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BXoc1HGDixc?si=AenifgD8OJtaguTX
Dvořák: Carnival Overture | Jakub Hrůša and the Orchestre Philharmonique du Luxembourg
드로르자크의 후스파 서곡 Op.67 역사적 배경
이 작품은 체코의 종교개혁자이며, 순교자, 민족운동가인 얀 후스(Huss, Johannes)의 업적과 그의 순교를 기념하고 후스를 지지하는 자들이 독일 황제겸 보헤미아 황제에 대해 반란과 체코독립 민족운동을 위한,황제 군대와 25년간의 전쟁에서의 승리, 그리고 카톨릭의 핍박과 교황청 십자군의 탄압속에서도 굽히지않고 끝내 교회내에서 지도권과 그외 종교적 목적을 달성한 역사적 사건을 기념하기 위한, 작품이다.
후스 (Huss, Johannes, 1369 ?~1415.7.6)
(체코의 종교개혁가 ·가톨릭 신학자.순교자), 후스는 보헤미아 남부 후시네츠 출생. 프라하대학교에서 신학과 문학을 배우고, 1398년 프라하대학교 교수로 신학을 강의하였으며, 1401년 철학부장, 1402∼1403년 학장, 1409년 총장직 등을 지냈다. 한편, 1400년 가톨릭 사제가 되었는데, 프라하대학장 시절 그곳의 베들레헴 성당 주임신부를 겸해 일반 시민들에게도 좋은 강연을 많이 하였다.
그러나 그는 신학수업 과정에서 철저한 변화를 경험하고 열정적인 진리의 탐구자요 신학자로 거듭났다.체코 종교개혁의 아버지로 일컬어지고 있는 얀 밀리치 크로메리즈와 마티아스 본 야노프가 후스의 신학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결정적으로 후스에게 영향을 미친 사상가는 영국 옥스퍼드 대학의 교수였던 존 위클리프(1330∼1384)였다.위클리프는 성경에 입각해 기존 교회질서에 준열한 비판을 가하고 철저한 교회개혁을 부르짖었던 종교개혁의 선구자였다.
순교 500주년 기념으로 1915년 체코 프리하 구시가 광장에 청동으로 세워진 '얀 후스' 동상 그 앞에는 "서로사랑하라, 모두에게 진리를 베풀라" 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 |
종교개혁자로서는 옥스퍼드대학교 교수인 J.위클리프의 설을 받아들여, 친구 히에로니무스와 함께 예정구령설(豫定救靈說)을 강조하며, 성서를 유일한 권위로 인정하고, 교황을 비롯한 고위 성직자들의 이른바 성직매매(聖職賣買) 등 세속화를 강력히 비판하였다. 또한 체코 민족운동의 지도자로서 보헤미아의 독일화 정책에 저항하였고, 프라하 대주교 즈비녜크의 후원을 얻어 프라하대학교 내에서의 체코인의 권리를 신장시켰으며, 1406년 체코어의 정자법(正字法)을 확립(1406), 성서와 위클리프의 저작을 체코어로 번역하였다.
로마 교회는 분열의 혼란 중에 있어서 한동안 후스의 움직임을 묵인하고 있었으나, 1410년 피사 종교회의에서 선출된 교황 알렉산더 5세는 후스에게 그 동안의 주장들을 철회하도록 명령하였고, 후임 교황인 요하네스 23세도 1411년에 후스를 파문(破門)하였다. 후스는 여전히 자기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로마교회는 이것을 철저히 단속할 필요를 느끼고 1414년에 콘스탄츠공의회에 후스를 소환, 그의 저서에 있는 이단사상으로 지목되는 부분을 취소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거절하였기 때문에, 지기스문트 황제의 안전통행장을 지니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415년 콘스탄츠 교외에서 화형에 처해졌다. 이러한 처사는 커다란 의분을 불러일으켜 1419∼1434년의 후스전쟁을 유발시켰다.
후스 전쟁
1419∼1434년 보헤미아의 후스파(派)가 종교상의 주장을 내걸고 독일황제 겸 보헤미아왕의 군대와 싸운 전쟁. 초기의 반란은 1415년 후스가 처형되면서 시작되어 온건한 우트라키스트(대학교수 ·귀족 ·상층시민)에 의한 프라하교회의 지도권 쟁취를 목표로 하였다. 이어 농민 ·하층시민을 주체로 한 과격한 타보르파가 프시네츠의 니콜라우스, 얀 지슈카 등에 의해 형성되어 프라하시(市)에서 황군(皇軍)과 싸우고(1419), 독일 각지에 조직을 확대하였다.
이에 대해 교황 마르티누스 5세와 황제 지기스문트는 5차례에 걸쳐(1420∼1431) 십자군으로 탄압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바젤종교회의는 후스파와의 화의(和議)를 제안하고(에겔화의), 후스파는 분열을 일으켜 내전(內戰)에서 온건파가 승리하였으며(리벤의 싸움), 최종적 해결은 이그라우 협정(1436)에 의해 실현되었다. 그 결과 후스파는 빵과 포도주에 의한 성체배령(聖體拜領)이 인정되어 종교적 목적을 달성하였다.
카렐 안체를(Karel Ancerl 1908~1973.7.3)
보헤미아의 남부 투카피에서 태어났다. 변호사가 되기 위해 프라하에 유학하였는데, 부친의 뜻을 거역하여 프라하 음악원에 입학하였다. 거기서 알로이스 하바에게서 작곡을, 바츨라프 탈리히에게 지휘법을 배웠다.
그리고 다시 독일에서 헤르만 셰르헨도 사사하고, 1930년 뮌헨의 현대 음악제에서 스승 하바의 오페라 <어머니>를 초연하여 지휘자로서 데뷔하였다. 같은 해 제네바의 오페라 극장의 코레페피토르(가수의 코치)가 되었고, 1931년부터 1939년까지 프라하 방송교향악단의 지휘자로서 활약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중에는 나치의 비협력자로서 강제 수용소를 전전하였으며, 그동안 양친과 처자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해되는 비참한 일도 체험하였다. 그러나 2차 대전의 종전과 함께 프라하 국립극장의 지휘자로서 악단에 복귀하여, 조국이 사회주의 국가로서의 새로운 걸음을 시작한 1948년에 다시 프라하 방송교향악단의 지휘자로 취임하였다.
이어서 1950년, 기구한 운명으로 후에 안체를 자신의 후임이 될 바츨라프 노이만(스메타나 4중주단의 초대 멤버에서 지휘자로 전향) 뒤를 이어 체코 필하모니의 음악 감독 및 수석 지휘자가 되었고, 전쟁으로 참담한 상태에 있었던 이 명문 오케스트라를 다시 세계 제일의 악단으로 발전시켰다.
소련을 비롯하여 동서 유럽의 나라들도 연주 여행을 자주 했는데, 1968년 미국과 캐나다를 단신으로 연주 여행중 체코의 자유화를 둘러싼 프라하의 동란이 일어났다. 그래서 귀국을 단념하고 체코 필하모니의 자리를 사임하면서 캐나다에 망명을 기도하였다. 1969년에 오자와의 후임으로서 토론토 교향악단의 상임 지휘자가 되었으나 4년 후에 운명하고 말았다.
안체를은 전위 작곡가 하바나와 세르헨의 영향으로 현대 음악과 젊었을 때부터 친근하였고, 따라서 그의 보헤미아 국민악파의 연주에는 현대적인 감각이 넘쳐 흘렀고, 그것이 체코의 전통적, 민족적인 표현과 멋지게 일체화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슬라브 민족의 나라인 소련의 프로코피예프나 쇼스타코비치의 작품에도 그러한 장점이 잘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레코드는 빈 교향악단을 지휘한 것도 있지만 체코 필하모니와 녹음한 스메타나의 <나의 조국>, 드보르자크의 <신세계에서><후스파 서곡> 야나체크의 <심포니에타> <타라스 불 바> <그라골 미사> (이상 수프라폰)가 걸출하다. 프로코피예프의 <로메오와 줄리에트>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제1번> <교향곡 제5번> <축전 서곡>, 바르토크의 <관현악을 위한 협주곡> (이상 수프라폰)등은, 현대 음악에 관한 안체를의 명성을 웅변하고 있는 것이다. 바이올리니스트인 젤트레르를 독주자로 하는 카를 아마데우스 하르트만의 <장송 협주곡> (수프라폰)은 현대 독일 작곡가의 곡이 나치의 폭력에 침범 당하는 체코슬로바키아에의 애가로서 작곡된 것이라는 데서도 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녹음의 하나임에 틀림없으며, 주목해야 할 일품으로 봐야 할것이다.
글출처: 하늘바람꽃
https://youtu.be/kKlAGKZgWrY?si=KjTupwdrZOeFmXYw
Hartmann "Concerto funebre" André Gertler/Karel Ancer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