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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은 하나님의 뜻인가?
욥기 23:1-17(교회력)
먼저 동영상 한 편을 보시겠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mbrW7uOQYOs&feature=youtu.be
영상의 내용은 보신 대로 이렇습니다. 파티에 참석한 딸이 엄마의 조언에 따라 술을 마시지 않고 음료만 마시고 운전하여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같은 파티에 참석했던 친구 중에 음주운전을 한 친구들이 있었고, 그들의 차량은 술을 마시지 않고 귀가하던 딸의 차를 덮칩니다. 그 사고로 음주운전자는 멀쩡한데, 술을 마시지 않았던 자신은 죽어갑니다. 딸이 엄마에게 이렇게 질문합니다.
“술을 마신 것은 그들인데, 나는 죽어가고 있고, 술을 마신 그들은 걸어 다니고 있는데 나는 죽어가고 있어요. 저는 술을 마시지 않고 운전했어요. 그런데 왜 내가 죽어야 하죠?”
■ 인과응보?
유대인 랍비 쿠시너도 <왜? 착한 사람에게 나쁜 일이 일어날까?>라는 책을 통해서 이와 같은 질문을 합니다. 많은 사람은 ‘착하게 살면 복을 받고, 악하게 살면 벌은 받는다.’고 믿고 싶어합니다. 소위 ‘인과응보’입니다. 이것은 신앙적으로 ‘하나님을 잘 믿으면 복을 받고 하나님 앞에서 죄지으면 벌을 받는다.’는 것으로 표현됩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이런 생각은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날 때부터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아이를 두고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이런 생각은 아주 뿌리가 깊어서 거의 본능적입니다. 목사인 저조차도 원하지 않는 일을 만나거나 힘든 일을 만나면 ‘혹시 내가 하나님께 죄지은 것이 있어서 이러는가?’ 생각하게 됩니다. ‘내가 조금 더 착하게 살았더라면, 조금 더 신앙이 깊었더라면 이런 일이 생기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닌가?’ 이런 생각도 합니다.
여러분도 이런 생각을 하신 적이 있을 겁니다.
최근 인도네시아에서 지진과 쓰나미로 2천 명 이상이 사망하고 5천 명 이상이 실종되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아주 편안하게 말합니다. 인도네시아 인구의 90%에 육박하는 이들이 이슬람교도라서 하나님께서 심판하신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자연재해로 수많은 이들이 고난을 겪을 때마다 하나님의 분노라며 ‘회개’하라고 촉구합니다. 그러나 과연 이것이 ‘하나님의 뜻’일까요? 교회세습으로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 한 대형교회 목사는 ‘2014년 세월호 사건’이 일어났을 때, 주일 설교에서 그 아픈 사건은 한국을 회개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뜻’이요 ‘은혜’라고 했습니다. 왜 죄는 어른들이 짓고 그 벌은 아이들이 받아야 하며, 정작 죄지은 사람들은 멀쩡한데 왜 아이들을 잃은 부모들이 고통을 받아야 하나요? 이것이 정말 하나님의 뜻이라면 하나님은 공평하신 분이시고 정의로운 분이실까요?
■ 교회력본문 / 욥기 23:1-17
20세기에 가장 심오하고 중요한 철학 정신 중 하나로 알려진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 1861-1947)라는 철학자가 있습니다. 그의 사상은 너무 어려워서 그의 저서를 읽다 보면 정말로 ‘머리가 하얘지는’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철학, 신학, 인문과학, 사회과학, 자연과학, 응용과학에 이르기까지 그의 사상이 미치지 않는 영역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는 <진화하는 종교>라는 책에서 욥기에 대해서 ‘고통당하고 있는 사람은 악한 사람이라는 생각에 항거하는 책’이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했습니다. 최근 한 달 동안 저는 ‘고난’에 대해 묵상을 하면서 쿠쉬너의 책 <왜 착한 사람에게 나쁜 일이 생길까?>라는 책을 정독했습니다. 그러면서 ‘고난’에 대한 나름의 신앙 고백적인 체계를 세울 수 있었습니다. 마침, 교회력 본문도 ‘고난’이라는 주제를 풍성하게 담은 욥기입니다.
■ 인생이란?
인생에 대한 많은 정의가 있습니다만, 불교에서는 ‘생노병사’가 인간의 삶이며, 그 삶은 ‘고해(苦海)’라고 봅니다. ‘고통의 바다’, 맞는 이야기 같지만, 고통의 삶 속에도 삶의 기쁨과 환희가 교차하고 인생의 짐이 아무리 버거워도 새 삶에 대한 기대감이 있기에 힘겨워도 기어이 살아갑니다. 아마 새 삶에 대한 기대감보다 인생의 짐이 더 무겁게 느껴지고, 그 굴레를 벗어날 수 없을 것으로 생각한다면 누구도 인생의 짐이 너무 힘겨워서 살 수 없을 것입니다.
인생이 왜 힘듭니까?
비 오는 날이 있고 맑은 날이 있듯이 우리 삶에는 좋은 일도 있고 나쁜 일도 있다는 것을 누구나 다 알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자신이 나쁜 짓을 해서 벌을 받으면 기꺼이 달게 받을 수도 있는 것이 인간입니다. 우리의 삶을 힘들게 하는 것은 ‘정직하게 살았는데도 불구하고 고난을 겪는 경우’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용어로 바꿔 표현하면 ‘하나님을 잘 믿었는데도 불구하고 고난의 상황에 부닥치는 경우’입니다. 고난의 때에 유신론자들은 ‘고통도 하나님의 뜻이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무신론자들은, ‘잘 믿었는데도 고통을 주는 신이라면 섬길 이유가 없다.’고 합니다. 두 주장은 상반된 것 같지만, 같은 생각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인과응보’입니다. 즉, 사람들은 ‘행위에 따라 상벌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받아들이면 유신론자요, 그것을 부정하면 무신론자입니다.
여러분은 유신론자입니까, 무신론자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유신론자입니다. 그러니까 ‘행위에 따라 상벌을 받는다.’는 ‘인과응보’적인 생각을 받아들여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사실, 기독교는 이 생각을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인과응보’는 죄 없는 사람들, 선한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나쁜 일과 악한 사람들이 떵떵거리며 잘 사는 현실을 설명해주지 못합니다. 욥기는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잘 견디었더니 이전 소유보다 갑절(42:10)이나 더 받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책이 아니라, 유신론이나 무신론자들의 주장과는 다른 ‘제3의 길’이 있다는 것을 밝히는 책입니다. 그 ‘제3의 길’이란, “고난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라는 선언입니다.
■ 본문 분석
욥이 고난이 겼자 절친한 친구였던 엘리바스와 빌닷과 소발이 찾아옵니다. 그들은 일주일간의 애통 기간을 지낸 후 욥과 논쟁을 벌입니다. 그 과정에서 친구들은 욥의 불경스러워 보이는 모습에 자못 실망합니다. 오늘 본문은 엘리바스와의 마지막 논쟁에 대한 ‘욥의 대답’입니다.
엘리바스의 신앙은 두 가지 신학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인과응보론’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선과 악의 분량에 따라 축복과 저주를 받으며, 공평하신 하나님은 이에 따라 복도 주시고 고난도 주신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인간의 유한성에 관한 것으로 ‘어느 인간도 의로울 수 없다.’는 것입니다. 결론은, 그러므로 욥이 당하는 고난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욥이 끊임없이 죄가 없다 하고, 억울하다 항변하니 불경스럽다는 것입니다. 욥을 불경스럽다고 판단하면서 자신은 경건하다고 자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욥은 반박합니다.
첫 번째로, 자신이 당하는 고난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라는 것이요, 만일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면 그는 참된 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대답으로 엘리바스는 욥이 하나님을 부정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가 부정한 것은 엘리바스가 숭상하는 신, 인과응보의 신, 인간의 유한성을 극대화하는 신, 당시의 세속적인 신앙이 숭배하는 신을 부정한 것입니다. 즉, 당신들이 믿는 그런 신은 참되 신이 아니고, 내가 믿는 하나님이 참된 분이신데, 그분은 고난을 주시는 분이 아니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바스는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22:21)”며 지속해서 욥을 비난합니다. 그에 대한 욥의 대답이 오늘의 본문입니다.
■ 여호와는 나의 목자 – 시편 23, 시편 121편
시편 23절의 주옥같은 시인의 신앙고백을 잘 아실 것입니다. 목자가 되시는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생각해 보십시다. 목자가 있으면 늑대나 이리가 안 올까요? 목자가 있어도 늑대나 이리는 호시탐탐 양 떼를 노립니다. 그리고 때로는 그들에게 양을 빼앗기기도 합니다. 또 목자가 있으면 길을 잃어버리는 양은 없을까요? 목자가 있어도 길 잃는 양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면, 목자는 필요 없을까요? 아니죠. 목자가 있으므로 늑대와 이리가 마음대로 양 떼를 공격하지 못하고, 설령 공격한다고 해도 목자가 그들을 내어쫓고, 길을 잃으면 목자가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섭니다.
자, 생각의 지평을 넓혀보겠습니다.
우리 삶에 닥쳐오는 고난은 마치 양 떼가 늑대와 이리를 만난 것과도 같은 상황이요, 양 떼와 떨어져 길을 잃은 것과도 같은 상황입니다. 이것은 목자의 뜻이 아니듯, 우리 삶에 다가오는 고난도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고난이 왔을 때 우리에게로 오셔서 지켜주시고, 함께 아파하시며, 고난을 견디며, 위로해주시며 고난을 이기도록 힘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들도 고난에 처할 수 있습니다.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만일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을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으로 생각하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심각한 문제에 직면할 수 있습니다. 첫째, 자신의 죄 때문에 고난을 겪는 것으로 생각하면 아무런 근거 없는 죄의식을 만들어 내게 됩니다. 죄의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둘째, 고난이 극심하여 견딜 수 없으면 자신을 증오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미워하게 됩니다. 그리고 정말 중요한 것은, 그것은 사실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시편 121편 2절에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는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여호와에게서 고난이나 비극이 오는 것이 아니라, 구원이 오고 여호와께서 지켜주신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 맺음말
그러면 성경에 ‘복된 사람들이 받을 복과 악인들이 저지른 일에 대한 대가를 받게 될 것이라는 류의 말씀들’은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의 문제가 생깁니다. 몹시 어려운 문제입니다. 그러나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선한 사람들이 받는 ‘복’이라는 것이 흔히 사람들이 생각하는 물질적인 것만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저는 최근 한 달 동안 고난에 대해 묵상하면서 이런 결론을 얻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고난 중에 ‘임마누엘!’ 하시는 분이시다.” 그러자 이런 일들이 생겼습니다. 첫째, 고난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아니기에 그분을 원망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둘째, 고난의 때에 가장 먼저 제게 오셔서 위로하시고 도와주시는 하나님이시니 오히려 고난 중에 하나님께 감사하는 비결을 알게 되었습니다. 셋째, 하나님께서 도와주시니 고난은 결코 나를 이기지 못할 것이라는 확신입니다.
오늘 읽은 욥기 23장 10절 말씀을 함께 읽어보십시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같이 되어 나오리라.”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습니까? 대체로 고난을 잘 이겨내면 순금같이 된다는 말씀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그런 뜻이 아니라, ‘아무리 하나님께서 나를 철저하게 시험하셔도 내가 순금 같은 사람임을 알게 될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새번역성경으로 보면 의미가 확실합니다.
“하나님은 내가 발 한 번 옮기는 것을 다 알고 계실 터이니, 나를 시험해 보시면 내게 흠이 없다는 것을 아실 수 있으련만!”
그러므로 고난은 자신의 죄 때문에 온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고난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아니다.’라는 확고한 믿음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번역본 개역 성경은 종종 말씀을 이해하기 어렵게 해석해 놓았습니다. 욥기 23:1~3절의 말씀도 개역 성경으로 읽으면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간단하게 요즘 말로 정리하면, “나는 절대로 너의 말에 동의할 수가 없어. 나의 항변은 정당해.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대하시는 것은 공정하지 않아!” 그리하여 화이트 헤드는 욥기에 대해서 ‘고통당하고 있는 사람은 악한 사람이라는 생각에 항거하는 책’이라고 주장한 것입니다. 그리고 16-17절의 말씀을 통해서 욥이 두려워한 것은 고난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을 찾지 못할까 봐,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을까 봐 두려워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고난 중에 계십니까?
그것은 여러분이 악해서 겪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도 아닙니다. 단지 우리는 고난의 때에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를 지켜주실 것이므로 어떤 고난도 이겨낼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지키는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