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시절 생각나는 경향 논객들 지하철을 탈 때마다 눈을 지긋이 감거나 핸드폰을 검색하다 내릴 곳을 놓칠 때가 많다. 무료한 시간을 죽이기 위해 자판을 두드리다 생각나는 일을 카페에 올리기도 했지만 이제는 습관처럼 무언가 써야 직성이 풀리니 습관이란 묘한 것, 오늘도 명상에 잠기다 40여 년 전 경향 논설위원시절이 엊그제 같아 돌이켜 보니 만감이 교차한다. 내가 경향 논설 실에 발을 들여놓게 된 것은 1980년 신군부 언론사통폐합 조치로 신아일보가 경향신문에 흡수 통합되면서 자연스럽게 직장이 바뀐데 연유한다. 그때 신아 부장급 이상 동료들이 경향에서 겪어야 했던 수모에 비해 나는 비교적 빨리 안정된 책상을 배려 받아 한달쯤 관망하다 덜컥 통 사설을 쓰라는 지시에 끙 끙 거리며 밤 새웠던 일이 엊그제 같다. 함께 간 논설위원 한분은 자존심상한다고 퇴직해 버렸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버틴 보람 있어 그럭 저럭 분위기에 동화 되었고 분야도 남이 기피하는 통일문제, 아니면 분담이 어정쩡한 교육문제를 전담하게 된다. 이런 업무분담이 나에겐 익숙해졌고 이 분야 외고도 심심찮게 쓰다 보니 잔돈푼도 생겨 대머리 집 외상 술값 갚는 데는 무리가 없었다. 논설회의는 주로 사장이 주재, 이진희 경향문화방송 사장, 경향 문화방송 분리후론 정구호 경향 사장이 회의를 이끌어 갔다. 돌아가며 논설 테마를 말하고 나면 사장이 그날 사설 제목을 결정하곤 했다. 하지만 진지했던 논설회의는 아랑곳 없이 다음 날 사설은 누가 썼는지 엉뚱한 주제의 통사설이 2면 전체를 도베질 하곤 했다.뒤에 알고보니 논설회의는 형식뿐 모처의 의중에 따라 사설이 좌우되고 있었음이 들어났다. 주로 이규행 논설주간이 상부(?)의 비위를 맞추고 있었음이 들어났고 전두환장군 대통령만들기에 경향이 총대를 메야했으니 모두가 역사의 뒤안길로 살아지고만 얘기다. 얼마나 지났는지 기억은 정확치 않지만 윤상철 주필이 논설회의를 주재하다 손광식 주간이 맡았다. 윤필(윤상철 주필을 그렇게 불렀다)이 경향논설 회의를 주재할 때 논설위원으로는 박노경 조규진 지용우 이강걸 이광훈 이형균 이성호 김은우 양동안 오동환 정운종, 손광식 논설주간 때는 최낙동 구건서 오동환 김세환위원이 합류했고 지용우 논설주간 때는 내가 관리국 정경연구소를 거쳐 롤백하니 성정홍 구건서 오익환 이춘송 최용길 위원이 와 있었다. 좀 장황하지만 이런 논설실 인사이동에서 내문제가 화제가 된 것은 어느 날 갑자기 내가 관리국 아르바이트 은행부장으로 발령이 나게 되자 좌천이니 퇴사하라는 인사라느니 말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강걸 위원은 정구호 사장 속도 모르고 논설위원을 관리국으로 보내다니 말이 되느냐며 항변했다. 그당시 논설위원 동료의 하나같은 우정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울컥 한다. 하지만 아르바이트 문제로 사설을 써야 할 때면 의례 나에게 지령이 떨어져 한동안 관리국 부장이 논설을 쓰게 되니 이는 경향 사상 초유의 일로 나로선 크나큰 보람이었다. 각설하고 경향 논설실에선 에피소트도 만발했다. 화제가 된 이강걸 위원의 속필, 오동환 지용우 실장과의 여적을 둘러싼 해프닝, 최낙동 최용길 위원의 바둑 삼매경 등등 아직도 머릿속을 생생하게 멤 도는 일화가 적지 않다. 지용우 실장과는 1980년 경향논설위원시절 함께 출퇴근을 해 거의 매일 행동을 같이했지만 아르바이트부장을 거쳐 정경연구소연구위원으로 소임을 마쳤을때 함께 일하자해 금의환향(?)한 기분으로 동고 동락, 친형제나 다름없는 우정을 나누며 지냈다. 돌아보니 손광식 이규행 지용우 이광훈 이강걸 모두들 이름만대면 알만한 당대의 논객들 먼저 저세상으로 가고 없으니 인생무상 이보다 더할손가. 최낙동 최용길 이춘송 구건서 위원도 무엇이 그리 급한지 한창 살나이에 이승을 떠났다. 그러고보니 신아 인물가운데 장기봉 사장을 비롯, 지명도가 높았던 윤임술 임승준 장상섭 이왈수 임영 호영진 김길홍 남정판 전규삼 정용기 장기효 윤종보 안재환 이영희 도기충 권동섭 김익진 모두 타계한지 오래, 한가한 시간 그립기도 하고 고인의 명복을 비는 마음으로 돌이켜 보았다.
참고로 2012년도 경향신문 발행 '여적' 책에 실린 '역대 주필 및 논설위원명단'을 소개한다.
* 주필 -鄭芝浴 趙容萬 吳宗식 李寛求 金基鎭(八峰) 朴商鎰 徐廷억 金炳洙 李揆行 尹相哲 崔鍾律 孫光植 李實 부주필 朱孝敏 洪性萬 宋建鎬 李恒寧
* 논설주간 - 任洪彬 金炳洙 李揆行 孫光植 李光勳 洪性萬 李實 宋忠植
* 논설실장- 池龍雨 李光勳 洪成萬 강신철 朴明勳 金學淳 宋永丞 宋忠植 金鐵雄
논설위원 - 姜永壽 鄭인俊 金汶龍 金永善 金泳祿 朱耀翰 李恒寧 金容甲 閔丙岐 朱孝敏 蘇斗永 吳炳憲 張庚鶴 朴喜範 申相楚 韓庸熙 朴運大 具常 林昌洙 安霖 張龍鶴 張龍 玄勝錘 洪性·宋建鎬 申東峻 申範식 金昇漢 李鍾極 李御寧 吳德永 李甲燮 金鎭福 李建鎬 嚴基衡 李相武 徐任壽 李命英 金周默 申一哲 金成斗 沈泰植 李者範 金基燻 許宗牛 吳明鎬 孫연淳 崔瑞泳 金煥榮 李沐雨 李鍾龍 林鍾哲 朴奉植 李相球 趙演鉉 李海南 朴源卓 鄭在虎 洪範基 金正源 權寧百 金燻烈 崔炳郁 金泰弘 李賢相 朴熙선 董勳 愼道成 張曉相 金炳洙 崔柱昊 金恩雨 李揆行 李鎔昇 鄭男 李綱杰 李鍾全 姜會模 李成鎬 鄭雲宗 李炯均 尹相哲 金鎭培 金重雄 任洪彬 曺圭晉 池龍雨 崔容吉 李哲鎬 李光動 徐祐錫 李春松 美容子 崔洛束 金容述 朴魯敬 梁東安 金仁會 張燃澔 吳東煥 具健書 吳翊煥 愼榮樹 朴錫興 洪性均 白璇基 洪性萬 姜漢弼 金明守 金容彦 表完洙 金忠一 成定洪 李元昌 金世煥 劉在喆 李實 李錘연 崔魯錫 朴明勳 李相文 李東柱 尹興寅 李成洙 姜琪錫 李傭 李演宰 高永信 金鍾斗 金志榮 金學淳 金澤根 宋忠植 宋永丞 金容材 全南植 曹成煥 許英燮 金鐵雄 鄭東植 金泰寛 任殷淳 朴魯承 李承哲 盧應根 徐培源 孫東佑 李大根 李鍾鐸 張倫榮 趙浩衍 劉仁華 金振鎬 梁權模 朴來勇 李仲根 劉炳선 金珉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