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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8월 25일 연중 제21주간 수요일
제1독서 : 1테살 2,9-13
복 음 : 마태 23,27-32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27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속은 죽은 이들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기 때문이다.
28 이처럼 너희도 겉은 다른 사람들에게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하다.
29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묘를 꾸미면서,
30 ‘우리가 조상들 시대에 살았더라면
예언자들을 죽이는 일에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고 말하기 때문이다.
31 그렇게 하여 너희는 예언자들을 살해한 자들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언한다.
32 그러니 너희 조상들이 시작한 짓을 마저 하여라.”
조명연 마태오 신부
어느 순간부터 안경의 초점이 맞지 않아서 사물이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시간을 내서 안경원을 찾아갔더니 저를 담당하는 안경사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좋은 소식이 있는데요. 눈이 좋아지셨어요.
그런데 나쁜 소식도 있는데요. 눈의 노화가 더 심해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초점이 맞지 않았던 거예요.”
다초점렌즈를 사용한 지 꽤 오래되었습니다.
다초점렌즈가 일반렌즈보다 비싼데, 여기에 시력이 좋지 않아서 압축까지 해야 하니
렌즈 가격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잘 보이지 않아 불편해도 안경 교체를 미뤄왔던 것입니다.
잘 보려면 자기 눈에 맞는 안경을 써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을 잘 보려면 자기 눈에 맞는 안경을 써야 할 것입니다.
이 안경이 바로 주님의 뜻이 담긴 사랑의 실천입니다.
사랑의 실천 없이는 우리와 함께하는 주님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안경을 쓰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기적이고 위선적인 모습을 간직하면서 사랑의 실천과는 정반대의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향해 불행선언을 선포하십니다.
그들은 철저하게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아닌, 이기적이고 위선적인 삶만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회칠한 무덤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무덤의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그 안에는 죽은 이들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불행선언의 주인공들은 겉으로는 아름답고 가장 올바르게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의 마음은 가장 더러운 죄로 가득 차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행실을 고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불행선언을 들어도 행실을 고치지 않으면서 더 큰 악으로 나아갑니다.
결국 모든 세대의 죄에 대한 하느님의 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지금을 사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능력이 대단한 것처럼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를 자랑하고 내세운다면,
그래서 겉으로는 아름다운 것처럼 보이면서도 속은 각종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 차 있다면
우리도 예수님께서 큰소리로 외치신 “불행하여라”의 주인공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 더는 과거 위선자의 전철을 밟아서는 안 됩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할 가장 중요한 사랑의 실천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주님을 제대로 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눈에 딱 맞는 안경을 써야 합니다.
“너희 조상들이 시작한 짓을 마저 하여라.”(마태 13, 32)
한상우 바오로 신부
더 나은
삶의 방향으로
이끄는 것이
올바른 믿음이다.
믿음은
정직한 자유이며
충만한 행복이다.
행복은
우리가 하느님을 대하는
마음 자세에서 시작한다.
불행의 고리를
끊어주시는
하느님이시다.
믿어야 할 것은
우리의 조상이
아니라
우리의 하느님이시다.
에집트 종살이같이
과거의 노예가 되길
바라지 않으신다.
따끔한
삶의 경고를
받아들여야 할
은총의 때이다.
무분별한
환경파괴가
재앙을 부르고 있다.
뼈저리게
실감하게 되는
우리들 삶이다.
진짜 마음의 음성을
들어야 하는 시간이 왔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시고
하느님께서
주신 이 삶을
이제 더는
파괴와 죽음으로
내몰아서는 안 된다.
더 좋은
세상을 위한 방향이
우리 삶의 가치이다.
더 이상
정신없는
삶이 아니라
예수님같이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지를
아는 삶으로
바뀌어야
악순환은 멈춘다.
삶의
기쁨과 행복은
복음처럼
삶의 가치를
이제
우리가 바꾸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응원하시고
하느님께서
힘이 되어주신다.
생명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이
우리 삶의
가장
올바른 방향이시다.
그분을 향해 나가는
실천과 변화의 하루이다.
믿음의 시간은
과거의 시간과
달라야 한다.
이것이
새로운 기쁨이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예전에 직장에서 존경 받는 상사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어떤 상사가 존경을 받을까요?
똑똑하고 부지런한 상사가 있습니다.
멍청한데 부지런한 상사가 있습니다.
게으른데 멍청한 상사가 있습니다.
똑똑한데 게으른 상사가 있습니다.
똑똑하고 부지런한 상사가 있으면 회사의 실적은 오를 것입니다.
그런데 직원들은 직장 생활이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상사의 뒤를 따라야하기 때문입니다.
상사가 매일 일찍 출근하면 직원들도 일찍 출근해야 합니다.
상사가 청렴하면 직원들도 청렴해야 합니다.
멍청한데 부지런한 상사가 있으면 직원들은 피곤합니다.
일의 방향이 자주 바뀌기 때문입니다.
열심히 일을 하는데 성과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산만 낭비하기 때문입니다.
게으른데 멍청한 상사가 있으면 직원들의 몸은 편하지만 회사에서 눈총을 받기 쉽습니다.
다른 부서에 비해서 성과가 적기 때문입니다. 그런 부서는 없어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똑똑한데 게으른 상사가 있으면 직원들은 몸도 마음도 편할 것입니다.
부서는 늘 일정한 성과를 내기 때문입니다. 자기 개발을 할 시간도 있기 때문입니다.
조선시대의 학자 정약용 선생은 ‘목민심서’를 저술하였습니다.
'목민심서'는 목민관 이 갖추어야 할 자세와 알아야 할 지식을 다룬 책입니다.
“목민관은 부임할 때부터 검소한 복장을 해야 하며,
백성들에게 폐를 끼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나라에서 주는 비용 외에는 한 푼도 백성의 돈을 받아서는 안 되며,
일을 처리할 때는 공과 사를 분명히 구분해야 합니다.
마음가짐은 언제나 청렴결백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청탁을 받아서는 안 되며, 생활은 언제나 검소하게 해야 합니다.
지방에 부임할 때는 가족을 데리고 가지 말아야 하며,
형제나 친척이 방문했을 때는 오래 머무는 일이 없도록 합니다.
목민관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임금의 뜻을 백성에게 잘 알리는 일입니다.
목민관은 자연 재해가 나지 않도록 항상 대비해야 하며,
재해가 생겼을 때는 백성들을 위로하고 구호하는 데 힘써야 합니다.
목민관은 집을 잃은 백성들에게 쉴 곳을 마련해 주고,
재해에 대한 구제가 끝나면 백성들을 따뜻하게 위로해 주어야 합니다.
벼슬에 연연하는 것은 선비의 도리가 아니며,
떠날 때 많은 재물을 가지고 가는 것 또한 선비가 할 일이 아닙니다.
백성들이 목민관이 떠나가는 것을 슬퍼하고 길을 막아선다면
훌륭한 목민관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제생활 30년을 하면서 ‘목민심서’의 내용은 제게 큰 울림이 되었습니다.
특히 ‘목민관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임금의 뜻을 백성에게 잘 알리는 일’이라는 내용입니다.
지난 30년 동안 예수님의 가르침과 하느님의 뜻을 삶으로서 충실하게 전하지 못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의 위선을 꾸짖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의 규정들을 이야기하면서
자신들은 열심히 율법을 지키려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변을 보면 세례를 받았지만,
신앙인으로서 충실하게 살지 못한 사람들을 볼 때가 있습니다.
주일미사에 참례하지 못하는 사람,
본당에서 준비한 피정, 교육에 참석하지 못하는 사람,
어려운 이웃들을 돕는데 인색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신앙의 뿌리가 깊지 못하기 때문에 곧 신앙이 식어버리곤 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우리는 바오로 사도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아주 근면하고 성실한 사도였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뜨거운 열정도 있었습니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우리의 수고와 고생을 잘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러분 가운데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하느님의 복음을 여러분에게 선포하였습니다.
우리가 신자 여러분에게 얼마나 경건하고 의롭게 또 흠 잡힐 데 없이 처신하였는지,
여러분이 증인이고 하느님께서도 증인이십니다.”
우리가 경제적인 풍요를 얻기 위해서 근면하고 성실하게 사는 것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오늘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복음을 위해서,
하느님께 나가기 위해서도 근면하고 성실해야 한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매일 기도하는 사람, 좋은 말씀을 듣기 위해서 피정과 교육에 자주 참여하는 사람,
어려운 이웃을 돕는 일에 적극적인 사람들은 신앙생활에서도 근면하고 성실한 사람들입니다.
나의 영혼과 이웃들을 위한 기도를 준비했다면,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이웃들을 도와주는 봉사를 준비했다면,
우리는 삶의 마지막이 온다 해도 아무 걱정 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은 하느님의 사랑이 그 안에서 완성될 것입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에는 우리가 안팎으로 그리스도인이기를 바라시는 주님의 마음이 엿보입니다.
"너희도 겉은 다른 사람들에게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하다."(마태 23,28)
오늘도 예수님께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위선을 혹독히 꾸짖으십니다.
그들은 백성들 안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부와 명예와 잇권을 누리며
영향력을 행사하는 지위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스스로 가르치는 바를 솔선해 지키면서
내면부터 차곡차곡 정의와 사랑의 덕을 채워가기를 바라십니다.
하지만 그들은 의롭게 되려고 하기 보다 의롭게 보이려는 데에 더 많은 에너지를 써왔지요.
그런 이들 손에 쥐어준 율법은 사랑의 도구가 아니라 단죄와 심판, 소외의 무기가 되어 버립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가르치는 바를 실제로 살아가는 신앙인의 모범을 보여 줍니다.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하느님의 복음을 여러분에게 선포하였습니다."(1테살 2,9)
"우리가 ...얼마나 경건하고 의롭게 또 흠 잡힐 데 없이 처신하였는지"(1테살 2,10)
바리사이였던 바오로는 예수님을 만난 후 새로운 길에 완전히 동화되었습니다.
그는 목숨을 바쳐 사랑을 완성하신 예수님을 알게 되자
신분이 보장하는 명성이나, 허세, 겉꾸밈, 명예 따위를
쓰레기로 여기고 오직 예수님께만 올인했지요.
그런데 우리는 겉과 속이 일치하기가 그리 쉽지만은 않다는 걸 모르지 않습니다.
알고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는 사랑의 진리가 얼마나 많은지요!
또 타인에게 충고는 잘 하면서 자신의 편협한 마음 하나 건사하지 못할 때도 없지 않으니까요.
자신이 의롭고 사랑과 연민이 넘치는 그리스도인인지 자문하면서
부끄러움과 자괴감 사이를 오가는 우리에게
오늘의 말씀은 겉과 속의 간극을 줄여나갈 수 있는 좋은 길을 안내해 줍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 안에서 참으로 하느님의 사랑이 완성되리라."(복음 환호송)
열쇠는 바로 "말씀"입니다.
전해 받은 주님의 말씀이 그 사람 안에 머물면 차츰 그 말씀으로 물들어 가지요.
말씀이신 분의 인격을 닮아가고 말씀께서 가리키시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말씀이 내가 되고 내가 말씀이 되는 일치로 나아가면,
내면에 차오른 말씀이 나의 눈빛과 말과 행동이 되어 밖으로 흘러나갑니다.
그러면 겉과 속이 점점 같아지게 되겠지요.
"그 말씀이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고 있"(1테살 2,13)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우리 각자가 걷고 있는 저마다의 인생길이
우리 안에 현존하시는 주님을 닮아가는 순례길이 아닐까 싶습니다.
정화되고 성화되어 주님을 닮아가는 변형의 도가니이고 용광로이니 녹록하지 않는 건 사실이지만,
마음으로도 사랑하고, 말에도 사랑을 담으며, 행동으로 사랑을 증거 하는
찐 그리스도인이 되어 가는 시공간인 셈입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향한 서슬 퍼런 꾸지람을 통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바를 알아듣고 깨닫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내면에 말씀을 품고 머물러 안팎 모두 참 그리스도인으로 영글어 가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오늘 프란치스칸들은 성 루도비코 9세 임금 기념일을 지냅니다.
프랑스의 국왕이었으면서도 가난한 이들의 벗이 되어준 찐 그리스도인이었던 그를 기리며
주보 축일을 지내는 모든 재속 프란치스칸들에게 축하를 보냅니다.
성 루도비코 9세 성왕(https://m.blog.daum.net/grori00/7680140)에 대해서
내 안에 족보 있다.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을 ‘회칠한 무덤’에 비유하십니다.
그들이 그렇게 된 것은 속이 썩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속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요? 바로 조상들이 있는 곳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위선적으로 착한 척하지 말고
빨리 자신들이 섬기는 조상들처럼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묘를 꾸미면서,
‘우리가 조상들 시대에 살았더라면 예언자들을 죽이는 일에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여 너희는 예언자들을 살해한 자들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언한다.
그러니 너희 조상들이 시작한 짓을 마저 하여라.”
마태오에게는 ‘새로 태어남’이 새로운 족보에 들어옴과 같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족보에 들지 못하면 그리스도처럼 살 수 없게 됩니다.
하느님은 당신이 조상이 되셔서 사람들이 온전히 당신 자손처럼 살기를 원하십니다.
이 믿음을 회복하는 것이 구원입니다.
영화 ‘오블리비언’(2013)에서 주인공은 자신이 지구인을 위해 외계인과 싸운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를 만든 것이 외계인이고 그는 지구인을 죽이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겉은 지구인이지만 조상은 외계인이었던 것입니다.
우리 각자는 우리 안의 조상을 모시고 삽니다. 그리고 그 조상이 산대로 삽니다.
만약 ‘진화론’을 믿는다면 우리 조상은 누가 되겠습니까? 원숭이가 됩니다.
그러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원숭이처럼 모든 삶을 생존을 목적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이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개구리가 되고 싶은 전갈이 있었습니다.
겉으로는 참으로 착했지만, 소풍 가는 날 개울을 건널 때는
자신이 개구리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선조도 전갈이고 자신도 전갈인 것입니다.
만약 이 전갈이 정말 개구리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했을까요?
자신의 조상이 개구리임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나 새로 태어나기 전에는 그런 일은 불가합니다.
그냥 믿으려고만 해서는 조상을 바꿀 수는 없는 일입니다.
조상이 그에게 자신들이 선조라는 것을 믿게 하려고 주었던
‘사랑과 가르침’을 다시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엠빅뉴스’에 ‘개 젖 먹는 까치, 울음소리도 멍멍?’이라는 뉴스가 올라왔습니다.
호주 퀸즐랜드주 줄리엣 웰스라는 여성은
2020년 9월 어미에게 버려져 죽어가는 아기 까치를 발견하였습니다.
이를 불쌍히 여긴 줄리엣은 까치에게 ‘몰리’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동물 전문가의 조언을 받아 정성껏 돌봐주기 시작했습니다.
그녀의 반려견 페기 역시 엄마처럼 몰리 옆을 꼭 지켰는데,
일주일 만에 건강을 회복한 몰리는 숲으로 돌아가기를 거부하였습니다.
자신을 개라고 생각한 듯 개처럼 달리고 개처럼 짖어댔습니다.
함께 인형 놀이도 하고 누워서 장난도 치며 서로를 끔찍이 여기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페기의 몸에 이상한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새끼를 낳아본 적이 없는 페기의 몸에서 젖이 나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몰리는 페기의 젖꼭지를 쪼아대며 젖을 먹었습니다.
동물병원 전문의는 “강아지도 까치를 자기 새끼로 여기게 된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몰리는 다른 동물들이 접근하면 페기처럼 짖어 페기에게 이 사실을 전했습니다.
둘은 하루 종을 껴안고 놉니다.
몰리는 까치들의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페기는 다른 개와 함께 새끼를 낳을 수 있을까요?
그건 모르겠지만 몰리는 다시 까치가 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어미로부터 버려져 새로운 족보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사람 안에도 각자 족보가 있고 그 족보대로 살아갑니다.
마태오가 족보를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의 조상은 누구입니까?
괜히 나의 조상을 원숭이, 혹은 인간이라고 하지 맙시다.
나의 조상이 나를 만들고 움직이는 것입니다.
나의 조상은 그리스도이고 교회입니다.
하느님은 당신 아드님을 내어주심으로써 우리가 이 족보에 들 수 있음을 믿게 하셨습니다.
믿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저절로 사랑의 소명을 수행할 수밖에 없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어떤 드라마에서 한 보통 사람이 머리를 다쳐서 자기가 사이코패스였음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누구도 무서워하지 않고 사이코패스로 살아갑니다.
그러다 다시 머리를 다쳐 원래대로 돌아옵니다.
우리의 주인이 우리 자신이라고 여겨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주인은 조상입니다. 내가 누구의 후손인지에 대한 믿음이 나를 만들 뿐입니다.
우리 각자 안에는 내가 믿는 조상이 들어있습니다. 그리고 그 조상이 산 대로 살게 됩니다.
하늘에 영광을 얻으려거든 우리를 당신 자녀로 삼아 주신 하느님을 첫 조상으로 여겨야 합니다.
우리 안에는 하느님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무덤이 맞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아닌 성체 성혈로 그리스도께서 묻힌 무덤입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