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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금식?>
흔히 사람들은 새해의 시작을 1월 1일로 생각하지만, 신앙인에게는 또 다른 의미 있는 시작점이 있습니다. 바로 '재의 수요일'입니다. 재의 수요일은 부활절을 앞두고 시작되는 사순절의 첫날입니다. 오늘 해가 떨어지는 시점부터 출발합니다. 단순한 달력상의 날짜가 아니라, 깊은 영적 의미를 담고 있는 날이죠. 이날 교회에서는 신자들의 이마에 재를 얹는 특별한 예식을 진행합니다.
“사람아,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여라.”
이 짧은 말씀은 인간의 근본적인 존재 조건을 상기시킵니다. 우리가 얼마나 연약하고 일시적인 존재인지, 그리고 궁극적으로 누구에게 의존해야 하는지를 겸손하게 일깨웁니다. 신앙인들은 이날, 지난 한 해를 돌아보며 자신의 한계와 연약함을 인정합니다. 먼지와 재는 죽음과 허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새로운 시작을 약속하는 희망의 상징입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인정할 때, 진정한 힘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사순절을 지키며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것은 세례 준비이고, 이때 강조한 과제가 금식입니다. 단지 세례 준비자만 금식하는 게 아니라 교인들도 함께 금식하는 게 관례였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가 복음서 본문을 통해 확인하게 되겠지만, 예수님이 광야에서 마귀의 유혹을 받으면서 40일간 엄격하게 금식하신 것을 본받아서 이 사순절 기간엔 예나 지금이나 ‘금식’이라는 경건의 목록이 가장 중요하게 다뤄집니다.
금식을 단순하게 생각하면, 배고픔을 참는 일종의 극기훈련으로 볼 수 있지요. 사순절이 되면, 어떤 분들은 예수님처럼 40일을 온전히 단식하기도 하고, 또 어떤 분들은 일주일에 하루, 또 어떤 분들은 일주일에 한 끼를 단식하며 자기를 넘어서는 훈련을 합니다.
지금도 천주교회에선 아예 사순절 금식을 공식적으로 가르치는데, 그 방법도 매우 구체적입니다. 21세부터 환갑이 되는 60세 성인은 반드시 재의 수요일과 성금요일에 온전하게 하루 종일 단식해야 하고, 14세 이상 모든 신자는 사순절 매금요일에 육식이 금지됩니다. 이처럼 규정된 단식이나 육식 금지 조항 외에도 정해진 기도와 예배에 반드시 참여해야 하고, 모든 교인은 사랑의 나눔을 실천하도록 규정합니다. 이것이 천주교회의 사순절 규정입니다.
실은 천주교회만 유별난 건 아닙니다. 명시적으로 결의된 것은 아니지만, 전통의 가치를 중시하는 교회들은 사순절엔 결혼도 하지 않고, 성직자들은 주례를 서지도 않아야 한다는 암묵적인 합의가 있던 것도 사실입니다.
누군가는 이런 교회 결정과 관례가 형식적이고 율법적이라고 비난할 수도 있고, 종교개혁자들의 이름과 성경 구절 몇 개를 인용하면서 사순절과 교회의 모든 절기와 기념일를 단 칼에 거절할 수도 있습니다.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16세기만해도 일부 교회에서 교회의 축일과 절기는 돈벌이를 위한 수단으로 전락했고, 그 의미는 사라지고 껍데기만 남았으니 그런 비판이 과언이 아닙니다. 개혁자들이 성경구절을 인용하고 자기 책에 그토록 날카로운 비판을 하고 거절했던 배경과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종종 어떤 분들은 ‘성경에 나온 것만 지켜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하기도 합니다. 말은 참 쉽습니다. 하지만, 그런 분들의 논리대로라면, 성탄절도, 주일도, 심지어 교회의 거의 모든 직무체계도 없어져야 합니다. 극단적으로 성경을 그대로 적용하면, 두 종류의 옷감으로 만든 옷도 입지 말고, 돼지고기도 먹으면 안 되고, 머리 깎는 스타일도 조심해야 합니다. 성경에 쓰인 대로 하지 않고는 모두 지옥 갈 일입니다. 성탄절이나 부활절, 추수감사절, 고난주간도 성경에 지키라고 안 했으니 날짜를 정해서 지키는 건 미신이고, 주일 대신 유대인의 안식일을 지키는 게 훨씬 더 성경적일 겁니다. 아, 양복입지 말고 넥타이도 차지 마세요. 그거 다 성경에 안 나옵니다. 그런데 성경대로만 살자는 분들도 그렇게 안 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것만 따르겠다는 분들보다 더 무서운 사람은 '개혁자의 말만 따르겠다'는 사람들입니다. 루터와 칼뱅이 썼다는 책에서 몇 구절 따온 다음 '이게 우리의 신앙'이라고 말하는 것도, 개혁자의 의도를 글자 몇 구절로 제한해 버리는 못된 문자주의, 못된 근본주의입니다.
우리가 성경과 개혁자들을 글을 읽고 본다는 것은 그 맥락을 읽고, 거기 담긴 정신을 배우고 익힌다는 뜻입니다. 이쯤해서 교회에서 말하는 ‘전통’이라는 말의 의미를 되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전통이라는 말은 단지 옛것을 반복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 안엔 ‘오늘을 살게 하는 힘’이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가 ‘전통을 지킨다’, ‘교회 절기와 날을 지킨다’는 말은 바로 그런 뜻입니다.
물론 그 반대도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를 살게 하는 힘, 즉 신앙에 유익이 없다면, 그것이 얼마나 오래 되었든지 얼마나 화려하든지 간에 과감히 벗어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루터는 신앙의 '아디아포라'(adiapora)라고 불렀습니다. 세례 받은 우리에겐 무엇이든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자유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신앙에 어떤 유익이 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전통이 '살아있는 힘'이라는 말은 곧 전통을 표현하는 외적인 형식이 언제든 바뀔 수 있다는 역설이기도 합니다.
사순절이라는 절기, 그리고 금식이라는 경건의 목록도 신앙의 유익과 연결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신앙의 유익이 사라졌을 때, 루터와 칼뱅이 사순절을 버리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신앙의 유익은 사라지고 껍데기만 남은 절기라면, 그것은 전통이 아니라 그저 사람을 피곤하게 만드는 악습일 뿐입니다.
금식 이야기는 좀 더 해야겠습니다. ‘금식이 신앙에 유익이 되는가’라는 질문은 중요합니다. 간혹 금식을 자기 통제력의 한계를 가늠하는 극기훈련이나 건강을 위한 간헐적 단식 정도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단식은 교회에서 권하는 금식과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주님의 산상설교에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는 마태복음 6:33 말씀을 여기 적용해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의 나라라는 말은 하나님의 다스림을 뜻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그분의 의(義)’라는 말을 주목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의를 옳고 그른 것을 판별하며, 악을 벌하고 선을 보상하는 ‘정의’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이런 현대적인 개념은 중세 이후, 종교개혁 시기에나 생겼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의’라는 말의 원래 의미는 ‘가지런히 배열하다’라는 말이라서 우리의 마음과 말과 행동이 모두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가지런히 정돈되는 과정을 ‘의’라고 말합니다.
사순절 경건의 목록인 기도, 금식, 구제가 마태복음 6장에 언급되는데, 예수님은 이것을 모두 하나님의 의와 연결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기도 금식 구제는 모두 하나님의 뜻에 우리의 마음과 삶을 가지런히 배열하는 행위이며, 이것이 곧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행동, 소위 ‘정의의 실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경건이며 신앙이지요.
구약이든(특히 선지자 요엘) 신약이든 금식을 강조할 때, 우선 그 금식은 보이는 외적인 행위가 아니라 마음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행위만 번지르한 사람을 두고 "외식하는 사람"(마 6:2,5,16)이라고 경고한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합시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뜻에 일치할 때 비로소 외적인 행동도 선하게 됩니다. 마치 좋은 나무에서 좋은 열매가 맺는 것과 같은 이치이지요.
두 번째로 성경에서 가르치는 금식은 한 개인만을 위한 경건 목록이 아니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교회의 금식은 언제나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세계와 환경을 어떻게 관계할 것인지 주의하게 만듭니다. 먹을 것, 입을 것뿐 아니라 매일 만나고 말과 행동을 섞는 사람 간 관계 방식도 여기 포함됩니다. 금식을 통해 우리는 우리에게 맡겨진 모든 관계를 어떻게 의미 있게 책임질 수 있는지 질문하게 됩니다. 자신의 욕망이나 아집을 내려놓고, 그 자리에 피조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채우는 것이지요. 최종 목표는 하나님의 뜻이 구현된 세상, 즉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뜻에 가지런히 정돈된 세계, 이것을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라고 부릅니다. 금식의 본래 목표가 여기 맞춰 있습니다. 내 마음과 말과 행동, 그 속에 내 주장을 비우고(금식) 하나님의 자비와 선하신 뜻으로 우리의 모든 관계를 구축하는 것이 우리가 실천할 금식/절제입니다.
이런 면에서 보자면, 예수님이 가르치신 기도와 구제도 정의를 실천하는 모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가지런히 정돈하고(기도), 모두가 가지런히 정돈되고 배열된 평화와 자유의 세계를 위해 구제하는 것은 정의를 위한 모험이자 신앙의 구체적인 행동입니다.
기도 금식/절제, 구제. 먼저 그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것! 이것은 사순절에 교회가 강조하는 정신입니다. 혹여라도 교회 성장 프로그램으로, 또는 좀 있어 보이려는 생각에 사순절을 말하고 있는 것이라면, 개혁자와 성경 구절의 말씀대로 모두 제거해 버려야 합니다. 반대로, 우리 신앙을 더 깊고 풍성하게 할 수 있는 전통이라면 권장해도 좋을 것입니다.
사순절을 지키는 교회와 성도라면, 단식 말고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금식을 실천합시다. 남에게 보이려고 단식투정하거나 제대로 된 단식도 아니면서 ‘투쟁’이라는 이름으로 금식의 정신을 욕보이는 일은 하지 맙시다. 그런 거 하는 사람과 단체는 일단 거르고 보면 됩니다. 요즘 국민의 대표랍시고 바리새인보다 못한 금식을 언론에 홍보하고 있던데, 신문이나 뉴스에서 그런 모습을 보면 무척 불편합니다. 그럴 바에 집에 가서 따뜻한 국밥 한 끼 잘 드시고, 그 힘으로 억울하고 가난한 사람 어디 있는지, 정의와 질서 평화는 잘 정착하고 있는지, 법은 잘 지켜지고 있는지, 국민들 먹고 사는 일은 무탈한지, 발에 땀나게 살펴보시는 게 낫습니다.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리하면 네 빛이 새벽 같이 비칠 것이며, 네 치유가 급속할 것이며, 네 공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사58:6-9)
사순절 금식은 특정 음식을 단식하고 포기하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사순절뿐 아니라 교회에서 권면하는 모든 금식은 하나님의 선물과 그분의 창조세계를 책임 있게 다루고 적절히 사용하도록 요청받습니다. 여기에는 사람들이 서로를 대하는 방식도 포함됩니다. 즉, 금식은 삶의 특정 영역(예: 식사) 또는 특정 시간(예: 일주일에 하루)만 하나님을 기억하는 행위가 아니라 우리 모든 삶의 영역에 미치는 하나님의 손길을 기억하고, 우리에게 맡겨진 모든 관계를 어떻게 의미 있게 책임질 수 있는지 질문하는 상징적 행위입니다.
욕망과 아집을 내려놓고, 그 자리에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채우는 것이지요. 이것이 금식의 본래 뜻입니다. 내 마음과 말과 행동, 그 속에 내 주장을 비우고(금식) 하나님의 자비와 선하신 뜻으로 우리의 모든 관계를 구축하는 것이 우리가 실천할 금식/절제입니다.
아, 오늘 저녁 7시 30분 우리 교회에서도 재의 수요일 예식이 있습니다. 이 말 하려다 글이 길어졌네요.
#사순절 #재의수요일
최주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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