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환미가
속 깊은 바람을 따라 가을이 가고 있다.
떨어진 나뭇잎과 쉰여덟 조각의 구름을 데리고, 글쎄 그곳이 어디인지는 잘 모른다.
어쩌면 왔던 그곳으로 가을이 떠나는 거겠지 막연히 생각한다.
나는 단풍이 들어가는 동안
밀린 숙제를 했고, 포도를 먹었고,
아픈 이를 뺐고, 높고 짙푸른 하늘을 올려다보다 풍덩 빠졌고, 허우적거리며 “아 가을인가~~~”를 연거퍼 외치다
밤이 오는 시간이면 부엌 한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세상의 모든 음악에 귀를 기울였다
어둠이 밀려드는 시간에 듣는 음악은 모두가 슬펐다.
학교에서는 그런 가을의 한 복판에 체육대회가 있었다.
대전표가 내걸리고 체육시간에 치러지는 예심도 만만찮게 치열했다.
아이들을 색깔이 다른 조끼를 입고, 마냥 뛰고 뒹굴고 부딪히고 깨지고 찢어졌다.
드디어 결승을 겨루는 날, 운동장엔 만국기가 걸리고
아이들은 이상한 복장으로 마냥 부풀었다.
인간은 경쟁을 붙여놓으면 목숨 걸고 싸운다. 싸우다 죽기도 한다.
인간은 멋지다는 생각을 해보기도 했다. 인근 아파트에서는 시끄럽다 항의 전화가 쇄도하고,
엄청난 함성과 환호 속에 이어진 계주로 운동장을
흥분의 도가니로 둘둘 말아 감으며 체육대회는 끝이 났다.
그 체육대회의 한 복판에 '환미'가 있었다.
천부적인 개그 기질로 번뜩였던 환미,
지금 같으면 유재석이 다녔다는 그 대학을 다녔을 환미,
내가 감자 반찬을 좋아한다 하자 죽는 날까지
만날 때마다 감자를 주머니에 넣어주겠다 약속했던 환미,
교지(울림)에 실린 태범이의 소설을 읽고 감동을 함께 나누었던 환미,
남학생들의 어정쩡한 걸음걸이나 행동을 흉내내주던 환미,
교실의 오아시스 나는 그런 환미를 좋아했다.
의당 환미 옆에는 선미가 있었다. 뜨개질이고, 피아노고 운동이고 뭐고
못하는 것이 없던 선미를 환미처럼 좋아했다.
지금 생각하면 환미는 고수였던 것 같다
아무 때나 노래하지 않았다. 꼭 일 년에 한 번
체육대회를 마치고 흥청거리며 교실로 들어서면,
그 때 우리들의 성화에 못 이기는 척 비시시 웃으며 교단으로 올라가
칠판 지우개를 들고 나훈아의 '고향역'이나 '가지마오~~~'를 불렀다.
우리는 환미의 노래를 들으며 발을 구르고 책상을 두 손바닥으로 쳐대며
엎어지고 잦혀지며 배를 움켜쥐고 웃었다.
이편에서 저편으로 세상을 건너 뛰어다니며 깔깔거렸다.
만약 내가 웃다가 죽었다면 아마 환미의 노래를 듣다 실족하여 죽었을 것이다.
우리는 환미의 노래를 듣기 위해 일 년 내내 가을체육대회를 기다렸다.
환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안양 박달동 '유한양행'인지 '현대'인지에 취직을 했다.
그 해 봄 환미는 자주색 목련 꽃잎을 잔뜩 넣은 편지를 내게로 보내왔다.
취업을 해야 했던 환미의 아픔이 짙게 배어 있는 꽃잎을 만지작거리다 나는 울었다.
그 이듬해 국립의료원에 실습이 있어 서울 올라왔다가 물어물어 환미를 찾아갔다.
그 때 안양이라는 데를 처음 가 보았다. 시내버스를 타고 스물 한 살의 태양을 따라,
1970년대 중반이라는 개발의 붐으로 들썩이는 황량한 들판을 지나 시꺼멓던 개울을 건넜다.
거기 환미가 있었다.
둘은 만나 무슨 눈빛으로 서로를 감싸 안고,
무슨 얘기를 나누며 팽창하는 서로의 젊음을 격려했는지,
그 때 하늘에서 어떤 소리가 들렸는지는 기억에 없다.
지금 같으면 함께 밥을 먹고 술을 먹고 헤어졌을 텐데,
아마 "밤 근무를 해야 한다“는 말을 하고 둘은 헤어졌던 것 같다.
환미는 감자 대신 차비를 듬뿍 내 주머니에 찔러 넣어 주었다.
“나 돈 벌잖아” 란 말도 했었다. 그 후 어찌 저찌 각자의 길을 가느라
서로를 잊은 듯 처녀시절을 보내고, 각자 있는 곳에서 결혼을 했다.
환미의 결혼식에 가지 못했고, 환미도 나의 결혼을 몰랐다.
30대 중반 인천 재옥이네 집에서 몇몇의 친구들이 모인 적이 있다.
대화 중 딴소리를 하면 환미는 “쟤는 학교 다닐 때 티를 낸다. 여태 우등생이 못되었니?”
농담을 던져 웃음을 터뜨리게 했다
동네 아줌마들이 "김미화를 닮았다고 한다“했다.
환미는 두 아이의 엄마였고 남편을 끔찍이 사랑한다고 했다. 안양에서 산다고 했다.
집으로 오는 길 지하철 상가 속옷 파는 상점 앞에서
지나치게 주름이 많은 이상한 해파리 같은 분홍잠옷이 있어
“저것 좀 봐라 ”했더니 환미는 갑자기 “성옥이 너하고 어울리겠다"며
"이 언니가 사 주마 ” 내 손목을 끌어 잡아 당겼다.
나는 극구 사양하며 킥킥거렸다. 환미가 이렇게 일찍 죽음이라는 저편으로 건너 갈 줄 알았다면
그때 그 이상한 잠옷 사달라고 할 걸. 감자를 받듯 덥석 받지 못한 걸 후회했다. 그 후 환미를 보지 못했다.
환미는 동창회에 나오지 않았다.
나는 나대로 언제라도 전화하면 그 곳에 환미가 있겠지 싶어
거의 연락을 하지 않고 지냈다.
그렇게 20년이 넘게 지나갔다.
그리고 작년인가 비보를 접했다.
긴가민가 싶어 선미에게 전화를 했다 선미도 처음 듣는 소리라 했다.
들려오는 소리로는 환미가 “아무에게도 죽음을 알리고 싶지 않다”고 했다 한다.
“환미 너 이순신장군을 만나러 간거지? 너 반칙한 거다.”
밀려드는 슬픔으로 몇 날을 절절거리다
계속되는 삶을 따라 일상으로 돌아 왔다.
가을도 지나갔고, 체육대회도 끝이 났고, 환미도 갔다.
나는 이따금 환미가 위암이라는 엄청난 고통을 견디며,
죽음이라는 그 깜깜한 통로 앞에서 지그시 눈 감고
식구들의 사랑과 행복, 생이라는 그 애절함을 먼저 생각했겠지만,
그 뒤편 어디쯤에선가 칠판지우개를 잡고
우리들의 폭발적인 웃음과 환호를 들으며
나훈아의 '가지마오'를 불렀을 지도 모른다 생각한다.
“환미야, 그 곳은 어떠니? 그 곳에도 학교가 있니?
만약 다시 태어난다면 공주 사대부고에서 다시 만나자."
"그 때 너는 반장을 하고 의란이와 현수, 내가 오락부장을 하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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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보고싶은 환미.. 많이 친했었구나
오래전 재연이랑 현수랑 어린이집에 놀러와 졸업 이 후 딱 한번 만났었는데
그 이후로 안타까운 소식 들었지..
장난스럽고 활달하고 끼가 넘치던 환미가 의외로 요리를 잘하고 요리가 취미라고..
출장요리도 나간다해 깜짝 놀랐던 만남 ~ 잠깐의 만남 이었지만 긴 여운으로 남는 만남이 되었지..
오늘 정말 환미가 그리워진다
아아 이런 애달픔도 있었군요... 숙연해집니다.
영화나 소설속의 이야기로 알았는데 세월이 흘러 나이가 드니 이런 일들이 이제 현실이 되는군요. 가까웠던 친구들은 많이 그리울거여요. 먼저간 다른 친구들이 얼마나 되는지 확인해볼 시점이 된 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