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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0 장 실종(失踪)
①
두두두두......!
관운빈은 모처럼 맞이한 자유를 만끽하며 말을 몰았다.
무림군왕성주 남궁혁이 그에게 직접 내준 천리마는 두 시진이 넘도록 질풍처럼 달렸지만 조금도 지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무림군왕성에서 보낸 한 달여의 기간은 그에게 압박감을 주었다. 그곳은 도무지 체질에 맞지 않는 곳이었다.
천하 각처에서 몰려든 군웅들로 북적대는 무림군왕성에서는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었다.
나름대로 각 지역의 패주들로 자부하는 인물들이 서로의 권위나 체면을 내세우느라 크고 작은 마찰을 끊임없이 빚어냈고, 삼삼오오, 또는 문파와 문파끼리 파당(派黨)을 형성하여 몰려 다니는 모습은 그에게 환멸감을 불러 일으켰다.
도무지 백도인들의 모습은 그에게 본받을 만한 점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들은 명예와 이익에 탐닉했고, 진정으로 무림을 위해 자신을 내놓으려 하는 인물은 아무리 찾아도 볼 수가 없었다.
군웅들의 그런 모습에서 관운빈은 역겨움을 금할 길이 없었다.
그래서 서둘러 무림군왕성을 떠난 것이었다. 성을 빠져나오는 순간 비로소 숨통이 트여졌고, 날아갈 듯 자유로운 느낌이 들었다.
만일 그곳에서 황보수선과의 달콤한 시간들이 없었다면 하루라도 견뎌내지 못했을 것이다.
황보수선의 부드러운 미소를 떠올리자 그는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늘 현숙한 모습과 사려 깊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았다. 헌신할 줄 아는 여인이었다. 그녀의 그런 성품은 남자라면 사랑하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는 것이었다.
관운빈은 말을 몰며 내심 중얼거렸다.
'필경 영매(零妹)도 기쁜 마음으로 황보소저를 받아줄 것이다. 태중혼약으로 이루어진 인연만으로 십 년을 넘게 날 기다려왔는데... 영매도 분명 이해할 거야.'
그는 황보수선과 사사영이 서로 손을 마주잡고 미소짓는 모습을 머리에 그리며 가슴이 뛰었다.
얼마나 달렸을까?
야산을 지나 나즈막한 숲언덕을 넘자 인가 한 채가 눈에 들어왔다. 토담을 두른 초라한 인가였다. 인가를 발견하자 그는 시장기를 느꼈다.
'저곳에서 잠시 쉬어 가야겠구나.'
그는 토담집 앞에서 말을 멈추었다.
"주인장, 계시오?"
말고삐를 집 앞의 우물가에 맨 그는 문을 두들겼다. 그러자 곧 노인의 메마른 기침소리가 들려왔다.
"콜록콜록! 게 뉘시오?"
"지나던 과객인데 잠시 요기를 할까 들렀소이다."
"잠시만 기다리시오. 콜록!"
질질 신발을 끄는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열렸다. 허리가 잔뜩 구부러진 백발노인이 지팡이를 받친 채 그를 올려다보았다. 관운빈의 아래위를 훑어본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오시오. 달리 먹을 것은 없고 소면이라도 괜찮다면 한 그릇 나눠줄 수 있소만."
관운빈은 빙긋 미소를 띠었다. 소면이 어딘가?
"그럼 폐를 끼치겠소이다."
"콜록콜록.... 너무 좋아할 것 없소. 돈은 받아야 하니까. 안 그러면 이 늙은이가 뭐 먹고 살겠소?"
"하하, 물론이지요. 노인장."
관운빈은 밝게 웃으며 노인의 뒤를 따라 집안으로 들어갔다.
집이라고 해야 비좁은 토방 두 칸이 전부였다. 좁은 방안에는 낡은 탁자가 두 개 놓여 있을 뿐, 의자마저 없었다. 의자 대용인 듯 거적이 깔려 있을 뿐이었다.
도리없이 거적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은 관운빈은 소면을 나오기를 기다렸다.
두 칸이라고 해야 실내는 벽이 없이 부엌과 방으로 연이어져 있었다. 노인은 솥 안에서 소면을 담고 있었다. 잔뜩 구부러진 허리와 백발, 나무껍질처럼 마른 피부는 노인의 나이가 최소한 칠순은 넘어 보이게 했다.
"노인장, 연로하신 분이 어찌하여 이런 외진 곳에 혼자 사시는 것이오? 슬하에 자식도 없습니까?"
측은한 마음이 든 관운빈은 그렇게 물었다.
"있기야 있었습죠. 그것도 아홉씩이나... 콜록! 하지만... 맞아죽고 굶어죽고 병들어죽고... 또 한 놈은 목매달아 죽었지.... 하여간 모두 죽었소이다. 마누라도 병들어 죽어버렸고... 콜록콜록!"
노인은 연신 기침을 하며 그렇게 대답했다. 잠시 후 젓가락을 꽂은 채 투박한 소면그릇이 나왔다.
"아니,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입니까?"
관운빈은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노인은 심드렁한 어조로 말했다.
"세상이 썩어 있으니 순하고 착한 것들은 제 명대로 살지 못할 수밖에. 콜록콜록!"
연기 탓인지 노인은 연신 기침을 발했다.
"자네도 인상을 보아하니 손해보는 일이 많겠구먼. 콜록! 독하게 사시오. 눈감으면 끝나는 인생... 후회 없이 살다 가구려."
노인의 말에는 뼈가 있는 것 같았다. 소면을 입에 넣던 관운빈은 문득 동작을 멈췄다.
"왜 그러시오? 소면이 입에 맞지 않는 모양이구려?"
"아, 아닙니다. 갑자기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요."
소면의 맛은 예상을 뛰어넘는 훌륭한 것이었다. 관운빈이 잠시 동작을 멈춘 것은 갑자기 주변에 찌르는 듯한 살기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는 잠시 눈살을 찌푸렸다가 다시 소면을 먹기 시작했다.
"더 있으니 모자라면 말씀하시오, 콜록콜록! 언제 갈지 모르는 인생, 기회가 될 때 배불리 먹어두시오."
관운빈은 다시 동작을 멈추었다. 그의 눈빛이 번쩍 빛났다가 사라졌다.
"슬슬 배고픈 중생들이 몰려올 때가 됐는데... 어디 준비를 좀 해볼까나......."
노인은 가마솥의 뚜껑을 열고 한 웅큼의 면을 넣은 후 휘젓기 시작했다. 펄펄 끓는 솥안에서 솟아오른 뜨거운 김이 노인의 몸을 뒤덮었다.
"콜록, 콜록, 콜록......!"
자욱한 김에 모습이 가려지게 된 노인. 그러나 기침소리는 더욱 크게 들렸다.
바로 그때였다.
슈슉!
문득 관운빈이 앉아 있는 거적을 뚫고 한 자루 검이 솟아올랐다. 관운빈은 벌렁 뒤로 쓰러졌다. 본능적인 반응이었으나 검은 그의 가슴을 스치고 지나갔다.
파파팍!
동시에 거적을 뚫고 괴인영이 솟구쳐 올라왔다.
인영은 저만치 나뒹굴었다. 그의 등 한복판! 젓가락 하나가 박혀있었다. 관운빈이 날린 것이었다.
그것은 다만 시작일 뿐이었다.
관운빈은 몸을 잔뜩 웅크린 채 굴러가듯 벽쪽으로 피했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토벽이 와르르 무너졌다.
파파파팟!
실내의 바닥에서 흙덩이가 치솟으며 한꺼번에 네 개의 인영이 솟구쳐 나온 것이다. 그들은 바닥에 은신하고 있는 살수들이었다.
"......!"
관운빈은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그의 전후좌우로 살수들이 압박해 들어왔다. 그들은 신형을 이동하면서도 조금도 소리를 내지 않았다. 그로 미루어 숙련된 특급살수들임이 분명했다.
슈슈슉!
배후에서 검이 날아왔다.
"어딜!"
관운빈은 낭랑하게 호통치며 몸을 한 바퀴 돌렸다. 그는 손에 철컥! 하는 둔탁한 감촉을 느꼈다. 비명은 없었다. 분명 상대의 검을 자르며 목줄기를 끊었으나 그자는 한마디의 비명도 발하지 않았다.
관운빈의 등에도 선혈이 흐르고 있었다. 그는 용명검을 쥔 채 우뚝 서 있었다.
'지독한 자로군. 죽어가면서도 신음 하나 내지 않다니.......'
쓴 입맛을 다시며 관운빈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세 명의 살수가 다가오고 있었다.
동료들의 죽음을 목격했음에도 그들은 추호도 흔들리지 않고 두 눈에 살기를 번뜩이며 쇄도해왔다.
슈슈슉!
동시에 세 자루의 검이 날아왔다. 용명검이 지체없이 허공에 원을 그렸다.
이번에는 충분한 대비가 되어 있었으므로 결과는 선명히 나타났다. 삼 인의 살수는 검과 몸이 함께 분리되며 피보라 속에 쓰러지고 말았다. 이번에도 그들은 신음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
"......."
관운빈은 시선을 돌려 아직도 가마솥 안의 면을 휘젓고 있는 노인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이 번쩍 빛났다.
토담집 벽이 무너져 내리는 와중에도 노인과 가마솥 주위에는 한줌의 잔해도 떨어져 있지 않았다.
"어떻게 알았는가?"
가마솥의 뚜껑을 닫으며 노인이 물었다.
"감각이 조금 예민한 편이오. 하지만 확신은 못했었소. 어쨌든 귀하의 수하들은 완벽했소. 단지 불운했을 뿐이오."
사실이었다. 관운빈의 뛰어난 감각에도 바로 직전에야 살수들의 기미를 눈치챘을 뿐이었다. 바로 바닥에 숨어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숨소리 하나 나지 않았던 것이다.
"별난 젊은이였군."
노인은 여전히 지팡이를 짚고 있었다. 굽은 허리도 그대로였다.
"흑련사에서 보냈소?"
관운빈은 담담히 물었다. 노인은 고개를 저었다.
"이 늙은이는 살막의 우노(愚老)라고 하네. 혈기왕성한 시절부터 워낙 우둔한 짓만 골라 하다보니 모두들 그렇게 부르더군."
관운빈은 내심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강호에 나온 이래 이것저것 줏어 들은 것이 적지 않았다. 살막이라면 전설적인 청부집단이었다. 그는 침중하게 말했다.
"이해가 안 되는구려. 살막은 반드시 죽어야 할 이유가 있는 자 외에는 억만금을 준다 해도 청부를 받지 않는다고 알고 있소. 내가 죽어야 할 이유는 무엇이오?"
"그건 막주가 판단할 일, 노부는 그저 명을 따를 뿐이네. 더 궁금한 점이 있는가?"
"누가 청부했소?"
쓸데없는 질문이었다.
"보기보단 어리석군. 그럼 더 이상의 질문은 없는 것으로 알겠네. 이제 손을 쓸 테니 조심하게."
노인, 우노는 지팡이를 짚으며 그를 향해 느릿느릿 걸어왔다. 둘 사이의 간격은 불과 두 장 정도였으나 우노의 걸음이 너무 느려 꽤 먼 거리처럼 지루하게 느껴졌다.
"......."
관운빈은 우노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그의 생에서 처음 격돌하게 되는 강적이었다.
우노는 아무런 기운도 발산하지 않은 채 마치 촌노가 나들이라도 하는 양 무심히 걸어왔다. 관운빈의 용명검이 움직였다. 그런데 검극이 우노가 아닌 허공을 향했다. 그의 시선도 검극을 따라 허공에 고정되었다.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관운빈의 자세를 힐끗 쳐다본 우노가 몸을 돌려 자신이 서 있던 자리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닌가?
관운빈은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뜻인가? 그만두겠다는 것인가?'
관운빈은 우노의 보폭에 맞추어 그를 향해 다가갔다. 용명검은 여전히 비스듬히 허공을 향한 채였다.
우노의 걸음걸이는 느려 터졌다. 마치 걷는 일이 이 세상에서 가장 힘든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관운빈의 전신에는 긴장감이 팽배했다.
그의 눈은 우노의 등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우노는 마침내 본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는 싸울 의사가 전혀 없는 듯 무쇠솥의 뚜껑을 열었다. 그의 덩치와 거의 비슷한 무거운 솥을 가볍게 들고 있는 그의 모습은 괴이해 보였다.
솥에서 나온 뜨거운 김이 그의 신형을 뒤덮었다.
"......!"
관운빈은 전신에 초긴장 상태를 유지했다. 그의 시력은 범인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자욱한 수증기 속에서 우노가 그를 향해 공격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이껏 이럴려고 그랬나?'
그는 내심 코웃음쳤다. 수증기가 그를 향해 밀려왔다. 그는 용명검을 휘둘렀다.
캉!
날카로운 금속성과 함께 솥뚜껑은 쪼개졌다. 순간 막강한 잠력이 쪼개진 솥뚜껑 사이로 밀려왔다. 도무지 항거불능할 정도로 거대한 잠력이었다.
관운빈은 눈을 부릅떴다.
솥뚜껑 사이로 전광석화처럼 지팡이가 날아온 것이다.
그는 일시에 두 손과 두 발을 떨쳐냈다. 용명검은 무쇠솥 조각을 날려버렸고, 그의 좌수는 장력을 뿌렸다. 펄펄 끓는 물이 그를 향해 쏘아왔던 것이다.
동시에 오른발로는 우노의 안면을 걷어찼으며, 왼발은 중심축이 되어 급격히 신형을 휘전시켜 지팡이를 피했다.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적절하고 빠른 대응이었다. 우노는 비록 정타는 피했으나 그의 족풍(足風)에 휘말려 뒤로 칠팔보나 밀려나가 버렸다. 솥뚜껑과 뜨거운 물도 사방으로 날아가버렸다.
관운빈은 위기를 넘겼다고 생각했다. 그가 막 재차 공격을 펼치려는 순간이었다.
퍽!
갑자기 그의 등에 쑤셔박히는 작은 두 손이 있었다.
관운빈은 눈을 부릅뜨며 빙글 돌아섰다. 그의 얼굴에 의혹이 떠올랐다.
그의 뒤에는 고작 칠팔 세밖에 안되어 보이는 난쟁이가 서 있었다. 그가 놀란 것은 그의 모습 때문이 아니었다. 그가 어떻게 자신의 바로 뒤에서 나타날 수 있었는가 하는 점때문이었다.
놀랍게도 난쟁이는 솥뚜껑 뒤에 붙어 있었다. 솥뚜껑이 용명검에 의해 쪼개지며 날아갔을 때, 그는 유령처럼 몸을 날려 그의 뒤에 내려섰던 것이다.
"끄... 끄으으......."
난쟁이는 자신의 두 손을 내려보며 괴상한 신음을 흘렸다.
그의 손이 없었다. 분명 관운빈의 등에 박아 넣었건만, 관운빈이 돌아서면서 자연스럽게 빠졌던 손이었다. 그런데 손목만 남아 있었다.
"가라."
관운빈은 좌수를 빙글 돌렸다.
"케에에엑!"
처절한 비명과 함께 난쟁이는 피를 뿌리며 날아갔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그는 토벽을 뚫고 날아가버렸다.
그때였다. 우노의 신형이 미끄러져 오며 기척도 없이 지팡이를 찔러왔다.
푸욱!
다시 한 번 섬뜩한 소리가 났다. 그러나 이번 것은 관운빈의 등에서 난 소리가 아니었다. 아래로 쳐져 있던 용명검이 위로 올라가며 우노의 심장에 박히는 소리였다.
우노의 지팡이는 관운빈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가 있었다.
"허허허....... 어떻게 이런 일이?"
우노가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물었다.
"말해주겠나? 눈을 감을 수 있도록."
관운빈은 담담히 말했다.
"내겐 남들에 비해 발달한 초감각이 있소. 그것은 추나신공을 익혔기 때문이오. 난쟁이가 내 등을 찔렀을 때도 마찬가지요. 내 혈맥(血脈)은 마음대로 위치를 이동할 수 있어서 그의 손은 견갑골(肩胛骨) 사이에 박히게 되었소. 근육에 힘을 주어 그의 손목을 절단해 버렸소. 결국 노인장의 암습은 기발했지만 내겐 통하지 않았소."
"추나신공이라......?"
우노는 눈을 반쯤 감으며 중얼거렸다. 그의 안색이 더욱 희게 보였다.
"하지만 너무 낙담 마시오. 내가 입은 상처도 결코 가벼운 것은 아니오."
우노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넨 이미 인간의 한계를 극복했군. 그것을 예상하지 못했던 우리의 패배는 당연한 것이야. 그럼 내 심장을 뛔뚫은 검법은 어떤 것이었나?"
"......."
관운빈은 이번만은 침묵으로 답변을 대신했다.
"자네는 태화천의 후예인가?"
우노의 뜻밖의 질문이었다. 관운빈은 흠칫했으나 곧 안쓰러운 눈길로 우노를 응시했다. 잠시 후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로군.... 이 늙은이의 마지막을 화려하게 장식하게 됐으니. 태화천주의 전설적인 검법인 천룡무극검(天龍無極劍)을 맛보게 되었으니......."
관운빈의 표정이 기이해졌다.
그는 지금까지 한 번도 천룡무극검법을 시전해 본 적이 없었다. 그것은 죽는 순간까지도 숨기려 했던 것이었다. 만일 이렇게 갑작스런 공격을 받지 않았다면 절대로 펼치지 않았을 것이다.
살아야 한다는 본능이 그로 하여금 비장의 검법을 펼치게 한 것이었다.
"이 늙은이의 번거로운 부탁을 하나... 들어주겠나?"
아마도 우노가 이런 말을 한 것은 이십 년은 족히 넘었을 것이다. 관운빈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전 죽은 막내를 비롯하여... 자네에게 죽은 아들들을 노부와 함께 태워주겠나? 이승에서 애비 노릇 한 번 다정하게 해보지 못했는데 저승에서는 함께 즐겁게 살아봐야 하지 않겠나?"
관운빈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럼... 이들이 모두... 노인장의 아들들이란 말입니까?"
"그렇다네."
"모두 죽었다고 하지 않았소이까?"
우노의 음성에서 점차 힘이 빠져나갔다.
"모두 죽었었지. 그것을 막주가 살려냈네. 하지만 살아난 것은 뼈와 근육, 그리고 맥박 정도라고 이해하면 정확할 걸세. 이미 자식 놈들의 영혼은 새까맣게 타버렸거든. 이 몹쓸 세상에서 힘깨나 쓴다는 놈들에 의해 우리 애들은 그때 다 죽은 것이지. 광대짓 하는 부모를 타고났다는 것이 그 애들의 공통된 죄였고... 그 외에도 큰 놈은 너무 글을 잘 깨우친다는 죄를 지었고 둘째 놈은 너무 힘이 넘쳐나는 죄가 있고... 셋째 놈은 인물이 너무 반반한 죄를 지었지. 그리고......."
"그만하시오, 노인장."
관운빈이 우노의 말을 중단시켰다. 그러나 우노는 관운빈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마지막 숨을 뱉으며 그는 자신과 자식들의 일그러진 인생을 독백처럼 흘려내었다.
"...희한한 건 막내 놈이야. 오늘도 그러했듯 일곱 살 되던 해에도 스스로 목을 매달았었거든. 그 이후로 성장이 멈춰 아주 재미있는 모습이 됐지. 그 덕에 세상에 한풀이는 제일 많이 할 수 있었지만......."
우노의 넋두리는 한참을 더 이어갔다. 그러던 어느 한순간, 침침하게 잠겨가던 우노의 눈빛이 반짝 기광을 발하며 관운빈을 향했다.
"젊은이, 사실 난 오늘의 죽음을 예감했었네. 그리고 이런 날을 기다려 왔기도 했지. 그래서 자식들을 모두 이끌고 왔지. 막주의 명을 받는 순간 그것을 직감했네. 본막의 겁난이 우리 부자들의 죽음으로 시작된다는 것을 막주도 알고 있는 듯했어. 어찌됐거나 조심하게. 본막의 살수들이 아직은 더 남아있으니... 젊은이, 이제 검을 빼주게. 이만 자식들을 에미 곁으로 데리고 가야겠어. 고마웠네."
우노의 눈이 스르르 감겼다. 관운빈은 그의 심장에 꽂혀있는 용명검을 뽑아냈다.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 관운빈의 의복에 선혈이 튀었다.
천리마는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말발굽이 일으킨 자욱한 황진 너머로 검은 연기가 피어 올랐다.
토담집이 불길에 휩싸인 것이다. 연기는 일직선으로 피어올랐다. 아마도 하늘로 곧장 올라갈 것이다.
관운빈은 고개를 돌려 힐끗 연기를 바라본 후 침울한 표정으로 박차를 가했다.
②
"하아.... 천첩은... 수 차례에 걸쳐 만금대인 부자를... 학! 경계해야 한다고... 전갈을 올렸습니다."
"그런 막연한 전갈로는 미흡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느냐?"
"아아!"
"본좌가 왜 널 살려두었다고 생각하느냐?"
"하아... 그건......."
"네가 너무 아름답기 때문이다. 이유는 그것뿐이지. 아직은 쓸만한 네 몸뚱이가 널 살렸다."
"황공... 헉! 하옵니다."
"하지만 이번이 마지막이다. 더 이상의 기회는 없다. 알겠느냐?"
"조... 존명!"
"이렇게 아름다운 네 몸뚱이가 무참히 찢기는 것은 몹시 안타까운 일이지."
"아... 하악."
"하지만 잘 들어라. 본천(本天)의 율법은 만인에게 공평한 법이다. 유념해야 하리라."
"아― 아― 악!"
창틀을 움켜쥔 여인의 섬섬옥수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그녀의 앵도 같은 입술은 한껏 벌어져 있었다. 한 떨기 꽃과 같은 옥용에 고통의 빛이 떠올라 있었다.
그녀는 알몸이었다.
두 개의 터질 듯이 부풀어 오른 젖가슴이 누군가의 손에 의해 구겨지고 있었다. 그녀의 뒤에 곤룡포(昆龍袍) 차림의 위인이 서 있었다. 그는 여인의 젖가슴을 억세게 틀어쥔 채 몸을 흔들고 있었다.
"하아... 악!"
여인의 입이 딱 벌어졌다. 그녀의 중심부를 강타한 무엇인가가 희열보다 열 배는 더 큰 고통을 가했기 때문이었다.
여인의 몸이 파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곤룡포의 인물이 떨어져 나갔다. 그녀의 대리석 같은 다리 아래로 선명한 혈화(血花)가 방울방울 떨어져 내렸다.
"......."
굳이 뒤돌아보지 않아도 여인은 알 수 있었다. 이미 그녀의 주인은 그 자리에 없을 것이다.
여인은 창틀과 벽을 훑으며 무너져 내렸다. 발등이 파묻힐 정도로 푹신한 양탄자에 머리를 처박은 여인은 한손을 입안에 쑤셔 넣었다.
"흐흑흑......."
오열을 터뜨리는 여인.
놀랍게도 그녀는 만화루의 여주인 예군향이었다.
③
무림군왕성주 남궁혁은 오십여 명의 위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은밀히 개봉부를 벗어났다. 그것은 충복 흑야혼의 진언에 따라 나선 잠행이었다.
그의 잠행은 총관 소손방은 물론 아들 남궁청운조차 모르게 결행되었다.
개봉을 벗어난 지도 꽤 시간이 흘렀다.
선두에 선 위사들이 들고 있는 유등의 불빛을 통해 주위에 널려있는 봉분(封墳)들의 모습이 을씨년스럽게 비쳤다. 그가 도착한 곳은 공동묘지였던 것이다.
얼마 후 남궁혁은 개중 규모가 커 보이는 거대한 봉분 앞의 사당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너희들은 이곳에서 주위를 경계하고 있거라. 누구를 막론하고 접근을 용납해선 안된다."
남궁혁은 위사들에게 명을 내리고 등불을 든 채 사당의 문을 밀었다.
사당 안.
침침한 어둠 속에서 한 점 불빛이 깜빡이고 있었다. 누군가 먼저 와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으음, 흑야혼. 먼저 와 있었느냐?"
남궁혁은 사당문을 잠궜다.
한편, 을씨년스런 묘지의 분위기는 위사들을 심란하게 했다. 초가을의 밤바람에는 냉기가 서려 있었고, 왠지 으시시한 기분이 들었다.
그들은 주변을 경계하면서 흘끔흘끔 사당을 돌아다 보았다. 남궁혁이 들어간 후 아무런 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여인의 성숙한 젖가슴과 같은 반달이 구름 속에 자취를 감추었다 드러내기를 몇 번이었을까?
위사들은 점점 더 초조해졌다. 머지않아 동이 틀 것 같았던 것이다.
"너무 지체되는 걸......."
위사들의 수장인 황대봉(黃大鋒)은 참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소인이 한번 들어가 볼까요?"
한 수하가 기다렸다는 듯 나섰다.
"아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 성주님의 명 없이 함부로 행동할 수는 없지 않느냐?"
석연치 않으면서도 황대봉은 망설이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사당 안으로 들어간 남궁혁에게서는 소식이 없었다.
이윽고 아침 햇살이 묘지 주변을 훤히 비추고 말았다. 황대봉은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결국 사당으로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쿵쿵쿵!
그는 사당문을 두드렸다.
"성주님! 소인 황대봉이옵니다. 성주님! 날이 밝았습니다!"
쾅! 쾅! 쾅!
그는 다시 크게 문을 두들겨 보았다. 그러나 여전히 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황대붕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안되겠다! 문을 부수어라!"
다급해진 그는 수하들에게 명령했다.
서너 명의 수하들이 병기로 문을 부수자 그는 즉각 사당 안으로 신형을 날렸다. 사당 안은 여전히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
"불을 밝혀라!"
수십 개의 유등이 밝혀지자 사당 안의 정경이 드러났다.
"......!"
황대봉은 눈을 크게 떴다. 사당 안에는 개미새끼 한 마리 없었던 것이다.
"성주님이 안 계시다니... 이게 어찌된 일이냐?"
그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때 한 위사가 바닥을 가리키며 외쳤다.
"지하로 통하는 통로인 것 같습니다!"
"어디냐?"
황대봉은 급히 그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 보았다. 과연 먼지가 수북히 쌓여 있는 바닥에 널빤지를 들춰낸 듯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열어라!"
수하들이 널빤지를 들어내자 지하로 통하는 어두운 계단이 나타났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 결심하고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계단은 의외로 길었다. 삼십여 개의 계단을 내려가서야 바닥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곳부터 일직선으로 뻗은 통로가 나왔다.
잠시 후, 한 칸의 장방형 석실이 나타났다.
석실은 텅 비어 있었다.
황대봉의 눈이 부릅떠졌다.
"이럴 수가......!"
석실 안에는 하나의 탁자와 네 개의 의자만이 놓여 있을 뿐,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런데 석실 바닥에 남궁혁이 들고 있었던 유등이 떨어져 뒹굴고 있었다.
황대봉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분명 무슨 일인가가 벌어진 듯한 상황이었다.
"주위를 샅샅이 조사해 봐라!"
위사들은 일일이 손바닥으로 사방의 벽을 더듬으며 조사해보았다.
"앗, 문입니다!"
한 위사가 외쳤다. 과연 그가 서 있던 벽이 안으로 밀려들어가 있었다.
"비켜라!"
황대봉은 소리치며 벽을 밀었다. 벽이 빙글 돌아가며 계단이 나타났다. 계단은 반대로 위쪽을 향해 나있었다.
"모두 날 따라라!"
그는 긴장한 음성으로 외치며 계단을 밟고 올라갔다. 계단은 그리 길지 않았다. 머지않아 그는 머리 위에 무엇인가 막혀있는 것을 발견하고 두 손으로 힘껏 밀어 올렸다.
"......!"
눈부신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이럴 수가......!"
그는 망연자실해지고 말았다.
계단을 빠져나오니 그곳은 사당에서 불과 삼십여 장도 떨어지지 않은 한 숲속 공지였다.
주변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아무 것도 눈에 띄는 것이 없었다. 그는 눈이 벌겋게 충혈된 채 수하들에게 외쳤다.
"뭣들 하느냐? 어서 성주님을 찾아 보아라!"
"옛!"
수하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주위를 수색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나무뿌리 하나, 풀 한 포기까지 면밀히 조사했다. 그러나 아무리 이 잡듯이 주위를 수색해도 단서 하나 발견되지 않았다.
그들의 주인 남궁혁은 감쪽같이 사라지고 만 것이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
잘~감상~~~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즐독입니다
감사^^
감사...
즐~감하고 갑니다.
잘읽었습니다
어떻게 된거야? 성주가 납치된거야?
아님 죽은거야?
감사합니다.
즐~감 하고 갑니다.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