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름 누아르라는 장르는 1940년대 말, 프랑스의 젊은 평론가들이 미국의 B급 액션 스릴러 중에서 특정한 경향을 발견하고 붙인 이름입니다. 비장미 넘치는 주인공들은 자신의 내적 불완전함에 의해, 혹은 숙명적 이끌림에 의해 파멸을 맞습니다. 주인공을 파멸로 이끄는 매혹적인 여인이 등장합니다. 팜므 파탈이죠. 산업사회 대도시 뒷골목을 배경으로 범죄세계와 연결되며 펼쳐지는 이야기들은, 그 불안한 정서 때문에 미묘한 흡인력을 발휘했습니다. 1980년대 후반부터 홍콩의 중국반환을 앞두고 불안한 홍콩인들의 심리가 반영된 영화들이 어떤 특정한 경향을 띄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을 홍콩누아르라고 부르기도 했지요. 그렇자면 한국형 누아르 영화는 어떤 것이 있을까?
한국 누아르 필름이 존재했는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아직 장르가 형성되지 않았다는 의견도 있고 [달콤한 인생]이야말로 최초의 한국 누아르 영화라는 주장도 있다. 나는 1995년 개봉된 장현수 감독의 [게임의 법칙]이 한국 누아르 필름의 원조라고 생각한다. [미드나잇 카우보이]에 강력한 영향을 받은 이 영화에는 사실상 누아르 영화의 모든 공식이 다 들어 있다.
신분상승의 욕망에 이끌려 지방 세차장에서 일하는 용대는 서울로 상경해서 조폭 세계로 들어간다. 그리고 조직의 인정을 받기 위해 물불 가리지 않고 앞장서서 사건에 뛰어든다. 그는 조직의 밀명을 받고 조직을 파헤치려는 검사를 살해하지만, 그 자신 역시 조직의 배신으로 비참하게 죽어간다. 평생 꿈이었던, 사랑하는 사람과, 친구와 함께 따뜻한 남쪽나라 사이판으로 떠나기 직전에 공중전화 박스에서 살해된다. 이 마지막 장면은 조금씩 변주되며 [초록물고기]나 [깡패수업] 혹은 [친구] 등으로 연결된다.
[달콤한 인생]은 최근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던 본격적인 한국 누아르 필름이다. 그러나 독창적 개성이 강한 김지운 감독은 기존의 장르적 공식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색깔을 만들기 위해 비장미 넘치는 씬 사이로 독특한 유머 감각을 끼워 넣고 있다. 이것이 [달콤한 인생]의 가장 큰 외형적 특징이다.
자신의 비극적 운명을 이해하면서 혹은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멈추지 않고, 아니 멈출 수 없이, 종말을 향하여 다가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언제나 우리를 매혹시킨다. 돌이킬 수 없는 삶의 일회성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필름 누아르 장르는 비장미로 가득 차 있다. 대부분 도시의 뒷골목을 무대로 음습한 범죄의 세계와 연결고리를 갖고 펼쳐지는 이 장르의 매혹은, 우리들의 삶 역시 저 주인공들처럼 결점 많은 삶을 살아왔다는 것을 선명하게 확인시켜주는 데서 발생한다. 시행착오가 없다면, 그러한 비극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결국 누구나 갖고 있는 인간적 결함이야말로 누아르 영화의 숨은 매혹의 근원이며 비장미 넘치는 이야기가 보편적 공감대를 갖고 확산되는 데 기여하는 핵심 요인이다.
김지운 감독의 [달콤한 인생]은 필름 누아르라는 장르적 공식 아래서, [조용한 가족]이나 [반칙왕] 혹은 [장화, 홍련]이 그랬던 것처럼 장르적 공식을 벗어나려는 감독의 욕망과 처절하게 싸우고 있다. 강사장은 자신의 애인 희수가 젊은 남자를 만나는 것을 알고 심복인 희수에게 처치하라는 명령을 내리지만 선우는 그들을 놓아준다. 왜 그는 평소의 냉정함을 잃고 그답지 않게 흔들렸을까? 이 의문이야말로 영화의 핵심을 관통하는 화두다.
[달콤한 인생]은 누아르 장르의 공식을 따라 전개되는 것처럼 보인다. 주인공을 파멸로 인도하는 팜므 파탈이 있다. 자신의 비극적 운명을 예감하면서도 질주하는 차에서 내리지 못하고 달려가는 남자가 있다. 결국 그는 비장미 넘치는 최후를 맞는다. 그러나 팜므 파탈은 우리가 흔히 만날 수 있는 전형적 요부라기 보다는 순수하고 지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는 방송국 관현악단의 첼리스트다. 선우는 팜므 파탈에 적극적 유혹에 의해 파멸에 이르는 게 아니라 내부의 결함으로 파멸과 맞부딪친다.
손목이 잘린 선우는 피의 복수를 하기 위해 강사장의 호텔로 찾아가 총을 난사하면서 세면대 앞의 거울을 보고 스스로 묻는다. [왜 이렇게 된거지?] 마지막 강사장과 대면한 그는, [말해봐요, 저한테 왜그랬어요?]라고 묻는다. 7년동안 친자식처럼 강사장 밑에서 신임을 받으며 일하던 그는 한 순간의 실수로 조직 전체를 향해 복수의 총을 들이댄다. 그러면서 강사장을 향해, 아니 스스로에게 묻는다. [우리 어떻게 하다 이렇게 된거죠?]
그렇다. 선우가 갖는 의문은 결국 자신의 존재에 대한 근원적 질문에 다름아니다. 스스로 이해할 수 없는 삶,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자신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전개되는 삶, 그것이 결국 자신의 삶을 파멸로 이끈 것이다. 차갑고 냉정한 판단으로 조직의 신임을 받던 그였지만, 어느 한 순간 자신의 일생을 뒤흔드는 힘이 찾아온 것이다. 누아르의 매혹은 바로 여기에 있다. 강사장은 선우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다시 이렇게 묻는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흔들린 거야?]
그들은 모두 의문을 갖고 있다. 확실한 것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들 자신도 모른다. 영화는 명확하게 선우의 마음을 보여주지 않는다. 물론 단서는 있다. 첼로를 연주할 때 스튜디오에서 그것을 바라보는 선우의 표정, 강사장이 선물한 촌스러운 전등 대신 희수가 갖고 싶어했던 장식등을 구입하는 선우의 행동으로 우리는 그의 마음을 짐작은 할 수 있다. 그러나 충분치 않다. 인생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들이 설명 가능한 것은 아니다. 호텔 스카이라운지의 화려한 바에 근무하던 선우가는 지하 룸살롱의 음습한 공간으로 추락한다. 그러나 그가 최후를 맞이하는 공간은 다시 스카이 라운지이다. 비극은 높은 곳에서 발생한다. 신분의, 계층의, 권력의 정점 어느 순간에도 무서운 함정은 도사리고 있다. [달톰한 인생]은 그 위험한 삶의 본질을 극단적 내러티브로 드러낸다.
그러나 [달콤한 인생]에는 비장미가 부족하다. 전체적으로는 누아르 영화가 제공하는 비극적 공식을 따라가고 있지만, 어느 순간 긴장은 풀어지고 우리는 무장해제된다. 우선 주인공 이병헌의 목소리는 하이톤이다. 누아르 영화의 주인공으로서는 지나치게 목소리의 톤이 맑고 높은 것이다. 또 결정적 순간에 등장하는 희극적 요소는 전체적으로 이 영화를 가볍게 만든다. 비장미로 가득차서 장중한 무게로 가슴을 짓누르는게 아니라, 상황은 비극적인데 우리는 상황의 엇갈림 때문에 어처구니 없게 웃게 된다. 영화를 재미있게 하고 무거운 분위기를 탈색시키기는 하겠지만, 그러나 꽉 짜여진 비장미는 부족해질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