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淸平調詞 청평조사(淸平調詞)는 한대악부(漢代樂府)의 제목중 하나다.
여기서 말한 청평조사는 이백(李白)이 청평조(淸平調)의 곡조에 맞추어 지은 가사체((歌詞體)로서 양귀비(楊貴妃)를 노래한 시다. △화청지(華淸池)
이백(701-762) 字 太白 호 靑蓮居士 唐人 AD 743년 봄 침향정(沈香亭)에 모란이 피어 있는 어느 날이었다. 당(唐) 현종(玄宗)이 양귀비와 함께 꽃놀이를 하고 있었다. 그 자리에는 명창(名唱) 이귀연(李龜年)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황제폐하 소신은 주중시선이니 술을 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자겠소이다." 술을 주지 앉자 이백은 벌러덩 황제 앞에 들어누워 버렸다. 신하들이깜짝 놀라 부등켜 안고 일으켜 세웠다. 이백은 내시(宦官) 장인 고역사(高力士)에게 말을 돌렸다. "고역사 내 버선 좀 벗갸줘..." 고역사는 황제 앞인지라 굴욕을 참고 버선을 벗겨 주었다. 이백은 다시 양귀비에게 말길을 돌렸다. "황후마마 먹물을 갈아주시면 백골이 난망이겠습니다." 이백은 몸을 가누고 붓을 들어 청평조사 삼 수(三首)를 짓게 되었다.
이 시는 양귀비를 예찬한 노래였다.. 양귀비는 중국 4대 미인 중의 하나다. 양귀비를 수화(羞花)라고 도 한다. 모란꽃도 양귀비를 보고 부끄러워 고개를 떨구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래서 수화 양귀비라 한다. 기련(起聯)부터 양귀비를 찬양하고 있다. 雲想衣裳花想容 양귀비의 의상은 구름 같이 날렵하고 용모는 모란꽃처럼 화사하다고 했다. 양귀비는 모란꽃 같이 풍만한 여인이었다.
양귀비를 무산의 선녀와 한나라 세류미녀(細柳美女) 조비연과 대비시키고 있다. 양귀비가 있는데 괜스래 무산선녀를 찾았다. 조비연이 화장읗 하고 온다해도 양귀비의 아름다움을 따라갈 지 모른다고 했다. 조비연이 중국 4대 미녀는 안 들어가지만 어지간히 예뻤던 것 같다. 조비연을 두고 읊은 시도 있다. 水色簾前流玉霜(수색염전류옥산) 물빛 같은 주렴 앞에 옥구슬 흘러내려 趙家飛燕侍昭陽(조가비연시소양) 조비연은 소양궁에서 황제 모시네 掌中舞罷簫聲絶(장중무파소성절) 장중무 파하고 피리소리 끊기니 당(唐)나라 시인 서응작(徐凝作)의 [한궁곡(漢宮曲)]이다. 그런가 하면 조비연과 양귀비를 비교하는 성어도 았다. 연수환비(燕瘦環肥 )다. [燕: 제비연 瘦: 여윌 수. 環: 옥 환. 肥: 살찔 비] 燕은 조비연, 環은 양귀비를 말한다. 양귀비의 본명은 양옥환(楊玉環)이고 귀비(貴妃)는 관직이다. 조선조 같으면 내명부 직첩(職牒)에 해당한다. 燕瘦環肥란 조비연은 날씬하고 양귀비는 통통하단 뜻이다. 중국 사람들은 넓고 큰 항주(杭州)의 서호(西湖)를 양귀비에 가늘고 긴 양주(楊州)의 서호(西湖)를 조비연에 비유한다고 한다. 호수 모습이 두 여인의 몸매와 흡사하기 때문이란다. △양귀비가 목욕을 끝내고 나오는 동상 조비연(趙飛燕)을 임풍양류(臨風楊柳)라 하고 양귀비(楊貴妃)를 부귀모란(富貴牡丹)이라 한다. 조비연은 바람에 날리는 버드나무 같이 날씬한 형이고 양귀비는 부귀의 상징인 모란 같이 풍만형이다. 한 말로 말해 복스러운 형이다. 우리나라도 한때는 얼굴이 달덩이처럼 둥글넓쩍하고 입술은 앵두 같고 콧날은 날카로워야 미인이라 했다. 못 멋고 살던 시절 부자집 맏며느리마냥 오동통한 여인이 대표적인 미인으로 선호됐다. 비단 우리만 그랬던 것도 아니다. 서양도 르네상스시절 모나리자나 말로의 비너스 그림도 양귀비 전형이다. 중국도 풍만한 글래머가 각광을 받은 것만은 아니었다. 한나라 이전까지는 날씬한 여인이 대접을 받았다. 춘추전국시대 초나라 양왕(襄王)은 세요(細腰)를 좋아 했다. 세요란 허리가 가는 여인을 말한다. 이 때문에 궁중 여인들 사이에서는 다이어트에 나섰고 급기야 굶어 죽는 사람이생기었다는 기록도 있다. 수당(脩唐)시대는 양귀비형 주목을 받았다. 당시로는 양귀비가 대표적인 미인이었다. 현종이 영귀비에 빠져 다른 여인들 한테는 눈길을 주지 않자 매비(梅妃)라는 후궁은 양귀비를 비비(肥婢)라고 비꼬기도 했다. 원 뜻은 살찐 계집종이란 말지만 '뚱땡이 또는 메주댕이"라고 한 것이다. 명청(明靑)시기에 이르면 상황이 변한다. 상업과 풍류와 예술로 넘처났던 양주(楊州)의 미인을 양주수마(楊州瘦馬)라고한다. 수마란 수척하고 마른 말(馬)이란 뜻이다. 날씬하여 잘 달린 말(馬)이다. 양주의 미녀들이란 몸매가 수양버들처럼 한들한들 늘어져야 대접받았단 말(言)이다. 이걸 일러 세류미녀(細柳美女)라 한다. 수양버들 가지처럼 가늘고 나긋나긋 해야한다. 세요(細腰)다. 초(楚)나라 양양(襄王)의 현상이다. 그래서 초요현상(楚腰現像)이라 한다.
인심이란 조석변이라 했던가? 이백이 청평조사 세 수를 일필휘지로 써 받치자 눈쌀을 찌프렸던 현종이나 양귀비 입이 귀까지 찢어질 정도로 만면의 희색이었다. 언짢았던 감정도 언제 그랬냐 듯이 스르르 풀리었다. 황제께 술을 앙탈했던 것이나 양귀비에게 먹을 갈라 헸던 실언도 춘삼월 봄눈 녹 듯 녹아 내렸다. 그야말로 解釋春風無限恨이다. 시에서는 春風은 양귀비가 되겠지만 여기서는 이백의 청평조사가 되겠다. 이백의 술주정으로 찌프려젔던 감정이 해묵은 찌거기까지도 모두 눈 녹 듯 스르르 녹아 내려버렸다. 모두들 이태백, 이태백, 환호성에 침향정에 울려 퍼졌다. 침향정 모란꽃 잔치는 성황리에 끝을 맺었다. 호사다마라 했다. 환관 수장 고역사(高力士)였다. 이백의 버선 벗겼던 일이 자존심이 풀리지 않았다. 고역사는 당시 현종의 두터운 신임을 등에 엎고 나는 새도 떨어뜨릴 만한 막강한 세도가였다. 그가 모사를 꾸몄다. 둘쨋수 끝구절이다. 可憐飛燕倚新粧 비연을 들고 나왔다. 양귀비를 찾아가 이백을 헐뜯었다. 조비연은 보잘 것 없는 집안 출신인데 고매한 황후께 감히 견주었고 백성들의 애정 행각을 운우(雲雨)라 하는데 무엄하게 황제와 황후 높은 금슬을 펌하했으니 이건 능멸이라고 몰아붙였다. 양귀비도 듣고 보니 그럴싸 했다. 감언 이설에 넘어 갔다. 결국 현종을 졸라 이백을 퇴궐시켰다. 청평조사는 이백의 인생길이 뒤바뀌는 단초(端初)가 되었다. 처음에는 좋았다가 나중에 뜻하지 않은 일을 당했으니 이런 낭패가 어디 있겠는가. 같은 일도 보기에 따라 앞뒤가 뒤바뀐다.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거리. 이현령(耳懸鈴) 비현령(鼻懸鈴)이다. 녹비(鹿皮)에 가로왈 자(曰字)다. 사슴 가죽에 日자를 써놓고 가로로 잡아당기면 '가로왈 자'가 되고 세로로 잡아당기면 '날일 자'가 된다. 이래서 인생을 새옹지마(塞翁之馬)라 하나보다. 이게 인생사다. 역사를 알아야 한다는 당위성이 바로 여기에 있다. 역사에는 지난 일을 거울 삼아 우리가 살아 나가야 할 반면교사(反面敎師)의 가르침이 있다. 선현들의 성패(成敗)를 더듬어 보면서 앞길을 모색해 보는 것도 공연한 시간 낭비가 아닌가 싶다.
당(唐)나라 화청궁의 온천지이다. 관중 여산 서북 기슭에 있는 온천지로서 진시황 때 돌을 깎아 집을 만들어 명신(名神)들의 온천지가 되었다고 한다. 당 천보원년(742) 현종은 못을 만들어 대대적으로 보수하였다. 못이 화청궁안에 있기 때문에 화청지라고 명명하였다. |
첫댓글 어찌하여 운우지정 이라 하느가 했더니 그런유래가 있었군요.
덕분에 유식해 집니다
귀한글 감사 합니다
찾아주신두 분께 감사말씀 드립니다. -산여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