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 9:23~31)
회심한 바울은 유대인에게도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대적자의 입장에 섰다.
유대인에게는 유대적 신념과 사회 기본 체계를 무너뜨릴 수 있는
인식과 발언을 하는 바울이 처단의 대상이었고,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비록 그가 회심했다고 하지만
워낙 회심 이전에 악랄한 대적자로 인식되어져 있었기에
못 미더웠을 것이므로 경계의 대상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바나바가 바울과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에서
중재자의 역할을 한다.
그의 중재함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바울을 품을 수 있었고
성경에서도 탁월한 복음 전도자의 사명자로 변신할 수 있었다.
그로 인해 복음을 듣고 회심한 자가 얼마나 많은 지를
인식한다면 바나바의 중재자 역할이 또한 얼마나
중대한 일이었는지 공감하게 된다.
바나바가 훌륭한 것은,
첫째, 영적 분별력이다.
입으로 자신이 회심했다고 말한다고 해서
자신들의 가족과 동족을 학살하고 많은 이들을 감옥에 보낸 이를
수용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인간적 검증에도 사실 한계가 있다.
분별력이 없는 인간은 여러 갈래로 나뉘고
대중들은 갈대처럼 분쟁에 휘말린다.
이런 틈을 틈타 자신의 욕망을 관철하고자 하는 이들은
진실의 향방과는 관계 없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진실을 호도하고 대중들을 이용한다.
특히 영향력 있는 위정자나 종교 지도자들이
그렇게 하면 그 폐해(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까지)가 막대하다.
비극적인 일이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이 영적 분별력이다.
깨끗한 영적 눈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받는 이에게 임하는
그 영적 분별력이 옳바른 판단을 이끌고
하나님의 사역을 돕는다.
바나바는 영적 분별력을 지녔다.
그래서 원수 중의 원수, 대적자 중의 대적자인 바울의
진실한 회심을 알았고
바울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중재자가 되었다.
둘째, 그에게 갖춰진 신뢰감이다.
아무리 그가 영적 분별력을 가지고 중재자로 나선다고 해도
이스라엘 백성이 그에 대한 신뢰감이 없어서
그의 옳은 주장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역사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중재는 아무런 문제 없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수용되었다.
이는 그가 평소에 얼마나 단단하게 신뢰를 구축하고 있었는지를
반증하는 것이다.
요즘 권력을 가진 다수의 교회 세력의 행실이 비판 받고
진정한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한국의 현실은
먼저 비신자들이 악의 세력에 휘감긴 사탄의 조종이라고
항변하기 앞서 자신이 걸어온 일에 문제가 없었는지
그것을 발견할 수 있는 눈과 정직한 인식능력을 달라고
기도할 일이다.
중재자의 역할을 사실, 예수님의 일이었다.
하나님의 원칙에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우리를
사랑하시어 하나님 앞에 수용되도록 자신의 처절한 희생을 담보로
중재하셨다.
그렇게 중재 받아 생명을 얻을 수 있었던 우리는
아직도 사람을 혐오하고 재단한다.
엄정히 다루어야 할 죄의 문제와
끝없이 수용되어져야 할 사랑의 대상인 차별 없는 타자라는
두 가지 상황을 구분할 능력이 없다.
여전히 단순하고, 율법이 신앙의 최고인 줄 착각하며
사랑은 돈 몇 푼 모아서 지급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며
타 종교와 비교되는 정량적 수치를 들이미는 나를 포함한 신앙인들은
중재자로서는 아직 한참 먼 곳에 있다.
주님! 용서하시고.... 내일은 오늘보다 나은 진보가
작지만 분명하게 있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