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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의 향기(1) 다실로 초대합니다
다실과 응접실
우선 여러분을 다실로 초대합니다. 여러분 중에 다실과 응접실을 혼동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서입니다. 하긴 차문화가 쇠퇴하여 차(茶)가 무엇인지조차 모호해진 마당에 응접실에서 차를 마신들 누가 뭐라 하겠습니까. 다만 차 이야기를 하려하니 다실의 존재의미를 되새겨볼 필요가 있어 꺼내는 이야기입니다.
응접실은 손님을 맞이하고 접대하는 방입니다. 주인의 경제형편이나 취향에 따라 얼마든지 호화롭게 꾸미고 치장 할 수 있는 방입니다. 의복이나 악세서리 착용에 구애받을 일이 없으며 기호품도 마음대로 선택하여 즐길 수 있습니다.
다실은 차 마시기 적합하게 꾸며진 방입니다. 차를 마시는 공간은 소박하고 단조로운 분위기가 좋습니다. 복잡한 업무, 분주한 마음 등 여러가지 생활잡념에 쫒기는 사람들이 잠시 모든 것을 잊고 쉬어갈 수 있도록 편안하고 여유로와야 합니다.
마음모아 차 한 잔 우려 마시며 명상을 통해 자기를 돌아보는 시간 - 화병에 꽂힌 한송이 꽃에 자기 모습을 비쳐보고 음악이나 바람소리에 마음을 실어보는 시간 - 그것은 인생을 아름답게 가꾸고 다듬는 훈련의 시간입니다. 그래서 차는 혼자 마시는 것을 선(禪)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때로 가족과 벗과 이웃을 통해 확인됩니다. 마찬가지로 다인들은 다실에서 만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심미안을 기르고 기쁜 소식을 전하며 양식(良識)을 나누고 슬픈일들을 위로합니다. 결코 고루지 못한 말을 던지거나 남을 비웃는 행위를 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다실은 혼자 있을 때는 선방(禪房)이요, 둘 이상이 되면 세파에 때묻고 거칠어진 마음을 순화시키는 도량(道場)이 됩니다.
어렵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사람이란 평소 길들이기 나름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좋은 말만 하기. 좋은 습관 갖기. 상대의 좋은 점만 발견하기. 좋은 향기 가까이하기를 반복하면 어떤 결과가 올까요. 아마도 삶 자체가 하나의 예술이 될 것입니다. 다실은 이렇게 아름다워지는 훈련을 통해 자연과 예술과 인간심성의 삼위 일체를 구하는 방입니다.
차를 일컫는 이름들
이제 차(茶)를 소개합니다. 그런데 차에 대해서도 혼동하는 분이 많습니다. 마시는 음료는 모두 차라고 말합니다. 오렌지 쥬스나 코코아도 차요, 심지어 커피도 차의 일종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응접실을 다실이라 말하는 것보다 더 큰 무지(無知)입니다.
커피는 커피나무 열매가 원료요 세계 어디를 가나 커피라고 부릅니다. 마찬가지로 차는 차나무 잎이 원료이며, 지구촌 어디에서나 '차'라고 부릅니다. 둘 다 고유명사인 것입니다.
중국 남부지방 방언에 차를 '떼'라고 하는 곳이 있는데, 그 발음이 사차지로(絲茶之路:실크로드)를 타고 유럽으로 건너 가 티(Tea)라는 발음을 만들었을 뿐입니다. 폴란드에서 차를 "테"라고 하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시베리아나 몽골, 말레이나 인도네시아에서도 테라고 부릅니다. 일본 사람들은 앞에 경칭을 붙여 오차(御茶)라고 부릅니다. 건강을 좌우하는 음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라고도 부르고 "차"라고도 부릅니다.
'티(Tea)'하면 홍차를 연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녹차를 마시지않는 지역에서는 블랙티를 줄여서 그냥 티라고 부릅니다. 본디는 "블랙티(Black Tea)"입니다. 블랙티의 유래는 17세기 차가 유럽에 처음 소개될 때의 일화가 있습니다. 동양의 차가 네델란드 상선에 실린 것은 17세기 초입니다. 당시는 운하가 없어 적도를 넘고 희망봉을 돌아 다시 적도를 통과해 유럽에 닿았습니다.
처음 배에 실을 때는 녹차였지만 운반되는 사이 완전 발효되어 새까맣게 변했습니다. 선주는 낙심천만이었습니다. 기왕 버릴 것 뜨거운 물에 우려나 보자며 넣으니 우리니 빨갛게 우러나는 것이 맛이 괜찮았습니다. 그들은 서둘러 차에 블랙티란 이름을 붙여 팔았습니다. 그것이 홍차입니다. 동양에서는 진작부터 발효차가 있었고 우린 물이 붉다하여 홍차(紅茶)라 불렀습니다. 결국 육로로 건너간 차는 Tea가 되었고 해로로 전해진 차는 Black Tea가 된 셈입니다.
커피를 브라질産 콜롬비아産으로 분류하듯 차도 산지별로 분류하기는 합니다. 또 나라마다 차에 붙이는 특징있는 대명사가 있습니다.
하지만 커피나무 열매가 아닌 것을 커피라고 하지않듯 차나무 잎이 아닌 것을 차라고 하는 나라는 없습니다. 차와 커피는 동양과 서양의 구별 만큼이나 뚜렷하게 대립되는 상징 같습니다만, 알고보면 커피 소비량은 많지않습니다. 차의 소비가 월등히 많고 선진 사회는 물론 원시적 생활을 하는 아프리카인까지 차를 마시지 않는 민족은 없습니다. 건강과 정서 생활에 없어서는 안 되는 음료이기 때문입니다.
한국차의 대명사는 작설(雀舌)
차를 생산하는 나라들에는 나름대로 대명사가 있다고 했습니다.
오룡차(烏龍茶)는 타이완이요, 용정(龍井)·철관음(鐵觀音)은 중국이고, 옥로차(玉露茶)는 일본, 립톤 하면 영국입니다. 우리나라 차의 대명사는 작설(雀舌)입니다. 차 만들기 적합한 잎의 부드럽고 연하기가 참새 혀와 같다하여 작설차(雀舌茶)라 이름하고, 품질을 논할 때도 참새작(雀)자를 써서 세작(細雀), 준세작(準細雀), 중작(中雀) 하는 식으로 등급을 매겼습니다.
차나무는 산차과(山茶科)의 상록활엽관목(常綠闊葉灌木)으로 따뜻하고 습기가 많은 곳에서 잘 자랍니다. 연평균 기온이 13℃이상, 강우량이 년 1,500mm 이상이어야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지리산을 중심으로 영호남의 남쪽지방이 자생이나 재배에 적합합니다.
키 작은 동백나무를 연상케하는 차나무는, 여느 관목이 다 그렇듯 밑둥에서 가지가 올라와 옆으로 퍼지는데, 높이는 60 - 90cm 정도이며 잎은 갸름하고 윤기가 있습니다. 뿌리는 직근성이서 밑으로 곧게 뻗습니다. 그래서 옮겨 심으면 살지 못하기에 우리 옛 사회에서 여성에게는 정절, 남자에게는 불사이군 충절의 상징이었습니다.
이러한 차나무의 잎에 현대 과학도 가려내지 못하는 신비한 성분이 가득하여, 우려 마시면 여러 면에서 우리 삶을 육체적으로 건강하게 하고 정신적으로 윤택하게 합니다. 성현들은 모두 차를 벗 삼았습니다. 때론 약용으로, 때론 수도용 음료나 의식용으로, 때론 풍류로 즐겼습니다.
커피나무에 열매가 열려야 하듯, 차나무 잎이라 아무 것이나 다 원료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봄 - 즉, 4-5월에 새로 돋아나는 잎이어야 차가 될 수 있습니다. 그중 덕(德:효능)이 뛰어난 차는 곡우(穀雨)를 전후해 채취되는 순(荀:芽)과 같은 어리고 여린 잎입니다. 이때의 잎은 정말 참새 혀처럼 곱고 연해서 작설차(雀舌茶)란 이름이 실감됩니다.
일반적으로는 작설차라 했지만 다른 이름을 붙이기도 했습니다.
대나무 숲에서 차나무가 잘 자랍니다. 대나무 이슬 먹은 차는 죽로차(竹露茶)라 하고, 차는 지혜를 준다하여 반야차(般若茶)라 이름하기도 했습니다. 설록차(雪綠茶)·춘설차(春雪茶)는 여기저기 잔설이 남아있는 이른 봄에 따서 만든 녹차를 연상하게 하는 이름들입니다.
이제 이해가 되실 겁니다. 이런 부름들이 인삼차 생강차 쌍화차 하고 부른는 것과 같을 수는 없습니다. 인삼은 인삼즙, 쌍화는 쌍화탕이라는 바른 명칭이 있습니다. 차나무 잎이 원료가 아닌 것을 차라고 부르는 나라는 지구촌 어디에도 없습니다.
인류 문화사는 곧 차문화사
문화사란 인간의 지혜가 밝아져 미개에서 벗어나 발전해 온 기록입니다. 불을 이용해 물을 끓이는 것도 시작의 하나입니다.
목이 마를때 짐승처럼 물가에 엎드려 마시던것을 용기(用器)를 이용해 떠 마시게 되었고 다시 그 물을 끓이거나 음식을 익히고 데쳐 먹으면서 식문화도 발달했습니다. 특히 음료가 인류사에 미친 영향은 매우 큽니다. 전쟁같은 굵은 사건만 열거해도 미국의 독립전쟁. 영국과 청나라 같 아편전쟁, 이 땅의 임진왜란 등이 차 때문에 일어났습니다. 생활문화·예술 측면에서보면 도자기·건축·의복·문학 ·서화·음악·예절 등이 차를 매개로 꽃을 피웠습니다.
억지가 아닙니다. 좋은 사람을 만나면 우선 차 한 잔 나누고 싶어지는게 본능입니다. 기왕이면 멋있는 공간에서 훌륭한 그릇에 차를 담아 나누고 싶어집니다. 분위기에 어울리는 잔잔한 음악이 있으면 더욱 좋고 꽃이 한편에 있으면 더욱 좋을 것입니다. 이런 차를 누구 시키지않고 직접 낸다면 상대방은 더욱 좋아할 것입니다. 차 내는 모습이 반듯하고 정성스러우면 그만 상대방은 감동하고 말 것입니다. 상대에게 감동을 주는 만남처럼 기분좋은 일이 또 있겠습니까. 자연스럽게 몇가지 이야기하였지만 차를 중심으로 보면 연결되지않는 문화·예술이 없습니다. 심지어 철학까지도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는 차에 무식한 국민이 되어버렸지만 반만년 찬란한 역사에는 차의 향기가 흥건합니다. 차를 모르고 고려청자와 조선백자를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집에 오신 손님 정성껏 대접하고 가시는 손님 뒤가 안보일때까지 배웅하는 우리의 미풍양속 또한 차를 외면하고 성립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차가 없었다면 차례(茶禮) 지낸다는 말도, 일상다반사(日常茶飯事)라는 말도 없었을 것이며, 다산 정약용선생이 '음다흥음주망(飮茶興飮酒亡)'을 외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차에 관심을 기울여 보십시오. 다도(茶道)라고 엄숙하게 부르지 않아도 좋습니다.다례(茶禮)라고 주장하며 번거롭게 행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그냥 '차 놀이'한다고 정감있게 부르며 생활화하면 어떻습니까.
차를 배운다는 것은 사고의 폭을 넓히자는 것이요, 차를 행한다는것은 아름다움을 가꾸고 다듬자는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차는 여성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오히려 남성에게 절실한 우리 문화입니다.
전통의 향기(2) 차의 유래와 다경
차(茶)는 지성인의 벗
우리나라 대표적 다서(茶書)의 하나인 초의선사(草衣禪師) 동다송(東茶頌) 첫머리는 이렇게 차의 유래를 전합니다. 동다송은 물론 우리나라 차(東茶)를 노래한 글입니다.
"후황가수배귤덕 수명불천생남국(后皇嘉樹配橘德受命不遷生南國)"
후황을 절대자 - 곧 한울님입니다. 한울님께서 귤나무의 덕을 지닌 아름다운 나무를 전하니, 옮겨서 살지못할 명을 받아 남쪽에서만 자란다는 말입니다. 동다송은 다음과 같이 이어집니다.
密葉鬪선貫冬靑 눈보라와 싸우는 빽빽한 잎사귀 겨우내 푸르고
素花濯霜發秋榮 가을에 핀 하얀 꽃 서리 맞아 빛을 더하네
姑射仙子粉肌潔 고야산 신선같이 희고 맑은 살결 속에
閻浮檀金芳心結 염부주 단금같은 고운 마음 맺혔네
沆瀣漱淸碧玉條 이슬에 씻긴 가지 벽옥같이 푸르니
朝霞含潤翠禽舌 아침 안개 머금은 잎은 푸른 새의 혀와 같구나
天仙人鬼俱愛重 하늘 신선과 사람,귀신이 모두 애중히 여기니
知爾爲物誠奇絶 진실로 너의 됨됨이 기절하구나
炎帝曾嘗載食經 염제 일찌기 맛 보고 식경에 적으니
醍糊甘露舊傳名 제호 감로와 더불어 그 이름 전해 오네
19세기 중반에 저술된 동다송이 특히 빛나는 것은 당시 다인들의 풍토가 "우리나라 차는 중국의 차에 미치지 못한다"고 여겼는데 선사는 반대로 우리의 다품(茶品)이 더 월등함을 노래한데 있습니다.
선사는 동다송 이전에 만보전서(萬寶全書)에서 다신전을 등초한 일도 있습니다. 다신전(茶神傳)을 통해 다도(茶道)를 정리하고 차를 직접 만들기도 한 체험에서 우러나온 값진 노래입니다.
선사는 또 "고래성현구애차 차여군자성무사(古來聖賢俱愛茶 茶如君子性無邪)"라고 했습니다. 옛부터 성현이 모두 차를 사랑했으니 차는 군자와 같아 사기가 없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실학자 다산(茶山) 정약용 선생은 고적한 유배지 생활에서 "음다흥 음주망(飮茶興 飮酒亡)"을 외쳤습니다. 차를 즐기는 민족은 흥하고 술을 마시는 민족은 망한다고 했습니다. 신라 고려 조선으로 이어지는 문화사에서 차의 덕(德)을 노래하고 공(功)을 예찬한 시인 묵객들은 당대를 대표하는 지성이었습니다.
중국 3대 기서의 하나인 삼국지연의는 유비현덕이 어머니께 드릴 한 줌의 차를 구하기 위해 멀고 위험한 여행을 떠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고운 최치원 선생이 당나라 유학 중 고국을 왕래하는 사람만 있으면 어머니께 보내드린 것도 차입니다. 역사의 오랜동안 차는 효(孝)의 상징이자 귀감이기도 했습니다.
최초의 기록은 8세기
차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시기를 삼국사기는 828년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흥덕왕 3년조에 …흥덕왕 3년 당 사신 대렴(大廉)이 차종자를 가지고 왔다. 왕은 그 종자를 지리산에 심게 했다. 차는 선덕왕때부터 있어왔는데 이 때에 와서 성해졌다…고 했습니다.
이를 근거로 우리나라에 차가 전래된 시기를 서기 828년으로 보는 견해가 많습니다. 그러면 선덕왕 때부터 있어왔다는 차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 토산차일 수 있습니다. 흥덕왕 3년에 심어진 것은 중국종의 차나무일 것입니다.
"차는 중국으로부터 전래되었다"라고 단정해서 말하는것은 토산차는 "차가 아니었다"는 사대주의적 발상에 근거합니다. 일연선사의 삼국유사에 나오는 토산차는 흥덕왕 3년보다 60여년이나 앞선 경덕왕 시절입니다.
…경덕왕 23년(765년) 삼월삼짇날, 봄 볕이 따사로운 경주 귀정문(歸正門) 누상(樓上)에서 예정에 없던 다회(茶會)가 열립니다. 몇 해 전부터 나라 안팎에 심상치 않은 불길한 일들이 일어나더니 전날 밤엔 오악삼산신이 궁전 뜰에 현신(現身)했습니다. 경덕왕은 착잡한 마음으로 측근에 신하들을 대동하고 문루에 올라 근자의 괴변을 막고 나라를 잘 다스릴 방법을 의논하다 훌륭한 스님을 찾아 왕사로 모시기로 합니다. 이에 신하들이 한 고승을 모시고 오니 왕은 몇마디 나누지 않고 이는 찾는 스님이 아니라고 돌려 보냅니다.
이 때 남쪽에서 걸어오는 한 스님이 있었습니다. 옷은 다 떨어진 누더기요 등에는 걸망을 짊어졌는데, 멀리서도 인품은 범상치않아 보였습니다. 왕은 그 스님을 누상으로 모시도록 했습니다.
"스님은 누구신가요?"
"소승 충담(忠談)이라고 합니다"
"아아, 기파랑가(讚耆婆郞歌)를 지으신 충담스님입니까?"
왕은 기뻐하며 예를 갖추고 다시 물었다.
"어디에서 오시는 길입니까?"
"소승은 삼월 삼짇날과 구월 구일이 되면 언제나 남산 삼화령 미륵세존께 차 공양을 합니다. 오늘도 차 공양하고 오는 길입니다"
왕은 나에게도 차를 한 잔 줄 수 있는가를 물었습니다. 스님은 이내 걸망을 풀었습니다. 걸망 속에는 차와 다구가 있었습니다. 정성껏 차를 달여 올리니 왕은 훌륭한 맛과 기이한 향기를 극찬했습니다.
"스님께서는 일찌기 기파랑을 찬미한 사뇌가(詞腦歌)를 지었는데 그 뜻이 매우 고상하여 온 백성이 즐겨 노래하고 있습니다. 나를 위하여 안민가를 지어 주십시오"
그러자 충담은 즉석에서 안민가(安民歌)를 지어 올립니다.
…임금은 아버지요 신하는 어머니시라. 백성은 어리석은 아이이니.
백성이 은혜를 모른다해도 어디로 가랴. 모두 이를 깨달아 왕이 왕
다웁고 신하가 신하답고 백성이 백성다우면 나라는 태평하리라…
경덕왕은 크게 기뻐하며 충담을 왕사로 봉하였으나 충담은 두 번 사양하며 끝내 받지 않았습니다. 경덕왕과 충담선사의 이야기는 적어도 8세기 우리나라에 차가 있었음을 시사합니다.
더 올라가면 가락국 김수로 왕과 아유타국 허황옥 이야기가 나옵니다. 허황옥이 꿈의 계시를 받아 김수로 왕에게 시집올 때 가져온 예물 중에 차 종자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수로왕은 김해에 그것을 심게 했다고 합니다. 여자가 시집갈 때 차씨를 가져가 뒤뜰에 심는 풍습(捧茶禮節)은 허황옥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한 번 심어지면 옮기지 못 하는 것이 여자의 운명과 같다는 뜻입니다.
범 동양적 설은 세 가지
차의 유래(由來)에 관한 설은 삼황오제 시절로 올라갑니다. 삼황오제의 한분이신 신농은 농사법을 연구해 후세에 전했다 하여 신농(神農)인데, 한편에서는 불을 이용해 물을 끓이고 음식 익혀먹는 법도 전했다하여 염제(炎帝)라 하기도 하고, 합쳐서 염제신농이라고도 부릅니다.
염제신농은 이외에도 만가지 약초를 씹어 그 효능을 일일이 기술하는 등 약과 의술 향상에도 힘썼는데 하루는 독초를 잘못 씹어 온 몸에 독이 번져 죽기 직전에 이르렀습니다. 이 때 한 나무가지가 너울너울 춤을 추는걸 보고 그 잎을 따 먹으니 몸에 퍼져던 독이 풀렸습니다. 그 나무가 바로 차나무였다고 합니다.
다음은 달마대사 이야기입니다. 달마대사가 참선을 하는데 졸음이 와서 눈이 자꾸 감겼습니다. 그러자 대사는 "이것은 눈시울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다"라며 양 눈시울을 뚝뚝 떼어 뒷뜰에 던졌습니다.
그랬더니 이튿날 뒷뜰에 나무가 하나 솟았고, 그 잎을 달여 마시니 잠이 멀리 달아나더라는 것입니다. 뒤뜰에 솟은 것이 차나무였습니다. 이후 차잎은 승려들의 수도용 음료로 널리 사랑을 받았습니다.
중국 역사에 올라있는 명의(名醫) 편작에 관한 설도 있습니다. 편작은 모두 8만 4천에 이르는 약방문을 알고 있었는데 가르침을 통해 직접 제자들에게 전수해 준 것은 절반에도 못미치는 4만 가지에 불과 했습니다. 그리고 비명에 죽었습니다.
제자들은 편작의 비명횡사도 슬펐지만, 더 이상 의술을 전수받지 못하게 된 것도 슬퍼 열흘 밤낮을 무덤 앞에 엎드려 울었습니다. 그랬더니 무덤에서 한 나무가 솟았는데 그 나무 잎에 신비한 성분이 가득하였습니다. 제자들은 연구를 거듭하여 스승의 미처 전수하지 못한 나머지 약방문을 터득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차의 기원이나 유래에 관한 이야기는 이외에도 많으나 그 내용은 대개 비슷합니다. 해독에 탁월한 효능이 있다거나 잠을 멀리 쫓고 심신을 맑게 하여 준다는 이야기들입니다.
불후의 고전 다경(茶經)
차에 대해 글을 쓰는 일은 당(唐)의 육우(陸羽)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8세기 중엽에 발표된 육우의 茶經 3편은 최초의 문헌이자 완벽하고 정밀한 고전으로 오늘날에도 보배롭게 읽혀지고 있습니다.
육우(陸羽)는 다경을 남김으로서 육자(陸子)로 불리우며 공자 맹자와 격을 같이 하게 되었습니다.
궁성(宮省)으로부터 아래 읍리(邑里)에 이르기까지 제사나 손님 접대, 잔치 때 먼저 차를 내는 풍습은 더 엄격한 범절(凡節), 즉 절차를 갖게 되었습니다.
육자 다경은 총 10절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1) 근원(一之源) 2) 도구(二之具) 3) 만들기(三之造) 4) 그릇(四之器) 5) 달이기(五之煮) 6) 마시기(六之飮) 7) 옛일(七之事) 8)생산(八之出) 9) 기타(九之略) 10) 도해(十之圖) 등 입니다.
그리고 뒤에 덧붙이기를 "차의 좋고 나쁨은 구결(口訣)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책에 실린 바는 오히려 조잡하여 차를 예술로 삼기에 하급이다. 천하의 지극한 도리를 글씨나 종이·먹 사이에서 얼마나 구할손가"
하였던 것입니다.
다경(茶經)은 세계 최초의 다서(茶書)이자 불후의 고전으로 다인(茶人)이 되려면 반드시 읽어야 할 필독서(必讀書)였습니다. 통일신라도 그 영향을 받아 차(茶)는 군자(君子)의 기질과 덕(德)을 지니고 있어 맑고 곧은 예지(叡智)와 함께 관용(寬容)의 미덕을 기른다 했습니다. 따라서 다인(茶人)이란 맑은 인격과 고매한 학덕과 예(藝)를 고루 갖춘 "그 시대의 지성"을 일컫는 관칭대명사였습니다. 살아서는 물론 죽은 뒤 명정(銘旌)에도 다인(茶人)으로 기록되는 것이 최대 영예인 그 시대 지식계층의 이상이었습니다.
전통의 향기(3) 맛있게 우리는 법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높은 산은 우러러 보고 큰 행동은 행한다"고 했습니다. 이에 연유하여 차를 내는 일을 "행차(行茶)한다"라고 합니다. 차를 내는 일은 사람과 사람을 만나게 하는 "인륜지대사"이기 때문입니다.
손님에게 차를 권하는 예의는 도교에서 비롯 되었습니다. 관윤(關尹)은 늘 함곡관(函谷館)에서 늙으신 철인(哲人:老子)을 맞이하였는데 언제나 먼저 대접하는 것은 차(茶)였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를 본받아 처음 만나면 우선 차를 나누는 것을 생활화 했습니다.
도교 영향권에 있는 우리나라에도 손님에게 차를 권하는 예의가 일반화되었습니다. "오신 손님 편안히 모시고 가시는 손님 뒤가 안보일때까지 배웅하는" 미풍양속에서 제일 먼저 권하는 것이 茶요, 제일 나중 나누는 것도 또한 茶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시다시피 차는 - 차잎을 가루로 만들어 물에 타 마시기도 하지만 - 차나무 잎을 더운 물에 우려 마시는 것이기에 백 번을 우려도 백번 다 그 맛이 다릅니다.
차의 품질에 따라 다르고 산지나 품천(品泉:물의 상태)에 따라서도 달라지며 온도나 우리는 시간에 따라서도 현격한 차이를 드러냅니다. 심지어 다기(茶器)에 따라서도 색향미가 달라집니다. 물론 분위기도 영향을 줍니다.
좋은 맛을 내기 위해서는 차를 내는 일에만 정신을 집중하고 정성을 다해야 합니다. 오랜 차생활을 통하여 손에 익어야 하며, 스스로 우러나서 삼매경에 빠져들어 차를 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옛 사회에서는 어느 집에 손님이 되어 갔을 때, 차 맛을 보고 잘 왔나 잘못 왔나를 판단하는 풍습이 강했습니다. 차 맛이 훌륭하면 "참 잘 왔구나. 주인이 진정 나를 반기는구나"하고 편안해 했고, 차 대접이 형식적인데다 맛도 시원찮으면 "어이쿠, 주인이 반기지 않는구나" 하고 서둘러 돌아갔습니다.
차 이야기를 많이하여 자칫 차를 내기가 겁나는 분들도 있을줄 압니다. 그러나 알고보면 차를 우리는 방법은 참으로 간편하여 한 두 번만 익히면 초심자도 금세 따라할 수 있습니다. 차잎이 함유하고 있는 성분에 영양이며 감미가 애초에 충분하기 때문에 설탕이니 하는 따위 아무 것도 첨가할 필요가 없어 더 간편합니다. 끓인 물과 차, 그리고 이 두 가지를 함께 넣어 우릴 수 있는 그릇만 있으면 차는 언제 어니에서너 가능합니다..
우선 물을 100℃로 충분히 끓인 다음 - 행차에서는 끓이는 것을 익힌다고 합니다만 - 약 70℃로 다시 식혀 차를 우립니다. 2 - 3분 정도 지나 알맞게 우러나면 잔에 고루 나누어 따라 마십니다. 이것이 전부입니다.
차는 이같은 간단한 과정을 되풀이하며 계속 우려 마실 수 있습니다. 보통은 서너번 정도 우려 마시지만 좋은 차는 여서일곱번을 우려도 그 색향미(色香味)가 처음과 같습니다.
물을 약 70℃로 식혀서 차를 우리는 이유는 비타민C와 같이 차에 함유된 우리 몸에 유익한 성분을 보호하기 위함이요, 또 다른 이유로는 탄닌산과 같은 쓴맛을 내는 성분이 너무 많이 우러나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70℃는 또 여러가지 신비한 효능을 나타내는 차의 성분이 고루 우러나와 가장 이상적인 색향미(色香味)가 얻어지는 기준점이기도 합니다.
어느듯 우리 입맛은 "차는 뜨거워야 된다"는데 익숙해져 있어, 이런 점이 얼른 친해지지 않는 장애가 되고 있습니다. "녹차는 미지근하여 차 마신 것같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몇번만 참고 마시면 그런 현상은 쉽게 사라집니다. 정말 잠시 뿐입니다. 불과 몇번 마시지 않아 친해질 수 있고, 차에 익숙해지면 "미지근하다"라는 했던 불만이 "은은하다"라는 예찬으로 바뀌며 스스로 다도 삼매경(三昧境)에 빠져들게 됩니다. 차에 있는 가르침을 배우고 싶어집니다.
차의 오미는 인생의 오미
잘 우러난 차를 음미하면 다섯가지 맛(五味)을 분명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쓰고(苦) 떫고(澁) 시고(酸) 짜고(鹽) 달고(甘)의 다섯가지 맛입니다. 맨처음 혀 끝에 와 닿는 맛이 쓴 맛이며, 쓴 맛 다음으로 와 닿는 것은 떫은 맛입니다. 쓴 맛은 물론 고미물질(苦味物質)이 있기 때문이고, 떫은 맛은 탄닌산 때문입니다. 탄닌은 차의 훌륭한 성분 중 하나인데 탁한 것을 맑게하는 정화(淨化)나 해독(解毒)에 탁월한 효능을 보이는 물질입니다.
그 다음 느껴지는 신맛은 풍부한 비타민 때문이고 짠맛은 소금맛입니다. 모든 생물에는 기본적으로 염화나트륨이 함유되어 있다고 보면 됩니다. 끝에 입안에 남는 게 단맛입니다. 이는 차에 함유된 포도당 또는 전분같은 탄수화물에서 나옵니다.
이러한 차의 오미(五味)는 흔히 희노애락고(喜怒哀樂苦)의 인생살이에 비견되기도 합니다. 희노애락 다음에 고를 붙여논 것은 어쨌든 인생은 고해(苦海)이기 때문입니다. 차의 음미(吟味)는 쓰고 떫고 시고 짠 것을 다 소화하고 포용하여 하나의 단맛으로 승화되었을 때의 기쁨을 가르쳐 줍니다. 마찬가지로 인생도 살면서 일차적으로 부빚치는 것들은 쓰고 떫고 시고 짠 것들입니다. 그 모든 것을 자기 안에서 하나의 향기로 승화시키는 일은 그 자체로 성취(成就)요, 지혜로와지는 훈련입니다.
훈련의 반복은 생활화로 이어지고, 이윽고 점입가경(漸入佳境)인 사색의 숲을 만나 자연과의 조화에 접근하게 됩니다. 그것이 곧 선(禪)이요, 깨달음이요, 아름다워지는 노력입니다.
초의선사(草衣禪師)는 동다송(東茶頌)에서 "제호(醍 ) 감로(甘露)와 함께 그 이름 전해왔네"라고 차의 단맛을 노래했습니다.
제호는 불교에서 일러오는 가장 맛있는 음식입니다. 설문신부(說文新附)에 "제호는 낙(酪)의 정(精)이다"라 하였고, 본초(本草)에는 불서(佛書)를 인용하여 "우유에서 낙(酪)을 만들고 낙에서 소( )를 만들고 소에서 제호를 만든다"면서 "황백색으로 지극히 감미로운데 좋은 소( ) 한섬에서 제호는 불과 서너되 밖에 나오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잡것이 섞이지 않은 순수한 버터를 연상하면 될 것입니다.
감로(甘露)는 천하가 태평하면 내린다고 하는 단 이슬입니다. 왕충(王充)의 논형(論衡)에 "감로는 맛이 엿이나 꿀과 같은데 천하가 태평하면 내린다"고 했습니다. 미로(美露) 신장(神漿)이라 부르기도 하는 신령(神靈)의 정(精)으로 신선들의 음료라고 전합니다.
70년대 후반에 시작된 "우리 차 마시기 운동" 덕분에 차에 대한 인식도 제법 - 아직 멀었지만 - 나아졌고 차를 마시는 인구가 늘어난만큼 생산과 소비도 놀랍게 신장되었습니다. 그러나 막연하게나마라도 차에서 제호 감로의 맛을 느껴본 사람은 몇이나 있을까 궁금해집니다.
반역(反逆)입니다만 실험삼아 대담하게 한약 달이듯이 차잎을 달여 들어 보십시오. 처음 입에 댈때엔 얼굴이 저절로 일그러질만큼 쓰고 떫지만 곧 생전 경험하지 못한 제호 감로의 전설적인 맛과 향기를, 어렴풋이나마 만날 것입니다. 반역을 반복해서 즐기는 것엔 찬성할 수 없지만 차의 신비한 세계가 결코 이상이 아닌 현실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의미에서 누구에게나 한번은 권하고 싶은 원시적 실험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실험에서 우리는 우리 차의 맛과 향기가, 중국이나 일본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월등함을 발견하게 됩니다. 마치 백두산 산삼이 최고이듯 차는 지리산 야생차가 단연 최상입니다.
전통의 향기(4) 양생의 선약
약용(藥用)에서 음료(飮料)로
차는 약용(藥用)에서 비롯되어 나중에 음료(飮料)가 되었습니다. 육우(陸羽)의 茶經 육지음(六之飮)에 그 효능이 처음 거론됩니다.
….하늘을 나는 새나 땅 위를 달리는 짐승이나 말을 하는 사람. 이 삼자는 하늘과 땅 사이에서 마시고 먹으며 살고 있다. 마신다는 것의 기원과 뜻이 참으로 오래 되었구나. 목이 마른 것을 도우려면 장(醬)을 마시고 울분을 덮어 버리려면 술(酒)을 마시고 혼미한 것을 가라앉히려면 차(茶)를 마시기에 이르렀다. 차를 음료로 삼는 것은 신농씨로부터 비롯되어 노(魯)나라 주공(周公)에 의해 널리 알려졌다.
본초목부(本草木部)에 이르기를 "차의 맛은 달고도 쓰다. 약간 차지만 독은 없다"면서 "누창(漏瘡;性病)을 잘 다스려 소변을 잘 나오게 하며, 가래, 갈증, 몸의 열을 물리치게 하며 잠을 적게 한다"고 하였고 동의보감은 다음과 같이 차의 효능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차는 사람에게 매우 좋은 음료이다. 좋은 차를 마시면 갈증이 없어지고, 소화가 잘 되고, 담이 제거되고, 잠을 쫒아주고, 소변에 이롭고, 눈이 밝아지고, 머리가 맑아지고, 걱정을 씻어주며 비만을 막아준다. 사람에겐 본래 하루도 차가 없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식사가 끝났을 때 진한 차로 입안을 가시면 기름기가 말끔히 제거될뿐 아니라 뱃속이 개운해 진다. 이 사이에 낀 것도 차로 씻어내면 다 소축되어 모르는 동안에 없어지기 때문에 번거롭게 이를 쑤실 필요가 없다. 또한 이의 성질에 쓴 것이 좋기 때문에 자연히 이가 튼튼해져서 저절로 충과 독이 없어진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중품이나 하품의 차로서 이러한 효능을 얻는다…
걸명소는 다산 정약용 선생의 동다송
차의 효능은 시인묵객(詩人墨客)의 사랑을 받으면서 문학적 향기를 더해 갔습니다. 송조(宋朝) 8대 황제로서 시문(詩文)과 서화(書畵) 등 예술에 조예가 깊었던 풍류천자 휘종(徽宗)은 "대관다론(大觀茶論)"에서 "차는 가슴을 후련하게 씻어주고 맑고 아늑한 기운을 가져다 준다. 범인이나 아이는 잘 느낄 수 없다. 그 상쾌함, 높고 조용한 운치는 소란한 가운데에서는 즐기기 어렵다"고 했습니다.
또 시성(詩聖) 이태백의 달 예찬, 주성(酒聖) 류백륜의 주덕송(酒德頌)에 비견되는 노동(盧同)의 "칠완다가(七碗茶歌)"를 음미해 보는 것도 멋진 일입니다.
一碗喉吻潤 첫 잔에 목과 입술이 부드러워지고
二碗破孤悶 둘째 잔에 고독과 번민이 스러진다.
三碗搜枯腸 셋째 잔에 메마른 창자까지 스며들어 적셔주니
惟有文字五千卷 오직 오천권의 문자만 남는구나
四碗發輕汗 넷째 잔에 땀이 나며 몸이 가벼워지니
平生不平事盡向毛孔散 평생 불평하던 일이 모두 흩어지는구나
五碗肌骨淸 다섯째 잔에 뼈와 살이 맑아지니
六碗通仙靈 여섯째 잔에 선령 세계와 통하게 되었노라
七碗喫不得也 일곱째 잔은 마실 수가 없구나
惟覺兩腋習習淸風生 양 겨드랑이에서 맑은 바람이 이니
蓬萊山在何處 봉래산이 어디메냐
乘此淸風欲歸去 이 맑은 바람타고 돌아가고 싶구나
첫잔에 목과 입술이 부드러워지고 둘째 잔에 고독과 번민이 스러진다.
셋째 잔에 메마른 창자까지 젖셔주니 오직 오천권의 문자만 남는다.
넷째 잔을 드니 평생 불평스러웠던 일들이 땀이 되어 흩어지고,
다섯째 잔에서 뼈와 살까지 맑아지니, 여섯 째 잔에 선령에 통한다.
일곱째 잔은 마실 수가 없구나. 봉래산이 어디메냐. 이 맑음 타고 가련다...
앞에서 품질이 좋은 차는 일곱여덟번을 우려 마셔도 그 색향미(色香味)가 처음과 같다고 했습니다. 차 여섯잔에 신선이 되어버린 노동은 일곱째 잔을 마시지 못했습니다.
노동이 그냥 남긴 일곱째 잔은 우리의 다산 정약용 선생이 비웁니다. 서학파동으로 인해 강진 땅에 유배당한 그는 차를 벗 삼아 외로움을 이겨내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차를 마시려 했으나 호(壺)가 비어 있었습니다. 그는 얼른 붓을 들어 차를 보내줄 수 있는 이웃 절(白蓮社)의 혜장선사에게 소(疏)를 오렸습니다. 소란 임금님께 올리는 글을 일컫는 말입니다. 장난끼가 섞였습니다만 당시 다산에겐 혜장선사가 차의 임금님이었습니다. 그것이 유명한 걸명소(乞茗疏: 차를 구걸하는 글)입니다.
나그네는 근래 차 버러지가 되었으며 겸하여 약으로 삼고 있오
차 가운데 묘한 법을 육우의 다경 3편이 통달케 하니
병든 큰 누에는 마침내 노동조차 마시지 못한 일곱잔 째를 마르게 했오
정력이 쇠퇴한 듯 하나 기모경의 말을 잊지 않았고
막힘을 풀고 흉터를 없애기 위해 이찬황의 차 마시는 버릇을 얻었오.
아아, 윤택할 진 저, 아침에 달이는 차는 흰 구름이 맑은 하늘에 떠 있는 듯 하고
낮잠에서 깨어나 달이는 차는밝은 달이 푸른 물 위에 잔잔히 부서지는 듯 하오
다연(茶 )을 돌릴 때면 휘날리는 옥가루들
산골의 등잔불로는 좋은 것 가리기 아득하지만
자주빛 어린 차순 향기는 숨김없이 그윽하고
새 샘물 길어다 들에서 달인 차의 맛은
신령께 바치는 백포 맛과 같소.
꽃청자 홍옥다완을 쓰던 노공의 호사스러움 따를 길 없고
돌솥 푸른 연기의 검소함은 한비자에 미치지 못 하나,
물 끓이는 흥취를 게눈 고기눈에 비기던
옛선비들의 취미만 부질없이 즐기는 사이
용단봉병 등 왕실에서 보내주신 진귀한 차는 바닥이 났오
이에 나물캐기와 땔감을 채취할 수 없는 병이 들어
부끄러움 무릅쓰고 차 보내주시는 정다움을 비는 바이오.
듣건대 죽은 뒤 고해의 다리 건너는 데 가장 큰 시주는
명산 고액이 뭉친 차 한 줌 몰래 보내주시는 일이라 하오
목마르게 바라는 이 염원,
부디 물리치지 말고 베품 주소서.
성인병 예방에 특히 좋아
옛 사람들이 전하는 차의 효능은 경험에 의한 기술일 것입니다. 그러나 현대의 과학이 오차없이 훌륭하게 뒷받침 해 줍니다.
우선 차의 주요 성분으로는 카페인·탄닌·단백질·지방질·당질·섬유·회분·비타민A·비타민B1·비타민B2·비타민C·불소·옥소 등이 함유되어 있는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아시다시피 카페인의 3대 약리작용은 각성(覺醒) 강심(强心) 이뇨(利尿)이며, 탄닌의 4대 약리작용은 해독(解毒) 살균(殺菌) 지혈(止血) 소염(消炎)입니다.
또 단백질은 생명의 기본적 구성물질인 동시에 사람의 삼대 영양소의 하나인 함질소 유기화합물이며, 당질은 탄수화물 및 그 유도 물질입니다. 이를 통털어 한마디로 표현하면 생활 에너지입니다.
여기 비타민C가 있어 괴혈병을 방지하고 또 A나 B1,B2 등이 있어 각기병 고혈압 등의 예방과 함께, 세균에 대한 저항력 감퇴까지 막아줍니다. 식사 후 진한 차 한 잔으로 입안을 개운하게 할 수 있는 것은 불소가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차를 우려서 마시는 것으로 치료의 효과까지를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예방의 방편에서 그 효능이 탁월하다는 이야기로 이해하시면 좋습니다. 복잡한 현대생활에서 심신의 피로를 풀어주고 가중되는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데 큰 효과가 있다는 사실만은 의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특히 중년 이상의 사람들에게는 식후에 한 잔의 차를 마시고 잠시 쉬는 것이 건강에 다시없이 좋고, 소화에도 큰 보탬이 됩니다. 이는 임상실험으로 입증된 사실입니다.
고래성현구애차…(古來聖賢俱愛茶…)
차가 우리 생명과 생활에 주는 공덕을 다 열거하기에는 지면이 너무 적습니다. 란슈꾸(蘭叔)가 주다론(酒茶論)의 말미에서 결론을 내렸듯이 허공을 입으로 삼고 수미(須彌:지상에서 가장 높은 산)를 혀로 삼아 아승기겁(阿僧祇劫:끝없는 시간) 논한다 해도 그 덕을 다 말할 수 없습니다.
다만 조선 성종 연간에 차를 아끼던 이목(李穆:1471-1498)이란 선비가 있어 차의 공덕을 5공과 6덕으로 함축해 노래로 남긴 바 있으니, 이를 음미해 보는 것으로 성품을 엿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차에 다섯가지 공(功)이 있으니 첫째 갈증을 해소시켜주는 공이요, 둘째 울분을 달래주는 공이고, 셋째 이웃과 정답게 대화를 나누게 하는 공이요, 네째 인체 내에 유해한 삼충(三蟲)을 몰아내는 공이며, 다섯째 주독(酒毒)을 풀어주는 공이다. 또 차에 여섯가지 덕(德)이 있으니 첫째 오래 살게 하고, 둘째 병을 낫게 하고, 세째 기운을 맑게 하고, 네째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다섯째 예의롭게 하고, 여섯째 신선처럼 살게 한다...
여기서 동다송(東茶頌)의 한 구절을 다시 음미해 보면, 차가 진실로 양생의 선약임을 알게 되면서 벗하고자 찾게 될겁니다.
古來聖賢俱愛茶 예 부터 성현이 모두 차를 사랑하였으니
茶如君子性無邪 군자와 같아 성품에 사기(邪氣)가 없기 때문이라.
전통의 향기(5) 다도 삼매경과 인정의 나눔
삼매의 경지
"오직 한가지 일에만 마음을 모아 생각하는 일심불란의 경지" 또는 "순수한 집중을 통하여 마음이 고요해진 상태"를 일컬어 삼매(三昧)의 상태라고 합니다. 독서에 붙여 삼매경이란 단어를 접했을 겁니다.
더 쉽게 풀이하면 주관과 객관, 그리고 그 사이에서 일어나는 마음이, 올바른 관찰과 마음가짐을 통하여 일체가 되고, 마침내 그 세 가지에 대한 생각까지 잊어버린 경지에 들어간 것을 뜻합니다.
삼매의 상태는 곧 불교수행의 이상적인 경지이기 때문에 불교 경전에서는 삼매를 이루는 방법을 다각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능엄경은 수능엄삼매를, 화엄경은 화엄삼매와 해인삼매 사자분신삼매를, 반야경은 108 삼매를, 법화경은 무량의처삼매와 법화삼매를, 금강경은 무쟁삼매를, 열반경은 25삼매를 주장하고 있으며, 대승기신론은 일행삼매(一行三昧)와 진여삼매(眞如三昧)를 논하고 있습니다.
선정(禪定)의 깊고 옅음을 구별하여 나눈 5륜삼매(五輪三昧: 地輪 水輪 風輪 金沙輪 金剛輪) 분류법도 있고, 여환삼매(如幻三昧) 관불삼매(觀佛三昧) 보현삼매(普賢三昧) 염불삼매(念佛三昧) 등도 자주 언급됩니다. 그러나 삼매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삼매를 정확하게 분류하여 설명한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이를 가장 명확하게 정의하고 분류한 대표적인 고승은 신라 원효입니다.
원효는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에서, 삼매는 곧 정사(正思)로서, 정(定)에 들었을 때 관계되는 경계인 소연경(所緣境)을 깊이 살피고 바르게 생각하고 통찰하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따라서 삼매에는 혼침(昏沈: 마음이 어두워 자세히 살필 수 없는 상태)과 심사(尋伺: 바르고 거짓된 것을 분별하는 마음)가 있어서는 안됨을 강조 했습니다.
분별과 무분별에 두루 통하고 침울하지도 들뜨지도 않은 채 바르고 자세히 생각하여야만 올바른 삼매라고 하였습니다.
다도의 도는 순리체득의 길
다도에서의 삼매는 순리를 체득하는 데 그 목적을 두고 있습니다. 차(茶)에 도(道)를 붙여 다도(茶道)라 부르는 것에 거부 반응을 보이는 분들이 있습니다만 절대로 그럴 필요 없습니다.
차는 흐린 것을 맑게 하는 효능이 탁월한 음료요, 도(道)는 애초부터 "삶의 길"을 뜻하는 글자입니다. 도는 "길 도"로써 "인생 여로"를 의미합니다. 다만 동양의 여러 종교들이 이 도(道)를 매우 중요한 가치기준으로 여겼기 때문에 철학·문학·사상·예술·문화 등 동양의 여러 정신적·물질적 면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고 시대와 장소, 그리고 인물에 따라 각각 상이하게 설명되어지면서 추상적인 의미가 첨가되기도 하고, 인간의 행위에 꼭 따라야 할 기준과 원칙으로 이해되기도 했을 뿐입니다.
도교에서의 도는 종교로서의 의미가 강하게 부각되어 우주만유의 본체이면서 형태지을 수 없는 형이상학적인 실재(實在)였습니다. 불교에서의 도는 "곧 진리이며 바름"이었고, 유교에서는 이 도로써 도덕적인 면을 강조한 나머지, 인간의 가치기준을 가름하는 핵심적 규범으로 삼기도 했습니다.
종교에서의 도는 이렇게 각각 다른 옷을 입게 됩니다만 공통되는 점은 인간의 인간다움을 도에서 찾고 있다는 점입니다. 즉, 사람은 이 도와 하나가 됨으로써 현실의 피상적인 차별이나 변화를 떠나 절대불변의 참다운 자유를 얻게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도는 순리(順理)입니다.
동양이 전통적으로, 인위적인 기교보다 자연적 섭리에 따르는 무위자연적(無爲自然的) 삶을 숭상해 온 것도 결국 같은 맥락입니다.
도의 자리
도(道)를 논(論)하는 기회가 흔치 않은만큼 이야기를 꺼낸 김에 도의 자리를 좀 더 자세히 살펴봅시다.
도는 존재 이전의 이데아, 즉 우주본래의 근본입니다. 시작도 끝도 없는 영원의 자리이자 무극(無極)의 자리입니다. 우리 사회에는 법(法)이전에 윤리나 도덕에 의한 무형의 위계질서(位階秩序)가 있어 왔습니다. 옛 성현들은 그 위계실체를 기·정·의·덕·도·자연(技·政·義·德〕·自然)으로 순서를 정리했습니다.
기(技)는 일반적인 삶의 기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한가지 소질은 갖고 태어나며, 한가지 기술만 익히면 일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사회적 동물인만큼 집단생활이 필요하여 기(技)는 정(政)의 지배를 필요로 합니다. 정은 관리입니다. 관리 규모가 커지면 정치라는 말로 발전합니다. 정치는 조화여서 상식석에서 행해지는 것이 이상적이라 했습니다. 정치에 절대로 기술자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데모크라시 정치론도 이러한 근본에서 출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정(政) 위에 의(義)를 두어 바르게 행할 것을 가르쳤습니다.
의(義)는 다시 덕(德)의 지배를 받습니다. 아무리 바르게 잘 하려고 해도 덕이 없으면 훈훈함이 없습니다. 너무 맑기만 한 물에서는 고기가 살 수 없듯 맑고 바른 것 만 추구하다보면 자칫 경직되기 쉽고 한쪽으로 치우칠 염려도 있습니다. 청렴강직한 지도급 인사가 아랫사람 잘못으로 물러날 때 "德이 없어 물러난다"는 말은 여기 연유합니다.
덕(德) 위가 도(道)의 자리입니다. 도(道)가 곧 순리(順理)라는 말이 이제는 이해되어야 합니다. 앞에 나열한 모든 것을 갖추고 행하되 순리로 하여야지 억지가 깃들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도(道)는 인간이 자연(自然)으로 통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
결국 도(道)는 자기 본분을 깨닫고 순리를 거역하지않는 범위에서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것으로, 모든 사람이 지켜야 할 길입니다. 인간사회를 널리 이롭게 한다는 홍익이념(弘益理念)으로 귀결되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제 이해가 되시는지요. 茶는 사유(思惟)의 반려라는 뜻에서도 다도삼매경(茶道三昧境)은 매우 귀중하고 유익한 과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차와 술의 비교
차와 커피는 지구촌을 대표하는 동격의 음료여서 자주 비교했지만 술과의 비교도 필요하다고 봅니다. 인정을 나누는 자리에 차 못지않게 자주 오르내리는 것이 술이기 때문입니다.
차와 술은 동격은 아닙니다만, 우리 생활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취하는 방법에 따라 상호 보완이 되기도 하고 서로 상반되는 작용을 하기도 합니다. 상식적으로도 자극성 강한 음료는 그만큼 조심해야 합니다. 조심하지 않으면 술은 마실수록 취하여 정신을 흐트러지게 합니다. 반면 차는 조심하지 않아도 마실수록 정신이 맑아지고 옷깃을 단정히 여미게 합니다. 술은 흥을 돋구지만 차는 마음을 가라앉혀 주는 것입니다.
역사를 보아도 다인치고 술 사양하는 사람 드물고, 술꾼치고 차 싫어하는 경우 역시 찾아보기 힘듭니다. 옛부터 성현이 모두 차를 가까이 하였나니… 라는 구절을 기억하십니까. 나라를 중흥시키고 꿈에 술을 얻은 은(殷)나라 고종(高宗)은, 술이 맑은 것을 성(聖)스럽다 하고, 흐린 것을 어질다(賢) 하였으니, 성현(聖賢)의 근원이 곧 술에 있는 셈입니다.
주다론(酒茶論)에 보면 술(酒)과 차(茶)가 서로 높은 자리에 앉으려고 말싸움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술은 근심을 잊게않다하여 망우군(忘憂君)이고, 차는 번민을 없애준다하여 척번자(滌煩子)라 이름하고 있습니다.
척번자 : 대저 하늘과 땅 사이 있는 것은 사람·금수·산천·초목이지
요. 그 중 제일 귀한 것이 사람입니다. 차(茶)라는 글자를 분석
해보면 풀 초(艸)와 나무 목(木) 사이에 사람 인(人)이 있어 자
연과 더불어 사는 것을 뜻합니다. 술이라는 글자는 물 수( )변
에 새 유(酉)이니, 술에 취하면 사람에 미치지 못하는 금수(禽
獸)가 된다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까.
망우군 :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시는구료. 사람에게는 귀천(貴賤)이 있
고, 위계(位階)도 있는 법인데, 사람이 풀과 나무 사이에 있다
면 어찌 귀공자라 하리이까. 꿩이나 토끼를 잡는 사냥꾼이거나
꼴군·나뭇군에 불과하겠지요. 특히 다인들은 꽃을 보면서 차
마시기를 즐기는 데, 이는 욕정(欲情) 가득한 살풍경 아닙니까.
당(唐)나라 이백(李白)과 두보(杜甫)는 천하가 인정하는 명사입
니다. 늘 물가의 새를 사랑한 두 분은 개원(開元:洛陽)에서 만
나 두 마리 새가 불리었는데 그 날개가 천하를 가렸습니다.
척번자 : 나는 금수(禽獸)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을 즐기지 않지만 그
대가 그렇게 말하니 한마디 하지요. 덩어리 차 문양에는 봉황
도 있고 용도 있습니다. 또 차를 달일 때는 기린숯을 쓰는 데
이것들은 모두 금수의 우두머리들이지요. 이들에게 둘러싸인
차 앞에서 물 가의 새는 어디로 날개를 펼칠런지요. 다구(茶具)
를 논해도 주기(酒器)와는 가치를 비교할 수 없을만큼 보배로
운 것이 많습니다.
망우군 : 아아, 미천한 그대여, 풍류란 마음이 너그럽고 온화한 것인 것
을 어찌 값으로 논한단 말이오. 술잔에도 금잔·은잔이 있고
약옥선(藥玉船)도 있소이다 그려. 그러나 주선(酒仙)들은 금잔
은잔보다 계절에 맞는 술을 더 즐겼지요. 봄에는 오얏동산(桃
李園)에서 복숭아술 기울이며 달에 취했고, 여름이면 댓잎술(竹
葉酒)로 더위를 잊었습니다.
척번자 : 그렇다면 그대의 술은 갈대처럼 변하는 여심과 같구료. 차에도
백미(百味)가 있으나 계절 따위에는 구애되지 않습니다. 차에
아홉가지 어려움이 있으니 이 아홉가지를 제대로 다스리지 못
하는 데서 빚어지는 백미이지요. 무릇 다도는 백미를 즐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심신수련을 통해 아홉가지 어려움을 극복하
여 한 가지 맛을 얻는 데 있는 것입니다. 육우는 다경에 이르
기를 정행검덕(精行儉德)이라, 했습니다. 정성스럽게 행하고 검
소하게 덕을 쌓으라는 뜻입니다. 인생 교훈이 차에 있는 것입
니다…
아침에 시작한 두 사람의 논쟁은 석양까지 이어졌습니다. 그 때 한 선인(仙人)이 다가와 둘에게 이야기 합니다.
"지금은 천하에 근심이 없고 나라에는 현묘한 도가 있으니 좋은 세월입니다. 이러한 때에 두 사람의 논쟁은 아무 일 없는 데 일을 만드는 것과 같습니다. 허공을 입 삼고 수미를 혀 삼아 아승기겁 논한다 하여도 술의 덕을 다 말할 수 없고 차의 공을 다 노래할 수 없을 겁니다. 나는 술도 잘 마시고 차도 좋아합니다"
이는 술도 이롭게만 마시면 천하에 다시없는 보약이요 인생의 반려라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러나 정도를 지나쳤을 때 나타나는 술의 폐해는 엄청납니다. 분별선악소기경(分別善惡所起經)에 술 마시고 취하기를 즐길 때 나타나는 서른 여섯가지 허물이 열거되어 있습니다.
▲부모(父母) 인군(仁君)을 공경하지 않게 되어 위 아래가 없어지고 ▲말하는데 잘못이 많아진다. ▲두 번 말하기와 잔소리가 늘고 ▲평소에 감추고 숨겼던 사사로운 일도 불쑥 화제를 삼는다. ▲하늘을 꾸짖거나 사당에 오줌누는 일도 서슴치 않으며 ▲길 가운데 눕거나 소지품을 잃기도 하고 ▲몸은 반듯하게 가누지 못한다. ▲비틀거리다가 구덩이에 떨어지기도 하고 ▲넘어져 다치기도 한다 ▲사고 파는 일이 잘못되어 법에 걸리고 ▲할 일을 잊을 정도니 생활도 근심하지 않아 ▲가난을 불러들인다. ▲처자가 굶는 것을 두렵게 여기지 않고 ▲법을 겁내지 않게 되며 ▲부끄러움이 없어져 심하면 옷도 벗은 벌거숭이로 다닌다. ▲남의 부녀자 앞에서 어지러운 말로 희롱하기를 예사로 여기며 ▲툭하면 옆 사람과 다투려 하고 ▲고함을 쳐서 이웃을 놀라게 하고 ▲벌레나 짐승 죽이기를 즐긴다 ▲순간적으로 흥분하여 집안 세간을 부수기도 하고 ▲집안 사람들과 사사건건 충돌하며 ▲나쁜 벗이 늘어나고 ▲어진 벗은 멀어진다 ▲취했다 깨어나니 몸이 질병에 걸린 것 같고 ▲잘 토하니 그 더러운 것을 모두 싫어하게 되고 ▲머리가 멍청해져서 위기도 분간하지 못하게 된다. ▲책을 멀리하게 되고 ▲음란하여져서 가리는 게 없어지고 ▲미친 듯한 모습이 되어 사람들을 놀라 달아나게 하고 ▲쓰러지면 죽은 듯하여 아무 것도 모른다 ▲이윽고 병이 들면 얼굴이 붓고 누렇게 되고 ▲모든 주위로부터 미움을 받게 된다. ▲피를 나눈 친지까지 멀어지는데 ▲스스로는 세상이 발 아래 놓인 듯 거만이 극에 달하니 ▲죽은 뒤 지옥에 가서 뜨거운 쇳물 마시는 형벌을 받게 된다. ▲윤회 법칙에 의해 환생하면 어리석어 아는 것이 없는 사람이 된다. 주변에 어리석은 사람은 모두 전생(前生), 즉 옛 세상에서 술을 지나치게 즐긴 사람들이니 현명한 자는 마땅히 술을 삼갈지어다.
18세기 이후 영국 사람들은 티 파티를 즐기고 있습니다. 차와 음식과 음악과 춤이 메뉴입니다. 건전하고 흥겨운 파티입니다. 술이 차로 바뀌었을 뿐입니다. 술을 마셔야만 흥이 난다는 생각은 습관에서 나온 것일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술 때문에 과식이 버릇되어 비만에 고생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하지만 차생활은 모든 것을 정상으로 만들어 줍니다.
차는 소화를 돕고 비만을 막아준다고 했습니다. 또 주독(酒毒)을 푸는 데 차 이상 탁월한 효능을 가진 선약(仙藥)이 없습니다. 콩나물 따위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효능입니다. 역사를 보아도 술과 차를 함께 좋아하거나 차만을 즐긴 현인군자는 많습니다. 반면 술만 즐긴 경우는 없습니다. 술만 즐기다보면 종내 인생을 그르치고 말아 현인 반열에 오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 이제 차와 술의 관계도 이해가 되실 겁니다. 차 없이는 술도 절대 제 구실 못 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전통의 향기(6) 다회법은 문화인의 기본예절
차는 질서의 상징
차는 동양의 산물(産物)입니다만 세계 어디를 가나 차를 마시지 않는 민족은 없습니다. 마시기에 부드럽고 몸을 이롭게 하고 정신을 풍요롭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정신을 풍요롭게 한다는 것은 무엇으로 나타날까요. 그것은 질서입니다.
다도를 논할 때 거론했듯 차는 질서입니다. 질서를 잘 지키고 순리를 존중해야 좋은 맛을 얻을 수 있습니다. 혀 끝에 닿는 맛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신적으로, 분위기까지 최상의 자리가 되어야만 정말 좋은 맛이 됩니다. 그러자면 차를 내는 쪽이나, 대접받는 쪽이나 다 예를 지키고 성의을 다해야 합니다.
혹시라도 사진 찍을 때 카메라 든 사람의 의중을 헤아려본 적이 있습니까. 어떻게 찍히고 싶다는 욕심만으로 가득한 자신을 돌아본 적은 없습니까. 또 레스토랑에 들어갔을 때 지배인이나 웨이터가 안내해주는 자리를 마다하고 마음대로 빈자리 골라 앉지 않습니까? 예약을 할줄만 알지, 못 가게 되었을 때 사전 해약한 경우는 얼마나 있습니까.
그런 것입니다. 알면 얼마든지 느끼고 깨달을 수 있는 것을 소홀히 하는 것이 무질서입니다. 차를 배우다보면 베푸는 쪽이나 대접받는 쪽이나 함께 예절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다회법을 통하여 그런 것을 배우게 됩니다. 다회법의 요강(要綱)을 살펴봅시다.
▲먼저 초대가 있어야 합니다. 왜? 라는 이유가 명시되어야 합니다.
▲초대받은 사람은 답을 해야 합니다. 응한다. 못 간다. 하고 말입니다. 그래야 준비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방문자가 정해지면 주인은 꼼꼼히 준비를 합니다. 내 집에 와서 어색하거나 당황하는 일이 없도록 말입니다.
▲방문자가 셋일 경우 각각 앉을 자리까지 미리 정해놓아야 합니다. 다기다구도 빠짐없이 챙겨 차를 하는 도중에 일어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이윽고 약속일, 약속 시간이 되면 마중을 나갑니다. 서로 시간을 지키는 것은 예의 기본입니다.
▲대문 앞에서 선절 하고 응접실로 가 맞절을 합니다. 오시느라고 고생은 안 하셨습니까? 그렇지 않았습니다. 만나고 싶었던 차에 마침 불러주시니 한 걸음에 달려왔습니다. 하고 정중히 인사를 나눕니다.
▲이때쯤 다실에서 물이 끓기 시작합니다. 주인이 말합니다. 물이 끓는 군요, 다실로 자리를 옮기시지요. 다실이 어떤 방이냐 하는 것은 (1)에 설명되어
있습니다.
▲다실에 들어서면 주인이 말합니다. 이쪽이 연장자 자리입니다. 그러면 손님들은 그 자리부터 장유유서 순으로 차례로 앉습니다.
▲주인은 차를 냅니다. 차를 맛있게 우리는 법은 (3)에 자세히 설명했습니다.
▲차를 마시기 전에는 다식이나 다른 먹거리를 입에 대지 않는 것이 예의입니다. 입안이 오염되면 주인의 정성을 제대로 느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첫 차를 마시고, 그 맛에 대한 찬사가 오가면 만남의 정중한 시간, 즉 1막이 끝납니다.
▲2막은 다식이 곁들이고 사사로운 이야기들이 정감있게 오고 갑니다. 차는 원하는 대로 계속 우려서 마십니다.
▲대화 영역은 우주여도 좋지만 일단은 다실 안의 사물이 화두(話頭)가 되어야 합니다. 좋은 글이나 그림, 혹은 꽃이나 그릇을 화두로 삼아도 좋습니다. 2막은 이렇게 지혜를 가꾸고 상식의 폭을 넓히는 시간입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 손님 중 연장자가 말합니다. 다음엔 저희 집으로 초대하겠습니다. 주인이 그 뜻을 얼른 알아차립니다. 다음을 말씀하시니 그만 가시려는 것 같군요. 손님이 말합니다. 가야지요. 시간이 꽤 되었을 겁니다. 그러면 주인이 청합니다. 그럼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정리를 하겠습니다.
▲손님은 주인이 정리하는 것을 기다려 주어야 합니다. 자신들의 방문으로 인하여 어질러진 살림을 그대로 두고 떠나는 것은 예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잠시 후 정리를 끝낸 주인이 인사합니다. 초대에 응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불편한 점이 없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손님이 답합니다. 불편한 점이라니요. 차 맛이 참
훌륭했습니다. 초대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가시는 손님은 뒤가 안 보일 때까지 배웅하는 것이 한국인의 심성입니다. 다회는 이렇게 끝납니다.
결과보다 과정이 중시되어야
다회법을 유심히 보면 우리가 사회생활을 하는 데 지켜야할 일상예절이 구체적으로 모두 포함되어 있습니다. 때문에 차는 목적이 아닙니다. 과정이요, 과정을 아름답게 가꾸고 다듬는 예술입니다. 다회법을 수없이 반복 연습하여 몸에 배도록 하면, 그것만으로 예의바른 사람이란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독불장군 없다는 말이 있듯 세상은 혼자만 잘나도 소용없습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설악산·다도해도 누구와 함께 여행했느냐에 따라 좋은 여행, 그저 그런 여행으로 구별됩니다.
여행이 살아있는 배움의 광장이라고 합니다. 오랜 여행에서 배우는 것은 무엇일까요. 세계를 두루 여행하다보면 결국 얻어지는 게 어디를 가나 사람사는 모습은 근본적으로 같다는 것입니다. 생명의 귀중함도 같습니다. 그렇다면 "공존(共存)"이라는 두 글자가 피부에 와 닿을 것입니다. 공존 - 그렇습니다. 인류가 희구하는 것, 언젠가 이루어야 할 과제는 공존입니다. 공존은 질서를 존중하는 데서만 가능합니다. 질서의식이 부족하면 강력한 법으로라도 확립해야 합니다.
우리사회 질서의식을 개탄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교육수준·경제수준 다 높아졌는 데 질서의식만은 바닥에 그대로 있다고 야단들입니다. 동방예의지국다운 미풍양속도 옛말이 되었다고 혀를 찹니다. 일반적인 느낌에도 충효사상은 이미 땅에 떨어졌습니다. 스승을 부모처럼 여기라고 가르친 선생이, 학생들로부터 무참한 봉변을 당하는 사례가 심심치 않습니다. 우리도 서양처럼 강력한 법 집행으로 질서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소리가 여기 저기서 막 튀어나옵니다.
부랴부랴 효를 바로 세우자는 운동을 펴고 있습니다만 별로 진전이 있는 것 같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모두 목적이거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과정을 가볍게 여기면서 일순간에 결과를 얻기는 불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또 결과적인 것들로 세상 질서를 바로 잡을 수는 없습니다.
결과만 좋으면 과정은 별로 문제삼지 않는 사회통속관념이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의외로 많습니다. 그러나 옳지 않다고 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그 통념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이 이미 큰 줄기라면 그렇게해서 흘러가는 곳이 과연 어디일까요.
금메달만 따면 카메라 스포트를 받는 사회 - 금메달만 따면 어떤 과정도 유려한 필치로 미화되는 사회가 우리 사회입니다. 스포츠만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치도 당선만하면 되고 경제사회도 돈 벌고 출세만 하면 됩니다. 성공(成功)이란 것이 노력으로 이룬다는 뜻이건만 달성(達成)과 같은 뜻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그렇게해서 도달하려는 곳이 과연 어디일까요.
법 보다 윤리 도덕을 더 무서워하는 사회가 되어야 합니다. 결과보다 과정이 더 중시되는 사회가 되어야 합니다. 비루한 금메달 보다 정직한 동메달이 더 값진 박수를 받는, 그런 사회가 되어야만 합니다.
까놓고 말하면 궁극적으로 인간은 모두, 재물과 명예를 탐하는 이기주의입니다. 겉으로 자비를 베풀든, 봉사정신을 외치든, 청빈을 내세우든 간에 결국 원하는 것은 명예거나 재물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이를 허물삼을 수 없는 것이, 사람이란 자신이 원하는 궁극적인 목표에 이르지 못하고 죽어가기 때문입니다. 후세는 그 사람의 목표를 따지지 않습니다. 과정이 곧 그의 삶이요, 평가 기준입니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받는 느낌이 있을 겁니다. 어쩌면 과정이 곧 전부일 수 있다는 진리 같은 것 말입니다.
결과만이 중시되는 사회가 되면 조화(調和)라는 단어가 사라집니다. 지금 우리 사회 단면입니다. 과정을 소홀히 여기면 정의(正義)가 빛을 발하지 못합니다. 역시 우리 사회 단면입니다. 이는 문화인의 사회가 아닙니다.
우리 전통사회는 더더욱 아닙니다.
차생활 교육의 참 가치
차에 대해 글을 쓰고 다도교실 운영하는 것이 이럭저럭 십오년 이상 되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 차를 배우고 싶다고 찾아왔을 때, 첫 만남의 대화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습니다.
"왜 차를 배우려 합니까?"하고 물으면 대개는 말없이 웃기만 합니다. 그러다가 작은 목소리로 "그냥은, 차가 좋아 보여서요"합니다.
"다도를 배우려는 겁니까?"하고 다시 물으면 고개를 흔들며 "아뇨. 번거로운 건 말구요. 간편하게 마시는 법만 알고 싶어요"합니다.
그러면 원하는 대로 마시는 법을 가르쳐 줍니다. 마시는 법이야 앞에서 이야기했듯 간단합니다. 끓인 물을 약간 식혀서 차와 함께 주전자에 넣고 우려 마시면 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원두커피 우리는 것보다 간편할지도 모릅니다. 다 가르쳐 주면 다시 묻습니다.
"이것 뿐인가요? 이것 외에 무언가 있다고 들었는데요…"
"아닙니다. 차를 우려 마시는 데는 이것 이상 말씀드릴게 없습니다"
"아니에요, 행차법 같은 게 있지 않아요?"
"…?"
꾸민 것이 아닌 자연스런 대화입니다. 차를 가르치고 배운다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단순 오락이나 취미를 넘어서서 생활문화의 규범과 이상을 현실에 반영하자는 것입니다. 스스로 아름답지 못하면 아름다움에 접근할 수 없다는 논리에서, 차를 수단으로 삼아 자기 몸과 마음을 아름답게 가꾸고 다듬는 훈련인 것이지, 차를 마시는 게 목적이 아닌 것입니다.
다신전(茶神傳)에 이르기를 차는 물의 신(神:靈)이요, 물은 차의 몸(肉)이니, 진수(眞水)가 아니면 다신(茶神)이 나타나지 않고, 정다(精茶)가 아니면 수체(水體)와 조화를 이룰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훌륭한 차를 얻기 위해서는 무색무취(無色無臭)한 물이 있어야 하고 정성들여 만든 차가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또 차는 그 스스로 참된 향과 색과 맛을 지니고 있으니 그것을 잘 살리는 것이 다도라 했습니다. 조금이라도 소홀히하여 오염되면 곧 참됨을 잃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차는 이런 것입니다. 더운 물에 티백을 넣어 우려 마시는 것으로 "나는 차마시는 사람이야"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소위 찻기(茶氣)가 있다는 것은 마음의 여유가 풍부한 사람을 일컫는 말입니다.
이 글을 읽고 마음이 동하면 이제부터라도 차생활을 하십시다. 우리 사회, 우리 삶이 무미(無味)하고 건조(乾燥)한 것은 모두 차생활을 잃어버린 탓입니다. 거듭 강조합니다. 다도라고 부르며 까다롭게 행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그냥 "차놀이"한다고 하면서 시작해 보십시오
차생활 운동으로 인식이 제법 나아졌지만, 다도(茶道)의 본뜻을 아직 이 사회가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재력이나 학교졸업장 만으로는 충족되지 않는 마르고 빈 공간이 현대인을 초조하게 합니다.
지금이라도 시작하십시오. 차를 문화생활의 중심수단으로 삼으면 얼마 지나지않아 사물을 대하는 자세가 달라지고 삶에 윤기가 생깁니다. 혼자도 좋고, 친구와 함께도 좋습니다. 차를 배우고 싶다면 언제든 필자를 불러 주십시오<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