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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때에는 이건창이 암행어사로 내려와 덕천군 사우 보수와 운영에 도움을 주었고, 일제강점기에 서울과 공주에 거주하는 종인들이 합심하여 재실(齋室)을 건축하였으며, 1960년에 대대적으로 사우를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덕천군 묘 written by 한국의 능원묘 |
▲ 정조의 서10자인 덕천군(德泉君) 사우 및 묘역 입구 전경 |
덕천군 사우(충남 문화재자료 61호) |
▲ 마을 입구에 홍살문이 세워져 있고 사우 앞에는 넓은 공간이 있습니다. |
고종 때에는 이건창이 암행어사로 내려와 덕천군 사우 보수와 운영에 도움을 주었고, 일제강점기에 서울과 공주에 거주하는 종인들이 합심하여 재실(齋室)을 건축하였으며, 1960년에 대대적으로 사우를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
▲ 덕천군 사우 전경 및 안내도 |
덕천군 사우와 관련된 유적으로는 묘소와 신도비가 있다. 덕천군 묘는 본래 남한산성의 서문 밖인 경기도 광주군 중대면 거여리에 있었는데, 이 지역이 군용지로 편입되면서 1974년 덕천군 사우가 있는 공주군 의당면 태산리로 이장하고 석물도 그대로 옮겨 세웠다. |
▲ 덕천군 사우는 입구가 잠겨 있어서 내부는 둘러보지 못하고 묘역을 오르면서 바라 본 사당 모습입니다. |
덕천군의 신도비와 묘비 등도 이때 옮겼다. 덕천군 신도비는 1808년(순조 8)에 건립된 것으로 10세손인 이광사가 짓고 썼다. 신도비는 높이 250㎝, 폭 77㎝, 두께 45㎝이다. |
▲ 사우와 묘역 우측에 최근에 건립한 사당 비슷한 건물이 있는데, 유물전시관으로 사용하려고 지었다고 합니다. |
덕천군 사우는 산의 중턱에 3단의 층대를 쌓고 서남향으로 대지를 조성, 여기에 삼문과 담장을 시설하고, 사우를 배치하였다. 사우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맛배집으로 뒤칸에는 제단을 설치하였고, 앞칸에는 참배 공간을 둔 전형적인 사당 건물이다. |
▲ 신도비 앞에서 내려다 본 덕천군 사우(사당) 및 마을 전경 |
덕천군(德泉君, 1397[태조 6]-1465[세조 11])의 휘는 후생(厚生)이고 시호는 적덕(積德)이다. 정종대왕의 10남이며 모후는 성빈 충주지씨이다. 일찍이 성빈이 흰 기린 꿈을 꾸고 공을 낳았으며, 선천적으로 효도롭고 우애로웠으며 인후함이 과인하여 진귀한 음식이 생기면 반드시 형제들과 나누곤 하였다. |
▲ 묘역 입구의 신도비각 안에 신도비가 있습니다. |
그래서 임금은 특별히 사랑하여 후(厚)자로 이름을 지었다. 7세에 정성(定省)의 예절을 다하였고, 천성이 문묵을 좋아하였으며 벼슬을 좋아하지 않았다. 처음에 수(守)를 배수(拜受)하였는데 종친들의 사회(射會)에 나아가 1등을 하였고 종학(宗學)에 가서도 성적이 가장 우수하였다. |
▲ 묘역 하단에 단풍 한 그루가 하도 빨개서 한 장 찍어 보았습니다. |
따라서 후에 봉군(封君)할 때 태종대왕은 ꡒ아무개는 인덕이 출천(出天)하고 모후가 지씨이니 연못에는 맑은 샘물이 있고 샘물에는 물이 마르지 않아 그 물이 곧 복의 물이다. 그러니 `덕천(德泉)'으로 군호(君號)를 지으라하고 `덕천군'이라고 석자를 써 주었다. |
▲ 정조의 서10자인 덕천군(德泉君) 묘역 전경 |
태종대왕 때 공이 총관으로 임금을 모시고 조회에 참석하였다가 퇴근하려 할 때였다. 임금이 명하기를 모빈(某嬪)의 아들 첫 돌이라 간단한 잔치를 베풀려고 하니 음식을 들고 가라하므로 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임금이 공을 곁에 앉게 하고 수저를 들었는데 갑자기 상을 물리치면서 음식에 벌레가 있다라고 호령을 하며 진노하였다. 그리하여 음식 만든 자를 처벌하라고 하니 궁녀 30명과 음식을 올린 사람 40명이 처벌을 받게 되었다. |
▲ 전방 좌우측에서 바라 본 덕천군 묘역 |
이때 누구도 아무런 말도 못하고 있는데 공이 홀로 계단으로 내려가 엎드려 울며 말하기를 신이 자세히 보니 그 벌레는 곡식의 벌레로서 독물이 아니오니 인명에는 해롭지 않습니다. 그들을 살려주십시오라고 하였다. 그렇게 공이 간청하였으므로 임금은 그 말을 받아들여 그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었다. |
▲ 덕천군과 군부인 장수이씨 합장 묘 |
공은 항상 검약하고 사치를 멀리하여서 봉록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주었으며,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라도 어려운 일을 당하면 도와주곤 하였다. 공이 일찍이 누이 덕천옹주(德川翁主) 댁에서 누이의 병을 간호할 때에 10여 명의 도둑이 담을 넘어 들어와 곳간을 뒤지다가 창고지기에게 붙잡히게 되었다. |
▲ 봉분 좌우로 덕천군과 군부인 장수이씨 옛 묘비가 있으며, 근래에 세운 묘비는 봉분 중앙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
공은 그때 도적들을 불러 상세한 연유를 물어보고 필요한 만큼 돈을 꾸어주었다. 공은 비록 귀한 왕자의 몸으로 태어났으나 농사에도 힘을 써서 공주에 전장(田莊)을 두고 때때로 내려가 몸소 노동 일을 하였다. 어느 해 여름에 장마가 져서 금강이 넘쳐 수백호가 떠내려가 남녀 수백명의 이재민이 생겼다. 공은 가산을 털어 이재 민을 구제하니 이때부터 공을 `적덕공(積德公)'이라 하게 되었다. |
▲ 덕천군 묘역 우측에서 바라 본 모습 |
공은 1397년(태조 6)에 태어나서 1465년(세조 11) 11월 10일 별세하였으며 경기도 광주군의 남한산성 서문 밖에 장례지냈다. 묘역이 일제시대에 군용지로 편입되어 부득이 1974년 8월 9일 충남 공주시 의당면 태산리 문중묘역 역내로 면봉하였다. 1872년(고종 9)에 광록대부 영종정경에 추증되었다. - 덕천군 후손 카페 자료 발췌 - |
▲ 덕천군 묘역 뒤에서 내려다 본 모습 |
덕천군 묘역 위치도 |
지도 중앙의 A 부분이 사당이고, 우측 상단의 묘지가 덕천군 묘역입니다. 소재지 : 충남 공주시 의당면 태산리 101 |
지도 우측 상단의 A 부분에 덕천군 묘역이 있습니다. 지도 하단의 공주IC와 동공주IC를 기준으로 위치를 가늠하시기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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