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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 /사진/그림 스크랩 <<삼강행실도>>에 나타난 효
晩塾 추천 0 조회 41 09.10.25 20:2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삼강행실도>>에 나타난 효

  <<삼강행실도>>는 세종 16년 1434년에 직제학 설순 등이 왕명에 의하여 우리나라와 중국의 서적에서 군신, 부자, 부부의 삼강에 모범이 될만한 충신, 효자, 열녀의 행실을 모아 만든 책이다. 이 책은 1428년 진주에 사는 金禾가 아버지를 살해한 사건에 대해서 강상죄로 엄벌하자는 주장이 논의되었을 때 세종이 엄벌에 앞서 세상에 효행의 풍습을 널리 알릴 수 있는 서적을 간포해서 국민에게 일상 읽게 하는 것이 좋겠다는 취지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한 마디로 <<삼강행실도>>는 교민화속하기 위해 내놓은 것이다. 이 책의 敎旨는 다음과 같다.
  "宣德(명나라 선종) 9년(1434년, 세종 16년) 4월 26일 도승지 신 안숭선이 삼가 교지를 받드니 이러하였다. '내가 생각하건대 하늘이 내려 준 착한 성품과 사람이 지키는 떳떳한 도리는 生民으 로서는 누구나 다 같은 것이며, 인륜을 돈독히하여 아름다운 풍속을 이루는 것은 나라를 가진 자 의 先務이다. 그런데 세상의 도리가 이미 떨어지고 순박한 풍속이 예전과 같지 않아 天經과 人紀 가 점점 진실을 잃고 있어, 신하로서 신하의 도리를 다하지 못하고 아들로서 아들의 직분을 다 이바지하지 못하고, 아내로서 아내의 덕을 온전히 하지 못하는 자가 간혹 있으니, 진실로 탄식할 일이다. 생각하면 옛날 聖帝, 明王도 도를 실천하고 몸소 가르치며 본보기가 되어 앞장서서 인도 하였으며 그 당시는 집집마다 封함을 받을 수 있을 정도였다. 돌아 보건대 나는 덕이 부족하여 비록 감히 그 만분의 일도 바랄 수 없지만 간절한 뜻은 가지고 있다. 그래서 오직 五典을 돈독히 하여 五敎를 펴는 도리에 대해서 밤낮으로 마음을 다하고 있으나, 한편 생각하면 어리석은 백성 이 趨向에 어두운데, 따라서 본받을 바도 없었다. 그래서 유신에게 명하여 고금의 효자, 충신, 열 녀 중에서 뛰어나게 본받을 만한 자를 가려서 편집하되, 일에 따라 그 사실을 기록하고 아울러 시찬을 덧붙이게 하였으나, 그래도 어리석은 남녀들이 쉽게 이해하지 못할 것을 염려하여 그림을 그려서 붙이고 이름을 <<삼강행실>>이라하여 이를 인쇄하여 널리 반포하는 바이다. 이것은 아 마 거리의 아이와 시골의 아낙네까지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니, 펴 보고 읽는 가운데 감동하여 분발하는 바가 있게 되면, 이끌어 가르치며 開導하는 방법에 있어서 작은 도움이나마 없지 않을 것이다. 다만 서민은 문자를 알지 못하니, 책은 비록 나누어 주었더라도 남이 가르쳐 주지 아니하 면 어떻게 그 뜻을 알아서 분발하는 마음을 일으킬 수 있겠는가? 내가 보건대 <<주례>>에 '外史는 책이름을 사방에 알리는 일을 맡아서 사방의 백성들로 하여금 책의 문자를 알아 이를 읽을 수 있게 한다' 하였으니, 이제 이를 모방하여 서울과 지방으로 하여금 회유하는 방법을 다하게 해 야 할 것이다. 서울은 한성부 오부, 지방은 감사, 수령이 학식이 있는 자를 널리 구하여 적극적으 로 권장하되 귀천을 막론하고 항상 가르치고 익히게 하라. 부녀들까지도 친속으로 하여금 성실하 게 가르쳐서 모두 다 환하게 알도록 하여, 입으로 외우고 마음으로 생각하여 아침에 더 배우고 저녁에 더 진행할 것 같으면 누구나 그 천성의 본연을 감발하게 되어, 아들된 지는 그 효도를 다 할 것을 생각하고, 신하가 된 자는 그 충성을 다할 것을 생각하며, 지아비와 지어미가 된 자도 모 두 그 도리를 다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이 올바른 법을 알아 스스로 새롭게 하려는 뜻을 떨쳐 일으킬 것이며 교화가 행해지고, 풍속이 아름다워져서 더욱 至治의 風敎에 이르게 될 것이니, 오직 너 예조는 나의 지극한 마음을 체득하여 中外에 효유하라."
  <<삼강행실도>>는 삼강행실효자도, 삼강행실충신도, 삼강행실열녀도의 3부작으로 되어 있다. 효자도에는 순임금의 큰 효성을 비롯하여 역대 효자 110명을, 충신도에는 용봉이 간하다 죽다 외 에 112명의 충신을, 열녀도에는 아황, 여영이 상강에서 죽다 외에 94명의 열녀를 소개하고 있다. 그 중 효자도에는 중국인과 우리나라 사람을 합해서 모두 111명의 효행사례가 실려 있는데, 그 내용은 크게 부모가 살아계실 때의 효행과 돌아가신 부모에 대한 효행으로 나눌 수 있고, 또 그 각각을 몇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부모가 살아 계실 때의 효행으로는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부모를 극진히 봉양한 사례, 부모 가 병이 났을 때 지극한 정성으로 간호한 사례, 부모가 위험에 처했을 때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 고 부모를 구한 사례들을 들고 있다. 또한 돌아가신 부모에 대한 효행으로는 부모를 죽인 원수에 게 복수하거나 항거하는 사례, 부모의 유해를 마치 살아계실 때처럼 정성스럽게 모신 사례, 부모 가 돌아가신 후에 애틋하게 사모하거나 행동을 근신하는 사례들이다. 


  중국 효자의 경우 그 제목만 적으면 다음과 같다.
  순임금의 큰 효성, 문왕의 문안, 문제가 약을 맛보다, 백기가 서리를 밟다, 증삼이 뜻을 받들어 봉양하다, 민손의 홑옷, 자로가 쌀을 져오다, 약정이 발을 다치다, 양향이 범을 움켜잡다, 백유가 매를 맞고 울다, 노래의 색동옷, 고어가 길에서 통곡하다, 제영이 아버지를 속이다, 진씨의 시어머 니 봉양, 채순이 오디를 따다, 유평이 도둑을 감동시키다, 염범이 유골을 져오다, 강혁의 큰 효성, 설포의 쓰레질, 강시가 잉어를 나오게 하다, 효아가 주검을 안다, 신도의 애절한 감동, 모용의 반 찬 장만, 황향이 베개에 부채질하다, 정남이 목상을 새기다, 동영이 돈을 빌다, 고초가 관에 엎드 리다, 포산이 광주리를 지다, 종승이 대나무를 나게 하다, 육적이 귤을 품다, 곽거가 아들을 묻다, 원각이 아버지를 깨우치다, 두효가 물고기를 보내다, 맹희가 금을 얻다, 왕부가 시를 폐하다, 맹종 이 대숲에서 울다, 왕상이 얼음을 갈라지게 하다, 성언이 굼벵이 때문에 울다, 유은이 꿈에 곡식 을 얻다, 허자가 짐승을 묻다, 왕연이 물고기를 나오게 하다, 반종이 아버지를 구하다, 법종이 유 해를 찾다, 오맹이 모기에게 물리다, 왕팽이 샘을 솟게 하다, 자평이 무덤을 만들다, 허지가 신명 을 감동시키다, 검루가 똥을 맛보다, 숙겸이 약을 구하다, 길분이 아버지를 대신하다, 자여가 강물 을 물러나게 하다, 불해가 주검을 들추다, 왕숭이 우박을 그치게 하다, 유하의 효덕, 보림이 개를 울리다, 효숙이 초상을 그리다, 노조가 어머니에게 순종하다, 소현이 뼈에 피를 적시다, 계전이 어 머니를 따라 물에 빠지다, 허탄이 맹수를 치다, 원사가 이리를 따르게 하다, 인걸이 구름을 바라 보다, 문정이 광을 파다, 의부가 다리 살을 베다, 당씨가 시어머니에게 젖을 먹이다, 유정의 분향, 명달이 아들을 팔다, 두고가 어버이를 감동시키다, 문양을 까마귀가 도와주다, 곽종이 장수를 빌 다, 수창이 어머니를 찾다, 서적의 독실한 행실, 소송이 어머니를 구하다, 첨씨의 딸이 도둑을 속 이다, 조효부가 아들을 팔다, 오이가 화를 면하다, 왕윤이 아버지를 안다, 왕천이 아버지의 수명을 늘리다, 양호가 하늘을 감동시키다, 황빈이 아버지를 꿈꾸다, 소조가 아버지를 지키다, 탕임이 얼 음을 구하려고 울다, 손억이 어버이를 구하다, 오우가 칼을 빼았다, 주악이 아버지와 함께 죽다, 왕흥이 얼음에 눕다, 진씨가 가슴이 두근거리다, 유씨가 시어머니에게 효도하다. 이상 중국의 효 자, 효부는 모두 88명이다. 이에 반해 우리나라의 효자, 효부는 23명인데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이 중 이미 앞에서 설명한 사람은 내용을 생략할 것이다)

  1) 지은이 몸을 팔다(知恩賣身, 신라)
  2) 설씨가 거울을 쪼개다(薛氏分鏡, 신라)
  3) 향덕이 넓적다리를 베다(向德 , 백제)
  4) 성각의 어머니 봉양(聖覺養母, 백제)
  5) 위초가 다리 살을 베다(尉貂割股, 고려)

  산원 동정 위초는 그 아버지 위영성(尉永成)이 악한 병을 앓았는데, 의원이 이르기를 "아들의 고기를 쓰면 고칠 수 있다."하니, 위초가 곧 자기 다리의 살을 베어 만두 속에 넣어 먹였다. 임금 이 이 사실을 듣고 재상 문준 등에게 명하여 그 포상을 의논케 하니 문준 등이 아뢰기를, "당나라 안풍현의 백성 이흥(李興)은 그 애비가 악한 병에 걸렸을 때에 이흥이 스스로 다리의 살을 베어 다른 것으로 속여서 먹였는데, 자사가 이 일을 아뢰어 그 마을 어귀의 문에 정표하였 습니다. 이제 위초는 본디 거란의 추한 종족이고 글도 모르는데, 능히 그 몸을 아끼지 않고 효성 을 다하였으니 옛 법대로 마을 어귀의 문에 정표해야 마땅합니다."하니, 그리하라고 분부하였다.

  6) 서능이 개구리를 얻다(徐稜得蛙, 고려)
  서능은 장성 사람이다. 조용히 숨어 살며,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어머니가 일찍이 목에 큰 종기 가 나서 몹시 위태하였으므로, 서능이 의원을 맞아 진찰케 하였더니 의원이 말하기를, "반드시 산 개구리를 함께 넣어 약을 제조해야 고칠 수 있습니다."하니, 서능이 울며 말하기를 "지금이 섣달 인데 어떻게 산 개구리를 구하겠습니까? 어머니의 병환은 거의 어찌할 도리가 없겠습니다." 하고 는 한참 동안 소리 내어 우니, 의원이 말하기를,"산 개구리는 없더라도 우선 있는 것만으로 약을 지어서 시험해 봅시다."하고, 나무 밑에서 불을 피워 약을 다리는데, 문득 나무 위로부터 솥 속으 로 떨어지는 것이 있어서 가보니, 곧 산 개구리었다. 의원이 놀라며 말하기를 "그대의 효성이 하 늘을 감동시켜 하늘이 내려 준 것이니, 그대 모친의 병은 꼭 나을 것입니다."하였다. 드디어 약을 지어 종기에 붙이니 과연 곧 나았다.

  7) 문충의 문안(文忠定省, 고려)
  문충은 지극한 효성으로 어머니를 섬겼다. 서울에서 30리 떨어진 오관산 영통사 산골에 살았는 데,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하여 벼슬살이를 하되, 아침에 나가고 저녁이면 돌아와, 나갈 때 고하고 돌아와 뵙는 일을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어머니가 늙은 것을 한탄하여 목계가(木?歌)를 지었다.
  '나무 끝에 작은 당닭 새겨 만들어
  젓갈로 집어다 벽에다 걸어 놨네.
  이 새가 꼬끼오 하고 때 알릴제야
  어머니의 모습이 저뭇하소서'

  8)누백이 범을 잡다(婁伯捕虎, 고려) 최누백은 고려 때 수원의 아전 상자의 아들이다. 어느 날 상자는 사냥을 나갔다가 범에게 물려 죽었다. 이때 누백의 나이는 15세였는데 산으로 올라가 그 범을 잡으려고 하자 어머니가 말리므 로 누백이 말하였다.
  "어머니! 어떻게 아버지 원수를 갚지 않고 이대로 견딘단 말씀입니까."
  이렇게 말하면서 즉시 도끼를 메고 범의 발자국을 따르니, 이때 범은 사람 하나를 다 먹은 뒤라, 배가 불러 누워 잠이 들었다. 누백은 그 앞으로 달려들어 범을 꾸짖는다.
  "이 놈! 네가 우리 아버지를 해쳤으니 나는 이제 네 고기를 씹어 먹어야겠다."
  이 말에 범은 겨우 눈을 떴으나, 꼬리를 치면서 그대로 넓죽 배를 깔고 엎드렸다. 누백은 힘껏 도끼를 내리쳤다. 그리고 범을 깔고 앉아 그 배를 갈라서 아버지의 뼈와 살을 가지고 돌아와 깨 끗한 그릇에 담았다. 또 범의 몸뚱이는 큰 항아리에 넣어 냇가에 묻어 두었다.
  누백은 아버지를 홍법산 서쪽에 장례를 지내고는 무덤곁에 여막을 짓고 살았다. 그러던 어느날 의 일이다. 잠시 잠이 들었는데 꿈에 아버지가 나타나더니 글 한 수를 읊는 것이었다.
  '가시 덩굴 헤치고 효자 사는 집 당도하니
  마음에 감동됨이 많아 눈물 흘려 그치지 않네.
  흙 져다가 날마다 무덤 위에 얹으니
  이 뜻 아는 건 오직 밝은 달과 맑은 바람뿐.
  살아서 봉양하고 죽어서는 잘 지켜주니 그 누가 효도의 시종이 없다 하겠는가.'   읊기를 마치자 아버지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거상을 마치고는 묻어두었던 범의 고기를 꺼내어 모두 먹었다.

  9)희삼이 어머니를 보호하다(希參 母, 고려) 조희삼은 수성 사람이다. 어머니를 부축하고 왜란을 피해 낙동강에 이르니, 배가 없어 건너지 못 하는데, 도둑의 무리가 뒤쫓아 왔다. 어머니가 말하기를, "나는 늙고 병들었으므로 죽어도 후회할 것이 없으니, 너는 말을 달려 죽음을 면해야 한다."하니, 조희삼이 말하기를 "어머니가 계신데 자 식이 어디로 가겠습니까?"하고, 드디어 그 어머니와 함께 밭 사이에 엎드렸다. 도둑들이 칼을 뽑 아 그 어머니를 치려 하는데 조희삼이 몸으로 막아 도둑에게 살해되고, 어머니는 죽음을 면하였 다.

  10)신씨가 도둑의 목을 조르다(辛氏扼賊, 고려)
  신씨는 연산 사람이다. 낭장 신사천(辛斯 )의 딸인데 천성이 침착하고 굳세어 식견과 도량이 있 었다. 홍무 임술년 6월에 왜적 50여명이 말을 타고 연산을 습격해왔다. 신사천이 가족을 이끌고 피란하여 멸포를 건너려 하는데, 도둑들이 매우 급히 쫓아왔다. 신사천의 가족이 이미 다 배 위에 오르고 두 아들 신식, 신열이 배를 앞뒤에서 밀고 땅기는데, 때마침 여름 장마 물이 한창 불었으 므로 물결은 빨라서 닻줄이 끊어져 배가 홀연 언덕에 닿았다. 도둑들이 쫓아와서 신사천을 쏘아 쓰러뜨리고 배 위로 올라와 다시 창으로 찌르고는 신씨를 잡아 배에서 데려가려 하였다. 신씨가 불응하자 도둑이 칼을 뽑아 신씨를 겨누니, 신씨가 크게 꾸짖어 말하기를 "도둑들아! 네가 나를 죽일테면 죽여라. 네가 이미 우리 아버지를 죽였으므로 하늘 아래 함께 살 수 없는 원수이니 차 라리 죽을지언정 너를 따르지는 않겠다." 하고 드디어 적의 목을 누르고 발로 차서 넘어뜨렸다. 적이 성을 내어 살해하니 그 때 20세였다. 전법판서 조준이 그 때 체복방왜사로서 이 사실을 갖 추어 사관에 이첩하고 조정에 아뢰어 비석을 세워 사실을 기록하고 정표하였다.

  11) 반전이 아버지를 사다(潘 買父, 고려) 산원 반전은 안음 사람이다. 홍무 무진년에 왜적이 돌연히 침입하여 그 아버지를 잡아갔는데, 반 전이 은대와 은괴를 가지고 왜적의 속으로 달려가서 아버지를 사왔다.

  12) 충개가 손가락을 자르다(蟲介斷指, 조선) 충개는 가주 사람이며 중랑장 김사안가문의 딸이다. 16세 때에 그 어머니가 간질을 얻어 여러 해가 되어도 낫지 않았는데 충개가 산 사람의 뼈가 약이 된다는 말을 듣고 곧 오른손의 무명지를 잘라 국에 넣?끓여서 바치니, 어머니의 병이 곧 나았다. 찰리사가 조정에 아뢰니 포상하고 정표 하였다.

  13) 석씨가 시어머니를 업다(石氏負姑, 조선)
  석씨는 의령 사람이며 심치의 아내이다. 20세 때에 지아비가 죽었는데 시어머니를 효성으로 섬 겼다. 그 어버지가 개가시키려 하였으나 사양하여 말하기를, "지아비가 외아들로 일찍 죽었는데, 아버지께서 제 뜻을 빼앗으면 죽은 지아비의 병든 어머니를 누가 봉양하겠습니까?"하고, 드디어 명에 따르지 않고, 시어머니를 더욱 성실하게 섬겼으며, 시어머니가 뒷간에 갈 때마다 몸소 업어 갔다.

  14) 임씨가 시어머니를 구해내다(林氏救姑, 조선)
  임씨는 태인 사람이며 사정 박조의 아내이다. 지아비는 당시 서울에 있었는데, 한밤에 집에 불이 났다. 시어머니가 병으로 일어나지 못하므로, 임씨가 곧장 불길 속으로 들어가 시어머니를 업고 7 나왔는데,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불에 데어 머리를 그을고 팔이 데었으나 모두 죽음만은 면하였다.

  15) 자강이 무덤에 엎드리다(自强伏塚, 조선)
  김자강은 성주 사람이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었다. 어머니를 받들매 승순하여 한 번도 어기는 일이 없었다. 어머니도 늙어서 죽으니 자강은 불법을 쓰지 않고 한결같이 가례에 의해서 장사를 치르고, 아버지와 합장했다. 그러고는 3년 동안 여막에서 살면서 거상을 마쳤다. 3년 거상이 지났 건만 또다시 아버지를 위해서 3년 동안 더 여막에서 살려고 하매 처족들이 억지로 자강을 붙들고 집으로 돌아가게 하려고 불을 질렀다. 자강은 여막이 타는 불빛을 돌아다보자 하늘을 향해 부르 짖고 땅을 치면서, 데리고 돌아가려던 좌우의 사람들을 물리치고 도로 무덤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는 사흘 동안 무덤 앞에 엎드린 채 일어나지 않았다. 이것을 보고 처족들도 그의 효성에 감동하 여 다시 여막을 지어주어 살도록 했다. 이리하여 자강은 다시 3년 동안을 여기에 살았으나 처음 어머니 초상 때와 똑같았다.

  16) 석진이 손가락을 자르다(石珍斷指, 조선)
  유석진은 고산현의 아전이었다. 아버지 천을이 악질에 걸리어 날마다 한번씩 발작을 하는데, 기 절해 나자빠지니 사람으로서 차마 볼 수가 없었다. 석진은 밤낮으로 곁에 모시고 있어 조금도 게 을리하지 않았으며, 하늘을 향해 울면서 사방으로 의원과 약을 구했다. 어느날 어떤 사람이 그에 게 말하기를, '그 병에는 살아 있는 사람의 뼈를 피에 섞어서 먹이면 낫는다'고 하였다. 석진은 즉 시 자기의 왼편 무명지를 잘라 그 말대로 이것을 피에 섞어서 그 아버지에게 먹이니 병이 씻은듯 이 나았다.

  17) 귀진이 손가락을 자르다(貴珍斷指, 조선)
  양귀진은 옹진 사람이며 양인길의 아들이다. 9세 때에 그 아버지가 간질을 얻어 한 달에 두세 번씩 발작하였다. 양귀진이 '손가락을 잘라 약으로 쓰면 고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스스로 넷째 손가락을 잘라 약을 만들어 바치니, 아버지의 병이 곧 나았다. 감사가 조정에 아뢰어 정문하고 부 역을 면제하였다.

  18) 박선의 여묘살이(朴善廬墓, 조선)
  박선은 안악 사람이다. 13세에 아버지가 죽었는데 무덤 곁에서 여묘살이 하면서 아침 저녁의 상 식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스스로 돌을 져다가 담을 쌓고 3년을 마쳤다.

  19) 은시가 손가락을 자르다(恩時斷指, 조선)
  은시는 태천사는 수순 광우의 딸이다. 21세 때에 그 아버지가 악한 질병을 얻어 한달에 두 번씩 발작하는데 은시가 '그늘에 말린 자식의 손가락을 약으로 쓰면 병이 낫는다'는 말을 듣고 드디어 왼손의 넷째 손각락을 스스로 잘라서 술을 타서 바쳤더니, 아버지의 병이 곧 나았다. 감사가 임금 에게 아뢰어 그 마을 어귀의 문에 정표하고 요역을 면제하였다.

  20) 사월이 손가락을 자르다(四月斷指, 조선)
  사월은 곽산 사는 군인 김말건의 딸이다. 19세 때에 그 어머니가 광역병을 알았는데, 1년이 지나 도 낫지 않고 봄과 가을이면 더욱 심하여 지아비에게 버림받았다. 사월이 '산 사람의 뼈가 약이 된다'는 말을 듣고 드디어 스스로 손가락을 잘라서 약을 만들어 올렸다. 감사가 이 사실을 임금에 게 아뢰어 정문하고 그 집의 부세를 면제하였다.

  21) 성무가 물고기를 구하다(成茂求魚, 조선)
  낭장 이성무는 강릉 사람이다. 아버지는 죽고 어머니는 79세였는데 이성무가 그의 아우 선무, 춘 무, 양무와 함께 그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영락 정유년에 어머니가 병을 얻어 수개월 동안 밥을 먹지 못하고 잉어 회를 먹고 싶어 하므로 이성무가 여러 아우와 고이 소리내어 울며, 함께 강가 로 가서 얼음을 뚫고 구하였더니 한 마리의 잉어가 뛰어 나왔다. 가지고 돌아와 어머니에게 바치 니 어머니가 먹고 몹시 기뻐하고 병이 드디어 나았다.

  22)은보가 까마귀를 감동시키다(殷保感鳥, 조선)
  윤은보와 서즐은 지례현 사람이다. 이들은 같은 마을 지의주사 장지도에게 함께 글을 배웠다. 어느날 이들은 이런 의견에 대해 토론했다. "사람이란 임금과 스승과 부모를 마찬가지로 섬긴다고 하지 않았는가."
  "옳은 말일세. 그런데 우리 선생님에게는 자식이 없지 않은가. 그러니 우리 두 사람이 선생님을 자식대신 섬겨드려야 하지 않겠는가."
  이리하여 이들은 좋은 음식을 보면 우선 이것을 갖다가 스승에게 올리고, 명일을 만나면 술과 안주를 갖추어 꼭 아버지 봉양하듯이 하였다. 그러다가 장지도가 세상을 떠나니, 이 두 사람은 각 기 부모 앞에 나아가 선생님 무덤 옆에 여막을 짓고 살기를 청하였다. 부모들도 이 뜻을 옳게 여 겨 승락하니 두 사람은 검은 관에 요질을 띠고 무덤 옆에 살면서 손수 밥을 지어 조석 제사를 올 렸다.
  윤은보의 아버지가 병들어 자리에 눕게 되었다. 은보는 즉시 집으로 돌아가 약을 달여 올리면서 잠시도 옷의 띠를 끄르지 않았다. 아버지 병이 나으매 다시 스승의 여막에 돌아온 뒤 한 달이 지 난 어느날 밤 은보는 이상한 꿈을 꾸었다. 은보는 즉시 집으로 돌아오니 과연 아버지는 그가 꿈 을 꾸던 날부터 다시 병이 시작하여 열흘도 못되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은보는 아침 저녁으로 땅을 치며 호곡하면서 잠시도 아버지 곁을 떠나지 않았다. 장례를 치른 뒤에는 아버지 무덤 곁에 여막을 짓고 거처하였다. 어느날 모진 바람이 불어 책상 위에 놓아둔 향합을 잃어버렸다. 그런지 몇 달이 지나서였다. 어느날 까마귀 한 마리가 무엇인가 물어다가 무 덤 앞에 놓고 날아갔다. 은보가 이상히 여겨 즉시 쫓아가 보니 그것은 잃었던 향합이었다. 초하루 보름이면 꼭 스승의 무덤에 가서 제사를 지냈다. 서즐도 역시 스승의 여막에서 3년을 마 치었다. 선덕 임자년에 임금께서 이 일을 듣고 윤은보와 서즐에게 나란히 정문을 세우고 벼슬을 내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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