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에스라의 중보기도 (스2-9)
2026년 7월 31일 (금요일)
찬양 : 십자가를 질 수 있나
본문 : 에스라 9:1-15절
☞ https://youtu.be/TNL-4-PUWJM?si=QBkc8UsliqYYhhY0
어제 작은 어머님을 섬기고 왔다. 몸은 파김치가 되어 힘들지만 마음은 행복하다. 이제 90이 가까우심에도 여전히 집을 정돈하시고 사시는 모습이 참 놀라웠다. 함께 예쁜 새 그릇을 드리고, 이전의 무거운 그릇을 버리고 정돈해 드렸다. 아내의 섬김에 감사할 뿐이다.
아무리 건강하셔도 이제 이 땅에서의 삶이 얼마 남지 않으셨는데 천국의 소망을 어떻게 전해 드려, 땅의 삶을 정리하고 하늘의 삶을 소망하며 준비하게 할지를 깊이 고민하며 기도하게 된다.
오늘은 나의 은퇴 선물로 주어진 한 달 휴가의 마지막을 정리하며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을 나누는 시간이다. 비록 내 생각과는 전혀 다르게 한 달이 흘러갔지만 하나님은 참으로 귀한 은혜로 내게 채우셨음에 감사를 드린다.
이날 주님은 어떤 말씀으로 인도하실까?
오늘 본문 에스라 9장은 예루살렘에 도착한 에스라가 마주한 충격적인 영적 타락 즉, 이방인과의 통혼 문제를 알고, 하나님께 옷을 찢고 가슴을 치며 드린 ‘위대한 중보적 회개 기도’의 장이다.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말씀의 사람 에스라가 왜 이토록 기가 막혀 옷을 찢고 기도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 배경과 기도의 핵심 내용, 그리고 이 기도가 가져온 위대한 결과를 본문은 보여준다. 1-2절
이 일 후에 방백들이 내게 나아와 이르되 이스라엘 백성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이 땅 백성들에게서 떠나지 아니하고 가나안 사람들과 헷 사람들과 부리스 사람들과 여부스 사람들과 암몬 사람들과 모압 사람들과 애굽 사람들과 아모리 사람들의 가증한 일을 행하여 그들의 딸을 맞이하여 아내와 며느리로 삼아 거룩한 자손이 그 지방 사람들과 서로 섞이게 하는데 방백들과 고관들이 이 죄에 더욱 으뜸이 되었다 하는지라.‘
에스라가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휴식을 취하고 모든 것을 정리한 후 보고받은 내용이다. 스룹바벨이 성전을 건축하면서 주변의 사람들이 함께 짓자고 하는 것을 단호히 거부하며 거룩한 성전의 정체성을 지켜내려고 16년의 멈춤까지도 수용하며 버텼던 그 자리가 성전을 짓고 시간이 흘러 너무도 허망하게 무너져 내린 것이다.
여기서 이방인과의 결혼을 금지한 것은 '민족주의(혈통주의)'나 인종 차별로 이해하면 안 된다. 고대 사회에서 결혼은 곧 '종교와 가치관의 결합'이기 때문이다. 이방 여인들이 들어오면 반드시 그들의 우상(다신교)과 세속적 풍습이 가정과 자녀 교육 속으로 스며들어, 유일신 여호와 신앙을 오염시키는 '영적 사생아(혼합주의)'를 낳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 본문 2절은 <거룩한 자손이 그 지방 사람들과 서로 섞이게 하는데>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이 문제의 심각성을 지적하고 있다. 특히나 더 충격적인 것은 이 일에 레위 사람들과 방백들과 족장들이 으뜸이 되어 이 죄악을 범했다는 사실이다.
말씀의 사람 에스라는 이 문제의 심각성을 보았던 것이다. 하나님의 구속사는 '거룩한 씨앗 즉 남은 자'를 통해 메시아의 언약을 이어가는 것인데, 이 거룩한 정체성이 멸절될 위기에 처한 위태로움을 말이다.
누군가에게는 그냥 그럴 수 있는 일탈 정도로 보였지만, 말씀의 사람 에스라에게는 이것이 심판과 회복의 갈림길에 선 엄청난 위기로 보였다. 그래서 이 보고를 듣자마자 그는 속옷과 겉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으며 저녁 제사 때까지 기가 막혀 주저앉았다고 한다. (3-4절)
이때 에스라와 영적인 교감이 된 사람들이 모여든다. 4절
‘이에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떠는 자가 사로잡혔던 이 사람들의 죄 때문에 다 내게로 모여오더라’
표준 새번역은 이 부분을 이렇게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을 두려워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내가 저녁 제사 때까지 넋을 잃고 앉아 있는 동안에 그들은 포로로 잡혀 갔다가 되돌아온 백성이 저지른 이렇게 큰 배신을 보고서, 나에게로 모여들었다.>
그동안 구심점이 없어 잠잠했던 이들이 에스라의 모습을 보고 그곳에 모여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때 에스라는 지적하고 책망하는 대신 하나님의 심판과 백성 사이를 막아서는 진정한 중보자의 위치에 선다. 5절
‘저녁 제사를 드릴 때에 내가 근심 중에 일어나서 속옷과 겉옷을 찢은 채 무릎을 굻고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향하여 손을 들고’
자신은 지금 막 도착한 사람이며, 심판의 권한까지 부여받은 사람이다. 얼마든지 치리하는 사람으로 서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에스라는 주님처럼 중보자의 자리에 서서 스스로 속옷과 겉옷을 찢은 죄인의 모습으로 무릎을 꿇고 하나님을 향해 기도하기 시작한다.
그는 먼저 이 문제를 저들의 문제라고 하지 않고 우리의 죄악이라고 고백하며 회개하기 시작한다. 6절
‘말하기를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끄럽고 낯이 뜨거워서 감히 나의 하나님을 향하여 얼굴을 들지 못하오니 이는 우리 죄악이 많아 정수리에 넘치고 우리 허물이 커서 하늘에 미침이니이다.’
그는 감히 얼굴을 들지도 못한 채 이 죄악의 심각함에 어찌할 줄을 모르며 그 죄악을 하나님 앞에 자백하고 있다. 고발하는 기도가 아니라 자신의 것으로 자백하는 기도를 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면서 에스라는 현재의 삶을 하나님의 은혜로 성전의 박힌 못과 같게 하시고, 조금 소생하게 하신 때라고 고백한다. 8절
‘이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잠시 동안 은혜를 베푸사 얼마를 남겨 두어 피하게 하신 우리를 그 거룩한 처소에 박힌 못과 같게 하시고 우리 하나님이 우리 눈을 밝히사 우리가 종노릇 하는 중에서 조금 소생하게 하셨나이다.’
이 고백은 바벨론의 압제 속에서 종노릇 하던 자들을 불쌍히 여겨 예루살렘에 성전을 짓고 다시 살 수 있는 '은혜의 텐트(못)'를 쳐주셨는데, 그 엄청난 은혜를 원수로 갚았다는 뼈저린 자각이다.
이런 심정으로 에스라는 이렇게 이 죄악이 가진 심각성을 자백한다. 10절
‘우리 하나님이여 이렇게 하신 후에도 우리가 주의 계명을 저버렸사오니 이제 무슨 말씀을 하오리이까’
에스라는 그야말로 지금의 죄악이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는 무서운 심판의 자리임을 분명히 선포하고 있다. 그는 이어서 이방 민족과 통혼하지 말라는 율법(신 7장)을 명백히 어겼음을 지적하며, 14절에서 <우리가 어찌 다시 주의 계명을 거역하고 이 가증한 백성들과 통혼하리이까 그리하면 주께서 어찌 우리를 멸하시고 남아 피할 자가 없도록 진노하시지 아니하시리이까>라며 그 심판의 타당성과 위험성을 분명히 인정한다.
그러면서 그는 현재의 심각성을 이렇게 자백하며 마친다. 15절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의로우시니 우리가 남아 피한 것이 오늘날과 같사옵거늘 도리어 주께 범죄하였사오니 이로 말미암아 주 앞에 한 사람도 감히 서지 못하겠나이다 하니라.’
이 부분은 메시지 성경의 번역이 이해가 쉽다.
<주님은 이스라엘의 의로운 하나님이시고, 지금 우리는 겨우 목숨을 건진 한 줌의 무리일 뿐입니다. 여기 숨을 데 없이 서 있는 우리를 보십시오. 주 앞에서 우리는 죄인입니다. 우리 가운데 누구도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에스라는 죄에 대한 어떤 합리화나 조건부 용서를 요구하지 않고 있다. 그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공의와 긍휼 앞에 공동체의 운명을 완전히 복종시키며 납작 엎드려 자신도 그 죄인의 한 사람으로 서서 기도한 것이다.
오늘 중보기도가 무엇인지를 에스라는 정확히 보여주고 있다. 진정한 중보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시다. 말씀의 사람, 황제의 마음도 열어 모든 것을 받을 수 있었던 에스라도 여기까지 밖에는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시라 그 죄악을 용서하시며 성전의 박힌 못과 같은 이들을 회복시킬 것을 믿으며 이렇게 그들과 함께 그 심판의 자리에 설 수 있었던 것이다.
에스라는 얼마든지 자신의 깨끗함으로 세상을 심판하고 정죄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그들을 책망하는 자로 서서 자신의 거룩함을 뽐낼 수 있었다. 그리고 왕이 준 권한으로 심판을 하면서 얼마든지 개혁을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에스라는 자신이 죄인의 자리에 서서 그것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심판의 자리에 선다. 그리고는 주 앞에 한 사람도 감히 서지 못한다고 자백하며 오직 하나님의 긍휼을 구한다.
그가 가진 말씀의 능력과 세상 왕이 준 권세를 가지고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자백하며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모습으로 선 것이다. 이것이 진정 영적 지도자의 모습임을 깊이 묵상하게 된다. 나의 후반전 사역이 이와같은 모습으로 서서 주님을 영화롭게 하는 자 되기를 사모하고 기도한다. 주님 이 종을 받아 주소서.
한줄 묵상 :
<공동체를 진짜 살려내는 힘은 문제를 척결하려는 '심판자의 권력'이 아니라, 그 죄를 나의 허물로 끌어안고 함께 죽으려는 '중보자의 눈물'이다.>
적용 질문 :
1. 가정이나 교회, 사회의 문제를 바라볼 때, 나는 정죄하는 심판자의 자리에 섭니까, 아니면 "나의 허물입니다"라며 연대적 책임을 지고 엎드립니까?
2. 주변 사람들과 적당히 잘 지내기 위해, 세상의 가치관과 타협하여 내 삶과 가정에 끌어들인 '영적 이방 여인(세속주의)'은 없습니까?
3. 내가 마땅히 주장할 수 있는 권리나 정당성을 내려놓고, 오늘 오직 하나님의 긍휼만을 구하며 대신 눈물 흘려주어야 할 대상은 누구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