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가장 가수지망생 대타 가수로 대박나다!
인생에 운이 세 번 찾아온다고 했다. 정말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전혀 뜻밖의 일이 성공을 가져오는 경우는 분명 있는 듯하다. 주현미의 데뷔가 그랬다.
조미미가 빠진 자리 부랴부랴 찾은 대타
주현미라는 이름을 세상에 알린 ‘쌍쌍파티’는 원래 조미미의 것이었다. 그러나 개런티 문제로 조미미는 결국 음반 취입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당시 김연자, 백승태 등의 가수가 메들리로 주가를 올리고 있었고, 오아시스 레코드에서도 조미미 메들리로 붐을 일으켜볼 심산이었다. 조미미가 빠지면서 프로젝트는 김이 샜다. 오아시스 사장은 “시작은 했으니까 누가 하든 끝을 봐야 할 것 아니냐”면서 일을 매듭짖는 차원에서 대타 가수를 찾았다. 이때 문예부장으로 있던 작곡가 박성규가 소위 연습생 한 명을 추천했다. 그가 바로 주현미였다.
당시 약사로 일하고 있던 주현미는 한때 소녀 가장이었다. 고교 시절 부모님과 떨어져 살면서 어린 동생을 돌봐야 했는데, 아버지가 사업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생활비가 제때 오지 않아 쉰밥으로 죽을 끓여먹은 적도 있다고 한다. 약대에 진학한 것도 어서 돈을 벌어 어머니를 편안하게 모시고 싶어서였다. 사는 게 팍팍해 가수의 꿈에 올인하지 못했지만 그는 소위 ‘연습생’으로 가요계 언저리를 맴돌았다. 그런 그에게 뜻하지 않은 기회가 찾아온 것이었다.
그리하여 1984년 12월, 우여곡절 끝에 세상에 선을 보인 ‘쌍쌍파티’는 뜻밖의 히트를 쳤다. 주현미의 간드러지면서도 파워가 있는 목소리와 김준규의 미성(美聲)이 어우려져 사람들의 마음을 파고들었던 것이다. 당시 ‘쌍쌍파티’가 흘러나오지 않는 다방이나 식당이 없다고 할 정도로 어디서든 주현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당시 시장의 노점상을 비롯한 소매상들을 통해서 하루 평균 1만여 개가 팔려나갔다고 한다.
아들 조PD 대타로 공연, 역시 엄마만큼 대박!
주현미가 대구를 방문했을 때를 잊을 수 있다. 처음 본 인상은 ‘순진한 아가씨’였다. 약사 출신이라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그렇게 다소곳하고 순수할 수가 없었다. 속으로 ‘저렇게 숫기가 없어서 무대에선 어떻게 노래를 부르나’ 걱정이 될 정도였다. 그러나 웬걸, 막상 무대에 오르니 전사로 변신했다. 자신만의 카리스마를 객석을 압도하는 모습을 보면서 ‘타고 났구나!’하고 속으로 감탄했다.
그 사이 불미스러운 일도 있었다. 바로 그녀에게 행운을 쥐어준 작곡가 박성규와 관련된 일이었다. 박성규는 ‘애정이 꽃피던 시절’, ‘해변의 여인’ 등을 작곡했는데, 주현미의 매니저로도 일했다. 그는 술을 좋아했는데, 이 술 때문에 사고를 쳤다. 90년대 초반 주현미와 상의도 없이 나이트 업주들과 출연계약을 하고 받은 돈을 사적으로 유용해버렸다. 그 일로 매니저 일을 그만두었다. 인연이 악연으로 변한 셈이었지만, 주현미는 그래도 은덕을 잊지 않고 박성규가 어려울 때마다 금전적으로 도움을 주었다.
주현미와 관련해 또 하나 흥미로운 사실은 아들도 노래를 잘한다는 사실이다. 알려진 대로 주현미의 남편은 미국 공연에서 만난 록그룹 ‘비상구’의 리드보컬인 임동신과 결혼했다. 부모 모두 가수인 만큼 아들도 노래를 잘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아들의 노래 실력을 확인한 것은 2007년 즈음이었다. 당시 주현미는 조PD와 ‘사랑한다’라는 제목의 듀엣 곡을 발표한 후 대구에 공연 일정을 잡았다. 그런데 조PD가 개인적인 사정으로 공연에 불참하게 됐다. 이때 아들이 대타를 자처하고 나섰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주현미 자신도 “불안했는데 생각보다 훨씬 잘해줬다”면서 대견해했다. 대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가수로 데뷔할 생각은 없다고 하지만 누가 알겠는가, 그의 어머니처럼 우연한 기회에 가수가 될지. 세상일은 알 수 없다.
주현미는 한 번 인기를 얻은 후 하향세를 탄 적이 없다. 지금껏 전성기의 인기를 그대로 가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얼핏 여린 듯해 보이면서도 음악에 관한 한 혼신의 열정을 다하는 태도가 식지 않는 인기의 비결이 아닌가 싶다. 얼마 전 다문화가정을 돕기 위한 앨범을 냈다고 한다. 뜻밖의 대박이 다시 한번 찾아오길 기원한다. *
◆ 남강일 선생은 60년대부터 우리 지역에서 MC로 활동한 한국 가요계의 산 증인입니다. 지금도 연예기획자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그는 특히 나훈아의 40년 지기(知己)로 유명합니다. 나훈아의 극장 데뷔 무대를 함께했으며, 81년 컴백 이후 대구·경북 지역 콘서트가 열릴 때마다 그림자처럼 그의 곁을 지켰습니다. 그를 통해 가요계의 뒷이야기, 그 희로애락의 역사를 돌아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