표정에는 냉기가 흘렀다.
"누구라뇨? 저희들은 사냥 몰잇꾼......."
대답하는 작자는 말끝을 흐렸다. 남궁청운의 입가에 조소가 어리는 걸 보았던 것이다. 그는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갔다.
"당주님께서 뭘 오해하시는 것 같은데......."
슈슈슉!
그의 손이 허리를 떠남과 동시에 자오정(子午釘)이 발출되었다.
"어딜!"
쩡! 쩡!
남궁청운의 소매가 떨쳐지자 자오정이 사방으로 퉁겨져 나갔다.
"쳐라!"
"놈이 눈치챘다!"
흑련사의 살수들은 마각(馬脚)을 드러내 일제히 공격을 가했다.
"하하하! 가소로운 것들!"
남궁청운은 이미 암수를 대비하고 있던 터라 즉각 반격을 펼쳤다. 그는 무림군왕성의 소성주이자 태자당의 당주였다. 그의 무공은 후기제일인이라 불리웠다. 아무 흑련사의 일급살수들이라해도 그의 무공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크아악!"
"한심한 놈들! 감히 날 암격하려 하다니!"
남궁청운은 단숨에 일곱 명을 거꾸러뜨린 후 재차 장력을 날렸다.
펑!
다시 두 명의 살수가 피를 토하며 날아갔다. 남은 한 명은 갑자기 몸을 돌리더니 숲속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서라!"
남궁청운은 말을 달려 그의 뒤를 쫓았다. 살수는 더욱 깊은 숲속으로 달아났다. 울창한 숲으로 인해 남궁청운은 더 이상 말을 달릴 수가 없게 되었다.
그는 마음을 돌렸다.
'이럴 게 아니다. 황보소저가 위험하다.'
그는 졸개 한 명을 쫓아봐야 별 볼일 없다고 생각하고 즉각 말을 멈추었다.
'그녀는 북쪽으로 갔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그가 막 박차를 가하려는 순간이었다.
"남궁당주, 아직 이곳의 일이 끝나지 않았네."
문득 한 가닥 창노하면서도 사기가 가득한 음성이 그의 고막을 울렸다.
"누구냐?"
그는 상대방의 음성만으로도 강적이라는 것을 직감하고 말머리를 돌렸다.
"강호에서는 노부를 독안금붕(獨眼金鵬)이라 부르지."
"독안금붕!"
남궁청운은 전신을 부르르 떨며 부르짖었다.
슈욱!
허공으로부터 거대한 새가 떨어져내렸다. 남궁청운은 고개를 들었다. 눈이 부셨다. 찬란한 금빛 새가 떨어지고 있었다.
'헉!'
그는 마상에서 몸을 흔들었다.
금빛 새는 눈 깜빡할 사이에 면전에 떨어져 내렸다. 알고 보니 새가 아니라 인간이었다. 금빛 장포를 날개처럼 펄럭이며 허공을 날아내린 자는 왼쪽 눈이 감겨져 있었다. 애꾸였던 것이다.
키는 칠 척, 나이는 육순이 넘어 보였다. 피부는 구릿빛이었으며 깡마른 체격이었다.
남궁청운은 신음을 흘렸다.
"으음, 뜻밖이오. 이곳에서 사사련의 련주를 보게 되다니......."
그렇다.
상대방은 사사련의 련주이자 당금 흑련사의 공동주인 중 한 명인 독안금붕이었던 것이다.
독안금붕은 괴소를 흘렸다.
"흐흐흐, 너무 늦게 알았다."
남궁청운은 눈썹을 성큼 치켜올렸다.
"내 비록 호구(虎口)에 떨어졌다고는 하나 아직 승부는 나지 않았소."
"오냐, 관을 보아야 눈물을 흘린다더니. 더 시간 끌 이유가 없겠지?"
"바라는 바외다."
훌쩍 말 위에서 뛰어내린 남궁청운은 허리춤에서 천왕도(天王刀)를 뽑았다. 그것은 그의 애병으로 지금까지 한 번도 뽑아보지 않은 것이었다.
그는 천왕도를 상단으로 뻗은 채 두 발을 팔자(八字)로 벌렸다. 그야말로 태산처럼 무거워 보이는 자세였다.
'으음! 호랑이 새끼인 줄 알았건만 이미 다 큰 범이 되어 있었군. 저놈을 지금 꺾지 못하면 향후 큰 우환이 될 것이다.'
독안금붕의 외눈이 번쩍 빛났다. 그는 소매를 떨쳤다. 그러자 두 개의 금륜(金輪)이 나타났다. 원형의 금륜은 날카로운 이빨이 달려 있어 살짝 스치기만 해도 살점을 뜯어낼 정도로 예리해 보였다.
윙!
그의 손에서 금륜이 회전했다.
"젊은 친구 먼저 손을 쓰게나."
"굳이 그럴 필요 없소이다."
남궁청운 특유의 호승심을 드러내며 조금도 위축감을 보이지 않았다.
"쯧쯧, 혈기를 다스리지 못하는 걸 보니 어직 멀었군. 자네는 용장은 될지언정 진정한 영웅의 재목은 아니로군."
독안금붕은 그를 비웃었다.
"으하하하......! 걱정해 줘서 고맙소. 하지만 나는 내 방식대로 살아갈 것이오. 귀하가 비록 대선배이긴 하지만 장강의 뒷물결이 앞물결을 밀어낸다는 말도 듣지 못했소? 오늘 이후로 당신은 더 이상 거드름을 피우지 못하게 될 것이오."
그야말로 방약무인한 말이었다.
남궁청운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미 전신에 공력을 극도로 끌어올리고 있었다.
"클클! 어리석은 놈, 애비의 명성을 업고 승승장구하더니 가슴에 바람이 잔뜩 들었구나. 네놈에게 세상이 얼마나 넓은가를 보여주마."
독안금붕의 외눈에서 금빛 안광이 뻗어나왔다. 남궁청운은 눈이 부심을 느꼈다.
위이이잉!
드디어 금륜이 독안금붕의 손을 떠나 날아갔다. 두 개의 금륜은 마치 태양처럼 눈부신 빛을 반사하며 좌우로 파고들었다.
남궁청운은 태산처럼 서 있다 금륜이 좌우로 쇄도하는 순간 천왕도를 휘둘렀다.
깡, 깡!
불꽃이 사방으로 퉁겼다. 금륜은 정확히 그의 칼을 맞고 퉁겨나갔다.
"타앗!"
남궁청운은 기합성을 발하며 신형을 날렸다. 그는 허공으로 삼 장 가량 떠올랐다. 일직선으로 떨어지며 단천획지(斷天劃地)의 일도를 펼쳤다.
무림사의 일장을 장식했던 무림군왕성주인 용비천군의 절학인 천왕도법(天王刀法)이 펼쳐진 것이다.
'헛, 대단하군!'
독안금붕은 헛바람을 들여마시며 쌍장을 합쳤다.
위이이잉!
"......!"
막 지면으로 떨어져내리던 남궁청운은 좌우에서 강맹한 경기가 몰려오는 것을 보고 시선을 돌렸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방금 전 쳐냈던 금륜이 전보다 더욱 빠른 속도로 날아오는 것이 아닌가?
그는 급히 도법을 거두며 왼발로 오른 발등을 찍으며 삼 척 가량 떠올랐다. 두 개의 금륜은 아슬아슬하게 그의 발바닥을 스치며 지나갔다.
"흐흐흐! 제법이구나. 하지만 아직 멀었다."
독안금붕이 쌍장을 교차시켰다. 순간 지나갔던 금륜이 마치 그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듯 방향을 꺾어 다시 날아왔다. 이번에는 더욱 빨라 마치 빛살처럼 보였다.
'억!'
남궁청운은 본능적으로 천왕도를 휘둘렀다.
카캉!
불꽃이 퉁기며 팔목이 시큰해졌다.
다음 순간 그의 눈이 부릅떠졌다. 퉁겨나갔던 금륜이 두 쪽으로 갈라지며 네 개로 나뉘어져 재차 날아오는 것이 아닌가?
'이럴 수가?'
그는 호흡이 탁해져 바닥으로 추락하고 있었다. 처음 끌어올렸던 진기가 고갈나고 있었다. 그는 천근추(千斤錐)의 신법으로 급격히 바닥으로 떨어져내렸다. 머리 위를 스치며 네 개의 금륜이 지나갔다.
머리카락이 우수수 떨어졌다. 금륜의 경기에 머리카락이 잘린 것이다.
그는 기겁했다. 그는 상대를 얕보는 마음을 버리고 천왕도를 단단히 움켜잡은 후 금륜을 노려보았다. 독안금붕의 무공은 너무나 괴이하여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위이잉!
다시 네 방향에서 금륜이 날아왔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할 수 없군. 패왕수라공(覇王修羅功)을 펼치는 수밖에.'
그는 공력을 전력으로 끌어올려 쌍장을 가슴 앞으로 모았다. 네 개의 금륜이 쇄도하자 쌍장을 뻗으며 신형을 빙글 회전시켰다.
콰쾅!
폭음과 함께 네 개의 금륜이 산산조각나며 사방으로 날아갔다.
"헉!"
독안금붕은 대경실색했다. 설마하니 자신의 절학을 이십을 조금 넘은 남궁청운이 파해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한편 남궁청운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가거라! 늙은이!"
우우우웅!
쌍장을 뻗자 가공할 회오리 강기가 뻗어나갔다. 독안금붕의 외눈이 번쩍 빛났다.
"크흐흐흐! 애송이놈! 기고만장했구나!"
그도 물러서기는커녕 앞으로 다가오며 쌍장을 뒤집었다 벼락처럼 뻗어냈다.
쿠콰콰쾅!
굉음과 함께 바닥이 움푹 패이며 흙덩이가 치솟아올라 천지간을 어둡게 했다.
"크아아아악!"
처절한 비명이 울렸다.
흙덩이가 떨어진 후, 장내에 비틀거리는 인영의 모습이 드러났다. 독안금붕이었다. 그는 피를 울컥 토하며 가슴을 움켜쥐고 있었다.
그의 앞.
남궁청운은 안색이 납덩이처럼 굳어진 채 서 있었다. 그의 우수가 뻗어있었다. 그는 손가락을 독수리발톱처럼 구부리고 있었다.
"흐흐, 가거라. 늙은이."
손가락을 와락 움켜쥔 순간.
"크아아악!"
독안금붕은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붕 떠올랐다. 그의 가슴에서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심장이 통째로 뜯겨져 나왔다.
쿠웅!
잠시 후 그는 바닥에 떨어졌다. 심장에 구멍이 뻥 뚫린 처참한 모습이었다.
"......."
남궁청운은 자신의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손에는 아직도 펄떡거리는 심장이 쥐어져 있었다. 손가락을 모으자 팍! 하는 소리와 함께 심장이 터지며 선혈이 사방으로 퉁겼다.
경악할 일이었다.
방금 전 그가 펼친 무공은 패왕수라공이었다. 그것은 남궁가문의 독문신공이 아니었다. 남궁가의 심법(心法)은 도가(道家)에 그 연원이 있는 것으로 패왕수라공처럼 잔혹하지 않았다.
남궁청운의 미간이 푸르게 물들어 있었다.
그것은 일종의 마기(魔氣)였다.
"흐흐흐......."
남궁청운의 입에서 음침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는 독안금붕의 시신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늙은이, 날 원망마라. 네가 자초한 것이었으니까......."
②
"설마 했는데.... 네놈이 흑련사의 주구일 줄이야......!"
남궁소연은 이를 갈며 호사붕을 노려보았다. 호사붕은 유들유들한 표정이었다.
"소연낭자, 주구란 표현은 듣기 거북하구려. 소생은 흑련사의 영주(令主)를 맡고 있소. 소생의 부친은 장로(長老)이기도 하오. 그러니 이번 일은 공적(公的)인 일인 것이오."
숲속의 한 공지.
수십 명의 황금총(黃金總) 고수들이 에워싼 가운데 두 여인이 분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녀들은 바로 남궁소연과 황보수선이었다.
"후후! 각자에겐 그 스스로의 길이 있는 법이오. 우리 만금가는 황금으로 천하를 제패했소. 우리가 어느 쪽과 손을 잡느냐는 것은 온전히 우리 자신의 문제요. 당신들보다 흑련사가 우리에게 좀 더 좋은 조건을 제시했을 뿐이오."
호사붕의 여유있는 말이었다.
남궁소연은 칠절편을 움켜쥔 채 황보수선을 돌아다보았다. 그녀가 적시에 뛰어들지 않았다면 자신은 벌써 호사붕의 포로가 되었을 것이다.
다행히 오십여 명의 황금총 고수들은 그녀를 생포하려 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벌써 쓰러졌을 것이다.
"흥! 우리 무림군왕성이 너희 가문에 섭섭하게 한 적이 있단 말이냐?"
남궁소연의 말에 호사붕은 느긋하게 답했다.
"거듭 말하지만 만금가는 손해보는 장사는 하지 않소. 무림군왕성보다는 흑련사가 본가에 더 이익이 된다고 생각했을 뿐이오."
호사붕은 음침한 눈으로 남궁소연의 아래위를 훑어보며 말을 이었다.
"흐흐, 오늘을 위해 얼마나 많은 투자를 했는지 아시오? 이제 그대는 얌전히 내 품에 안기는 것이 좋을 것이오."
남궁소연은 그의 눈길이 자신의 몸을 훑어보자 전신에 소름이 끼쳤다.
"ㅌ! 더러운 놈, 어디서 함부로 음탕한 혓바닥을 놀리는 거냐?"
그러나 그녀의 반응은 호사붕의 음심을 더욱 충동질했을 뿐이었다.
"흐흐, 네 앙칼진 성미가 더욱 구미를 돋구는구나. 사실 황보수선 같이 얌전을 빼는 것보다는 더욱 내 성미에 맞는다."
"닥쳐라! 이 더러운 놈! 네 주둥아리를 뭉개주겠다!"
쐐애액!
분노가 극에 달한 남궁소연은 칠절편을 날카롭게 휘둘렀다.
"호오! 낭군될 사람에게 너무 지나치군?"
호사붕은 유연한 보법으로 칠절편을 피하며 계속 약을 올렸다. 남궁소연의 무예는 범상치 않은 것이었으나 호사붕은 쉽게 그녀의 공세를 피해내고 있었다.
'이 자가 지난 번 옥지환(玉指環)을 빼앗아 간 것은 우연이 아니었어. 이제 보니 자신의 무공을 감추고 있었구나.'
남궁소연은 신도문에서의 치욕이 되살아났다.
당시 호사붕은 자신의 몸을 집요하게 훑어보며 그녀가 던진 옥지환을 가볍게 낚아챘었다.
"후후! 벌써 지쳤나? 그럼 이만 내 품에 안기는 게 어떻소? 극락의 꿀맛을 보여줄 테니."
호사붕의 야유가 이어졌다. 남궁소연은 피가 거꾸로 흐르는 것 같았다. 그녀는 앙칼지게 외치며 칠절편을 휘둘렀다.
쌔애애액!
허공을 가르며 연편이 꿈틀거리며 날아갔다. 이번에는 호사붕도 더 물러서지 않았다. 그녀는 어깨를 흔들하는가 싶더니 채찍의 사정권 안으로 달려들었다.
남궁소연은 안색이 변했다.
채찍은 길었다. 적당한 간격을 두어야 제 위력을 발휘한다. 호사붕은 그녀의 약을 올려가며 그녀로 하여금 냉정을 유지할 수 없도록 충동질했다. 그러다 틈을 타 파고든 것이었다.
"앗!"
그녀가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팔꿈치 부분의 곡지혈(曲池穴)이 따끔해지며 그만 채찍을 놓치고 말았다. 호사붕의 손이 그녀의 곡지혈을 움켜쥔 것이다.
"이... 비열한 놈! 놓지 못하겠느냐?"
"흐흐! 그만 앙탈부려라. 이젠 포기할 때도 되지 않았느냐?"
남궁소연은 이번에는 허리춤의 마혈(痲穴)이 뜨끔 하는 것을 느끼며 그만 눈을 감고 말았다.
"네 뜻대로 됐으니 어서... 죽여라!"
"쯧쯧, 아직도 내 진심을 몰라주는군. 평생을 함께 할 여인을 죽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냐?"
호사붕은 남궁소연을 음탕한 눈길로 쓸어보며 흡족한 미소를 머금었다. 여인의 손처럼 희고 가느다란 손이 남궁소연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치워라! 이 개 같은 놈아!"
"흐흐, 하늘 같은 낭군에게 그게 무슨 말버릇이냐?"
호사붕은 남궁소연의 젖가슴을 덥석 움켜쥐었다.
"악! 이 짐승 같은 놈이......!"
남궁소연은 전신을 부르르 경련했다. 말할 수 없는 수치감으로 인해 정신이 아득해졌다.
호사붕은 그녀의 귓전에 대고 속삭이듯 물었다.
"지난 번 만화루에서 두 노마에게 납치된 적이 있었지? 후후, 그때 기분이 어땠느냐?"
남궁소연은 눈을 부릅떴다. 그녀는 무엇인가를 깨달은 듯 치를 떨었다.
"이... 이제 보니 그것도 네놈이 시킨 짓이었구나?"
"후후! 물론이지. 그날 밤 너와 인연을 맺어볼까 해서 말이야. 하지만 훼방꾼 때문에 수포로 돌아갔었지."
훼방꾼이란 당세곤을 말하는 것이었다.
"이... 개만도 못한 놈아! 어서 날 죽여라!"
남궁소연은 급기야 눈물을 흘리며 외쳤다. 호사붕은 그녀의 허리를 안은 채 한 손을 그녀의 가슴 속으로 밀어넣었다.
"후후, 그건 안되지. 이렇게 아름다운 육체를 땅에 묻기는 너무나 아깝지 않느냐?"
그는 뭉클한 젖가슴을 손으로 덥썩 움켜쥐었다.
"악! 제발... 그만하란 말야!"
남궁소연은 하마터면 졸도할 뻔했다. 처녀의 몸으로 중인환시리에 당하는 모욕이 너무나 컸던 것이다.
이때였다.
"이 더러운 색마! 죽어라!"
앙칼진 호통과 함께 날카로운 경기가 날아왔다. 황보수선이 황금총의 무사들 사이에서 몸을 뽑아올려 덮쳐온 것이다.
"하하! 이건 또 뭐지?"
호사붕은 남궁소연의 뒤로 숨으며 이죽거렸다.
"이 가증스러운 인간아! 썩 앞으로 나서라!"
호사붕은 고개만 불쑥 내밀며 이죽거렸다.
"그래 어쩔 테냐? 네년도 이 어르신의 계집이 되고 싶으냐?"
"뭐... 뭐라고?"
난생 처음 들어보는 치욕적인 언사에 황보수선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니면 좀 기다려라. 네년을 귀여워해 줄 어르신이 따로 계시니 말야."
말을 하면서도 호사붕의 손은 여전히 남궁소연의 젖가슴을 주물러대고 있었다.
"이... 금수만도 못한 놈!"
황보수선은 쌍장을 번쩍 치켜올렸다.
"수선언니, 흥분하지 마세요. 이자가 일부러 언니를 격동시키고 있어요!"
남궁소연은 경황중에도 그녀에게 경고를 보냈다. 방금 전 자신이 휘말려들었던 것을 떠올린 것이었다.
"호오! 감히 지아비를 험담하다니, 고약한 계집이로구나."
호사붕은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아악!"
남궁소연은 자지러지는 비명을 질렀다. 젖가슴이 무참히 그의 손아귀에서 뭉개진 것이다.
"손 떼지 못하겠느냐!"
휙!
황보수선은 신형을 날려 호사붕을 덮쳐갔다. 그때였다.
쏴아아!
갑자기 허공에서 시커먼 그물이 떨어져 내렸다. 너무나 갑작스런 일이라 아차 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그녀의 몸은 그물에 갇혀버리고 말았다.
황금총의 인물이 나뭇가지 위에서 그물을 던진 것이었다.
황보수선은 그물에 갇힌 인어(人魚)가 되어 허우적거렸다. 그녀의 무공이 아무리 뛰어나다해도 천잠사(天蠶絲)로 짜여진 그물에서 빠져나가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하핫! 꼴 좋구나. 무림의 일대재녀가 그물에 갇힌 신세가 됐으니 말이다."
호사붕은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이로써 그는 중원쌍미(中原雙美)로 불리는 두 여인을 사로잡은 것이다.
황보수선은 허리춤에서 비수를 꺼내 그물을 자르려 애썼으나 어찌된 셈인지 잘려지지가 않았다.
"하하하! 네년은 천잠사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느냐? 천하의 보검이라도 벨 수 없을 것이다. 공연히 헛수고하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황보수선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이것이 천잠사 그물이란 말인가? 아아! 그렇다면 벗어나기는 틀렸구나.'
이때 허리춤이 뜨끔하더니 온몸이 마비되어 버렸다. 호사붕이 그녀의 연마혈을 짚어버린 것이다.
"수선언니!"
남궁소연은 피를 토하듯 부르짖었다.
"후후, 어디 쓸만한 몸매를 지녔는지 살펴볼까?"
호사붕은 남궁소연을 내버려 두고 그물을 걷더니 황보수선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황보수선은 눈앞이 캄캄했다. 수십 명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서 옷을 벗기우게 될 줄이야! 그녀는 이 믿을 수 없는 사태에 절망을 금치 못했다.
'아아! 이런 모욕을 받게 되다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
그녀는 혀를 깨물려 했다. 그런데 갑자기 턱이 마비되고 말았다. 간악하기 그지없는 호사붕이 눈치채고 그녀의 아혈(啞穴)마저 짚어버린 것이다.
문득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호사붕이 그녀의 경장 하의를 벗겨버린 것이다. 대리석처럼 미끈한 두 다리가 드러나고 말았다.
"호오! 겉보기와는 틀린걸?"
호사붕은 탄성을 발했다.
눈처럼 흰 피부와 늘씬하게 뻗어내린 다리를 보는 순간 그는 침을 꿀꺽 삼켰다.
'제길, 이제 보니 남궁소연 못지않은 계집이로구나.'
그는 입맛을 다셨다. 황보소연을 부친에게 양보한 것에 대해 후회가 막심이었다.
그는 황보수선의 상의를 벗기기 시작했다. 못 먹을 떡 주물러나 보자는 심산이었다. 황보수선은 그만 죽고만 싶은 기분이었다. 가슴 속으로 불쑥 손이 밀고 들어오자 그녀는 눈을 부릅떴다. 그때였다.
푸른 하늘에서 커다란 새가 떨어져 내렸다.
'......?'
그녀는 의아했다. 그러나 곧 그것이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더욱 눈을 크게 떴다.
'저분은......!'
그녀는 하마터면 심장이 입밖으로 튀어나올 뻔했다. 허공에서 떨어져내리고 있는 인영은 바로 백육호였던 것이다.
"더러운 손을 떼지 못하겠느냐!"
위이잉!
태산이라도 누를 듯한 장력이 밀려왔다.
"제기랄!"
호사붕은 욕설을 퍼부으며 급히 황보수선에게서 손을 떼며 장력을 쳐올렸다.
펑!
"윽!"
호사붕은 신음을 발하며 연달아 뒤로 물러났다. 바닥에 한 치 이상의 발자국이 찍혀 있었다.
"우웩!"
그는 선혈을 토해냈다. 단 일 장의 격돌에서 내상을 입고 만 것이었다.
백육호는 소리없이 황보수선의 앞에 내려섰다. 그는 급히 그녀를 안으며 물었다.
"황보소저, 괜찮으시오?"
황보수선은 아혈이 짚혀있어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백육호는 아! 하고 탄성을 발하며 그녀의 아혈을 풀어주었다.
"아! 이게... 꿈은 아니겠지요."
황보수선은 말문이 터지자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했다.
이때였다.
뚜우우우!
멀리서 뿔고동 소리가 울려왔다. 백육호는 그 소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급히 물었다.
"어느 혈이 점혈되었소?"
황보수선은 황급히 눈을 감아버렸다. 그녀의 바지는 아직 벗겨진 상태였다. 그녀는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허리의 세 군데......."
백육호는 그녀의 혈을 풀어주려다 흠칫했다. 눈부시게 흰 허벅지가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는 얼른 그녀의 바지를 여며준 후 혈도를 타통시켰다.
황보수선은 혈이 풀리자 벌떡 일어났다.
"내 이... 인간 같지 않은 놈을 가만 두지 않겠어요!"
그녀는 이를 갈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호사붕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오십여 명의 황금총 고수들도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놈들은 모두 달아났소. 방금 전 뿔고동 소리가 퇴각신호인 것 같소."
황보수선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단 말인가요?"
"모르겠소. 일단은 남궁소저부터 구하고 봅시다."
그는 남궁소연을 구하는 일을 황보수선에게 맡겼다. 남궁소연의 옷도 반쯤 벗겨져 있었던 것이다.
③
뜻밖의 변수가 상황을 반전시켰다.
수렵장에 깔려있던 흑련사와 황금총의 고수들은 일제히 퇴각했다. 그것은 무림군왕성의 무사 천여 명이 밀려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만금장은 졸지에 주인이 뒤바뀌고 말았다.
호금수를 비롯하여 그가 비밀리에 거금을 들여 고용했던 황금총의 고수들이 모두 달아났던 것이다. 남아있는 자들은 노약자나 무공을 모르는 여인들뿐이었다.
수렵장의 일은 일단락 되고 사태는 수습되었다.
"장형도... 죽었단 말이오?"
여웅이 비통한 듯 중인들을 향해 물었다. 그도 심한 고초를 겪은 듯 전신이 피투성이였다.
"그렇소. 내 눈으로 직접 확인했소. 그는... 처참하게 죽었소."
남궁청운의 음성에는 분노가 담겨 있었다. 그는 호사붕에게 철저히 농락당한 한으로 분을 삭이지 못하고 있었다.
태자당은 이번에 지대한 타격을 입고 말았다.
철기문의 장건웅과 구룡방의 소방주 열화권 마휘가 참혹한 시신으로 수렵장 내에서 발견되었다.
뿐만 아니라 화산파의 연채령은 행적이 묘연했다.
철무영과 황보수선, 남궁소연은 무사했지만 그들은 이번 일로 말할 수 없는 심적 타격을 입고 말았다. 여웅 또한 몇 개월 요상을 해야 할 정도로 중상을 입었다.
무사한 사람은 백육호와 남궁청운, 그리고 당세곤 뿐이었다.
"진작에 말했어야 했는데... 설마 이렇게 빨리 놈들이 음모를 꾸밀 줄은 몰랐소."
당세곤이 탄식하며 말했다.
영걸들이 모여있는 곳은 만금장의 대전이었다. 그 말에 남궁소연이 발갛게 충혈된 눈으로 물었다.
"무슨 말씀이세요? 그럼 미리 알고 있었단 말인가요?"
중인들의 시선은 일제히 당세곤에게 집중되었다. 당세곤은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난 벌써부터 호사붕이 흑련사와 내통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소."
중인들의 안색이 변했다. 남궁소연은 말도 안된다는 듯이 따져 물었다.
"그럴 수가? 그런데 어째서 우리에게 알려주지 않았죠? 사전에 말했다면 이렇게 어이없이 당하지는 않았을 거 아녜요?"
당세곤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꼭 그렇다고 말할 순 없었을 것이오. 우선 여러분은 내 말을 믿지 않았을 것이오. 아직도 내가 신도문에서 동지들을 독살했다고 의심하고 있지 않소?"
"......!"
중인들은 멈칫했다.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신도문에서 의문의 살인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들은 대부분 당세곤을 의심했던 것이다.
"난 그 사건이 있은 후 끈질기게 호사붕을 조사했소이다. 놈에게 냄새가 나기 때문이었소. 그 결과 결정적인 단서를 찾게 되었소이다."
"무슨 단서죠?"
남궁소연이 계속 물었다.
"여러분은 언가권의 임표와 아미파의 석정진인이 독살되던 날을 기억하시오? 그 두 사람의 시신을 발견한 자가 누군지 말이오?"
남궁소연은 잠시 생각하더니 중얼거렸다.
"물론이에요. 그건 두 분의 방을 보살피던 하인이었잖아요."
당세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난 그자를 주목했소. 그자의 뒤를 면밀히 살핀 결과 점점 더 확신하게 되었소. 그자는 만석동(萬石童)이란 자로 그 사건이 있은 직후 신도문을 떠났소. 그리고 어디서 생겼는지 돈을 물쓰듯 하며 지내고 있었소."
"으음......."
남궁청운은 신음을 발했다.
"나는 그자를 심문해서 사건의 전모를 파헤치는데 성공했소. 그자는 매수당했던 것이오."
이번에는 여웅이 조급하게 물었다.
"그래, 무엇을 알아냈소?"
"만석동은 호사붕의 부탁을 받고 독초(毒草)를 푼 물을 두 사람에게 갖다 주었소. 결국 두 사람은 그 물로 세안을 한 후 중독되어 죽은 것이오."
"그럼 당시 방안에 있던 찻잔은 또 무엇이오?"
"그건 호사붕이 혼선을 빚게 하기 놓아둔 것이었소. 결국 내가 표적이 되도록 수를 쓴 것이었소."
이제까지 잠자코 듣기만 했던 황보수선이 의문을 제기했다.
"호사붕의 간악함으로 미루어 만석동이란 자의 입을 함구시켜야 하지 않았을까요? 또 물에 담갔다는 독초는 무엇이길래 두 분이 속수무책으로 당했을까요?"
당세곤은 부드러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본 후 고개를 끄덕엿다.
"역시 황보소저의 안목은 예리하군요. 먼저 독초에 대해 설명해 드리겠소. 알다시피 우리 당문(唐門)은 독(毒)에 관한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가문이오. 나는 만석동의 얘기만 듣고 그것이 무색무미무취(無色無味無臭)의 특성을 지닌 선인장의 한 종류라는 것을 알았소. 그것은 중원의 동남방, 즉 십만대산(十萬大山) 일대에서만 나는 것이오. 말하자면 사사련(邪邪聯)이 있는 지역과 인접한 곳인 것이오."
"......."
"결국 이 일에는 흑도의 거물인 사사련이 연관되어 있다는 생각이 든 것이오. 그리고 만석동을 죽이지 않은 이유는 두 가지로 볼 수 있을 것이오."
"그게 뭐죠?"
"첫째는 호사붕이 방심했다는 것이오. 그는 일단 흉수로 날 모함하는데 성공했다 믿고 후속조치를 취하지 않았을 수도 있소. 둘째는 공연히 그를 죽였다가 다른 단서를 남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것이오."
중인들은 침묵했다. 그의 말이 맞든 안 맞든 간에 지금으로써는 반박할 근거가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다.
당세곤의 눈길은 다시 황보수선에게 향했다. 그의 눈빛에는 뜨거운 관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호사붕이 적도로 판명난 이상 그는 새로운 희망이 생긴 셈이었다.
황보수선은 그의 눈길이 부담스러운 듯 고개를 떨구며 물었다.
"그렇다면 왜 이제와서 그 얘기를 꺼냈나요? 미리 말했다면 장공자와 마공자가 희생당하는 일은 없었을 텐데......."
당세곤은 한숨을 쉬었다.
"아까도 말했듯이 내가 말해봤자 여러분은 믿지 않았을 것이오. 특히 남궁당주는 호사붕과 막역한 사이지 않았소?"
그 말에 남궁청운의 얼굴이 붉어졌다. 입이 백 개라 한들 할 말이 없었다. 그는 호사붕과 죽이 맞았었다. 만일 당시 당세곤이 이런 말을 했다면 아마도 스스로가 발벗고 나서서 당세곤을 몰아붙였을지도 몰랐다.
"그래서 난 좀더 확실한 증거를 잡아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이오. 그러나 설마 수렵장에 우리를 몰아넣고 인간사냥을 시작할 줄은 꿈에도 몰랐었소."
당세곤은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사실 내가 무사한 것도 수렵장에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이었소. 나는 사냥을 하는 척하면서 증거를 찾기 위해 만금장을 뒤지고 있었소. 그렇지 않았다면 아마 나 역시 화를 면치 못했을 것이오."
중인들은 무거운 침묵에 잠겼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황보수선이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아무튼 이 정도인 것이 다행이에요. 만일 적시에 무림군왕성에서 원군을 파견하지 않았다면 우리 모두는 수렵장 안에서 죽고 말았을 거예요."
이때 남궁청운이 종리무를 돌아보며 물었다.
"한데 너는 어찌 알고 달려왔느냐?"
사실 황금총과 흑련사의 고수들이 퇴각한 것은 종리무가 천여 명의 고수들을 이끌고 달려왔기 때문이었다.
종리무는 담담히 말했다.
"흑련사의 정예고수들이 만금산장으로 집결하고 있다는 소식을 일월단(日月團)에서 급보로 보내왔습니다. 그래서 성주님의 명을 받고 즉시 달려온 것입니다."
남궁청운의 안색이 밝아졌다.
"과연 일월단이로군! 그들의 눈과 귀는 천하의 어떤 것도 속일 수가 없지!"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땅에 떨어졌던 자존심이 일월단으로 인해 어느 정도 회복되었다는 느낌이 든 모양이었다.
"그래, 아버님께서 다른 말씀은 없으셨느냐?"
"성주님의 전갈이 있었습니다."
"그래, 무엇이냐?"
"이곳의 일이 수습되는 대로 당주님과 아가씨는 물론 태자당의 여러분들은 즉시 성으로 들어오시라는 명을 내리셨습니다."
"그래? 아니 무엇때문에?"
종리무는 눈을 가늘게 하며 설명했다.
"성주님께서는 더 이상 무림의 사태를 방관할 수 없다며 곧 전열을 정비하여 흑련사와 일전을 결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으음,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남궁청운은 눈을 가늘게 했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 물었다.
"총관은 다름 말씀이 없었느냐?"
종리무는 흠칫하더니 소매속에서 밀봉된 서신 한 통을 꺼내 두 손으로 바쳤다.
"이걸 소성주님께 전달하라 하셨습니다."
남궁청운은 중인들의 시선을 의식한 듯 서신을 그 자리에서 읽지 않고 품속에 집어넣었다.
"알겠다. 이곳 일이 정리되는 대로 태자당의 사람들과 함께 내일이라도 떠나도록 하겠다."
이때 남궁소연이 불쑥 말했다.
"오라버니, 태자당이라곤 이제 오빠와 절 제외하면 수선언니와 철공자, 그리고 여공자밖에는 남지 않았어요."
"그래서?"
남궁청운의 안색이 홱 변했다. 그는 남궁소연의 말뜻을 알았다. 본래는 이십여 명이나 되었던 태자당이 이젠 불과 몇 명밖에 남지 않은 것은 어쩌면 당주인 그의 책임이라고 할 수 있었다. 남궁소연은 그에게 보이지 않는 질책을 한 것이었다.
"제 말은... 모든 것이 밝혀진 이상 당소협도 포함되어야 한다는 거예요."
남궁소연은 찌르는 듯한 시선이 돌아오자 고개를 떨구며 그렇게 말했다. 그 말에 당세곤의 얼굴에 화색이 감돌았다. 그는 태자당에서 축출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가 기뻐한 것은 물론 태자당에 복귀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었다. 다만 황보수선과 다시 함께 있을 수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으음, 그야 물론이다."
이번에는 황보수선이 나섰다.
"제 생각엔 여기 백선생도 함께 가주셨으면 좋겠어요."
그 말에 중인들의 시선은 일제히 백육호에게 향했다. 백육호는 흠칫했다. 그는 생각지도 않은 화살이 자신에게 떨어진 것이 그리 반갑지가 않았다.
"당형이야 당연히 태자당에 복귀할 수 있다지만 백선생은 무림인이 아니거늘......."
남궁청운은 회의적인 표정으로 말끝을 흐렸다.
이때 남궁소연이 꾀꼬리 같은 음성으로 말했다.
"제가 경황이 없어 말씀 드리지 못한 게 있어요. 여러분은 저와 황보언니가 어떻게 무사할 수 있었는지 모를 거예요. 그건 바로 백선생께서 도와주셨기 때문이에요. 백선생은 숨은 고수였어요. 그 간악한 호사붕도 백선생의 일장에 중상을 입고 도주했어요. 그러니 백선생이야말로 백도무림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분이에요."
"......!"
남궁청운을 비롯한 중인들의 시선이 일제히 백육호에게 집중되었다. 황보수선도 거들고 나섰다.
"소연 동생의 말이 맞아요. 백선생이야말로 숨은 기인이세요."
이렇게 되자 남궁청운은 새삼스런 눈으로 백육호를 보게 되었다. 이때 철무영도 가만 있지 못하고 나섰다.
"그렇소이다. 내 목숨을 구해준 분도 백선생이오. 당시 난 육합신창 악곤에게 죽을 뻔했소. 그때 백선생이 나타나 놈을 죽이고 포위망에서 날 구해주셨소이다."
"육합신창까지?"
남궁청운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 육합신창이라면 육합문의 문주로 무림에서 초절정 고수였다. 잠시 날카로운 눈으로 백육호를 쳐다보던 그는 서서히 포권하며 말했다.
"백선생, 이거 소생이 귀인을 미처 알아보지 못했구려. 내 목숨을 구했을 뿐더러 소연의 생명까지도 구해주셨다니 그저 감읍(感泣)할 따름이오."
"별 말씀을......."
백육호는 마주 답례하며 말문을 흐렸다. 그는 자신의 존재가 부각되는 것이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상황이 상황이니 만큼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백선생께 한 가지 부탁을 드리고자 하오. 들어주시면 고맙겠소이다."
남궁청운의 말에 백육호는 담담한 어조로 물었다.
"무엇인지 말씀해 보시오."
남궁청운은 가볍게 헛기침을 한 후 말을 꺼냈다.
"기왕에 백선생께서 숨은 실력을 드러내어 우리에게 도움을 주신 이상 이 참에 태자당에 가입하여 탕마멸사의 대열에 참여하시는 게 어떻겠소? 이는 모두가 원하는 일이외다."
"소생은......."
백육호는 거절하기 위해 입을 열었으나 철무형이 급히 나섰다.
"백선생, 그렇게 하십시오. 강호에 몸을 담은 이유만으로도 악을 멸하는 것은 당연한 도리입니다. 백선생이 태자당에 가입한다면 태자당으로서는 천군만마를 얻는 셈이 될 것입니다."
백육호는 미간을 찌푸렸다.
"송구스런 말씀이오나 그것만은 받아들이기가 곤란합니다. 소생은 이미 평생을 의원으로 살아가기로 결심한 사람이오. 게다가 천하명가들의 후손들로 이루어진 태자당에 가입하는 것은 어울리지도 않는 일이오. 소생은 정중히 사양하겠습니다."
그 말에 남궁청운의 눈에서 냉기가 번뜩였다. 철무영은 만면에 서운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뭐라 말하려 했다. 이때 황보수선이 부드러운 음성으로 나섰다.
"백공자님, 제 생각엔 굳이 태자당이나 무림군왕성에 가입할 필요는 없는 것 같아요. 다만 이번에 저희들과 함께 군왕성으로 들어가시는 것은 괜찮지 않을까요? 어차피 의기로 뭉친 곳이니 공자님께서 견문도 넓힐 겸 한 번 방문하시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백육호는 내심 한숨을 쉬었다.
'황보소저마저 이러니 입장이 난처하게 되었구나.'
사실 그는 태자당은 물론 무림군왕성에도 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황보수선은 계속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는 간절한 빛이 담겨 있었다. 그 눈빛을 본 순간 백육호는 그만 마음이 약해지고 말았다.
'할 수 없지. 일단 그곳에 함께 간 후 조용히 물러나와도 될 테니까.'
마침내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럼 이번 기회에 견문을 넓혀 보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개인자격일 뿐 태자당에 가입하는 일은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히 해두고 싶소이다."
그 말에 남궁청운의 안색이 가볍게 변했다. 그는 자존심이 상한 듯했다.
"백선생은 태자당이 마음에 들지 않으시는 모양이구려?"
백육호는 흠칫했다.
"그럴 리가 있겠소이까? 다만 소생에게는 소생의 길이 있을 뿐이외다."
남궁청운은 더 이상 거론하지 않겠다는 듯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자, 그럼 내일 아침 출발하기로 합시다. 여러분은 그동안 쉬시는 게 좋겠소."
④
교교한 달빛이 화원을 비추고 있다.
"백공자님, 왜 절 속이셨죠?"
"속이다니, 내가 언제 낭자를 속였단 말이오?"
화원을 거닐던 남녀가 걸음을 멈추었다. 그들은 화원 사이에 난 소롯길을 걷던 중이었다.
"제 눈을 쳐다보세요."
황보수선은 고개를 들어 대담하게 백육호의 눈을 마주보았다. 저녁식사 후 백육호의 처소로 방문한 그녀였다. 백육호는 그녀의 제안으로 산책을 하던 중 느닷없이 항의를 받은 것이다.
커다란 한 쌍의 눈이 자신을 주시하고 있었다. 백육호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듯했다.
'이거 괜히 나왔구나. 단단히 각오한 것 같은데.......'
그는 슬며시 황보수선의 눈을 피했다.
"왜 제 눈을 마주 보지 못하는 거죠?"
"난... 낭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소."
황보수선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좋아요, 그럼 우선 무공을 숨긴 것부터 해명해 보세요."
백육호는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아, 그것 말이오? 그야 처음부터 숨길 생각은 없었소. 다만 굳이 내 입으로 말할 필요가 없었을 뿐이오. 의도적인 것은 아니었소."
"네, 그럴 수도 있겠네요."
황보수선은 뜻밖에도 순순히 응했다.
"하지만 공자님은 달리 숨기는 게 있죠?"
'윽, 끝난 게 아니었나?'
백육호는 내심 비명을 질렀다.
"그럴 리가 있소? 내가 낭자에게 무엇을 또 숨긴단 말이오?"
"공자님, 그렇다면 제 눈을 똑바로 보고 말씀해주세요. 다시 묻겠어요. 저에게 정말 숨기시는 건 없나요?"
백육호는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휴우! 이보다 더한 고문은 없을 것이다.'
그는 손등으로 이마를 훔치며 말했다.
"대체 무엇을 숨긴단 말이오? 난 속이는 게 없소이다."
"그럼 왜 제 눈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는 거죠?"
"그건......."
"그건 뭐죠?"
황보수선은 집요했다. 백육호는 식은땀을 닦으며 얼버무렸다.
"낭자가 너무나 아름답기 때문이오."
"......!"
황보수선은 설마 그가 이런 말을 할 줄 몰랐다는 듯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미처 이런 응답에 대응할 말을 생각하지 못한 그녀는 얼굴이 붉어진 채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백공자님, 우리 좀더 걸어요."
그녀는 작은 음성으로 말하고 먼저 걸음을 떼었다. 백육호는 그녀의 뒤를 따라 걸었다.
화원 사이로 난 소로를 한동안 걷자 아늑한 정자가 하나 나타났다. 그곳은 사방이 숲으로 싸여있어 주위의 시선이 차단된 곳이었다.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정자 안으로 올랐다.
"한 여인이... 있었어요."
황보수선은 정자의 난간에 기댄 채 잔잔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 여인은 세상에 나오기도 전에 어른들에 의해 태중혼약을 맺은 상태였어요. 두 집안에서 태어난 아이는 어릴 적부터 거의 함께 자라나다시피 했죠. 꼬마적부터 신랑각시 놀이를 하며 행복하게 자라났어요."
"......."
"그런데 두 아이가 열 살 되던 해였어요. 신랑 집안이 갑자기 어디론가 사라져버렸어요. 물론 꼬마신랑도 함께 말이에요."
황보수선의 음성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한편, 그 말을 들은 백육호의 눈썹도 경련을 일으켰다.
'제발 그만 하시오, 낭자!'
백육호는 내심 괴롭게 외쳤다. 그러나 물론 입밖에 내지는 않았다.
"꼬마각시는 어째서 꼬마신랑이 사라졌는지를 알지 못했어요. 매일같이 소꿉놀이를 하던 꼬마신랑이 사라지자 슬픔을 금치 못했어요. 그래서 자나깨나 집밖으로 나가 꼬마신랑이 돌아오기를 기다렸죠. 그래도 꼬마신랑은 돌아올 줄을 몰랐어요. 어느 하늘 아래서 죽었는지 살았는지......."
황보수선의 눈에 맑은 이슬이 비쳤다. 그녀는 격동이 치민 듯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이었다.
"꼬마각시는 믿었어요. 언젠가 꼬마신랑이 환하게 웃으며 자신에게 달려올 거라고.... 그렇게 세월은 자꾸만 흘러갔어요. 한 달이 넘고 일 년이 넘고... 그러기를 열 번을 반복했는데도.... 이제 꼬마각시는 성숙한 여인이 됐지만 신랑은 여전히 소식이 없었답니다."
황보수선의 뺨으로 두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백육호는 멍한 시선을 밤하늘에 던지고 있었다.
"마침내 주위 사람들이 여인을 설득했어요. 이제 그만 잊으라고요. 심지어는 부모님까지도 태중혼약은 없었던 것으로 하겠다고 말씀하시며 좋은 사람을 만나라고 설득했답니다. 물론 그녀도 그렇게 하려고 무진 애를 썼어요. 때마침 여인에게 구애해오는 사람도 있었어요. 하지만... 그녀는 그럴 수가 없었답니다. 모든 사람들이 잊으라고 말하는데도 여인은 과거의 꼬마신랑을 잊을 수가 없었답니다. 아니,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확실히 느끼게 되었어요.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은 세상에 오직 하나... 꼬마신랑밖에 없다고 말이에요."
마침내 황보수선은 어깨를 들먹이며 숨죽여 흐느꼈다.
"왜 여인이 그런 생각을 했을까요? 그건 언제인가는 꼬마신랑이 돌아올 거라는 확신을 가졌기 때문이랍니다. 비록 그녀에게 구애하는 사람은 많았지만 여인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그래요. 여인도 꼬마신랑이 죽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여인은 지난 날의 아름다웠던 추억만 안고 평생을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오늘까지도... 마음 속에 그 어떤 남자도 들여놓지 않았던 거예요....... 흐흐흑!"
마침내 황보수선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십 년이 넘는 세월동안 참고 참았던 고독이 한꺼번에 격발된 것이었다. 그녀는 난간에 기댄 채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는 손길이 있었다. 백육호였다. 기다렸다는 듯이 황보수선은 그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그대는 정말 어리석구려. 왜 그런 바보 같은 생각을 했단 말이오?"
백육호의 음성도 떨리고 있었다. 황보수선은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격정적으로 외쳤다.
"관(關) 공자님! 맞죠? 당신이 바로... 꼬마신랑이죠?"
쿵!
백육호의 가슴에 종이 울리는 듯한 격동의 소리가 있었다. 그는 황보수선을 내려다보았다. 눈물에 흠뻑 젖어있는 그녀의 얼굴은 비맞은 한 떨기 목련화였다.
"그렇소. 내가 관운빈(關雲彬)이오."
휘황한 달빛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달빛은 화원의 꽃나무를 비추고 정자 안의 남녀에게도 신비한 광휘를 뿌려주었다.
"아아! 운빈! 돌아와주었군요! 돌아왔어요!"
황보수선은 눈물을 펑펑 쏟으며 백육호, 즉 관운빈의 목에 매달렸다. 그녀의 가슴은 터질 듯이 부풀어오르고 있었다. 꼬마신랑을 기다리며 보냈던 무수한 나날들.... 이제 그가 돌아왔다. 그토록 애타게 기다렸던 그가, 관운빈이 그녀 앞에 나타난 것이다.
한편, 꽃나무 아래서 인영 하나가 비틀거렸다.
그는 두 사람의 뒤를 조심스럽게 밟았던 철무영이었다. 그는 정자 안의 남녀가 포옹하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며 나무에 몸을 기댔다.
그의 얼굴에 허탈감이 가득 떠올랐다.
'돌아왔구나. 죽은 줄 알았었는데.......'
철무영은 몸을 돌렸다. 그의 가슴은 이 순간 절망으로 가득 찼으나 한편으로는 황보수선의 행복을 기원하고 있었다.
'소저, 축하드리오. 그대의 사랑을 되찾은 것을 말이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두 남녀의 입술은 하나가 되었다. 황보수선은 이제는 놓지 않겠다는 듯이 관운빈의 목을 세차게 껴안고 있었다. 다시는 헤어지지 않겠다는 듯이...
첫댓글 감사합니다
잘~감상~~~고맙습니다~~~~~
즐감요~~
감사합니다
즐독입니다
감사합니다.
즐~감하고 갑니다.
잘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제야 본명이 나왔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