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秦始皇帝....그의 삶과 죽음
중국은 나라가 거대하고 역사가 오래인 만큼 전쟁도 많고 흥미진진한
이야기도 많지만 그중 진시황제의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합니다.
그러나 유명한데 비하여 그의 평생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아요. 그 점에 있어서는 나 역시 마찬가지.
이번에 우연히 대만방문을 계기로 중국 역사상 가장 유명한
진시황제에 대한 이야기를 알게 되고 관심을 갖게 되어,
그 진기한 스토리가 너무나 흥미진진하여 간단히 소개하고 싶습니다.
대부분의 무덤은 사람이 죽은 다음에 만드는 것이지만,
이집트의 왕들도 그렇고...
중국의 왕들도 자기가 죽은 후의 일들은 믿을 수가 없어서인지...
집권을 하자부터 자기의 무덤을 짓기 시작하는 거...
불노장생 하고 싶어 서복(徐福)이라는 신하를 보내
불로초를 구해 오도록 명령하였으나
구하지 못하고 결국 죽은 걸 보면 비록 스스로를 신격화하여
황제로서 백성 앞에 군림하였지만 죽음이 두려운 건 어쩔 수 없었나봅니다.
진시황릉에서 약 1.5km 떨어진 곳에 7,000 토우 전사들을 실제크기로 병마용(兵馬甬)을 만들어 자신의 무덤을 지키게 한 것은 오히려 얼마나 자신의 나약함을 드러내는 처사인지...
살아있는 7,000 병마를 무덤에 함께 데리고 들어가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지..
약 30년 전에 이것이 출토되어 세계를 놀라게 했고...지금은 관광명소가 되어있습니다.
난 아직 가 보지 않았지만....네이버에 뒤져보니 요런 사진이 나오네요...퍼왔죠!^^
진시황제는 중국역사상 가장 유명한 황제이고 가장 널리 알려진 인물.
그가 죽은 지 2,000년이 넘었지만 지금까지 그의 명성은 사라지지 않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로마의 황제 네로와 함께 영원한 인기 제왕이랄까...
그 이유는 바로 그가 중국 역사 속에서 너무나 많은 것을 창조하여
후세에 무수히 많은 신기록을 남겨놓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기록은 스포츠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든이 세계 최초라면 신기록이지요^^
그는 최초로 거대 중국을 통일하였고,
최초로 통일된 정부의 통합관리체제를 만들어 놓았으며,
최초로 문자를 통일하는 작업을 단행하여 한자를 정형화시키는 기초를 다졌고.
최초로 전국적인 군현제를 실시. 토지 분봉제 대신 전면적인 행정구역제도를 마련했으며,
최초로 도량형을 통일하고 지역 간에 서로 다른 환산표준을 하나로 일치시켜
경제활동의 활성화를 꾀했다.
최초로 ‘황제’라는 칭호를 창조하고 사용했다. 이 칭호는 후세의 제왕들이 계속해서 사용했으며,
2천여 년의 중국 봉건사회 속에서 줄곧 최고 통치자의 법정 호칭이 되었다.
최초로 통일된 중앙집권제도를 창설하였는데, 이 제도 역시 한나라 때 수정과 보완을 거쳐
마침내 중국 봉건사회의 기본제도가 되었다.
그리고 또 한가지...세계 최초 최장의 만리장성을 쌓았다는 점...그 만리장성의 애초의 목표는
외침을 막는 것이었지만 사실 외침을 막는 데는 별로 쓰이지 못했고...그리고 그것을 쌓으며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기 때문에 업적이라기보다 오히려 실정에 속할 것 같은데...
그래도 그것으로 인해 현재 중국이 벌어들이는 관광수입이 만만찮으니 긴 안못의 업적이라고나 할까...^
그의 업적만 이렇게 많은 것이 아니고...진시황은 분명히 폭군이기도 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써 분서갱유는 오늘날까지 지식인들의 치를 떨게 하는 폭행이었습니다.
분서갱유(焚書坑儒)란 승상 이사(李斯)의 간언에 기인한 것인데
유학자들이 황제를 비난한다는 말을 듣고 그 대책을 의논하니 이사의 말:
“봉건시대에는 제후들 간에 침략전이 끊이지 않아 천하가 어지러웠으나
이제는 통일되어 안정을 찾았사오며, 법령도 모두 한 곳에서 발령되고 있나이다.
하오나 옛 책을 배운 사람들 중에는 그것만을 옳게 여겨
새로운 법령이나 정책에 대해서는 비난하는 선비들이 있사옵니다.
하오니 차제에 그러한 선비들을 엄단하심과 아울러
백성들에게 꼭 필요한 의약(醫藥) 복서(卜筮) 종수(種樹) 농업(農業)에 관한 책과
진나라 역사책 이외에는 모두 수거하여 불태워 없애버리소서.”
이리하야....대대로 내려오던 문서를 모조리 불태우고 위의 다섯가지 책을 남겨 놓았는데...
그 중 복서(卜筮)라는 책이 무엇이냐하면....우리나라의 토정비결같은...ㅋㅋㅋ..운명을 점치는 책...
우리나라의 사극을 보면 신당을 모시는 여제가 권력의 주위를 멤도는 것과 같이...
과학이 발달되지 못한 우매한 당시의 상황을 한 눈에 보는 것 같아.
복서(卜筮)를 태우지 못하게 한 진시황...지도 별 수 없는 한 치 앞을 모르는 사람이라는 것....
옛날 서책들은 이렇게 대나무를 엮어
글씨를 쓰고 책으로 만들었다.
이렇게 만들기는
얼마나 힘들었을 것이며..
불 태우면....얼마나 잘 탔을꼬...!
그 이듬해에 그것을 반대하고 항의하는 유생들 460명을 산 채로 구덩이에 파묻어 죽였으니
이 분서갱유사건이 진시황을 폭군으로 모는 대표적인 희대의 학살로서
한꺼번에 많은 사람을 죽인 것으로 말하면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 다음으로 많은 숫자인 것이다.
세계역사 속에서 지금 현재도 중국이 후진을 면치 못하는 이유가 바로 이 사건 때문이 아니었을까....
나름대로 생각해 봅니다.
옛 성현들의 유익한 책들을 모조리 불태워..
요즘처럼 컴퓨터에 저장 될 수 있는 세상도 아니고
불태워 없앴으면 그것으로 영원히 그 기록은 없어지는 것이고...
공부하는 똑똑한 유생들을 그렇게 많이 죽였으니...
후세 사람들이 무엇을 가지고 삶의 지침을 삼았을 것이며 지혜로운 사람이 누가 있어
나라를 지대로 이끌었을지...중국의 현재를 보는 마음이 착잡합니다.
진시황의 탄생
진나라의 왕자 장양왕은 인질로 잡혀와 초나라에서 살았답니다.
이때 거상 여불위 라는 간교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첩이 절세미인...
보자마자 탐을 내니 여불위가 생각하기에 장양왕에게 주는 것이 자기에게 이익이 될 것이라 판단...바로 장양왕에게 넘겨 주었는데 그때 그 여자는 임신 중이었다는 것...
그 후 9개월 후에 누구의 아기인지 아리까리한 때에 태어난 아기가 영정(嬴政)...후에 진시황제가 될 아기였다는 것입니다.
진시황은 장양왕의 아기일까요? 여불위의 아기일까요?
기원 전 2세기의 사마천의 사기(史記)에는 여불위의 아기라고 분명히 말 했으나 신빙성이 없다는..
"여불위는 최고의 무용수이자 한단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부(情婦)를 첩으로 맞아들였고, 그녀는 아이를 가졌다. 장양은 그녀를 보자마자 사랑에 빠졌고, 그녀를 가질 수 있는지 알아보았다. 어느 누구보다 여불위가 격노했다. 그러나 여불위는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에게 이로운 점이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보고는 그녀를 장양에게 넘겨주었다. 그녀는 임신했다는 사실을 비밀로 했다. 정상적인 임신 기간이 지난 후, 그녀는 아들 영정을 낳았다."
이 글은 사마천의 사기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무엇이 진실인지는 모르지만, 여불위가 장양왕이 죽은 후 영정의 교육자 역할을 맡았고, 13세에 즉위하여 22세에 왕권을 쥐기까지 섭정에 있는 태후와 관계했고 어린 왕의 책사(策士)였고 승상이었다는 것은 사실이랍니다.
야심차고 똘똘한 영정은 열세 살에 왕위에 올라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권력’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게 되고...
자신의 권력을 다른 사람과 나누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기원전 238년 영정의 22번째 생일 직전에 여불위와 결별하였습니다.
여불위는 자신과 태후의 관계가 들통날까봐 환관 노애를 소개해서 태후와 관계 하게하여 두 아들을 낳았고...그니까 노애는 환관이면서 거세하지 않았다는 증거..궐내에서 상당한 권력을 누렸겠지요...
왕이 이복형제의 존재에 대해 눈치 채게 되자, 노애는 왕에게서 권력을 찬탈하여
자신의 아이들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궁중 혁명을 일으켰습니다.
흐미...진시황을 완전 물로 본 것이지요...
말 할 것도 없이 반역으로 바로 진압되었고
노애와 그 추종자 20명은 말에 끌려 사지가 갈기갈기 찢어지는 죽임을 당했습니다.
또 그의 두 아들도 가죽 주머니에 집어넣어져 몽둥이로 때려 죽였고..
여불위도 지위를 잃었고,
1년 후엔 쓰찬 지방으로 추방되어 유배되는 도중 자살했고...
당연히 태후도 페위되어 궁중을 떠나 멀리 멀리 유배되어야 했습니다.
최초의 반역을 피로 진압한 젊은 왕은 권력의 주도권을 잡았으며,
기원전 221년에 스스로 진시황제(秦始皇帝)라 하고 그후 15년동안...아코...생각보다 얼마 안 되네요.. 통일 중국을 통치하는 절대 군주로서 군림하게 되는 것입니다.
진시황의 죽음
시간은 흐르고, 그에 따라 사람도 늙기 마련인 것을....
진시황제는 영원히 살며 영원히 권력을 휘두르며 나라를 통치하기를 바라고
불로초를 구하려고 서복(徐福) 일행을 바다 건너보내기도 하였지만...
사마천의 기록에는 이런 그를 두고 "허무맹랑하게 불로초를 찾는 바보"라고 평가했습니다. 이런저런 기록을 볼 때 사마천이 진시황제를 좋게 보지 않은 것은 틀림없어 보입니다.
그러니까 싫은 사람을 좋게 기록했을 리가 없다고
그의 진시황제에 대한 기록을 의심하나봅니다.
불로초를 구하려고 한 일화에서 보듯 죽음 앞에서는 그도 약한 한 인간이었을 뿐만 아니라
죽음 또한 비참하게 맞았습니다.
진시황은 자주 그 넓은 중국 대륙 이곳저곳으로 시정시찰 다니는 것을 좋아했다는데...
그때에도 궁중을 떠나 광총시안 북서쪽 허베이 지방으로 나가서 병을 얻어서...
그때 수행 중이던 사람이 환관 조고(趙高)와 예의 그 분서갱유(焚書坑儒)사건의 이사(李斯)였답니다.
으이그...어딜가나 그 환관이 문제야...요즘으로 말하면 대통령 비서실장격인..
그리고 궁중은 장남이자 왕위 계승자인 부소(扶蘇)에게 맡기고
총애하던 막내 호해왕자을 데리고 다녔다는 말씀...왕자 중 17번째라네요...많기도 하다!
부소는 너무나 강직하고 착한 효자였기에 조고와 이사 같은 간신배들과 사이가 좋았을 리가 없지요.
왕이 자기의 병이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 유언을 적어 환관 조고에게 맡기니...
조고가 이것을 서찰로 만들어 오니 왕은 이미 숨을 거둔 상태...
기원 전 210년 7월...진시황의 50세 되는 무더운 여름날이었습니다.
부소에게 보낸 유서의 내용은
군대는 가장 신실하고 의협심이 강한 장군 몽념에게 맡기고
돌아와 유해를 맞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자기들을 좋지 않게 보는 부소가 왕이 되면 당근 자기들이 살아 날 길이 없으니...
유서를 위조합니다. 왕의 글씨를 흉내 내어 부소에게 보내는 편지를 쓰는데...
이 편지에는 부소와 몽념 장군은 자살하라는 내용이 들어 있었습니다.
이유는 유목민과의 전투에서 패배하였기 때문이라 하였습니다.
이 편지를 받은 부소는 몽념장군이 절대 그럴 리가 없다고 말리는 데도
그 편지가 아버지의 뜻이라 믿고 자결하고...아코...이이이 등신!
환관과 두 공범은 그 편지를 보낸 후에 황제의 죽음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죽은 진시황의 시체를 마차에 싣고
전국 순행을 계속하였습니다.
그 오뉴월 땡볕에!
요즘같은 냉동시설이 있을 리가 없고...
당근 죽은 진시황제의 시체에서 송장 썩는 냄새가 나기 시작하자 그것을 위장하기 위하여
소금에 절여 말린 생선이 들어 있는 수레를 황제의 마차 앞뒤로 끌게 하였습니다.
산천초목이 그의 앞에서 벌벌 떠는 권력을 휘두른 진시황제였지만 죽음은 비참하였고
객사한 그의 시체가 썩어 송장냄새가 등천을 하도록 아직도 시정 시찰하는 척 마차 속에 방치되고....평생을 공들여 만든 어마어마한 규모의 무덤 속에 바로 묻히지도 못하였습니다.
이 천인이 공노할 끔찍한 여행은 제1왕위계승권자인 부소의 자살 소식을 들은 후에야 중단되었고...
그들은 곧장 수도인 셴양으로 돌아왔습니다. 비로소 황제의 죽음이 공표되었고
그들의 계략대로 호해가 제 2대 황제로 옹립되고...
그러나 사실적인 권력은 환관 조고의 손아귀에 있었습니다.
약한 왕들이 흔히 그러하듯, 간신들의 계략에 의해 왕이 되었으니
그 간신들의 손에 놀아나는 나라가 제대로 될 리가 없으며
왕위가 언제나 불안하고 초조하여
형제 자매들을 의심하는 병이 생겨 일벌백계의 위력을 보여주기 위해
가장 잔인한 방범으로 형제 자매와 이복 형제 자매들을 공개적으로 처형하는 만행을 저질렀으나...
그 왕을 무서워하기 보다는 나약하고 잔인하기만 한 왕을 없애려는 역적모의 반란세력만 늘어가...
왕조 말에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전 철을 예외없이 하나씩 밟아
결국 그는 집권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암살 당하고..
이사도 반역의 누명을 쓰고 허리가 잘리는 요참형을 받아 백성들이 지켜보는 길거리에서 처형 당했고,
그 가족은 삼족이 멸함을 당했습니다.
이 모든 일의 배후 조종자인 조고도 기원전 207년에 주살 당하였습니다.
이렇게 망국의 길로 접어든 진왕조는 불과 몇 달 후인 기원전 206년에 농민반란으로 멸망..
진시황제가 꿈꾸었던 세세만년의 제국은 불과 15년 만에 허무하게 무너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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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여행기록은 이것으로 마칠라고...
드문드문 올린 글들을 재미있는 척하고 읽어주신 이웃님들!
감사합니다! ㅎㅎ..
한 가지 더....
내가 탄 비행기는 아시아나...
이뿐 가방이 하드라 조심해서 다뤄달라고 부탁을 했건만..그래서 "FRAGILE" 표시까지 붙였건만...
이렇게 무지막지하게 깨져 있는 거...
새가방은 아니라도 가까운 곳에 부담없이 들고 다닐 수 있는 거였는데...
사실 지난 번 여행때 윗부분이 쪼끔 깨지기는 했어도...ㅋㅋ..
공항을 나오면서 버스기다릴 시간이 좀 남아...
말이나 해 볼라고 아시아나에 가서 항의 했습니다...
여직원이 나오더니 " 새 가방이 나갈 거거든요..."
나에게 팜플렛을 내보이며 "고르세요! 맘에 드는 거..."
이리하야...새 가방이 새로 생겼습니다....
그런데 또 깨지는 불상사가 생길가봐 천 가방으로 골랐더니...
좀 이뿌진 않아요...다시 바꿔달래야 되나...
그러다가 그냥 날자가 가고 있네요..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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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추가
그레이스
이웃609명
가족과 친구간의 화기애애한 분위기...그곳에 음악이 있어 더욱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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