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장안에 화제를 뿌리고 있는 드라마 <야인시대>에서 김두한 역을 맡은 안재모의 연기모습.
드라마 <야인시대>가 몰고온 화제 때문에 가는 데마다 김두한에 대해 물어보는 사람들이 많다. 그럴 때면 나는 얼마 전 차세대 전투기 도입을 둘러싸고 인터넷에서 수백만건의 조회수를 올리며 장안의 화제가 된 김대중 대통령과 부시 간의 전화 이야기를 꺼낸다. 실제로 일어난 것은 아니지만, 김대중 대통령이 미국 대통령에게 “그렇게 해주었으면” 하는 국민의 바람을 담아 잠시만이라도 우리에게 웃음을 안겨준 그 동영상을….
김두한은 정말 김좌진의 아들인가
<야인시대>를 거의 보지 못했기에 그 내용에 대해 왈가왈부할 수 없는 처지지만, 드라마는 그냥 드라마로 보았으면 한다. 그 동영상에서 김대중 대통령이 부시에게 펀치를 날리는 것을 보고 김대중을 반미투사로 생각한다면 웃음거리이듯이, <야인시대>나 영화 <장군의 아들>을 보고 김두한을 항일영웅으로 생각한다면 그 역시 웃음거리다. 김두한은 항일영웅의 아들이지 그 자신이 항일영웅은 아니다.
영웅이 없는 시대, 그리고 ‘진짜 사나이’- 그런 게 ‘진짜’ 있는지 모르지만- 가 없는 시대에 김두한에 대한 향수는 주기적으로 되풀이된다. 김두한 살아생전에는 그 자신의 입으로 엄청 부풀려진 무용담으로, 그의 사망 이후에는 1970년대에 신상옥 감독, 이대근 주연의 <협객 김두한> 시리즈로, 1980년대에는 소설가 홍성유에 의해 <조선일보>에 연재된 <인생극장>으로, 그리고 1990년대 벽두에는 임권택 감독의 <장군의 아들> 시리즈로, 그리고 세기가 바뀐 뒤에는 <야인시대>로 김두한에 대한 향수는 끊임없이 되살아난다. 물론 이런 소설이나 영화에 비추어진 김두한의 생애는 엄청난 과장과 미화로 역사라기보다는 하나의 신화로 우리 앞에 다가왔지만, 아무나 신화의 주인공이 될 수는 없다는 점에서 김두한의 생애에는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다.
사진/ 국회 기자실에 들러 인사하는 60년대 김두한 의원.
장군의 아들, 그것은 김두한을 상징하는 말이다. 한 개인을 논할 때 그 사람 개인이 아니라 누구의 아들이라는 것이 그 사람을 상징하는 수식어가 된다는 것은 그 인물이 끝내 아버지의 후광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 된다. 그만큼 김두한 신화에서 김좌진의 위치는 절대적이다. 아버지의 후광이 없었다면 김두한은 그저 뒷골목 깡패의 보스나 해방 뒤 백색테러의 행동대장의 하나로밖에는 기억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김좌진 장군과 쌍벽을 이룬 홍범도 장군의 아들을 기억하지 않는다. 이준 열사의 아들로 진짜 독립군 대장이 되어 중국대륙을 누빈 이용(李鏞) 장군을 기억하는 사람도 거의 없다. 이용 장군은 북에서 고위직을 지냈기 때문이다.
일부에서는 김두한이 정말로 김좌진 장군의 아들이 맞느냐는 의문을 제기한다. 호랑이에게서 어떻게 승냥이가 나오냐는 것이다. 그러나 김두한이 장군의 아들이 아니라는 확증 역시 어디에도 없다. 김좌진 장군의 부인 등 유족들이 김두한을 장군의 아들로 인정하고, 안동 김씨 일가들 역시 김두한을 높이 평가하지는 않지만, 일가로 받아들이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데 확증도 없이 김두한이 장군의 아들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다만 흥미 있는 것은 김두한이 자신의 이름으로 1963년에 간행된 회고록 <피로 물들인 건국전야>에서 김옥균을 자신의 양할아버지로 묘사하고 있는 대목이다. 김좌진이 김옥균의 양자로 들어갔다는 것이다.
김두한의 회고록을 바탕으로 박창규가 1965년에 간행한 <피로 물들인 민족사>에서는 김옥균을 김좌진의 백부라고 쓰고 있다. 김옥균과 김좌진은 모두 안동 김씨지만, 촌수로는 20촌이 넘는 그냥 같은 문중일 뿐이다. 갑신정변이 실패하고 김옥균이 일본으로 망명한 뒤 역적으로 몰리자, 안동 김씨 문중에서는 김옥균 항렬의 돌림자를 균(均)에서 규(圭)로 바꾸었는데, 김좌진의 아버지는 아마도 형균(衡均)에서 형규(衡圭)로 개명했을 것이다. 이런 사정을 고려해볼 때 김좌진이 김옥균의 양자로 들어갔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이야기다. 김두한이 정말 김좌진 장군의 아들이 맞느냐는 의심이 자꾸 제기되는 것도 따지고 보면 그의 회고록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진/ 김두한이 자신의 백색테러를 자랑한 <피로 물들인 건국전야>.
김두한이 본격적으로 항일영웅으로 묘사되기 시작한 것은 아마 1980년대 후반 홍성유가 김두한의 깡패 시절을 다룬 소설을 <조선일보>에 연재하면서부터가 아닐까 한다. 이 소설의 원제목은 <인생극장>이었는데, 뒤에 책으로 간행될 때 제목을 <장군의 아들 김두한>으로 달았고, 임권택 감독의 영화도 이 제목을 따서 붙인 것이다. <피로 물들인 건국전야>나 이 책을 토대로 박창규가 쓴 <피로 물들인 민족사>에는 <장군의 아들>에서 김두한과 세를 겨룬 일본인 깡패 조직 하야시 패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대신 고노에(近衛) 패와 일전을 겨룬 이야기가 나온다. 고노에 패와의 일전도 종로의 상권을 지키기 위한 민족적인 입장에서 이야기된 것이 아니라 그냥 깡패(협객)들 간의 싸움으로 묘사되어 있을 뿐이다.
1960년대의 김두한 신화에서 협객 부분은 강조되었지만, 이 협객이 항일협객은 아니었다. 김두한 패와 대결했다는 혼마찌(本町: 오늘날의 충무로)의 하야시 패 우두머리 하야시도 사실은 조선사람 선우영빈(해방 뒤에 건설협회 부회장을 지냈다고 한다)이었고, 그 부하들도 대부분 조선사람들이었다. 다만 그들은 일본인들과 좀더 유착되어 있을 뿐이었다. 김두한도 현재 중앙우체국 앞에 있는 자전거 영업소의 관리권을 하야시로부터 넘겨받는 조건으로 하야시 패에 통합되었다는 증언이 나오는 것을 보면, 김두한과 하야시의 관계는 <장군의 아들>류에서 그려지는 그런 대립적인 관계는 결코 아니었다. 하야시 패와 김두한 패가 한때 대립했다면 그것은 깡패들의 영역 싸움 때문이었지, 민족주의적 대립이라고는 할 수 없다.
처음엔 좌익진영에 가담
1960년대까지 김두한이 강조한 것은 자신의 항일이 아니라 반공이었다. <피로 물들인 건국전야>란 제목이 상징하듯이 김두한은 해방 직후의 좌우대립에서 우익 백색테러의 행동대장으로 맹활약했다. 백색테러란 말은 김두한의 책에서 아주 자랑스럽게 무수히 등장한다. 1968년에 간행된 <명인옥중기>에 실린 김두한의 회고록은 더욱 과장이 심하여 1945년 12월7일 좌익 계열의 국군준비대를 습격하여 죽창으로 가슴을 박아 일일이 죽음을 확인하고 건물에 넣고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질러 모두 1300여명을 일시에 화장했다고 자랑하고 있다. 박창규의 <피로 물들인 민족사>에서는 국군준비대 습격에서 10여명을 살해했다고 했는데, 몇년 사이에 전과가 100배로 늘어난 것이다. 그러나 민간인 학살이 한참 자행되던 한국전쟁 발발 이후면 모를까, 1945년 12월에 1300명은 고사하고 십수명의 학살도 있지도 않았고 있을 수도 없었다. 이 기록은 비록 허구이긴 하지만, 학살의 주역이 학살을 정당화한 거의 유일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김두한은 이때 사용한 무기는 해방 직후 3천여명의 대원들을 이끌고 용산의 일본군 사령부를 포위하여 빼앗은 무기 중 미군에 압수당하지 않은 것들이었다고 하지만, 우리 손으로 일본군을 무장해제시킬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으랴!
1945년 12월이라면 아직 좌우 간에 물리적인 충돌이 본격화되기 전이며, 김두한이 속한 대한민주청년동맹이 결성되기도 여러 달 전의 일이다. 이 시기 김두한은 아편을 밀매하다가 미군정에 단속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3개월가량 옥살이를 한 뒤 출옥하여, 우익이 아니라 좌익쪽에 가담하고 있었다. 이를 감추다 보니 해방 직후에 김일성이 특사를 보내 육군 소장에 남반부 인민군 사령관으로 임명하면서 금단추가 달린 군복을 보냈다는 황당한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다. 김두한은 일제강점기와 해방 직후에 최고의 인기를 누린 유명한 만담가 신불출(申不出)의 영향을 받아 좌익 계열의 조선청년전위대에 가담하여 활동하고 있었다. 이 조직에는 김두한과 과거 수표교 다리 밑에서 같이 거지생활을 했던 죽마고우 정진룡(丁鎭龍, 김두한 회고록에는 鄭鎭英으로 나온다)도 포함되어 있었다.
정진룡은 김두한과 같이 종로 패에 속해 있다가 부산으로 내려가 부산의 주먹 보스가 되었다가, 해방 이후에 서울로 올라가 하야시 패가 붕괴된 이후 무주공산이 된 명동의 주먹계를 장악한 인물이었다. 그런데 정진룡이 청계천을 건너 종로로 진출하여 5가와 6가를 장악하고 남진해오자 김두한은 위기의식을 느끼게 되었다. 특히 김두한 밑의 중간 보스들이 여럿 정진룡쪽으로 넘어가자 이 위기감은 가중될 수밖에 없었다. 이에 김두한은 조선청년전위대의 일방적인 해체를 선언하고 부하들을 이끌고 우익 청년단체쪽에 가담하게 된다. 대개의 회고담은 김두한이 처음 멋모르고 좌익에 가담했다가, 염동진(백의사 사령으로 맹인장군으로 알려진 수수께끼의 인물)이나 박용직(朴容直) 등으로부터 아버지인 김좌진 장군이 공산주의자에게 살해당했는데 네가 어떻게 공산당 노릇을 하느냐는 말을 듣고 설득당했다고 하지만, 김좌진 장군이 공산주의자에게 암살당한 사실은 일제강점기에도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일이었는데 그 아들인 김두한만 몰랐다는 것은 믿기지 않는다. 김두한이 좌익진영에서 우익으로 넘어간 것은 주먹 세계 내의 영역 다툼이 좌우익 대결로까지 비화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김두한이 가담한 우익청년단체는 대한민주청년동맹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해서 김두한 패가 가담함으로써 이 단체는 1946년 4월에 출범한 것이다. 이 단체의 명예회장은 이승만과 김구였고, 회장은 뒷날 박정희 시대 야당의 총재로 이른바 진산파동의 주역이 된 유진산(柳珍山)이었다. 이 단체의 총무부장 유우석(柳愚錫)은 유관순 열사의 오빠로 일제강점기에는 아나키스트였던 사람이고, 선전부장은 김두한에게 많은 영향을 준 박용직. 정보부장은 5·16군사반란 이후 장태화란 이름으로 서울신문사 사장을 지낸 장우극(張愚極) 등이었다. 김두한은 이 단체에서 감찰부장이 되었는데, 당시 청년단체의 감찰부는 백색테러의 행동대 역할을 수행하는 곳이었다. 김두한이 이끄는 대한민주청년동맹 별동대는 서북청년단 등 다른 우익청년단체들과 함께 좌익이 주도한 1946년의 9월총파업 등을 파괴하는 데 앞장섰다. 당시 파업은 합법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미군정 당국도 이를 막기가 어려웠는데, 우익 청년단체들을 오늘날의 구사대 격으로 동원해서 파업을 깨버린 것이다.
미군정 아래서 교수형을 받다
미군정 경찰의 강력한 후원을 받는 우익청년단체들은 특히 1946년 이후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그런데 권력과 주먹패가 본격적으로 야합하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지만, 그 단초는 이미 일제강점기에 열려 있었다. 일제는 조선인 청년들을 전쟁에 동원하는 과정에서 많은 청년들이 일본어도 모르고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해 조직생활을 해본 경험이 없어 군인이나 전쟁노무자로 동원하는 데 어려움이 있자, 이를 해결하기 위해 청년단이나 청년훈련소를 조직하여 조선인 청년들을 황국 청년으로 교육하는 데 주력했다. 김두한을 비롯한 주먹패들이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 반도의용청년단(또는 정신대)에 가담하게 된 것도 일제의 청년동원책의 하나였다. 이는 파시스트 권력이 뒷골목 세계에까지 일정한 공식성을 부여하며 체제내화한 것으로, 해방 뒤의 백색테러나 한국전쟁 전후의 민간인 학살 등과 같은 불행한 사건들의 씨앗은 이때부터 뿌려진 것이라 할 수 있다. 또 주먹계에서 두목을 단장님이라 부르는 1950년대의 관행도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백색테러의 주역으로 활동하던 김두한이 미군정에 의해 구속된 것은 1947년 4월의 일이다. 1년 이상 끌어온 명동패 정진룡과의 대립으로 골치를 앓던 김두한 패거리가 정진룡 일파 여러 명을 남산 기슭의 대한민주청년동맹 본부로 납치하여 고문하다가 그만 정진룡을 죽여버린 것이다. 이때 같이 잡혀온 사람 중의 하나가 탈출하여 미군정에 고발하는 바람에 김두한 등 10여명은 사체가 있는 현장에서 미군정에 의해 체포되었다. 당시 우익세력은 이 사건의 수사와 재판에 깊이 개입하여 김영태 등 3명만이 징역형을 받고, 책임자인 김두한과 많은 부하 10여명은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장택상 등은 분명 김두한을 비호하고 있었지만, 미군들은 극우파 청년단체들의 무법행동을 길들일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이 재판에 개입했다. 당시로서는 드물게 이 사건의 2심은 미군 군법회의로 넘어갔고, 이 때문에 이 사건을 재판한 심판관 3명이 외부 개입에 항의하여 사표를 제출하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재판은 1948년 1월에 속개되어, 김두한 등 14명이 교수형을, 2명이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하지는 관할관 확인과정에서 김두한 1인만 교수형으로 하고 종신형 4명, 30년 징역 9명, 20년 징역 2명으로 형을 확정했다. 김두한은 이때 자신이 오키나와의 미군형무소로 이감되어 옥중에서 흑인 주먹들을 상대로 일전을 벌였다고 무용담을 늘어놓고 있으나, 당시의 신문자료나 청년운동 관계 기록을 보면 김두한은 서대문형무소에서 이태원의 미군형무소로 이감되었다가 형확정 이후 대전형무소로 이감되어 정부 수립 직후인 1945년 9월이나 10월에 가석방된 것으로 보인다. 김두한은 회고록에서 여운형을 암살한 한지근에게 자신이 권총을 주었다고 하였으나, 여운형 암살이 일어난 1947년 7월은 김두한이 벌금형을 선고받았지만 풀려나지는 못한 상태였던 것으로 보이니, 이 또한 사실과 다른 암살 영웅담()이다.
이승만이 "사람 좀 그만 죽이게"
정부 수립 이후 이승만은 난립한 우익청년단체들을 하나로 통합하여 1948년 12월19일에 대한청년단을 조직했다. 민족청년단의 합류 문제로 난항을 겪다가 해가 바뀌어 발표된 대한청년단의 간부 명단을 보면 김두한은 뒤에 국민방위군 사령관이 되어 국민방위군 사건으로 사형을 당한 김윤근(金潤根) 감찰국장 밑에서 부국장이 되었고, 그 밑의 감찰부장에는 1950년대 중반까지 명동을 장악한 이화룡(李華龍)이 임명되었다. 얼마 뒤 김두한은 건설국장으로 승진했는데, 1949년 6월17일 다시 불법감금·공갈 등의 혐의로 구속되었다. 김두한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1948년 자신이 석방된 뒤 이승만을 만나러 갔을 때 이승만이 금일봉만 주고 다른 일정이 있다고 나가면서 “사람 좀 그만 죽이게”라고 말해 섭섭한 생각을 갖게 되었다고 썼는데, 이승만이 김두한을 불러 만났다는 것도 확실하지는 않으나, 어쨌든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논공행상에서 배제된 채 다시 옥살이를 하게 된 김두한이 이승만에 대해 불만을 갖게 된 것은 분명하다.
한국전쟁 시기의 김두한은 그 행적이 다소 불분명하다. 자신의 회고록에는 학도의용군 총사령관으로 영천·포항 등지에서 싸웠다고 한다. 김두한이 김윤근을 따라 국민방위군 지도부로 갔다면, 그도 방위군 사건의 책임을 지고 잘못되었을 가능성이 높지만, 다행히 그는 1949년 사건으로 투옥된 경력 때문인지 방위군으로 가지는 않았다. 이 시기 김두한은 대한노총의 감찰책임위원을 거쳐 1954년 4월에는 모두 3인인 최고위원의 한 사람이 된다. 그 자신 한번도 정당한 노동을 해보지 않았고, 해방 이후에는 노동운동 파괴에 앞장섰던 인물이 대한노총의 최고위원이 된 것이다.
김두한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자유당 중앙위원이기도 했던 그는 자유당의 공천을 바랐으나 여의치 않자 무소속으로 출마를 강행한다. 이에 자유당은 그를 반당행위를 이유로 제명했다. 자유당의 탄압에도 김두한은 종로 을구에서 대법관 출신의 변호사 한근조, 여운형의 동생 여운홍 등 중앙정계의 거물들을 물리치고 당선되었다. 이때 김두한은 종로 유흥업소 아가씨들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는데, 차점자인 한근조와 채 500표도 차이가 나지 않은 것을 보면, 김두한이 아가씨들 덕에 당선되었다는 말은 헛된 것이 아니다.
김두한은 국회의원이 되었지만, 자유당은 그를 선거법 위반에다 살인혐의까지 씌워 구속해버렸다. 이 와중에 김두한은 김두한은 자유당에 다시 입당하게 된다. 이승만의 종신집권을 위해 개헌을 꿈꾸던 자유당으로서는 개헌선에 한참 모자라는 의원 수를 메우기 위해 밉지만 할 수 없이 김두한을 다시 모셔간 것이다. 그러나 김두한은 자유당의 개헌에 끝끝내 반대했고, 1표 차로 부결된 개헌안이 사사오입 파동을 거쳐 가결된 것으로 선포되자 다시 자유당에서 나왔다.
사진/ 57년 야당의 장충단 집회를 이정재의 부하들이 습격한 장충단 공원사건에서 김두한은 정치깡패로부터 야당의원들을 보호하기도 했다. 오른쪽 맨 위 얼굴만 나온 김두한의 모습이 보인다.
국회의원으로서의 김두한은 뉴스 메이커이자 트러블 메이커였다. 정책 입안 같은 것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김두한은 그래도 자유당 시절 국회에서 이승만을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의 두목으로 몰아붙인 유일한 인물이었다. 그가 이 발언을 한 것은 야당 부통령으로 이승만을 비판한 김성수를 자유당 의원이 친일파라고 비판한 것에 대해 반발했기 때문이다. 이런 인연이 있으니 드라마 <야인시대>가 많은 비판에도 불구하고 김성수를 독립운동가로 그리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김두한이 이승만을 친일파 두목으로 비판한 것이 말인즉 옳은 것이라 하더라도, 정작 이승만이 두목의 자리에 오를 수 있도록 온갖 파괴공작을 일삼은 자신의 행동을 비판하지 않은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어쨌든 김두한은 이승만을 비판한 사건으로 과거의 부하였던 이정재로부터 의원휴게실에서 협박을 당하게 된다. 이 사건은 이정재가 과거의 보스 김두한에게 공공연히 도전한 첫 사건이다. 이후 이정재는 자유당 창당동지회 창립대회 사건, 그리고 1957년 20여만명의 시민 앞에서 거행된 야당의 장충단 집회를 부하들을 동원하여 습격한 장충단공원 사건에서 다시 김두한과 격돌했다. 이 두 집회의 경비책임자가 김두한이었기 때문이다.
조봉암의 진보당에도 몸담다
김두한의 정치행적에서 또 하나 특이한 경력은 그가 한달이라는 짧은 기간이긴 하지만 조봉암의 진보당에 몸담았다는 것이다. 김두한이 한달 만에 탈당성명을 냈을 때 진보당에서는 “정식으로 입당원서를 쓴 바 없으니 탈당이라고 할 것까지도 없다”라고 논평했다.
김두한은 1958년 4대의원 선거에서는 낙선했다. 정당정치가 뿌리내려가는 마당에 노농당이라는 군소정당 간판을 달고 나온 김두한이 서울을 석권하다시피 한 민주당 돌풍을 견뎌내지 못하고 한근조에게 더블 스코어로 패한 것이다. 선거가 끝나자마자 김두한은 다시 선거법 위반으로 체포되었다. 이때 서대문을 선거구의 이기붕을 이천으로 몰아내었으나 낙선한 민주당의 김산도 같이 구속되었는데, 김두한은 자신이야 감옥을 별장같이 드나들지만, 연로한 김산이 걱정이라는 여유를 부리기도 했다.
4월혁명 이후 실시된 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김두한은 이번에는 종로을을 피해 아버지의 고향인 충남 홍성에서 출마했다. 당시 홍성에는 가뭄이 들었는데 김두한이 기우제를 지내니 비가 왔다고 해서 화제가 되기도 했으나 김두한은 10명이 겨룬 선거에서 1등과 700여표 차이로 낙선하고 말았다. 김두한이 다시 국회에 진출한 것은 6대 때였다. 그러나 총선거 때가 아니고 야당의원 중 강경파가 한일회담에 반대하여 사퇴한 뒤 이루어진 보궐선거 때였다. 이때 김두한은 한국독립당의 간판으로 나와 용산에서 당선되었는데, 3대 때와 마찬가지로 당선되자마자 한국독립당 내란음모사건으로 인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또다시 구속되고 만다. 이 사건은 김두한이 김종필과 가까워지자, 그를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실제로 <피로 물들인 민족사>에서는 김종필을 김옥균에 비유하면서 김종필은 우리 역사에서 500년에 한번 나오는 인물이라면서 그를 돕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하겠다고 생각하기까지 했다고 쓰고 있다.
김두한은 보궐선거로 당선된 뒤 몇번 등원도 못하고 구속된 것에 대한 동정여론이 일어 국회에서 석방동의안이 통과되어 석방되었고, 국가보안법 사건으로는 드물게 1966년 5월 1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았다. 그리고 그해 9월22일 김두한은 헌정사상 초유의 사건을 일으키며 정치생활을 마감하게 된다. 삼성재벌의 이병철은 5·16군사반란 뒤 부정축재자로 몰려 처벌대상이 되었으나, 박정희 정권의 방침이 바뀌어 풀려났을 뿐 아니라, 막대한 상업차관을 바탕으로 한국비료를 인수하였다. 그런데 한국비료가 공장건축자재를 수입한다면서 금수품목인 사카린을 밀수한 것이다. 일반인들은 양담배 한 개비만 피워도 경찰서에 끌려가 곤욕을 치르던 시절에 당대 최대재벌의 밀수가 밝혀지자 여론은 벌집을 쑤신 듯했다. 더구나 이렇게 밀수로 번 돈이 공화당의 정치자금으로 흘러들어간다는 의혹이 불거져 국회는 연일 이 문제를 놓고 논란이 벌어지고 있었다. 야당의 김대중 의원이나 여당의 권오석 의원 등도 당사자들을 광화문 네거리에서 극형에 처해야 한다는 여론을 전하며 열변을 토했다.
오전회의에서 당시 국회부의장으로 사회를 보던 이상철이 김두한의 발언 순서에 불리하게 사회를 보자 김두한은 머리를 가리키며 “당신 이거 한번 부서지는 것을 보려고 그래요” 하고 험악하게 몰아붙였다. 그리고는 “그 따위로 당신 하면 좋지 않아! 노인이니까 그냥 두지 장 부의장(장경순)같이 유도깨나 쓰면 날릴 테야!” 하고 소리쳤다. 김대중 의원의 날카로운 질의에 이어 마침내 발언권을 얻은 김두한은 자신은 “말을 할 줄 모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할 줄 모르는 행동을 할 수 있다”고 운을 뗀 뒤 별장 같은 감옥에 이미 40여회 들락날락했는데 “또 들어갈 심정”이라며 자신의 반공투쟁에 대해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이상철 부의장이 시간이 없으니 본론만 말하라고 하자 김두한은 국회에 출석해 있는 국무총리와 장관들을 하나의 피고로 다루겠다고 말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의석에는 웃음소리가 터져나오고 있었다. 김두한은 가지고 온 종이라 싼 상자를 들어보이며 이 내각을 규탄하는 국민의 사카린이라며 “이 내각은 고루고루 맛을 보여야 알지, 똥이나 처먹어 이 개새끼들아!” 하고 외치며 국무위원석을 향해 똥물을 끼얹었다.
김대중 의원 발언 뒤에 똥물을 뿌리다
공화당 정권은 이 사건을 가지고 밀수사건으로 궁지에 몰린 처지를 역전시키려고 강공을 퍼부었다. 그러나 시정의 여론은 김두한을 옹호했다. 똥을 뿌린 것이야 잘한 것은 아니지만, 통쾌하기 짝이 없다는 반응이 만만치 않았다. 더구나 민중당과 선명성 경쟁을 벌이던 신한당도 김두한을 두둔하고 나오자 민중당도 태도를 바꿔 김두한을 옹호하기도 했다. 김두한에 대해서는 의장(議場) 모독으로 징계안이 제출되었지만, 김두한이 의원직을 사퇴함에 따라 징계안이 처리되지는 않았다. 1년이라는 짧은 기간의 6대의원직을 사퇴한 김두한은 구치소로 직행했다. 김두한은 재판 중에 울먹이며 부친의 훈장을 반납하겠다고 하기도 하고 자해를 시도하는 등 옥중에서도 끊임없이 뉴스를 만들다가 3개월여 만인 1966년 12월22일 병보석으로 출감했다. 그 뒤 김두한은 광산업에 손을 댔다가 실패하고, 폭력, 반공법 등으로 두어 차례 더 옥문을 드나들다가 1972년 11월21일 갑작스러운 뇌출혈로 55살의 한창 나이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김두한의 생애는 거품을 벗겨낸다 하더라도 참으로 파란만장했다. 그는 우리 역사에서 참으로 악역을 많이 맡았지만, 분명히 그 어딘가 미워할 수 없는 구석이 있다. 5년여의 의원생활 중 그만큼 당적을 많이 옮긴 사람도 적지만, 아무도 그를 철새라 하지 않는다. 그는 살인과 폭력을 일삼기도 했지만, 때로는 군화에 가죽장갑을 낀 모습으로 나타나 정치깡패들로부터 야당의원들을 보호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 자신이 정한 법에 따라 불의를 응징했다. 나름대로 자기 입장을 갖기 위해 열심히 살았지만, 그는 주변의 모사들에 의해 이용되는 경우가 많았고, 끝내 자신의 이름보다 장군의 아들이란 아버지의 후광 속에 들어가야만 빛을 발하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 역사에 만일이란 없지만, 그의 활동무대가 종로가 아니라 아버지처럼 만주벌이었다면 그 역시 장군이 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