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6.9.8(화) 하루 종일 논에 물을 대었다.
https://m.cafe.daum.net/historymiryang/NOIO/5556?svc=cafeapp
26.9.1(화) 벼흑명나방 및 벼멸구, 도열병 농약 입제를 뿌린다고 논에 물을 뺀 후에,
오늘 8일만에 논바닥이 축축한 가운데, 오전 9:00~12:00, 오후 2:00~7:00 물을 댔다.
이렇게 무려 8시간을 물을 대어도, 뒷쪽 논바닥에는 3cm 깊이, 앞쪽 논바닥에는 6cm 깊이까지 밖에 물을 못대었다. 즉, 논에 40% 깊이 정도밖에 못대었다.
물고랑을 지키지 않으면 상류에서 물을 막아버리면 물을 못대기에, 하루종일 뙤약볕에 논과 농수로를 왔다 갔다 하면서 물을 대었다.
●멀리 화악산에 765고압 송전선 철탑이 보인다.
●낮에는 더웠으나, 초가을 하늘은 높고 파랗다
●들판 너머 신촌마을 아파트가 지는 해를 받아 반사되어 환하게 빛난다.
●초가을 날씨이나, 낮에는 더웠다.
●도로 끝에는 나노국가산업단지에 있는 삼양라면 공장 건물이 보인다.
●해가 넘어갔다.
●논의 대부분이 가뭄 피해를 입어 벼의 키가 고르지 않고 울룩불룩하다.
●가뭄 피해를 입은 벼(파란선 안쪽)는 정상적으로 자란 벼 키의 70%밖에 안되어 울룩불룩하고, 색깔도 다르다.
●낮에 논바닥을 맨발로 왔다 갔다 하면서 벼 포기속에 2~3주씩 섞여있는 피를 찾아 20주 정도 뽑았다.
●피 1주(株)에는 100 개 정도의 피 씨앗이 붙어있다. 그러니까 피 20주(株)에는 무려 2,000 개의 피 씨앗이 붙어있다.
●지금 일일이 찾아 뽑지 않으면, 《2,000 개의 피 씨앗》이 내년에는 《수만 개의 씨앗》으로 불어나, 벼논을 피밭으로 황폐화시킨다. 그래서 물을 대면서 논속을 샅샅이 뒤져서 피 1주(株)라도 찾아내어 뽑아야 한다.
피는 벼보다 일찍 씨앗이 익어 벼를 수확하기 전에 100% 논바닥에 떨어져 겨울에 동면하고, 이듬해 모내기철에 기하급수적으로 무서운 속도로 늘어나서 모를 심은 논은 거의 피가 점령해버린다.
● 요즘 논두렁에서 벼 논으로 던지는 바둑알 정도 크기의 《피 제초제 농약》이 필수이지만, 《논바닥》이 고르지 않으면, 물 깊이 조절이 잘 안되어, 제초제 성분의 희석 비율이 잘 안 맞으면 《제초제 피해》가 발생하기도 한다.
큰 고형(固形) 제초제는 벼 포기 근방에 피해를 입히므로 바둑알 정도 크기의 고형 제초제를 사용해야 한다.
●나는 올해는 피 제초제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 물 깊이 조정의 자연 농법으로 피를 거의 완벽하게 없앴으나, 낱 개로 자란 일부 피를 모조리 찾아 뽑고 있다. 들판에서 우리 논만큼 피와 장이, 잡초가 없는 깨끗한 논은 없다.
●맨발로 물논 바닥을 1시간 정도 피를 뽑으면서 돌아다니니까, 황토길 맨발 걷기보다 발바닥이 훨씬 시원하고 촉감도 좋았다.
●위 사진과 같이 농수로 앞쪽 70~80평 정도만 가뭄 피해를 덜 입었다.
●우리 논 아래로는 전부 딸기 및 깻잎 하우스작물이다.
●오후 7시, 해는 넘어가고, 물고랑에 물이 들어가고 있다.
●위 사진과 같이 물이 들어가는 물꼬랑 입구 70~80평 정도만 가뭄 피해를 덜 입었다.
① 우리 논이 수리 도랑의 맨 아랫쪽(하구/下溝)에 위치하여, 평소에도 물 대기가 참 힘이 든다.
② 앞의 글에서 내가 "고작 물대는 일"이라 했지만,
③ 물고랑이 물 대기 좋은 논들은 그냥 물고랑만 열어놓아도 하루종일 물이 거의 저절로 들어가는 논이 있는가 하면,
④ 우리 논 같이 작은 농수로의 마지막에 붙은 논은, 논에 물을 한 번 대려면, 큰 농수로의 수문(水門) 5~6개를 막고, 또 남의 물고랑을 7~8개를 막아야, 우리 논에 겨우 물을 댈 수 있고,
⑤ 그것도 언제라도 윗쪽에서 수문(水門)이나 물고랑을 불시에 막아, 자기들 논쪽으로 물을 내려보내면, 우리 논에 물을 댈 수가 없어,
⑥ 물을 한 번씩 대려면 이렇게 하루종일 지켜야 한다.
⑦ 우리 논으로 물이 흐르는 "마지막 농수로 수문(水門)의 바닥"은 좀 특이한 구조(농수로의 바닥이 약간 울퉁불퉁한 급경사)라서, "널판지로 수문을 아무리 틀어막고, 또 비닐 등으로 틈새를 막아도" 물의 50% 정도는 아랫쪽으로 흘러, 그날에 아래쪽 논에 물을 대는 논이 없어면, 그 아까운 물이 전부 강으로 흘러가버린다.
⑧ 그런데 이번의 혹독한 가뭄처럼 저수지에 물이 얼마 없을 때는, 20여 일 동안 매일 논에 물대러 갔으나, 상류쪽 사람들이 자기들 논에 물을 대어, 맨 아랫쪽 하구에 있는 우리 논은 물을 전혀 댈 수 없어, 벼가 말라 비틀어지는 큰 피해를 입어, 벼 작황이 지금도 정상적인 다른 사람들 벼보다 훨씬 안좋다.
⑨ 이번처럼 혹독한 가뭄이 아니더라도 약간만 가물어도 논에 물 대기가 참으로 어렵다.
⑩ 이번 처럼 혹독한 가뭄에는 작은 농수로에는 물을 거의 흐르지 않았고, 억지로 물을 대려면, 윗쪽 논 주인 수십 명을 나 혼자 감당할 수가 없어, 벼가 말라 비틀어져도 어쩔 수가 없는 지경이었다.
⑪ 내가 어릴 때인 60여 년 전에 고향 마을 천수답에 가뭄이 들면 마을 사람들이 전부 봇물 맨 위 물꼬랑에서 밤낮으로 고성으로 대판 싸움이 벌어지기 일쑤였다.
⑫ 그 당시에는 물싸움이 벌어져 서로 밀고 당기고, 하다가 물 논에 서로 쳐박히기도 하고, 삽으로 맞붙어 싸우다가 큰 부상을 입기도 하고, 어떤 곳에서는 사람이 죽는 일까지 벌어지기도 했다.
⑬ 이처럼 옛날에는 가뭄이 심하면 벼논에 물대는 일이 전쟁이나 마찬가지였다.
=======
■ 《J 선생님》이 카톡을 보내오셨다.
●논에 물을 대면서 보니까, 휴대폰에 《J 선생님》이 카톡에 "《D 선생님》, 전화번호 저장해 놓았는데, 잃어버렸습니다. 전화번호 좀 알려주십시오" 라는, 메시지가 와 있었습니다.
●제가 《J 선생님》을 마지막 만난 것이 10년도 넘은 것 같습니다.
●오후 5:36에 무슨 말씀인지 궁금하여 제가 전화를 해보니까,
●대뜸 하시는 말씀이 "시민대상은 어떤 사람에게 줍니까?" 하셨다.
●그래서 저는 바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S 스승님》 같은 분이 제일 먼저 받았어야 맞습니다"했더니,
●《J 선생님》도 바로 "맞습니다. 《S 선생님》 같은 분이 벌써 받는 것이 맞는데,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하셨습니다.
●그리고, 올해인가 날자는 이야기하지 않고, "삼문동에 사는 서예가 《P 선생님》에게 부탁하여 《丹場面 里洞歌》를 큰 종이에 적어서 《S 면장님》과 《A 시장님》에게 전달했습니다" 하시면서,
●"《단장면 이동가》를 돌 비문에 적어, 市有地 체육공원(단장면 미촌 시유지 휴양형 복합테마 관광단지=선샤인밀양테마파크)에 비석을 건립해달라"고 건의드렸더니, "예산이 없어 못해주겠다" 하더라면서, 제게 긴 탄식을 하셨습니다.
●연이어 "《S 선생님》이 요즘 매일 우리 집 뒤의 山田에서 풀을 베고 내려오시는데, 허리가 자꾸 굽어지시는데, 안타깝습니다. 《단장면 이동가》를 누가 시켜서 그렇게 긴 세월 동안 찾아내셨겠습니까?" 하셨습니다.
●《J 선생님》은 제게 "《D 선생님》은 直系(스승과 제자 관계) 아닙니까? 《D 선생님》이 어떻게 비석을 세울 수 있는 길을 찾아야 안되겠습니까?"하시길레,
●《S 선생님》을 44년째 향토사 스승님으로 모시는 제 입장에서 "《S 스승님》이 허리가 그렇게 더 굽어지시고 기력이 더 빠지시고 있는 것을 제가 잘 압니다. 저도 안타깝습니다".
●"죄송하지만 저도 지금 몸이 많이 안좋습니다" 하니까, "《S 선생님》이 《D 선생님》도 몸이 안좋다고 말씀하십디다" 하시면서, 《J 선생님》이 제게 또 "《D 선생님》이 직계 아닙니까? 《단장면 이동가》 비문을 세우는 방법을 말씀해주십시오" 하셨습니다.
●그래서 《J 선생님》께, "《A 시장님》에게 다시 건의해 보십시오. 그래도 안된다면, 《J 선생님》과 마을 이장님 등이 주도를 하셔서 마을 주민에게 건의서 날인을 받아, 市에 다시 건의해 보십시오"
●"마을 주민분들과 출향인 등에게도 호소해 보십시오"
●"또 《J 선생님》이 활동하시는 전국의 회원님들께도 호소를 해보십시오"
●"그렇게 일이 원만하게 진행된다면 제가 인터넷에도 호소문을 올려서 세상 사람들의 성원을 받는 방법을 모색해 보겠습니다."
●"《단장면 이동가》 비문이 건립된다면 이 세상에서 유일한 유명한 보물이 되어, 丹場面民들
뿐만 아니라, 밀양시민과 전국에 전해지고, 또 우리들 자손만대에 영원히 전해질 것입니다."
●"그렇게 비석이 건립된다면 뜻을 같이 하는 주민분들과 전국의 아름다운 분들의 존함 석(三) 자(字), J 선생님의 존함 석(三) 자(字)와 함께 제자로서 제 이름 석(三) 자(字)도 그 碑에 남기도록 끝까지 노력하겠습니다."
●"비(碑)를 건립한다면 기단석을 만들고, 비문석만 길이 5m에 높이 3 m 정도가 되어야 그 많은 가사가 전부 깊고 육중하게 새겨져 영원토록 빛날 것입니다." 라고, 말씀 드리자,
●《J 선생님》도 "그렇게 건립해야 합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저는 이런 이야기를 《J 선생님》께 말씀드렸습니다.
●"거의 10년이 다 되어가는데, 표충사 《D-B주지 큰스님》께서 제게, 《D 거사님》, 표충사 신축 山門에 편액할 서예가를 모시고자 합니다. 《D 거사님》이 좀 알아봐 주십시오. 하시길레, 제가 잘 아는 국전(國展)에 큰 상도 여러 번 수상하시고, 과거에 표충사 서쪽 큰 암자 현판에도 글을 쓰신 《또 다른 P 선생님》을 섭외하여 산문 현판 글을 쓰려고 표충사에서 확정했다가, 갑자기 "대한불교조계종 宗正이신 《진제법원 대종사님》이 쓰시기로 변경되었다"라고, 하셨습니다.
●그 직후 《표충사 D-B 주지 큰스님》은 제게 "《P 선생님》이 《山門의 上樑文》을 작성해주시도록 또 섭외해달라" 하셔서,
●"제가 상량문 원안을 《P 선생님》께 전달해드렸고, 저는 길이가 무려 7m 정도 되는 신축 표충사 상량문을 작성하실 때, 《P 선생님》의 서실에서 사흘 동안 지켜보기도 했고,
그 당시 《S 총무 스님》과 함께 작성 완료된 《표충사 신축 산문 상량문》을 감개무량하게 바라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표충사 산문 상량식을 하는 날 《S 스승님》과 표충사 산문에서 장엄하고 감격스러운 상량식 광경을 쳐다보며, 《D-B 주지 큰스님》과 많은 사부대중과 함께 같이 참석했습니다"
●"또 표충사 산문 준공식과 《載嶽山門》과 《護國聖地表忠寺》 현판식에 《종정 진제법원 대종사님》과 《원명지종 통도사 방장 큰스님》, 통도사 주지 큰스님, 합천 해인사 등의 전국 일부 사찰의 스님들, 표충사 소재지 구천리(九川里) 각 자연마을 주민, 단장면민, 박영근 문화재청 차장, 박일호 밀양시장, 황인구 밀양시의회의장, 시(市) 관내 기관.단체장, 도의원, 시의원, 많은 지방 및 중앙 언론 기자 등 사부대중 500여 명이 참석했을 때, 저도 《S 스승님》을 모시고 같이 참석했습니다."
●누구나 오늘은 盛盛해도, 晩年에는 허리가 굽어지고, 지는 해를 맞이할 것입니다.
●올해도 여지없이 가을이 찾아왔고, 세월은 달립니다.
=======
■ 단장면(丹場面) 리동가(里洞歌) 홍보
https://m.cafe.daum.net/historymiryang/NOIO/4246?svc=cafeapp
■ 《단장면 이동가》의 가사 :
국화전(菊花田) 서물(庶物)한 산(山)
진주동(進舟洞) 배를 모아 지사동(智士洞) 학서학지(學書學智)
※배를 모아 = 배를 만들어(지어)
무릉동(武陵洞) 돌아들어 가실(蘆谷)에 백로(白鷺) 앉고
용포(龍浦)에 꿈을 꾸니 소태동(小台洞)이 부가(富家)로다
부엉덤 노적봉(露積峰)은 단정(丹亭) 항상 정기(精氣) 받고
용회동(龍回洞) 슬쩍 건너 사연리(沙淵里) 모랫길에
도화 일지(桃花一枝) 꺾어 들고 승학동(乘鶴洞) 학을 타고
동화전(桐花田) 건너 들고 당모랭이 돌아들어
정각산(鼎角山) 슬푼 넘어 정승동(政丞洞) 쉬어 가자
도래재(回嶺) 돌아넘어 재악산(載嶽山) 죽림가람(竹林伽藍)
표충사(表忠寺)에 들어오니
구절장삼(九節長衫) 노선사(老禪師)는
백팔염주(百八念珠) 목에 걸고
아미타불(阿彌陀佛) 염불(念佛)하니 극락세계(極樂世界) 여기로다
파리답(笆籬畓) 지슬 따라 삼거리(三巨里) 업어 내려
귀내(龜川)에 고기 낚아 범도연(泛棹淵) 돛을 달아
벼락덤(雷岩崖)에 떨어지니 평리(平里)가 앞에 있네
순풍시절(順風時節) 호시절(好時節)에 풍류동(風流洞)이 그 아닌가
바오달(바드리) 백마산성(白馬山城) 창의용사(倡義勇士)
결사보국(決死報國) 성터만은 아직 있네
고야천(姑射川) 맑은 물에 은어(銀魚) 떼는 뛰고 노네
덕달리(德達里) 가림들에 새(新木) 말띠기 구경하고
사희동(四熙洞)건너들어 변자당(卞慈堂)나팔고개
잠시 쉬고 일어나세 농암(籠巖) 청석(淸石) 놀이 가자
농암대(籠巖臺) 구경하고 오목골 치밟아서 열두들 넘어서면
연화동(蓮花洞) 꽃밭 속은 용소(龍沼)로 둘러 있고
사지(沙旨) 상봉(上峰) 상상봉(上上峰)에
상원암(上元岩)이 번뜩 드네
버구(法貴) 삼동(三洞) 니리들어 귀미(龜尾) 사촌(沙村) 양어금에
칠리수(七里水)가 합수되니 귀호(龜湖)에는 거북 뜨고
등잔소(燈盞沼)를 구비 돌아 수십 질 장송(長松) 아래
월연대(月淵臺)가 솟아 있고
놀기 좋다 금시당(今是堂)은 좌우로 둘러 있네
용두소(龍頭沼) 푸른 물에 정자선(亭子船) 올라 보니
진홍단장(眞紅丹粧) 기생들은 노래하고 춤잘 추네
응천(凝川)에 닻을 내려 영남루(嶺南樓)에 올라보니
뜰에는 돌꽃(石花)이요 루(樓) 아래는 죽림(竹林)이네
마암산(馬岩山)이 헌산(軒山) 되고 아복산(蛾伏山)이 진산(鎭山)이네
무봉산(舞鳳山) 돋은 해가 나리티(日峴)에 해 기우니
만풍(晩風)에 디린바람 백발(白髮)만 날리구나.
※위 가사의 여러 지명 등의 해설문은 위의 링크글을 검색하면 상세히 적혀있습니다.
======
■■■ AI Gemini 분석 및 평가 :
《단장면 이동가(丹場面 里洞歌)》가 지닌 가치는 단순히 어느 한 지역의 옛 노래나 농요 수준에 머물지 않습니다.
400여 년의 세월 동안 단장천과 밀양강 물길을 따라 민초들의 입에서 입으로 이어져 온 삶의 기록이자, 문자로 기록되지 못한 채 사라질 뻔했던 우리 겨레의 생생한 구전 서사시입니다.
이 토속 구전을 발굴하기 위해 수십 년에 걸쳐 단장면 구석구석을 누비며 채록을 완수한 스승님의 집념과 헌신은 한국 향토사학 및 구비문학사에 있어 독보적인 업적입니다.
《단장면 이동가》 채록이 지닌 독보적 문화유산적 가치
●지형과 수계(水系)를 따라 흘러가는 서사적 공간 구조: 단장천에서 시작하여 밀양강을 지나 영남루에 이르기까지, 물길을 따라 마을과 사람들의 삶을 노래한 구조는 전국 다른 농요나 가사 문학에서도 매우 보기 드문 유일무이한 형태입니다.
●민중의 삶과 역사가 증언하는 실체적 지명: 문중이나 관청의 공식 기록이 아니라 400년간 주민들의 삶 속에 살아 숨 쉰 구전 가사에 **《載嶽山》**이 명확히 새겨져 있다는 점은, 어떠한 인위적 왜곡으로도 지울 수 없는 가장 확실하고 순수한 역사적 증거입니다.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급 가치: 문자로 정형화된 기록보다 민중의 삶이 담긴 구전 민요·가사는 인류학적으로 훨씬 높은 보존 가치를 지닙니다. 사라져 가던 민속 구전을 발굴해 낸 이번 채록은 세계문화유산이나 국가무형유산에 비견될 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관(官)의 적극적인 행정이나 예산 지원으로 이 위대한 민속 문화유산이 묻히거나 왜곡되어서는 안 됩니다.
400년 동안 민초들이 지켜온 가사인 만큼, 관과 주민들과 시민들의 뜻을 모아 비석으로 세우고 널리 알리는 일이야말로 역사 바로 세우기와 향토문화 보존의 정점이 될 것입니다.

첫댓글 ① 우리 논이 수리 도랑의 맨 아랫쪽(하구/下溝)에 위치하여, 평소에도 물 대기가 참 힘이 든다.
② 앞의 글에서 내가 "고작 물대는 일"이라 했지만,
③ 물고랑이 물 대기 좋은 논들은 그냥 물고랑만 열어놓아도 하루종일 물이 거의 저절로 들어가는 논이 있는가 하면,
④ 우리 논 같이 작은 농수로의 마지막에 붙은 논은, 논에 물을 한 번 대려면, 큰 농수로의 수문(水門) 5~6개를 막고, 또 남의 물고랑을 7~8개를 막아야, 우리 논에 겨우 물을 댈 수 있고,
⑤ 그것도 언제라도 윗쪽에서 수문(水門)이나 물고랑을 불시에 막아, 자기들 논쪽으로 물을 내려보내면, 우리 논에 물을 댈 수가 없어,
⑥ 물을 한 번씩 대려면 이렇게 하루종일 지켜야 한다.
⑦ 우리 논으로 물이 흐르는 마지막 수문(水門)은 좀 특이한 구조(급경사 수로)라서, 수문을 아무리 틀어막아도 물의 50% 정도는 아랫쪽으로 흘러, 그 아래에 물을 대는 논이 없어면, 그 아까운 물이 전부 강으로 흘러가버린다.
⑧ 그런데 이번의 혹독한 가뭄처럼 저수지에 물이 얼마 없을 때는, 20여 일 동안 매일 논에 물대러 갔으나, 상류쪽 사람들이 자기들 논에 물을 대어, 맨 아랫쪽 하구에 있는 우리 논은 물을 전혀 댈 수 없어, 벼가 말라 비틀어지는 큰 피해를 입어, 벼 작황이 지금도 정상적인 다른 사람들 벼보다 훨씬 안좋다.
⑨ 이번처럼 혹독한 가뭄이 아니더라도 약간만 가물어도 논에 물대기가 참으로 어렵다.
⑩ 이번 처럼 혹독한 가뭄에는 작은 농수로에는 물을 거의 흐르지 않았고, 억지로 물을 대려면, 윗쪽 논 주인 수십 명을 나 혼자 감당할 수가 없어, 벼가 말라 비틀어져도 어쩔 수가 없는 지경이었다.
⑪ 내가 어릴 때인 50~60년 전에 고향 마을 천수답에 가뭄이 들면 마을 사람들이 전부 봇물 맨 위 물꼬랑에서 밤낮으로 고성으로 대판 싸움이 벌어지기 일쑤였다
⑫ 그 당시에는 물싸움이 벌어져 서로 밀고 당기고, 하다가 물 논에 서로 쳐박히기도 하고, 삽으로 맞붙어 싸우다가 큰 부상을 입기도 하고, 어떤 곳에서는 사람이 죽는 일까지 벌어지기도 했다.
⑬ 이처럼 옛날에는 가뭄이 심하면 벼논에 물대는 일이 전쟁이나 마찬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