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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0월 4일 금요일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13-16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13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앉아 회개하였을 것이다.
14 그러니 심판 때에 티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15 그리고 너 카파르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 16 너희 말을 듣는 이는 내 말을 듣는 사람이고,
너희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물리치는 사람이며,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 쓰고
죄를 짓고 용서를 청하는 모습이 각양각색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석고대죄(席藁待罪)하는 것은 풀이나 거적을 깔고 엎드려 처벌을 기다라거나 저지른 죄에 대한 처분을 기다리는 것이 있습니다. 왕의 처분에 용서를 청하는 자세로는 풀이나 거적을 깔지 않고 그냥 돌 위에 꿇어 앉아 죄의 처분을 기다렸던 것입니다.
육단부형 예문사죄(肉袒負荊, 詣門謝罪)라는 방법도 있습니다. ‘가시나무를 짊어지고 문 앞에서 용서를 청한다.’ 는 뜻으로 가시나무로 때려서 죽여도 좋으니 용서해 달라는 뜻으로 참회를 하는 모양이었습니다. 어려서 잘못하면 매를 만들어서 종아리를 걷어 올리는 것과 같은 모양이었습니다. 또한 도끼를 메고 들어가 상소를 올리는 지부상소(持斧上疏)가 있습니다. 수호통상조약을 강요한 일본 사신 구로다 교타카(黑田淸隆)의 목을 베라고 상소하면서 면암 최익현은 1876년에 광화문에 도끼를 들고 나타난 것입니다. ‘만약 상소를 받아들여 구로다의 목을 베지 않으신다면 그 도끼로 소신의 목을 치십시오.’ 하는 강경한 상소인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회개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유대의 풍습에 의해서 보여주십니다. 자루 옷을 입고 참회하거나 재를 뒤집어쓰고 참회하는 모습입니다. 자루 옷을 입고 엎어져 있는 죄인의 모습을 상상해 봅니다. 자루는 한 쪽만 뚫어져 있어서 뒤집어쓰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팔다리도 움직일 수 없으니 꼼짝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냥 엎어져 있을 뿐입니다. 그냥 처분만 바라고 있을 뿐입니다. ‘죄인이니 죽여주십시오.’할 뿐입니다. 살아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살려주는 은혜를 베풀어주는 분이 계실 때뿐입니다.
재(회 : 灰)는 물질을 태워서 남은 가루를 말합니다. 유대인들은 참회 시에 마의(麻衣) 상복을 입고, 머리에 재를 뒤집어쓰는 습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회개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하신 것 같습니다. 우리도 참회하는 마음으로 ‘재의 수요일’에 머리에 재를 받습니다. 힌두교신자들도 재로 정(淨)함을 행하는 의식이 있습니다. 이들 행위는 죽음을 의례적으로 체험함으로써 혼의 정화를 지향하는 것이라고 하며, 일종의 자기 매장으로도 볼 수도 있는데 이들 재는 휴대하면 마귀방지가 된다고 믿었으며, 뉴기니에서는 죽인 뱀의 재를 발에 발라두면 숲을 걸어도 독뱀이 물지 않는다고 믿고 있다고 합니다.
재는 사자(死者)에 대한 애도나 슬픔의 상징도 되며, 고대 그리스에서는 장례식 때 재를 몸에 발라서 슬픔을 표현했다고 합니다. 또한 ‘재를 먹는다.’(eat ashes)라는 영어의 표현은 ‘절망’을 나타냅니다. 나무나 풀이 탄 재는 불의 특성과 깊은 관계가 있으며, 생명력과 풍요의 상징이 됩니다. 영국에서는 하지의 전야나 성 세례자 요한의 축일(6월 24일) 등에 불태운 재는 풍작을 부르는 주문으로서 밭에 뿌려졌습니다. 화전농경에서는 재가 유용한 비료가 되기 때문에 생명의 원천으로 생각되었을 것입니다. 또한 C. 페로의 동화로 알려진 신데렐라(Cinderella)라는 이름은 <재>를 의미하는 cinder에서 유래하며, 원뜻은 <재를 뒤집어쓴 공주>인데 재에 묻혀서 일하는 이 주인공은 죽음과 재생을 암시하는 동시에, 오래된 풍요신이 동화화(童話化) 된 모습이기도 합니다.
비누가 만들어지기 전에는 잿물을 만들어 빨래를 했습니다. 그래서 재는 불로 태워서 정화를 하든, 물로 씻어서 깨끗하게 하든, 정화(淨化)의 상징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또한 도자기의 유약을 만들 때도 잿물을 사용했습니다. ‘재를 털어야 숯불이 빛난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자기를 반성하고 자기의 약점과 허물을 없애 버려야 자신을 더 빛낼 수 있다는 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회개하고 새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자신의 잘못을 자꾸만 덮으려고 할 것이 아니라 자루 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진정으로 회개하고 새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십니다.
<아침에게 명령해 보고 바다의 원천까지 가 보았느냐?>
▥ 욥기의 말씀입니다. 38,1.12-21; 40,3-5
1 주님께서 욥에게 폭풍 속에서 말씀하셨다.
12 “너는 평생에 아침에게 명령해 본 적이 있느냐? 새벽에게 그 자리를 지시해 본 적이 있느냐?
13 그래서 새벽이 땅의 가장자리를 붙잡아 흔들어 악인들이 거기에서 털려 떨어지게 말이다.
14 땅은 도장 찍힌 찰흙처럼 형상을 드러내고 옷과 같이 그 모습을 나타낸다.
15 그러나 악인들에게는 빛이 거부되고 들어 올린 팔은 꺾인다.
16 너는 바다의 원천까지 가 보고 심연의 밑바닥을 걸어 보았느냐?
17 죽음의 대문이 네게 드러난 적이 있으며 암흑의 대문을 네가 본 적이 있느냐?
18 너는 땅이 얼마나 넓은지 이해할 수 있느냐? 네가 이 모든 것을 알거든 말해 보아라.
19 빛이 머무르는 곳으로 가는 길은 어디 있느냐? 또 어둠의 자리는 어디 있느냐?
20 네가 그것들을 제 영토로 데려갈 수 있느냐? 그것들의 집에 이르는 길을 알고 있느냐?
21 그때 이미 네가 태어나 이제 오래 살았으니 너는 알지 않느냐?”
40,3 그러자 욥이 주님께 대답하였다. 4 “저는 보잘것없는 몸,
당신께 무어라 대답하겠습니까? 손을 제 입에 갖다 댈 뿐입니다.
5 한 번 말씀드렸으니 대답하지 않겠습니다. 두 번 말씀드렸으니 덧붙이지 않겠습니다.”
축일 10월 4일 성 프란치스코 (Francis)
신분 : 부제, 설립자
활동 지역 : 아시시(Assisi)
활동 연도 : 1181/1182?-1226년
같은 이름 : 방지거, 프란체스꼬, 프란체스꾸스, 프란체스코, 프란체스쿠스, 프란치스꼬, 프란치스꾸스, 프란치스쿠스, 프랜시스
성 프란치스코(Franciscus, 또는 프란체스코)는 이탈리아 중부 움브리아(Umbria)의 아시시에서 부유한 포목상인 피에트로 디 베르나르도네(Pietro di Bernadone)와 프랑스인 어머니 피카 드 브를레몽(Pica de Bourlemont)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사업차 프랑스에 가 있었고, 어머니는 그에게 요한(Giovanni)이란 이름으로 세례를 받게 하였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사업상의 이유 등으로 프랑스를 좋아했기 때문에, 아들의 이름을 ‘프랑스 사람’이란 뜻의 프란치스코로 개명하였다. 성 프란치스코는 젊은 날을 무모할 정도로 낭비하고 노는 일로 보내다가 기사가 될 꿈을 안고 1202년 아시시와 페루자(Perugia) 간의 전투에 참여했다가 포로가 되어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이듬해 두 도시 간의 평화조약이 체결되면서 석방되어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잠시 옛 생활로 돌아가는 듯 보이다가 중병을 앓았고, 병에서 회복한 뒤로는 조금씩 변화의 조짐이 보였다.
여전히 기사가 될 꿈을 버리지 못한 그는 1205년에 브리엔네(Brienne) 백작의 군대에 입대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밤에 그는 스폴레토(Spoleto)에서 환시와 함께 메시지를 들었는데, “왜 주인을 섬기지 않고 종을 섬기려느냐? … 집으로 돌아가라. 내가 할 일을 알려주겠다.”라는 내용이었다. 군대에서 나온 그는 1206년 성 베드로 대성당을 순례하고 돌아오는 길에 한 나병 환자를 만나 입맞춤을 한 후 삶의 전환점을 맞이했다. 그는 가난한 이들에게 가진 것을 나누어주고 자주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다. 어느 날 폐허가 된 산다미아노(San Damiano) 성당 십자가 앞에서 기도하던 중 “프란치스코야, 가서 허물어져 가는 나의 집을 고쳐 세워라.”라는 주님의 말씀을 들었다. 그는 주님의 말씀을 글자 그대로 이해하고, 아버지의 가게에서 물건을 내다 팔아 성당을 수리하려고 했다. 이를 안 부친은 그를 작은 방에 가둘 정도로 분노했고, 이 사건으로 인해 그는 부친과 결별하게 되었다. 성 프란치스코는 아시시의 주교 앞에서 재산 상속권을 포기하길 강요하는 아버지의 뜻에 기꺼이 응하며 입고 있던 옷까지 모두 벗어 아버지에게 넘겨주고 알몸이 되어 가난한 삶을 선택했다.
이때부터 성 프란치스코는 허름한 농부의 옷을 입고 본격적으로 ‘가난 부인’을 모시는 통회의 생활을 시작했다. 이 소식을 들은 친구들이 그의 주위에 모여들어 기도와 노동을 하며 극도의 가난 생활을 실천했다. 1209년 성 프란치스코는 자신들의 생활 양식을 인준해 주길 교황에게 요청했다. 그 회칙이 너무 엄격하다 여긴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Innocentius III)는 처음에는 주저했으나 성 프란치스코가 쓰러져 가는 라테라노 대성당을 떠받치고 있는 장면을 꿈에서 본 후 1210년 마침내 구두로 인준해 주었다. 그리고 극도의 가난을 살고자 하는 성 프란치스코와 그의 11명의 동료를 인정하고 그들에게 설교의 사명까지 주었다. 이것이 ‘작은 형제회’, 곧 프란치스코회의 시작이었다.
그들의 본부는 오늘날 아시시 교외 천사들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Santa Maria degli Angeli) 안에 있는 포르치운쿨라(Portiuncula) 성당이었다. 이 작고 허름한 성당에서부터 성 프란치스코가 설립한 수도회는 역사에 그 유례가 없을 정도로 큰 나무로 성장했다. 성 프란치스코와 동료들은 이탈리아 내외를 두루 다니며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통회와 보속의 생활을 단순한 말로 가르쳤다. 그들은 재산과 인간적인 지식 소유를 거부했고 교계 진출 또한 사양하였다. 성 프란치스코는 사제가 아니었고 다만 부제였다고 한다. 그들의 공동체는 날로 지원자가 늘어 여러 곳에 분원이 생겼다. 그만큼 그들의 청빈 생활은 많은 이들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1212년 아시시의 명문가 출신인 성녀 클라라(Clara)도 그의 설교에 감명을 받아 수도 생활을 시작했다. 가족과 친지들의 극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성녀 클라라는 성 프란치스코의 지도를 받아 뜻을 같이하는 몇 명의 자매들과 함께 ‘가난한 자매들의 수도회’(현 클라라 수도회)를 설립하였다. 1216년부터 프란치스코회 안에는 새로운 기운이 치솟기 시작해 조직이 강화되면서 발전의 폭이 커졌다. 몇 개의 관구가 형성되었고, 1217년과 1219년의 총회에서는 잉글랜드(England)를 비롯한 외국으로 선교사를 파견하기로 결의하는 등 참으로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다. 그리고 이 무렵 성 프란치스코는 모슬렘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직접 찾아갈 정도로 선교와 순교의 열정에 불타고 있었다. 그래서 1219년에 십자군을 따라 이집트로 갔다가 술탄 알 카밀(Al-Kamil)의 포로가 되기도 했다. 그는 이슬람에 대한 선교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예루살렘 성지를 방문한 뒤 이탈리아로 돌아왔다.
이탈리아로 돌아온 성 프란치스코는 스스로 총장직을 사임하였다. 이 또한 역사에 길이 남을 일이었다. 그러나 그의 부재중에 몇몇 회원들이 수도회의 회칙을 완화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음을 알고, 우고리노(Ugolino) 추기경의 도움으로 회칙을 보완해 1223년 11월 29일 교황 호노리우스 3세(Honorius III)에게 인준을 받았다. 1224년 성 프란치스코는 라 베르나(La Verna) 산에서 그리스도의 수난을 묵상하며 그 고통에 참여하길 기도하던 중에 그리스도의 다섯 상처를 자신의 몸에 입었는데, 이것은 최초로 공식 확인된 오상(五傷)이었다. 그리스도의 오상은 은총의 선물이었으나 그의 일생 내내 계속되면서 동시에 심한 육체적 고통도 안겨 주었다. 그는 오상으로 인한 고통 중에도 당나귀를 타고 움브리아 지방을 다니며 계속 복음을 전하다가 기력이 쇠하여지고 눈마저 실명되어 갔다. 그런 고통의 와중에서 그는 이탈리아어로 ‘태양의 찬가’를 지어 외우며 모든 피조물과 함께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1226년 9월 병세가 깊어진 성 프란치스코는 포르치운쿨라로 숙소를 옮겼다. 미리 유서를 작성한 그는 죽음이 다가온 것을 깨닫고 알몸으로 자신을 잿더미 위에 눕혀달라고 했다. 십자가 위의 그리스도처럼 완전한 가난 중에 임종을 맞이하고 싶어서였다. 그리고 수사들에게 요한 복음의 주님 수난기를 읽게 한 후 시편 43장을 노래하며 1226년 10월 3일 ‘자매인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의 유해는 다음날 아시시에 있는 산 조르조(San Giorgio) 성당에 안장되었다. 성 프란치스코는 선종 2년도 채 되지 않은 1228년 7월 15일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Gregorius IX)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고, 1230년 5월 25일 그의 유해는 엘리아 형제가 그를 기념해 지은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 지하 성당으로 이장되었다.
지금도 성 프란치스코에 대한 공경은 세계 곳곳에서 활기차게 이루어지고 있고, 그가 세운 제3회 재속 프란치스코 회원들도 다른 재속 회원과 비길 수 없을 정도로 많아져 그의 성덕을 본받고 가난을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 1979년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는 그를 생태학자들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였다. 아시시의 가난뱅이 성 프란치스코만큼 교회 안에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다시 없을 정도이다. 그래서 그는 ‘제2의 그리스도’라고 불리기도 한다.
오늘 축일을 맞은 프란치스코 형제들과 형제회, 클라라 수도회, 재속 3회 회원들에게 주님의 축복을 기도합니다.
야고보 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