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2024. 10. 21. 월요일.
무척이나 서늘하고, 추워서 두툼한 옷을 껴입고는 바깥으로 나갔다.
서울 송파구 석촌호수 한 바퀴를 천천히 돌았다.
당뇨병을 앓고 있는 남편이 걱정되었을까? 아내가 함께 뒤따랐으며, 벤치에서 쉴 때 달콤한 과자류와 사탕을 내밀었다.
일전 나는 경기도 <과천추사박물관>에 들러서 추사 김정희의 서예 작품을 보았다.
실학파(實學派)로 알려진 추사는 사실은 철저한 양반가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내 착각이겠지......)
양반과 백성의 세계가 엄청나게 다르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으며, 또한 글감을 얻었다.
오늘은 조선조 역사를 조금이라도 공부하기 시작한다.
조선조 서민의 생활사 위주로 검색해야겠다.
* 서해안 산골마을 태생인 나(1949. 1. 생).
내가 기억하는 1950년대, 60대 그 당시의 산골 사람들은 왜그리도 가난했을까?
하물며 200년전, 300년전, 500년 전의 과거로 되돌아간다면..... 정말로 비참한 백성들이었다고 본다
* 추사 김정희(金正喜, 정조 10년(1786년) 6월 3일(1786년 6월 28일) 조선 충청도 예산 출생 ~ 철종 7년(1856년) 10월 10일(1856년 11월 7일). 경기도 과천에서 별세.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서예가, 금석학자, 고증학자, 화가, 실학자.
1809년(순조 9년) 생원이 되고, 1819년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에 급제하고 세자시강원설서, 예문관검열을 지냈다.
그뒤 삼사의 언관을 거쳐 효명세자의 사부로써 보도하였으며, 1823년 규장각대교가 되었다가 충청우도암행어사로 나갔다.
그뒤 의정부의 검상(檢詳), 1836년(헌종 2년) 성균관대사성과 병조참판, 이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 유교적 권위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18세기에 싹튼 풍속화와 진경 산수화를 낮게 평가했다.
말년에 과천에서 은거할 때는 불교에 빠지기도 하였다.
추사 김정희
* 실학파 : 조선 시대 17~19세기에 걸쳐서 실학사상을 주장한 학파.
학문의 실용성을 주장하였고 근대 지향적인 사상을 갖고 있었다.
헐벗은 백성들의 옷
(박제가 북학의)에서
조선 : 백성들 중 하루 2끼니를 해결할 수 있는 집은 10가구 중 1~2가구에 불과하다.
구황작물로 비축해놓은 곡식이라곤 옥수수 몇자루와 마늘 수십개가 전부다.
조선 : 농부들은 1년에 무명옷 한벌도 제대로 입지 못한다.
남자나 여자나 태어나서 침구가 무엇인지 구경조차 못하고 이불 대신 멍석을 깔고 살아간다.
아이들은 겨울에도 벌거숭이가 되기 일쑤고 신발도 신지 못한다. 한둘이 아니라 대부분 사람이 그러하다.
박제가(1750. 11. 5. ~ 1805. 7. 6.(향년 54세)
- 조선조 영조 25년에 태어나 순조 5년에 돌아가심
1750년 왕실 승지 박평과 이씨 사이에서 서자로 출생했다. 박제가는 신분이 서자였던 탓에 승지의 아들이기는 하지만 가족으로 인정받지 못하였다.
그래도 아버지 박평은 박제가를 아끼고 잘 대해주었으며 박제가에게 글재주가 있음을 알자 아들이 글을 배우도록 도와주었다.
'북학의 :
조선후기 실학자 박제가가 청나라의 풍속과 제도를 시찰하고 돌아와 1778년에 간행한 견문록. 실학서
당시 일반 백성은 하루 두 끼만 먹었다.
세 끼를 먹은 이들은 왕이나 고위 관원, 부자 등 극소수. 점심이 중식의 의미로 굳어진 것은 18세기 후반 들어서라고 한다. 대신, 조선 사람의 한 끼 식사량은 대단해서 외국에까지 알려질 정도였다.
오희문의 '쇄미록' 등 문헌에 당시 성인 남자의 한 끼 식사량으로 기록된 곡물 7홉은 420cc로, 오늘날 성인 섭취량의 세 배에 이른다.
백성과 달리 왕족 사대부의 의상은 .....
아래는 인터넷으로 검색했다.
성리학의 나라 조선, 가혹한 신분 차별의 법제화…조선 시대 노비 매매 문서를 보면 “그 자손들도 영원히 팔아버린다(後所生幷以永永放賣)”는 문구가 어김없이 나온다.
조선시대 인구의 절반이 노비였다!
전쟁 포로나 다른 민족을 노예로 삼았던 다른 나라들과 많은 차이를 보인다. 즉 동방예의지국은 커녕 동방노비지국이었다.
조선 시대 양반들이 주자(朱子)를 떠받들며 사서삼경(四書三經)을 읊조릴 때, 그 밑에서 노비들은 주인의 수족(手足)이 되어 농장일, 집안일, 부엌일, 심부름 등 시키면 궂든 힘들든 군말 없이 죽도록 일해야만 했다.
조선의 신분제는 너무나 철저했다. 양반의 자손은 대대로 양반의 신분을 유지할 수 있었고, 노비의 자식들은 웬만해선 “근본 천생(賤生)”의 굴레를 결코 벗어날 수 없었다.
주자학의 나라 조선에 과연 유교적 인본주의(人本主義)가 있었는가?
홍익인간(弘益人間)이나 인내천(人乃天)과 같은 인류적 보편이념을 추구했는가?
조선의 주자학자들은 대체 어떤 인간관을 가졌기에 인류사 최악의 신분제를 그토록 긴 시간 유지할 수 있었는가?
202. 10. 21. 월요일.
나중에 보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