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소돔에서 출토된 유골(아래 사진) |
동성애에 관한 성경의 교훈을 비합법화시키려는 첫 단계는 "성경은 동성애에 관하여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는 식의 주장을 내세우는 것이다. 사실 성경은 빅북이지만, 동성애 관습의 옳고 그름 여부에 대하여 폭넓게 다루진 않았다. 성경의 1,189장 및 3만여 구절 중에 불과 10여 구절이 동성애 이슈를 다루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전통적 결혼관의 기초는 겨우 몇 쪼가리 밖에 없다는 말인가? 겨우 예닐곱 구절이 여태까지 여러 세기동안 교회가 동성애를 막을 근거가 되었다는 것이 과연 이해되는가? 예수님은 한 번도 언급조차 하지 않으신 '마이너 이슈'인데도 불과 몇 구절 갖고 교단과 가족과 친구들과 단체와 기구들이 서로 깨지고 찢어지는 현상이 말이나 되는가?
6 포인트
이에 대하여 여섯 포인트로 접근할 수 있다. 먼저 기억해둘 것은 이 도전 문제가 복음주의자들에 의해 꾸며진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1) 전통주의자들이 수십 개의 블로그와 책을 통해 관련 글을 쓰고 있는 것은 수정주의(revisionist) 지도자들이 먼저 대화를 원했기 때문이다. 낙태, 안락사 동성혼 등의 이슈에 관하여 많은 토론이 있어온 까닭은 50년 전까지는 부도덕과 불법으로 간주되던 행동을 합법화하려는 인사들이 많기 때문이다. 현대의 문화적 쟁점들에 관해서는 남들이 저마다 하는 이야기를 피하는 것은 과히 슬기롭진 못하다.
2) 성경이 동성애에 관하여 비교적 적게 말하고 있는 이유는 고대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 사회에서는 발생율이 적어 그다지 큰 문제 될 것이 없는 죄악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고대 유대교나 초기교회에서 동성애 행위의 표출에 대해 관용했다는 증거는 없다. 신구약 성경은 우상숭배, 종교적 위선, 경제 불공정, 이교 숭배 등이 당대에 아주 흔한 죄악이었기 때문에 응당 많은 경고와 교훈을 준다. 선지자들이 동성애에 관해 준엄하게 꾸짖지 않은 것은 특히 언약사회에서 흔히 저질러지는 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성경은 수간(獸姦)에 대하여 동성애보다 더 적게 말하고 있지만, 수간이 덜 중대한 이슈라거나 근친간이나 아동학대 기타 성경이 적게 말하고 있는 다른 50여 죄악들보다 덜한 죄여서가 아니다. 그러므로 특정 토픽에 대한 성구의 숫자를 따지는 것이 죄의 심각성을 결정짓는 최선의 길은 아니다.
3) 성경은 동성애에 관해 '침묵'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사실은 특히 레위기의 모세 율법이 동성애를 단호히 단죄하고 있으며, 신약에서는 사도 바울의 가장 중요한 서신서인 로마서에서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대표적인 반역의 형태로 비쳤다. 동성애는 또 고린도전서와 디모데전서 등 2개의 다른 서신서에서도 심각한 죄악의 하나로 꼽혔다. 동성애는 또 하나님이 소돔과 고모라 등 가장 악명 높던(!) 도시들을 단죄하고 멸하신 이유의 하나였다.
하물며 결혼에 관한 온갖 교훈들(창세기, 잠언, 아가, 말라기, 마태복음, 에베소서)이랴! 성경이 죽은 자 대신 세례(침례)를 받는 것에 관하여 아무 역사적 해석이나 동의 없이 낱절을 말했을 때(고전 15:29), 거기 너무 매일 필요도, 지나치게 도그마적으로 다룰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면 맞다. 그런데 동성애 행위에 관한 성경적인 증언은 이것처럼 흐릿하거나 동떨어진 것이 전혀 아니다.
4) 동성애 행위에 대한 성경의 증언은 전혀 애매모호하지 않다! 심지어 수정주의자들조차도 성경이 동성애 행위에 대해 한결 같이 부정적임을 인식하고 있다. 동성애자인 네덜란드의 핌 프롱크 박사는 성경이 동성애를 지지해줄 것을 많은 신자들이 갈망한다는 사실을 시인한 뒤 "이 경우 그런 지지가 안 된다."고 잘라 말한 바 있다.
프롱크는 자신의 도덕적 입장이 성경을 의존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지만(바로 그래서 그는 동성애를 지지하지만), 학자로서의 그는 "성경은 동성간 성행위를 언급할 때마다 그것을 단죄하고 있다... 동성애에 대한 거부가 성경의 필연적 결론이다. 그런 평가는 성경 어디에서도 문제거리가 되지 않는다."고 바른 말을 했다.
프롱크는 성경이 동성애 이슈를 거들 때마다 늘 한결 같다고 인식한 것. 댄 O. 비아도 마찬가지로 반수정주의자인 로버트 개그넌과 논쟁할 때 "동성애 관습을 다룬 특정 성경 본문들이 동성애를 무조건 단죄하고 있다는 점을 개그넌 교수와 내가 현저히 공감하고 있다."고 밝혔다.
동성애에 관한 긍정적인 변론이란 게 성경에서 나올 수 없다! 다만 본문 그대로가 아닌 딴 의미가 있다는 등, 그래서 다른 관점에선 특정 성구가 무시될 수 있다는 따위의 수정주의적 주장만 나름 "가능"할 뿐이다.
5) 성경이 성적 부도덕의 죄악을 얼마나 심각하게 취급하고 있는지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성적인 죄악은 아디아포라(무관심 대상)일 수가 없고 식법이나 명절 준수처럼 찬반여부 수준의 이슈가 아니다(롬 14:1-15:7). 반대로, 정확히 말해서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게 하는 종류의 죄악이다. 신약성경엔 각종 죄목의 리스트가 최소 8개(막 7:21-22, 롬 1:24-31, 13:13, 고전 6:9-10, 갈 5:19-21, 골 3:5-9, 딤전 1:9-10, 계 21:8) 되는데, 리스트마다 성적인 부도덕이 포함돼 있다.
사실 8개 리스트 중 7가지는 복합적인 성 부도덕을 들고 있다(예: 성적인 불순, 호색·관능, 혼음·난교, 동성애). 또 대다수의 리스트에서 성적인 죄가 먼저 나타난다. 성적인 죄보다 더 자주 더 한결 같이 더 심각하게 단죄된 죄를 찾기란 쉽지가 않다.
6) 예수님은 동성애에 관해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는 주장은 정확한 말이 아니다. 주님께서는 한 남자와 한 여자가 한 몸을 이루는 창세기적 결혼의 정의를 여실히 강조하셨고(마 19:4-6, 막 10:6-9), 모든 성적인 죄를 포괄하는 광역적 의미의 음란인 포르네이아(막 7:21. 이 단어에서 '포르노'가 나왔다: 역자주)도 단죄하셨다.
포르네이아의 사전적 의미는 "불법 성행위, 성매매, 비정절·바람기, 간음" 등을 모두 의미한다. 신약학자 제임스 에드워즈는 포르네이아가 다양한 그리스 문헌에서 통간, 간음, 성매매, 동성애 등 다양한 불법 성행위를 가리킨다. 구약에서 그것은 한 남자와 한 여자사이의 부부관계 이외의 모든 성적 행동을 가리키고 있다."고 썼다.
예수님은 동성애에 관한 특별설교를 하실 필요가 없었다. 청중은 이미 동성애는 모세 오경에서 금지된, 유대인들이 극력 삼가야 할 다양한 형태의 성적 죄악(포르네이아)의 하나임을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일부 동성애자들이 들고 나서듯) 예수님의 말씀이라고 해서 성경의 다른 부분보다 더 권위적이라는 발상도 불필요하다. 왜냐하면 주님 자신이 구약의 권위를 재확인하셨고(마 5:17-18), 제자들이 그분의 사역의 참된 의미성을 채우기를 기대하셨기 때문이다(요 14:25-26, 16:12-15 참고: 눅 24:48-49, 행 1:1-2).
제3의 길
성경이 하나의 심각한 죄에 대하여 시종일관 단호하게 말할 때, 다른 '제3의 길'을 찾아내어 남들로 하여금 죄를 짓게, 죄악을 증진하게 만드는 것은 어리석다. 물론 전통주의 신자들은 자문자답해보고, 상대방의 말을 끈기있게 들어주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여주는 데까지 자라야 한다. 그러나 '제3의 길'은 보통 그 이상을 의미한다.
'제3의 길' 수정주의자들은 교회와 교단들, 교계 단체들이 "불일치를 위한 일치"라는 타협에 도달해주길 주문한다. 그들은 우리 모두가 문제 이슈를 상당기간동안 새롭게 재고해보고 재정의할 기회를 가질 때까지 일시 유예기간을 갖기를 원한다. 숱한 감정과 숱한 배울 것들이 있는데 어찌 서로 이야기를 계속하지 않고 배기겠는가라는 식이다.
상호대화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끝없는 대화가 결국 우유부단 또는 비겁의 핑계가 돼버린다는 점이다. 주류계 교단 산하 교회에서 10여년 목회해온 필자는 이런 폐단을 너무나 자주 봐왔다. 그것은 대화에 의한 죽음이다. 역사적 입장을 재확인한 후에도 대화는 끝나질 않는다. 또 다른 문서, 또 다른 심포지엄, 또 다른 대화의 라운드가 반복된다.
선언을 기다리는 유예기간은 수정주의 입장이 이겼을 때에야 비로소 끝날 것이다. 신자에게 소중한 기독교신앙의 핵심교리가 하나하나 난상토론을 거치게 된다. 부활이나 삼위일체, 그리스도의 양성(신성/인성)등에 관한 '대화'에서 똑똑한 찬반측이 계속 불일치하는 이상, 우리는 오래 전에 이미 우리의 정통을 잃었을 것이다.
이 모든 '제3의 길'의 끝은 뻔하다. 성경이 받아들여 주지 않는 행위가 놀랍게도 받아들여진다는 것. "불일치를 위한 일치"는 "어쩌다 중도에 손 잡기"라는 겸손한 타협 같이 들릴지 몰라도 "동성애는 성패 양단간의 딱 부러진 이슈가 아니다"고 보수주의 신자들을 달래는 미묘한 방책이며 그것은 오류이다. 인종차별이나 인신매매 같은 죄의 경우, 아무도 제3의 길이 있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제3의 길은 도덕 파산의 지름길이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에 대하여 신실하다면, 성적인 부도덕을 똑같이 심각한 죄로 보게 된다. 불경건한 삶을 사는 것은 신자를 정의하는 건전한 가르침(딤전 1:8-11, 딛 1:16)에 모순된다. 어두움과 빛, 은혜와 라이선스, 죄에 대한 간과와 율법적 행위와 구분되는 칭의(의인)의 복음과 혼동해선 안 된다. 신약성경은 성적인 범과를 "덜 중대한 윤리 이슈"로 다루긴커녕 출교(고전 5장)나 이혼(고후 6:12-20), 타락을 향한 타협의 유혹(유 1:3-16)으로 본다.
우리는 동성애 행위를 무심해도 되는 문제로 넘길 수 없다. 물론 동성애는 세상의 유일한 죄도, 수많은 교회 상황에서 다뤄야 할 최우선 순위의 문제도 아니다. 그러나 고전 6장이 옳다면, 동성애 성행위를 여느 성 부도덕을 옹호하듯 성역화 하다가는 사람들을 지옥행의 위험에 빠뜨리게 된다.
성경은 동성애 죄이든 그보다 흔한 이성애 죄이든, 그리스도로부터 분리된 성 정체성을 추구하려는 것,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과는 모순된 성적 관습을 지향하는 것을 자주 경고한다. 이것은 '전천년설'·'후천년설'·'무천년설'의 차이나 찬양경배 악기의 선택과는 다른 문제이다.
만약 동성애 행위를 수긍하는 교설을 관용한다면, 우리는 사람들을 하나님으로부터 따돌리는 교리를 관용하는 셈이다. 그것은 주님께서 그분이 명하신 모든 것을 만국에 가르치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사명이 아니다. 성경의 가르침은 일관돼 있지, 안개 속처럼 몽롱하지 않다. 동성애는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그분의 뜻이 아니다!
이런 명약관화한 진리 앞에 침묵한다는 것은 현명한 처사가 못 되며, 그런 빛의 떨림 앞에 머뭇거리는 것은 인내가 아니다. 성경은 동성애에 관해서도 우리가 뭔가를 말하도록 단순한 충분 이상의 것을 말하고 있다.
|
첫댓글 감사합니다. 우유부단과 결단. 입에 담기도 수치스런 큰죄. 잠시 잠간 세상에 지나가면서 끝없는 타락과 실족. 주의하고 경계하고 정신 차려야 할 것입니다.
포르네이아의 사전적 의미는 "불법 성행위, 성매매, 비정절·바람기, 간음" 등을 모두 의미한다. 신약학자 제임스 에드워즈는 포르네이아가 다양한 그리스 문헌에서 통간, 간음, 성매매, 동성애 등 다양한 불법 성행위를 가리킨다. 구약에서 그것은 한 남자와 한 여자사이의 부부관계 이외의 모든 성적 행동을 가리키고 있다."
주님께 영광! 글 감사합니다.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좋은글 감사합니다
주님께 영광! 글 감사합니다.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자료 감사합니다.
자료 감사합니다.
자료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