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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허선사鏡虛禪師의 선화(禪話) 24가지
1
경허가 천장사에 있을 때의 일이다.
어느 여름밤 제자 만공이 큰 방에 볼 일이 있어 경허가 누워 계시는 앞으로 불을 들고 지나가다 얼결에 보니 경허의 배 위에 길고 시커먼 뱀 한 마리가 걸쳐 있었다. 만공은 깜짝 놀랐다.
“스님, 이게 무엇입니까?”
“가만두어라. 내 배 위에서 실컷 놀다 가게.”
경허는 놀라지도 쫓지도 않고 그대로 태연히 누워 있을 뿐이었다. 얼마 후 그의 법문이 있었다.
“동요하지 말라. 그게 공부니라.”
2
엄동설한의 한 겨울을 토굴에서 혼자 정진하며 지내기로 한 경허는 낡고 헐어 벽에 틈이 벌어지고 문창이 뒤틀린 암자를 수리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불장(佛藏)에 보관되어 있던 경전을 모조리 뜯어 풀을 바른 후 문이나 벽, 방바닥, 천장까지 남김없이 발랐다. 암자로 찾아간 제자들이 이 광경을 보고 깜짝 놀라 물었다.
“스님, 성스러운 경전으로 이렇게 벽과 바닥을 발라 도배하고 장판을 해도 됩니까?”
경허는 태연히 대답했다.
“자네들도 이러한 경계에 이르면 이렇게 해보게나.”
토굴로 찾아간 제자들은 그에게 삼배를 올리고 물러났다.
3
그는 사람들이 찾아와 불법(佛法)의 도리를 물으면 종일 그대로 앉아 일체 말이 없다가 누구든지 곡차를 갖다 바치면 그 곡차를 다 마신 후에는 종일 법문을 하였다. 만공이 그 손님들이 다 가고 난 후 불평하였다.
“스님께서는 만인 앞에 평등하셔야 할 도인이신데 어째서 그렇게 편벽하십니까?”
그러나 그는 한 마디로 잘라 말했다.
“이 사람아, 법문이라는 것은 술김에나 할 것이지 맑은 정신으로는 할 게 못돼.”
4
어느 날 형님인 태허(泰虛) 스님이 갈산 김 씨네 49재가 있어 장을 푸짐하게 보아 부처님 앞에 정성껏 진열해 놓았다. 당시만 해도 백성들이 초근목피로 연명하던 때라 동네에 큰 제사나 잔치가 있다고 하면 떡과 과일을 얻어먹으려고 인근 마을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드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경허가 나타나 구경꾼들에게 음식을 모두 나눠줘 버렸다. 재를 지낼 탁자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태허 스님이 노발대발했다.
“재나 다 지낸 뒤에 주지, 어째서 재 지낼 것을 다 갖다주느냐?"
경허가 빙긋 웃었다.
“제사는 바로 이렇게 지내는 게 제대로 지내는 것입니다. 영가께서 극락왕생하려면 좋은 일, 착한 일을 많이 베풀어야 하는 법이거늘 여기 모인 이 배고픈 사람들에게 떡과 과일을 보시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좋은 일 아니겠습니까? 오늘의 이 공덕으로 영가께서는 반드시 극락왕생하실 것이오.”
태허 스님은 할 수 없이 급히 사람을 보내어 새로 재를 지낼 상을 봐 오게 하고 재주에게 사과했다. 그러나 재주는 환하게 웃더니 재를 올릴 비용을 새로 내놓으며 말했다.
“우리 부친의 재는 참으로 잘 지냈습니다.”
5
경허가 대중을 모아 법문을 연 뒤 시자에게 말했다.
“우리 어머님을 모셔오도록 하라.”
시자는 그 뜻을 연만한 어머니께 전하며 큰스님으로 존경받는 아드님의 법회에 가시길 권하였다. 어머니는 희색이 만면하여 대중이 모여 있는 큰 방에 들어가 향을 피웠다. 그리고 정성을 다해 경의를 표하고 자리에 앉았다.
“우리 경허가 나를 위해 법문을 설한다 하니 이렇게 기쁠 수가 없구나.”
그때 경허가 갑자기 옷을 벗기 시작했다. 모두들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놀란 사람은 어머니였다. 그러나 정작 경허는 조용히 말했다.
“어머니, 저를 보십시오.”
완전히 벌거벗은 알몸. 어머니는 대노했다.
“대체 무슨 법문이 이럴 수 있단 말이냐? 별 발칙한 짓을 다하는구나!”
어머니는 자기 방으로 들어가 좀처럼 나오려 하지 않았다. 경허는 쓸쓸하게 웃었다.
“저래 가지고 어찌 남의 어머니 노릇을 한단 말인가? 내가 아주 어려서는 이 몸을 벌거벗겨 씻기며 안고 빨고 하시더니 지금은 왜 그렇게 못하실까? 세상 풍속 참으로 한심한 일이로군.”
6
“만공아, 단청불사를 해야겠다. 시주 받으러 가자.”
“예, 스님.”
이렇게 스승과 제자가 마을 집을 방문하면서 얼마의 시주금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 웬걸, 시주금을 챙긴 경허가 터덜터덜 주막으로 향했다. 그러고는 술을 거나하게 마셨다. 만공이 불평 가득한 눈으로 말했다.
“스님, 참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뭐가 말이냐?”
“스님은 시줏돈을 받아 술을 드셨으니 지옥에 떨어지실 겁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내가 무슨 거짓말이라도 했단 말이냐?”
“그러고 말고요. 단청하라고 시주를 한 것은 법당에 칠을 하라고 준 것이지, 스님이 술 드시라고 준 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뻔뻔할 수 있습니까?”
“녀석 참 뭘 모르네. 내 얼굴을 봐라, 이놈아.”
“술 취한 모습이 참 가관입니다요.”
“어허 녀석, 단청불사를 볼 줄 모르네. 붉은 내 얼굴이 얼마나 보기 좋으냐, 이놈아!”
“그럼 스님 술 드시려고 시주를 받았단 말입니까?”
“그랬다 이놈아! 목이 마르고 컬컬해 한잔 생각이 났지. 그런데 부처님이 영험하시니 이렇게 목도 축이고 기분 좋게 길을 갈 수 있지 않느냐? 그 부처님 참 영험하시기도 하지. 흐흐!”
“그렇게 말씀하시면 남들은 궤변을 늘어놓는다고 말합니다요.”
“그렇겠냐?”
“그렇고말고요.”
“그렇다면 내가 왜 궤변을 늘어놓았는지 지적을 해봐라.”
“첫째로 스님의 몸과 법당은 다르단 말입니다.”
“왜 달라?”
“스님은 인간이지만 법당은 부처님이 계신 곳이잖아요.”
“아따 고놈, 눈도 참 나쁘네.”
“뭐가 말입니까?”
“이놈아, 내 속에 부처가 있다고 그렇게 말했는데 아직도 모른단 말이냐? 잘 듣거라. 이 몸은 법당이요, 이 마음은 부처이니라. 법당의 부처는 죽어 있는 돌덩어리고, 법당은 돌덩어리를 지키는 집이라고 하느니라. 나는 내 법당에 단청을 하려 했는데 너는 죽은 부처의 법당에 단청을 하지 않는다고 하니 참 안타까운 일이니라.”
“스님 말씀을 듣고 보면 그럴싸하기는 합니다만, 그래도 뭔가 잘못된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뭐가 잘못되었는지 말을 해보라 하지 않느냐.”
“부처님은 술을 먹지 말라 하셨는데 스님은 술을 드셨으니 이것이 또 문제란 말입니다.”
“보통의 화상들은 술을 먹으면 본성이 취해 함께 흔들리지만 내가 그렇게 술을 많이 마셔도 어디 한번 비틀거리는 것을 본 적 있느냐?”
“그런 적은 없습니다만 …….”
“이놈아, 술을 먹었다 계를 범했다 하고 맨날 고시랑거려봐야 아무 소용이 없어. 부처가 기특하다고 수기(授記)를 줄 것도 아니고, 네 스스로 그 속박에 매일뿐이란 말이다. 오로지 스스로 깨달음을 얻어 자유롭게 살아가는 것만 못하다는 이야기지. 너 마음 쓰는 것을 보니 큰 중은 되겠지만 큰 자유인은 되기 어려울 상 싶다. 노력 많이 하거라.”
7
경허가 만공을 데리고 주막에 들러 탁배기를 마시고는 기분이 좋아져 주모와 수다를 떨었다.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던 만공의 심사가 또 뒤틀리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감히 하늘 같은 스승님께 대들 수는 없었다. 다시 절로 돌아오는 길. 경허가 만공의 마음을 모를 리 없었다.
“너 어째 상판이 영 일그러져 있냐? 뭐 속상한 일이라도 있느냐?”
“그야 스님 때문이지, 왜 그렇겠습니까?”
“내가 왜? 너보고 마음이 나쁘라고 하기라도 했단 말이냐?”
“아까 주막에서 그게 뭡니까? 체통 좀 지키셨으면 좋겠습니다.”
“체통이라니 내가 뭘 잘못했단 말이냐?”
“주모의 가슴도 보시고 음담패설도 하고 그러셨잖아요? 그게 다 음계와 구업을 짓는 것이라는 정도는 충분히 아실 텐데요. 스님이 그렇게 하신다는 것은 결국 위선이 아닌가 싶어 지금 스님의 곁을 떠나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고민하고 있는 겁니다.”
“엉? 아하, 네놈이 내가 혼자 노니까 열이 났던 모양이구나. 허허허!”
“그게 아니지요. 얼렁뚱땅 넘기려고 하시는군요. 비겁합니다. 그러시면 …….”
“아, 이놈아, 음계는 네가 범하고 있구나!”
“무슨 억지 말씀입니까요?”
“야, 이놈아, 난 그 주막을 떠나면서 그 여인을 이미 잊어버렸는데 너는 아직도 그 여인을 생각하고 있으니 말이다. 부처님이 그렇게 가르치더냐? 바보 같은 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놈아, 세상 삼라만상은 그 마음에 흔적이 없이 수용하고 있는데, 너는 어째서 이미 흔적도 없는 허상에 대해 집착을 하느냔 말이다. 내가 그 여인과 농담을 주고받은 것도 흔들림이 없는 마음에서 한 일이고, 지금 이렇게 길을 가는 것도 흔들림이 없는 마음으로 행하는 것인데 너는 늘 흔들리는 마음으로 여자를 건드리면 안 된다느니 술을 먹으면 안 된다느니 하는 분별을 하고 있으니 결국 그 분별지에 떨어지고 말 것이다.”
“……”
8
어느 해질녘이었다.
경허가 역시 만공과 함께 탁발을 나갔다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날도 탁발 성적이 매우 좋아 그들의 쌀자루에는 쌀이 가득했다. 그러나 흐뭇한 마음과 달리 짐은 몹시 무거웠고 갈 길은 아직도 까마득했다. 바랑끈은 어깨를 짓눌러 왔고, 만공은 걸음이 빠른 경허 스님의 뒤를 따라갈 수 없었다. 만공이 먼저 지쳐 경허에게 통사정을 했다.
“스님, 걸망이 무거워 더 걸어가기 힘듭니다. 잠시만 쉬었다 가시지요.”
경허가 만공에게 말했다.
“두 가지 중 한 가지를 버려라.”
“두 가지 중 한 가지를 버리라니요?”
“무겁다는 생각을 버리든지 아니면 걸망을 버리든지 하란 말이다.”
“에이 참 스님도 ……. 하루 종일 고생해서 탁발한 곡식을 어찌 버리란 말씀이십니까? 아, 그리고 무거운 건 무거운 건데 그 생각을 어찌 버립니까요?”
경허는 휘적휘적 앞서가기 시작했다. 만공은 다시 허겁지겁 숨을 헐떡이며 뒤따라갔다.
“스님, 정말 숨이 차서 그렇습니다. 잠시만 쉬었다 가시지요.”
“저 마을 앞까지만 가면 힘들지 않게 해줄 것이니 어서 따라오너라.”
이윽고 마을이 나타났다. 한 모퉁이를 돌아서니 마침 사립문이 열리면서 젊은 아낙네가 머리에 물동이를 이고 나왔다. 갓 스무 살을 넘겼을까 한 아주 예쁜 새댁이었다. 앞서가던 경허가 여인과 마주쳤다. 그러자 경허가 느닷없이 달려들어 여인의 양 귀를 잡고 번개같이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에그머니나!”
여인은 놀라 물동이를 떨어뜨리고 집으로 뛰어 들어갔다. 당연히 집안에서 소동이 일어났다. 소동은 곧 마을에 퍼지고, 급기야 온 마을 사람들이 뛰어나왔다. 그들의 손에는 굵은 몽둥이와 곡괭이 자루가 들려 있었다.
“저놈 잡아라!”
“아니, 어디서 요망한 중놈이 나타나 가지고!”
경허가 먼저 뛰기 시작했다. 쌀을 지고 뒤따르던 만공 또한 함께 뛰지 않을 수 없었다. 만공은 온 힘을 다해 필사적으로 앞서 뛰어가는 경허를 따랐다. 몽둥이를 들고 뒤쫓던 사람들도 달아나는 두 사람을 끝까지 쫓지는 못했다. 이윽고 두 사람은 발걸음을 멈추고 쉬게 되었다. 마을을 벗어나 절이 보이는 산길에 접어든 경허는 천천히 만공에게 말했다.
“허허, 너도 용케 붙잡히지 않고 예까지 왔구나.”
“스님, 속인도 해서는 안 될 짓을 왜 하셨습니까요?”
“그래, 그건 그대 말이 맞다. 헌데 도망칠 적에도 걸망이 무겁더냐?”
“예?”
“그 쌀자루가 무겁더란 말이냐?”
경허는 석양이 비낀 먼 마을을 바라보며 껄껄 웃었다.
9
청양(靑陽) 장곡사(長谷寺).
경허가 곡차를 잘 마신다는 소문을 듣고 인근 마을 사람들이 곡차와 파전을 비롯한 안주 여러 가지를 정성껏 마련해 가지고 왔다. 마을 선비들과 술자리가 무르익은 뒤 옆에 앉아 있던 만공이 경허의 법문을 듣고자 넌지시 물었다.
“스님, 저는 혹 술이 있으면 들기도 하고 없으면 안 듭니다. 이런 파전도 굳이 먹으려 하지 않고, 생기면 굳이 안 먹으려 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스님께서는 ……?”
경허가 대뜸 말을 받았다.
“허어, 자네는 벌써 그런 무애(無碍) 경계에 이르렀는가? 나는 그렇지 못해 술이 먹고 싶으면 제일 좋은 밀씨를 구해 밀을 갈아 김을 매고, 가꾸어 밀을 벤 뒤 누룩을 만들어 술을 빚고 걸러 이렇게 먹을 테야. 또 파전이 먹고 싶으면 파씨를 구해 밭을 일구어 파를 심고 거름을 주며 알뜰히 잘 가꾸어 이처럼 파전을 부쳐 가지고 꼭 먹어야 하겠네.”
만공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10
행자 관섭(寬燮)은 경허의 다른 법문은 다 좋지만 그의 무애행(無碍行) 만은 도무지 마땅치 않았다. 아니, 마땅치 않은 정도가 아니라 너무 부끄러웠다.
그러던 어느 날, 마침 안주를 사 오라고 경허가 돈을 주자 관섭은 안주를 사고 난 나머지 돈으로 몰래 비상을 샀다. 수도는커녕 술만 마시는 경허의 행각을 아주 끝내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관섭은 비상을 잘게 빻아 구운 안주에 골고루 뿌려 넣었다. 그리고 술과 안주를 경허에게 천연스레 갖다 바쳤다. 그러나 아직 어린 행자. 그는 더럭 겁이 나서 뒷문 문구멍으로 숨을 죽이며 경허의 다음 동정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가슴이 뛰었다. 그런데 경허는 곡차를 한 번 쭉 따라 마시고 안주를 집어먹기 시작하더니 뭔가 버석 씹히는 것이 있자, 그 씹히는 것만 차례로 골라 털어버리고 먹기를 계속했다. 그리고는 벌렁 드러누우며 말했다.
“아, 참 잘 먹었다!”
11
시냇가에서 아리따운 처녀가 물을 건너지 못해 어쩔 줄 몰라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마침 길을 가던 경허와 제자가 그곳을 지나가게 되었다. 처녀는 부끄러움을 참으며 젊은 제자에게 도움을 구했다. 그러자 제자는 처녀에게 정색을 하며 화를 냈다.
“우리 불가에서는 여자를 가까이하면 파계라 하여 내쫓김을 당하는데 어찌 젊은 처자가 그런 요구를 하십니까?”
난처해진 처녀는 경허에게 다시 도움을 청했다. 그러자 경허는 선뜻 등을 내밀었다. 경허는 처녀를 등에 업고 건너편에 내려준 뒤 계속해서 갈 길을 갔다. 그러나 뒤따라가는 제자의 마음에는 갈수록 온갖 의심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혹시 땡중이 아닐까?”
제자는 스승에게 따지고 싶었지만 이를 꾹 참고 십리 길을 더 갔다. 마침내 제자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물었다.
“스님, 어찌 그럴 수 있단 말입니까? 수도하는 스님이 어떻게 젊은 여자를 업을 수 있습니까?”
경허가 웃으며 말했다.
“예끼 이놈! 네놈은 아직도 그 처자를 업고 있느냐?”
12
경허가 머물던 천장사는 가난했다. 모두 초근목피로 연명하던 시절이었으니 작은 암자인 천장사의 살림도 말이 아니었다. 그래서 경허 또한 자주 탁발을 나가야 했다. 어느 날 경허가 커다란 솟을대문 앞에서 탁발을 하려고 목탁을 치며 염불을 하고 있을 때였다. 마침 주인이 거들먹거리며 밖으로 나왔다.
“우리 집 대문 앞에 와서 목탁을 치는 것을 보니 곡식이라도 좀 얻어 가자는 것 같은데, 그대는 과연 중이란 말인가 거렁뱅이란 말인가?”
경허는 합장하여 예를 갖춘 후 나직이 대답했다.
“절에서 살며 수행하고 있으니 중이 분명하옵고, 오늘은 양식을 탁발하러 왔으니 거렁뱅이 또한 분명한가 합니다.”
13
경허가 만공과 함께 먼 길을 나섰다. 어느덧 한낮이 가까워 오고 있었다. 길은 첩첩산중이고 마을은 눈에 띄지 않는데 시장기가 돌기 시작했다. 굽이진 산길을 돌아 어느 산마루 턱에 당도하였을 때, 저쪽에서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곳에 오색 깃발 같은 것이 늘어져 있었다. 상여 행렬이 고개 마루턱에서 쉬는 중이었다. 경허는 만공을 데리고 장례 행렬 앞으로 다가갔다. 그는 상여 앞에서 합장을 한 다음 음식을 청했다.
“시장해서 음식을 좀 청합니다.”
“행상(行喪) 길이니 술밖에 더 있나요?”
한 상여꾼이 장난스럽게 대꾸하자 경허는 태연히 말했다.
“술이 있으면 술을, 고기가 있으면 고기를 주시지요.”
사람들이 모두 눈을 크게 떴다.
“아따 참, 원 별 중들 다 보겠네.”
사람들이 빈정거렸다. 점잖은 한 상여꾼이 말했다.
“아니 대사(大師)가 어찌 술을 달라 하시오? 곡차라 하지도 않고.”
경허는 그를 보며 대답했다.
“시장한데 한잔 하면 되지, 굳이 다른 말 할 게 뭐 있겠소.”
사람들은 어이가 없었지만 술 한 대접을 듬뿍 떠 내놓았다. 막걸리였다. 경허는 술잔을 받지 않고 손을 내저었다.
“잔이 너무 작습니다. 차라리 바가지나 동이째 주시오.”
경허에게 흥미를 느낀 한 상여꾼이 웃으며 말했다.
“어디 동이째 내줘 봐.”
이윽고 다른 상여꾼이 술이 가득 담긴 동이를 들어 경허 앞에 내놓았다. 경허는 그것을 단숨에 비워냈다. 처음부터 끝까지 보고 있던 상주의 마음이 움직였다. 틀림없이 도가 높은 대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상장(喪杖)을 짚고 경허에게 가서 공손히 물었다.
“무애행을 하시는 도가 높은 스님들 같사온데 스님들의 자비로움으로 망인이신 우리 아버님의 명당(明堂)을 하나 잡아 주실 수 없는지요?”
경허는 느닷없이 소리를 질렀다.
“명당은 해서 뭐에 써? 죽으면 다 썩은 고깃덩어리가 될 뿐 아무것도 아닌 것을!”
극진한 대접을 했는데 갑자기 표변한 걸승(乞僧)의 행동에 상주들이 분노했다.
“아니, 어디서 굴러먹던 중놈들이!”
상주들은 대막대기(喪杖)를 들어 당장에 후려칠 기세였다.
“네 이놈들!”
경허의 우렁찬 소리가 좌중을 압도했다. 경허와 만공은 모두 6척이 넘는 건장한 체구였다. 순식간에 일어난 이 뜻밖의 사태를 상여꾼들은 그저 멍청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때 맏상주가 흥분한 아우들을 헤치고 다시 앞으로 나섰다.
“스님 말씀이 지당합니다. 사람이 죽으면 까막까치나 구더기의 밥이 되는 것이지요. 저희들이 미흡해 알아 뵙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자손 된 도리를 다하지 못해서요.”
맏상주는 행상 길을 재촉해 떠날 차비를 했다. 잠자코 있던 경허가 중얼거렸다.
“모든 것은 다 허망할 뿐이니 죽고 사는 것은 원래 그러하므로 만약 모든 것이 참으로 허망한 줄 알면 그대들도 참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일세.”
14
경허의 법을 신봉한 직지사 제산(齊山) 스님은 청정한 지계행과 높은 덕행을 겸비해 제방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 제산 스님은 경허가 합천 해인사 조실로 있을 때 시봉을 도맡다시피 했다. 당시 400~500명의 대중이 상주하는 대사찰에서 경허의 뜻을 받들기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 이유는 경허를 위해 대중 모르게 곡차를 마련하고 안줏감이 될 만한 것을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제산 스님은 입소문을 막기 위해 다른 사람을 시키지 않고 깊은 밤이면 몰래 절 밖으로 나가 안주를 만들어 경허에게 올렸다.
하지만 꼬리가 길면 잡히게 마련. 제산 스님의 행각은 대중 사이에 알려지고 말았다. 산중은 변고가 난 것처럼 야단이었다. 납자 몇몇이 모이기만 하면 모두들 경허와 제산 스님을 성토하기 바빴다. 당시 주지 남전 스님이 이 소문을 듣고 제산 스님을 찾아 소문의 진위를 물었다. 제산 스님은 태연했다.
“제가 경허 스님을 위해 한 일입니다.”
남전 스님으로서는 제산 스님을 만나기 전 낭설이겠거니 하며 물었는데 제산 스님의 당당한 소리에 어이가 없었다. 남전 스님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얼굴을 붉히며 밖으로 나갔다. 남전 스님은 믿기지 않았다. 평소 법력이 높아 추앙받는 선지식 경허, 또 학덕과 율행을 겸비한 것으로 알려진 제산 스님이었던 것이다. 남전 스님은 며칠을 두고 고민을 거듭했다. 스님의 고민은 경허의 법력에 대한 의구심에까지 이르렀다.
그래서 남전 스님은 경허의 법문을 찬찬히 들었다. 그런데 들으면 들을수록 깊은 감명이 우러났다. 걸림이 없었던 것이다. 남전 스님은 곧바로 선방에 들어가 가부좌를 틀고 용맹정진을 시작했다. 신심이 발한 남전 스님은 큰 깨달음을 얻었다. 남전 스님이 하루는 대중공양을 하는데 발우를 펴며 제산 스님에게 격외 법담을 걸었다.
“스님, 이 발우가 안 보입니다.”
스님의 높은 경지에 모든 좌중은 크게 놀랐다. 그 후 남전 스님 역시 제산 스님 이상으로 경허에 대한 소문들을 진정시키는 데 앞장섰다.
해인사에서는 어느 날 만공ㆍ제산ㆍ남전 스님이 함께 자리해 경허의 법 따르기를 견주는 기회가 있었다. 제산 스님이 말했다.
“누가 뭐라 해도 경허 스님께 계속 곡차와 닭고기를 바치리다.”
남전 스님이 말을 받았다.
“경허 스님과 같은 어른을 위해서라면 닭이 아니라 소를 잡아 올려도 거리낄 게 없소.”
그러자 만공이 말했다.
“나는 전쟁이 나 깊은 산중에 모시고 살다 양식이 떨어져 공양 올릴 것이 없게 된다면 나의 살점을 오려서라도 스님의 생명을 구하겠소.”
15
경허가 마정령(馬亭領)이란 고개를 넘을 때였다. 산에서 나뭇짐을 지고 내려오던 초동들이 스님을 보고 웃었다.
“저 중 봐라, 이상하다.”
그때 경허의 행색은 머리는 깎았으되 수염은 길렀으며 맨발에 한 손에는 담뱃대를 잡고, 다른 손에는 떡과 과자가 든 자루를 둘러메고 있었다. 아이들의 웃음에 스님이 물었다.
“얘들아, 나를 알겠느냐?”
아이들이 말했다.
“저희들은 스님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면 나를 보느냐?”
“예, 지금 스님을 보고 있습니다.”
“이놈들아, 나를 알지 못한다 하면서 나를 어찌 본다 하느냐?”
경허는 차고 있던 주장자(拄杖子)를 내어주며 일렀다.
“얘들아, 누구든지 이 막대기로 나를 한번 때려봐라. 만약 너희들이 나를 제대로 때리기만 한다면 수고한 대가로 이 자루에 든 과자와 돈을 모두 주마.”
그 가운데 한 영리한 아이가 앞으로 나왔다.
“스님, 그게 정말입니까?”
아이는 경허가 내주는 주장자를 받아 쥐고 힘껏 경허를 후려쳤다. 하지만 경허는 계속 아이들을 보고 말했다.
“때려봐라, 때려봐라!”
아이들은 무더기로 달려들었다. 그런데도 경허는 껄껄 웃었다.
“너희들은 나를 때리지 못했느니라. 만약 때렸다면 부처도 때리고 조사도 때리고, 또 세세 제불과 역대 조사 내지 천하 노화상을 한 방망이로 때려 갈길 것이니라.”
아이들이 항의했다.
“스님을 아무리 때려도 때리지 못했다고 하니 과자와 금전을 준다고 하는 것은 모두 거짓 아닙니까?”
경허는 여전히 웃으며 말했다.
“여기 있다. 다 가져가거라.”
경허는 어째서 아이들에게 매 맞는 것을 자초한 것일까? 그리고 분명히 맞았는데 어째서 맞지 않았다는 말을 되풀이해 계속해서 매질을 유도한 것일까? 경허는 아이들에게 흠씬 두들겨 맞고 싶었던 것이다. 못난 이 씨 왕조, 그 속에서 만신창이가 된 백성들. 아이들 앞에서 속죄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 질곡 속에서 그들을 구할 길이 없었던 것이다. 특히 이 땅의 주인공이 되어야 할 아이들에게 제일 미안하기에 저들로부터 몰매 맞는 것을 자초한 것이다. 경허는 아이들에게 돈과 과자를 내주고 고개를 넘어가며 한 곡조 노래를 읊었다.
온 세상 혼탁하나 나 홀로 깨었어라.
우거진 수풀 아래 남은 해를 보내리.
16
경허가 만공과 여러 날 멀리 여행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만 여비가 떨어지고 말았다. 날이 저물어 여관에 행장을 푼 다음날, 여관 주인이 경허ㆍ만공 스님에게 숙박비와 식대를 내라 했다. 그러자 경허가 말했다.
“우리가 법당을 중수하려고 화주(化主)를 나왔습니다. 주인께서도 시주를 하시지요?”
여관 주인이 잠자코 있다가 답했다.
“그러면 그 화주책을 한 번 봅시다.”
만공이 곰곰이 생각해 보니 경허에게는 화주책이 없었다. 화주책도 없는데 시주하라고 말을 꺼냈으니 큰일이었다. 만공이 말했다.
“실은 이 주인댁에 우리가 화주를 하려고 왔으나 지난밤 너무 극진한 대접을 받아 고맙기 이를 데 없습니다. 그러니 이 댁에서는 시주를 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화주책을 내놓지 않고 둘러대는 만공의 말에 얼떨떨해진 여관 주인은 대꾸를 하지 못했다. 이때 만공이 덧붙인 한마디가 더 가관이었다.
“그렇게까지 괘념하시어 우리에게 고맙게 시주까지 해주신다면 책을 꺼내 보여드리지요.”
만공은 당황했다. 그렇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 만공은 걸망 속에 손을 쑥 집어넣었다. 정작 있지도 않은 화주책을 꺼낼 기세였다. 그러자 여관 주인이 책 꺼내는 것을 만류하며 말했다.
“알았습니다. 알았어요. 스님들. 제가 시주를 특별히 할 수는 없고, 어젯밤 두 분의 숙식비는 받지 않을 테니 그냥 가시지요.”
주인으로서는 자칫 잘못하다 여관비를 받기는커녕 법당 중수 화주까지 하게 생겼다는 생각에 책 꺼내는 것을 극구 만류할 수밖에 없던 것이다. 여관에서 나오자 경허가 만공에게 말했다.
“자네 수단이 나보다 훨씬 낫네그려.”
17
만공이 경허와 만행하며 겪은 고비는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 고비마다 만공은 기지를 발휘했다. 만공이 경허와 함께 전주 인근을 지날 때였다. 어느 식당에서 점심 공양을 마친 두 사람은 구한말 시대에 쓰던 은백전을 내주었다. 그러자 식당 주인이 고개를 내저었다.
“이 돈은 전라도 도지사가 사용치 말라는 명령을 내려받을 수 없으니 여기서 쓰는 돈을 주시오.”
당시는 일제가 새 화폐 사용을 강요하던 시기였다. 식당 주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경허가 큰 눈을 부릅뜨고 일갈했다.
“그 도지사란 놈은 당장 잡아 목을 벨 놈이로구나. 우리나라에서 내놓는 돈을 우리나라 사람이 사용 못 하다니 그런 죽일 놈이 있단 말이냐? 이 돈을 썩 받아라!”
스님의 호통에 주인은 얼떨결에 돈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마침 식당 주변에는 일제 관원이 나와 있었다. 관원이 이 광경을 보고 개입하려 했지만 서슬 퍼런 경허의 야단에 아무 말도 못 한 채 머뭇거리고 있었다. 경허는 이 틈을 타 식당을 나와 뛰기 시작했다. 만공은 태연한 척 마을 사람들에게 잘 이야기하고는 부리나케 경허를 쫓아 식당을 빠져나왔다. 얼마를 갔을까? 산모퉁이를 돌고 나니 경허가 쉬고 있었다.
“내가 어지간하지. 그 바람에 길을 많이 걸어왔다. 어떠냐? 내 재주가?”
18
경허와 만공이 어느 산중 깊은 길을 가다 갑자기 비를 만났다. 두 사람은 큰 바위 동굴에 몸을 피했다. 조용한 가운데 경허가 단단한 바위로 된 동굴 천장을 자꾸 올려다보았다. 만공이 의아해서 물었다.
“스님, 왜 그렇게 천장을 올려다보십니까?”
경허가 조용히 말했다.
“이 바위가 내려앉을까 염려되어 그러네.”
만공이 다시 물었다.
“스님, 이 끄떡없는 바위가 내려앉을 리 있겠습니까?”
경허가 조용히 말했다.
“이 사람아, 가장 안전한 곳이 가장 위험한 곳이네.”
19
경허가 서산 개심사 조실로 있을 때였다. 당시 개심사 주지 동은(東隱) 스님은 세간에 부자 스님으로 소문나 있었다. 해마다 들어온 쌀을 조용히 모아 사찰 이름으로 논을 샀기 때문이었다. 경허는 시자인 사미승 경환을 시켜 동은 스님이 모아놓은 쌀을 모두 가져오라 지시했다. 소문일 뿐 확인되지 않은 쌀을 가져오라는 지시에 경환은 어리둥절했다.
“스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경환의 질문에 경허는 그저 다시 동은 스님의 방에서 쌀을 가져오라 지시할 뿐이었다. 경환은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남의 물건을 몰래 가져오는 것은 정직하지 못한 짓인데 어찌 그런 일을 스님께서 지시하십니까?”
경허가 일갈했다.
“이놈아, 너무 정직하기만 하면 못쓰는 것이니라. 정직한 체, 청정한 체하는 것은 자기를 속이고 남을 속이는 무서운 도구가 되느니라. 알겠느냐?”
경허는 경환에게 다시 주지의 방에 둔 쌀을 훔쳐 올 것을 지시했다. 경환은 할 수 없이 쌀을 가지러 가기 위해 동은 스님의 방으로 갔다. 스님의 방에는 큰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다. 또 주지 스님이 좀처럼 자리를 비우지 않아 쌀이 있는 곳으로 의심되는 곳 근처조차 갈 수 없었다. 한나절 동안 주지실 앞에서 어슬렁거리던 경환은 주지 스님에게 모든 것을 실토하고 말았다.
“주지 스님, 실은 조실 스님께서 …….”
이야기를 전해 들은 동은 스님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크게 웃었다. 동은 스님은 예상보다 훨씬 많은 쌀을 내어주며 경환에게 말했다.
“조실 스님의 장난은 이제 이런 짓까지 서슴지 않으시니 참 알 수 없는 일이구나. 허허!”
경환은 묵직한 쌀자루를 지고 와 경허에게 올렸다. 그러자 경허가 다시 말했다.
“그 쌀을 가지고 아랫마을에 내려가 막걸리를 사오너라!”
20
경허가 오대산 월정사를 지나게 되었다. 당시 월정사 방장으로 있던 인명(寅明) 스님이 경허에게 "화엄경" 설법을 청했다. 하여 경허가 3개월 동안 "화엄경" 법회를 진행하게 되었다. 1000여 명에 달하는 승속이 청법하는 자리에서 경허는 의연히 법좌에 올라 말했다.
“<대방광불화엄경>이라.”
경허는 먼저 대(大) 자에 대해 설법했다.
“대들보도 대요, 댓돌도 대요, 대가사도 대요, 세숫대도 대요, 담뱃대도 대니라.”
이어 방(方) 자에 대해 설했다.
“근방도 방이요, 지대방도 방이요, 동서남북 사방도 방이니라.”
이어 그는 광(廣) 자로 법문을 이어나갔다.
“쌀광도 광이요, 찬광도 광이요, 연장광도 광이요, 광장도 광이니라.”
다음은 불(佛) 자.
“등잔불도 불이요, 모닥불도 불이요, 촛불도 불이요, 화롯불도 불이요, 번갯불도 불이요, 이불도 불이며, 횃불도 불이니라.”
다음은 화(華) 자.
“매화도 화요, 국화도 화요, 탱화도 화요, 화병도 화요, 화살도 화요, 화엄경도 화니라.”
다음은 엄(嚴) 자.
“엄마도 엄이요, 엄살도 엄이요, 엄정함도 엄이요, 화엄도 엄이니라.”
마지막 경(經) 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면경도 경이요, 구경도 경이요, 풍경도 경이요, 인경도 경이요, 안경도 경이니라.”
대중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자유로움, 그 담대함. 대중은 모두 머리를 숙였다.
21
지리산 깊은 골짜기에 마천(馬川)이라는 마을이 있다. 마천 마을이 자리한 심산유곡(深山幽谷)은 실상사(實相寺)ㆍ백장암(百丈庵)ㆍ벽송사(碧松寺)ㆍ상무주(上無住) 등으로 갈 수 있는 길목이지만 너무 높고 험해 찾는 길손조차 없었다. 어느 해 초여름 무렵이었다. 모진 흉년 끝에 마천 마을 주민들은 보릿고개를 넘다 못해 굶주려 아사할 직전에 이르게 되었다. 당시는 일제 강점기, 어느 누구도 두메산골의 가파른 민생고를 해결할 수 없었다.
이때 경허가 우연히 그곳을 지나게 되었다. 그는 지리산 마천 마을의 참상을 보고는 가던 길을 멈추었다. 한동안 생각에 젖어 있던 그는 가던 길을 돌려 남원 쪽으로 향했다. 그는 단숨에 100리 가까운 길을 걸어 남원 땅에서 탁발을 하기 시작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고 그는 가까스로 바랑 가득 곡식을 모을 수 있었다. 그는 그 짐을 짊어지고 걸음을 재촉해 100리 길을 다시 걸어 마천 마을로 돌아왔다. 그는 집집마다 손수 돌며 굶주린 주민들에게 식량을 나눠주었다. 여러 차례 걸쳐 그는 100리를 걸어 탁발을 하고 또 100리를 걸어 곡식을 나눠주었다. 그는 죽어가던 두메 사람들을 이처럼 살려놓은 뒤 홀연 자취를 감추었다.
22
때는 일제강점기로 일본 경찰들이 치안을 담당하던 시기였다. 비로관(毘盧冠)을 크게 만들어 머리에 쓰고 검은 장삼을 걸친 한 스님이 거리를 누비고 있었다. 구척장신의 스님은 맨발에 한 손에는 담뱃대를 들고, 다른 한 손에는 고기를 주장자에 매달아 어깨에 메고 있었다. 경허였다. 마침 거리를 순찰하던 일본 헌병 보조원 두 명이 그를 산적으로 알고 체포했다. 그러자 그가 입을 열었다.
“이놈들아, 끌고 가려면 너희들이 나를 메고 가거라.”
경허는 땅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두 헌병 보조원은 하는 수없이 긴 장대를 갖고 와 경허의 양다리와 양팔을 밧줄로 꽁꽁 묶어 헌병대로 데려갔다. 두 사람이 땀을 뻘뻘 흘리며 헌병 분견대로 향하는데 경허가 웃었다.
“흥, 경허가 그래도 어지간한가 보구나!”
헌병 보조원들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여보, 대사! 그 무슨 소리요?”
경허는 다시 한바탕 웃으며 말했다.
“나를 너희들이 이렇게 메고 가야지, 내 발로 걸어갈 수야 있겠느냐. 이놈들아!”
더욱 화가 난 헌병 보조원들은 경허를 내려놓고 손발에 동여맨 밧줄을 풀었다.
“그럼 걸어갑시다.”
헌병 보조원들은 경허에게 발길을 재촉했다. 헌병 분견대에서 일본 헌병대장이 직접 경허를 취조했다. 독립군의 수뇌나 산적 두목으로 본 것이다. 취조에서 아무 표정 없이 묵비권을 행사하던 경허가 갑자기 지필묵을 청했다. 헌병대장이 이상 하게 생각하고 지필묵을 갖다주게 했다. 경허는 헌병들에게 두루마리 양쪽을 붙들게 하고 붓에 먹물을 찍어 ‘제행무상(諸行無常) 시생멸법(是生滅法)’의 휘호를 써 갈겼다. 그의 글 쓰는 자세를 보던 헌병대장은 깜짝 놀라 자세를 정중히 했다. 헌병대장은 그 깊은 뜻을 알 수 없었지만 경허가 큰 도인임을 짐작했다. 헌병대장이 큰 절을 하며 경허에게 말했다.
“스님,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알아 모시겠습니다.”
경허는 강계 땅에서도 박진사로 행세하던 중 일본 경찰에 끌려간 적이 있었다. 공주 경찰서에서 그를 취조한 야마모토 경찰서장에게 경허 스님은 붓과 종이를 청해 일필휘지의 글을 남겼다.
“그 뜻을 얻었다면 거리의 한담도 다 진리의 가르침이요, 말하는 주인을 알지 못하면 용궁에 간직된 보배로운 경전도 한낱 잠꼬대일 뿐.”
야마모토 서장은 경허가 쓴 글의 깊은 뜻을 알아보고 그를 자기 집 내실로 모신 뒤 자기 부인에게 일렀다.
“이 어른의 시봉을 잘 해드리고 어떤 행동을 하시든 언제나 원하시는 대로 모시도록 하시오.”
야마모토 서장은 집안 하인들에게도 행여나 경허의 뜻을 거스르지 않도록 극진히 봉대토록 했다. 며칠 융숭한 대우를 받던 경허는 서장 집에 보관된 금고를 털어 시장에서 술을 사 먹었다. 뿐만 아니라 배고픈 걸인과 주민들에게 돈을 나누어 주었다. 야마모토 서장은 일체 참견하지 않고 그가 하는 대로 하게 했다. 하지만 경허는 며칠 뒤 아무 말 없이 그 집을 나섰다. 야마모토 서장이 극히 애석해 했음은 불문가지이다.
23
혜월(慧月)이 정혜사(定慧寺)에서 공양주를 할 때였다. 혜월은 역력고명 무형단자(歷曆孤明 無形丹子) 화두에 깊게 들었다. 하루는 의심이 매우 솟아 뒷방에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고 일주일을 앉아 무아지경에 들었다. 일주일 뒤 혜월이 홀연히 문을 열고 나와 은사 스님에게 화두를 깨달은 경계를 말했다. 하지만 은사 스님은 고개를 저었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 나로서는 네 공부를 판단해 줄 능력이 없다. 그러니 개심사(開心寺) 경허 스님을 찾아가 네가 공부한 경지를 지도 받도록 하여라.”
혜월은 그 길로 개심사에 찾아가 경허가 있는 선방 앞에 이르렀다. 혜월은 다짜고짜 소리를 질렀다.
“스님!”
그리고 말했다.
“관음보살이 북으로 향한 뜻이 무슨 뜻이 오리까?”
경허는 눈도 뜨지 않고 답했다.
“그것 말고 또?”
혜월은 아무 말 없이 주먹 하나를 높이 들고 서 있었다. 마침내 경허가 말했다.
“앉으라!”
그리고 경허는 불조(佛祖)의 밀전 밀맥(密傳 密脈)을 지도하기 시작했다. 경허와 혜월의 첫 만남이었다.
24
경허가 시봉인 사미 영주 스님을 데리고 충남 공주 계룡면 양화리에 위치한 연천봉 등운암(騰雲庵)에 다녀올 때였다. 연천봉은 계룡산의 한 봉우리로 동학사(東鶴寺)에서 10리 가량 떨어져 있었다. 등운암에서 양화리 방향으로 10리를 더 내려가면 신원사(新元寺)에 이르렀다. 그들은 등운암에서 신원사로 향하고 있었다. 먼 길을 가야 하기에 영주 스님의 걸망은 퍽 두둑했다. 그런데 아래쪽에서 젊은 사람들이 떼를 지어 올라오고 있었다. 그중에는 동학사에서 심부름과 잡일을 하던 양화 김도령이라는 이도 있었다. 영주 스님은 김도령을 알아보고 먼저 말을 건넸다.
“아니, 양화 김도령 아닌가?”
김도령은 그저 영주 스님이 멘 두둑한 걸망을 훑어볼 뿐이었다. 김도령은 경허를 보고 말했다.
“이 사람과 긴밀히 할 얘기가 좀 있구먼요. 잠깐이면 되니 스님은 먼저 내려가시지요. 이 사람도 곧 따라갈 겁니다.”
경허는 영주 스님이 김도령 일행과 잘 아는 사이로 알고 혼자 천천히 산길을 내려왔다. 그러나 한참을 내려와도 영주 스님의 기척이 없어 경허는 다시 영주 스님과 헤어진 곳까지 산을 올랐다. 하지만 영주 스님과 김도령, 한 무리의 젊은 사람들은 그 자리에 없었다. 젊은 사람들은 산적이었다. 산적들은 경허가 하산하자마자 영주 스님의 걸망을 가로챈 것이다.
“있는 돈 모두 내놓아!”
“가진 거라고는 그것밖에 없소이다.”
“돈을 내놓지 않으면 죽는다!”
돈이 없는 영주 스님은 강도 일당에게 두 손 모아 빌 수밖에 없었다.
“김도령! 필요한 돈은 다음번에 만들어 드릴 테니 어서 큰 스님을 따라가게 해주오?”
하지만 그들은 막무가내였다. 그들은 빼앗은 걸망을 풀어헤쳤다. 그러나 그 속에는 노잣돈 몇 푼과 헌 옷가지, 책 몇 권 밖에는 없었다. 산적들은 푼돈을 거두고 영주 스님의 몸까지 샅샅이 수색했지만 돈이 나올 리 만무했다. 산적 무리는 영주스님을 후미진 곳으로 끌고 가 살해했다. 입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시체를 숲속 나뭇가지에 매달고는 자취를 감췄다. 한참 만에 다시 올라온 경허는 그 현장을 미처 찾아내지 못하고 하산할 수밖에 없었다.
동학사까지 혼자 넘어온 경허는 이상한 생각에 갑사(甲寺)에 사람을 시켜 영주 스님이 갑사로 가지 않았는지 물었다. 갑사에서 연락을 받고 영주 스님을 찾았지만 스님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나무꾼이 깊은 숲속에서 나무에 매달린 사람의 시체를 발견했다. 영주 스님의 시체였다. 경찰의 현장조사 결과 시체 주변에 있던 바랑과 소지품은 모두 경허의 것이었다. 경찰은 경허를 의심했다. 이런 사실도 모르고 경허는 해인사 학명 스님을 만나러 경상도 지역으로 향했다. 얼마 되지 않아 죽은 시봉 영주 스님에 대한 소문이 해인사까지 전해졌다. 그러나 경허는 단 한마디의 변명도 없었다. 당시 경찰 수사는 원시적인 수준이었다. 진범을 찾을 수 없는 까닭에 경찰과 주변 사람들은 모두 그를 의심했다. 경허에 대한 수군거림은 그치지 않았다. 주위가 시끄러워지자 경허는 해인사 퇴설당 선방에 내려가 있었다.
만공이 있던 서산 개심사 선방의 입승은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괴팍한 경허 스님께서 정말로 영주를 죽인 걸까? 어쩌다 죽였을까? 스님이 왜 시봉하던 스님을 죽인단 말인가?’궁금증을 이기지 못한 승려는 그 길로 해인사를 찾아 경허를 만났다. 하지만 경허를 보는 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생로병사 자체가 마음에 없는 저 어른이 어찌 영주를 죽였겠는가?’ 다시 돌아와 만공을 만나 인사드리자 만공이 물었다.
“그래, 스승님께서는 잘 계시더냐?”
“큰스님께 소문을 직접 묻고 싶었는데 부처님께 ‘아난존자를 죽였습니까? 수보리를 죽였습니까?’라고 묻는 것과 같아 차마 입을 떼지 못하고 왔습니다.”
만공이 빙긋 웃으며 스승께 문안인사도 드릴 겸 해인사로 내려갔다. 퇴설당 선방에서 경허를 만난 만공이 살짝 여쭈었다.
“영주 사미의 생사는 어떻게 된 겁니까?”
경허가 제자 만공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너하고 나하고만 알자. 영주는 내가 죽였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만공의 경지에도 경허의 말은 뜻밖이었다. 만공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러나 상당한 시일이 지나 공주 경찰서에서 산적 무리를 검거했고 경허의 결백은 밝혀졌다. 경허가 열반의 길을 찾아 함경도 갑산으로 떠나고 만공이 수덕사를 지킬 무렵 산적에 의해 살해됐음이 밝혀진 것이다. 만공은 스승 경허를 조금이나마 의심했던 것을 후회하고 자책하며 사흘 밤낮을 울었다. 경허가 사건에 대해 일체 말이 없었던 까닭, 그것은 어리석고 못나 지은 중생의 죄를 대신해 흔쾌히 형무소에 가겠다고 작정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