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전례
빈첸시오 드 폴 성인은 1581년 프랑스 랑드 지방에서 소농의 아들로 태어나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가 운영하는 학교에서 공부하고 1600년에 사제품을 받았다. 그는 가난한 이들을 만나는 체험을 하며 ‘가난한 이들을 돕는 것이 곧 하느님을 섬기는 것’임을 깨닫고, 자선 단체인 사랑의 동지회, 전교회,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 사랑의 딸회를 설립하여, 가난한 이들을 돕는 데 일생을 바쳤다. 1660년에 선종한 빈첸시오 사제는 1737년에 시성되었다. 1885년에 레오 13세 교황께서는 그를 ‘모든 자선 사업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셨다. 오늘날 수많은 이가 성인의 영성을 실천하고 있으며, 우리나라에도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 사랑의 딸회, 사랑의 씨튼 수녀회, 성 빈센트 드 뽈 자비의 수녀회와, 평신도 사도직 단체인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가 서로 연대하며 활동하고 있다.
본기도
하느님, 가난한 이의 복지와 성직자 양성을 위하여
복된 빈첸시오 사제에게 사도의 열정을 부어 주셨으니
저희도 같은 정신으로
그가 사랑한 것을 사랑하고 그가 가르친 것을 실천하게 하소서.
제1독서
<하늘 아래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 코헬렛의 말씀입니다.3,1-11
1 하늘 아래 모든 것에는 시기가 있고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2 태어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긴 것을 뽑을 때가 있다.
3 죽일 때가 있고 고칠 때가 있으며 부술 때가 있고 지을 때가 있다.
4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기뻐 뛸 때가 있다.
5 돌을 던질 때가 있고 돌을 모을 때가 있으며
껴안을 때가 있고 떨어질 때가 있다.
6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간직할 때가 있고 던져 버릴 때가 있다.
7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침묵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다.
8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의 때가 있고 평화의 때가 있다.
9 그러니 일하는 사람에게 그 애쓴 보람이 무엇이겠는가?
10 나는 인간의 아들들이 고생하도록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일을 보았다.
11 그분께서는 모든 것을 제때에 아름답도록 만드셨다.
또한 그들 마음속에 시간 의식도 심어 주셨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시작에서 종말까지 하시는 일을 인간은 깨닫지 못한다.
복음
<예수님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어야 한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9,18-22
18 예수님께서 혼자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도 함께 있었는데,
그분께서 “군중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19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나셨다고 합니다.”
20 예수님께서 다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시자,
베드로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1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하게 분부하셨다.
22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하고 이르셨다.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인간관계 쉽게 끊는 것도 문제지만 못 끊는 것은 더 큰 문제다
베토벤과 그의 조카 카를 판 베토벤(Karl van Beethoven)과의 관계는 그의 개인 생활과 경력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생애 마지막 몇 년 동안 그에게 큰 정서적, 육체적 고통을 안겨주었습니다.
베토벤은 1815년 그의 형이 사망한 후 카를의 양육권을 얻는 데 집착하게 되었습니다. 베토벤은 카를의 어머니에 대해 깊이 불신하고 있었고 그녀가 아들을 키우기에 도덕적으로 부적합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는 칼의 완전한 양육권을 놓고 그녀와 길고도 격렬한 법적 싸움을 벌였습니다.
이 양육권 싸움은 베토벤의 시간, 에너지, 재정적 자원을 많이 소비했습니다. 그것은 수년 동안 계속되었고 종종 그의 음악 작업에 방해가 되었습니다. 그의 우울증과 좌절감은 끊임없는 법적 논쟁으로 인해 더욱 악화하였습니다.
베토벤이 양육권을 얻은 후 칼과의 관계는 이상적이지 않았습니다. 베토벤은 그의 조카에 대해 높은 기대를 하고 있었고 그를 교양 있었고 도덕적인 사람으로 만들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칼은 까다롭고 반항적이며 베토벤이 꿈꾸던 삶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칼을 징계하고 통제하려는 베토벤의 시도는 종종 둘 사이에 긴장을 초래했습니다. 베토벤은 소유욕이 강하고 위압적이어서 그들의 관계가 긴장되었습니다. 칼에게 엄격한 양육을 제공하려는 베토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칼은 종종 삼촌의 통제에서 벗어나려고 했습니다.
칼이 베토벤에게 끼친 가장 비극적이고 직접적인 영향은 1826년에 일어났습니다. 칼은 그에게 가해진 압력과 기대에 대처할 수 없어 머리에 총을 쏴 자살을 시도했습니다. 다행히 그는 살아남았지만, 이 사건은 베토벤을 황폐화했습니다. 그는 칼의 불행에 대해 개인적 책임을 느꼈고, 실제로 베토벤은 카를의 자살 시도 이후 건강이 악화하여 몇 달 뒤인 1827년에 사망했습니다.
베토벤의 죽음의 원인을 조카에 대한 집착으로 볼 수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를 자기 책임 하에 놓으려고 하는 것에서 엄청난 에너지를 소진했음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좋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조카는 삼촌의 음악을 본받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이 모든 책임은 베토벤에게 있는지 모릅니다. 끊어내야 할 사람을 끊어내지 못하고 오히려 자기 사람으로 만들려고 했던 것입니다. 우리 삶에서도 집착 때문에 얼마나 큰 피해를 보는지 모릅니다. 어떤 사람은 아내나 형제, 자녀의 잘못 때문에 정치 인생을 망치기도 합니다. 만약 나라를 위한 정치를 한다면 기회가 있을 때 비록 가족이라도 그 사람을 끊어냈어야 옳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제자들에게 당신이 누구냐고 물으십니다. 다른 이들은 요한이 살아났다고 하고, 어떤 이들은 엘리야나 다른 예언자가 살아났다고들 하지만 베드로를 대표로 하는 제자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이시라고 고백하십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이상한 말씀을 하십니다. 그들에게 ‘당신이 메시아란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하게 이르시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며 당신의 복음을 전하라고 하시지만 왜 여기서는 당신에 대해 말하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시는 것일까요?
이 말씀 전에 예수님은 5,000명을 먹이시는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신나있을 때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당신을 따르는 길이 십자가의 길임을 알지 못합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예수님은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함구령이란 당신을 위해 십자가를 질 생각이 없는 사람에게 당신을 안다고 말할 자격도 박탈하시는 것입니다. 자칫 당신이 이용당하여 목적을 완수할 수 없게 되고 또 그 사람에게도 좋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을 쉽게 끊는 것도 문제지만 못 끊는 것은 더 큰 문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저도 주교님에게 전화를 받은 일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을 아느냐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저의 이름을 대면서 아주 잘 아는 사이고 책을 쓸 때 조언도 해 주었기 때문에 머리말에 저의 이름도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구에서는 잘못된 교리를 가르치는 그 사람이 강의하고 책을 파는 것을 금하려는 때였습니다.
저는 그 신자를 압니다. 책을 쓸 때 조언도 해 준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에는 만나지 않았습니다. 왠지 자신을 위해 저를 이용하지, 저의 생각으로는 한 발자국도 다가오려 하지 않는 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래도 인연이 중요하다고 여겨 계속 그 인연을 유지하고 있었다면 자칫 저도 그 일 때문에 혼이 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절연해야 할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나를 위해 전혀 십자가를 지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에게 나를 아는 것에 대해 말할 자유를 주어서는 안 됩니다. 더 큰 일을 할 미래를 위해 그 사람을 끊어내야 합니다. 사랑은 무능력이나 우유부단함이 아닙니다. 사명이기에 그에 어긋나는 것은 가차 없이 끊어낼 줄도 아는 일입니다.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두 아빠 곰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두 아빠 곰에게는 각기 아들 곰이 있었습니다.
한 아빠 곰은 아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매일 물고기를 잡아다 먹였습니다. 다른 아빠 곰은 아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쳤습니다. 매일 잡아다 주는 물고기를 먹었던 아들 곰은 자기 아빠 곰이 최고라고 늘 외쳤습니다. 그러나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주는 아빠를 둔 아들 곰은 힘든 사냥에 투덜거리면서 불평을 이야기했습니다. 왜 다른 아빠 곰과 달리 직접 사냥하는 방법만 가르쳐주냐고 했지요. 그래도 아빠 곰은 그때마다 인내를 가지고 아들을 가르쳤습니다.
시간이 흘러 두 아빠 곰은 늙었고 자기 힘으로 더는 물고기를 잡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제 물고기를 받아만 먹던 아들 곰은 투덜거렸습니다. 이 아들 곰은 물고기를 잡을 줄 몰랐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냥을 배운 아들 곰은 아빠를 위해, 자기를 위해 그리고 더 나아가 자기 새끼를 위해 사냥을 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무엇이 중요한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넘어지지 않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넘어져도 일어서는 방법을 가르쳐야 했습니다. 실제로 주님의 훈육법은 넘어져도 일어서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고통과 시련을 온몸으로 받아들여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 주님과 함께했던 사람은 일어나는 법을 압니다. 계속해서 우리 삶 안에서 가르쳐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던 사람은 불평불만만을 이야기할 뿐, 그 상황을 이겨낼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군중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으십니다. 이에 제자들은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나셨다고 합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아마 제자들은 이렇게 대답하면서 뿌듯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에 관한 군중의 반응이 좋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렇게 영광만이 주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말을 들으신 뒤에, 의외의 말씀을 하십니다. 즉, 당신의 수난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꽃길만 있을 줄 알았는데, 가시밭길을 이야기하십니다. 이는 곧 우리가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당신께서 먼저 수난과 죽음으로 고통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지금 삶을 잘 살 수 있는지를 모범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길이 무조건 영광의 길만 주어지지 않습니다. 고통과 시련으로 상징되는 십자가를 짊어져야 부활이라는 참 영광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가장 오래 산 사람은 가장 나이 들어 죽은 사람이 아니라 인생을 잘 느끼다 죽은 사람이다(장 자크루소).
사진설명: 성 빈첸시오 드 폴 사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