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강재(壽康齋)와 중희당(重熙堂)
수강(壽康)’은 ‘오래 살고 건강하다’는 뜻으로 서경 홍범(洪範)에서 말한 오복(五福)인 수(壽), 부(富), 강녕(康寧), 유호덕(攸好德), 고종명(考終命) 에서 인용한 어휘로 순원왕후 안동 김씨의 장수와 강녕을 바람의 의미이다.
수강재는 석복헌(錫福軒, 1847, 경빈 광산김씨, 복을 주다 즉 후사 기원) 동쪽에 있는 건물로 본래 정조의 서재이자 문효세자(1782 – 1786, 이양)의 서연 장소인 세자궁이었으나 1874년 낙선재 건립 때 고쳐 지어 대왕대비인 순원왕후 안동 김씨(순조 비 1789 -1857)의 처소로 사용했다.
고종의 고명딸 덕혜옹주은 1925년 13세의 나이에 한창수와 스마나가 히데코 손에 끌려 동경유학을 떠난다.
고국을 떠난지 37년 만에 동경 마쓰자와 정신병원에 있던(1946 –1961) 덕혜옹주는 김을한 서울신문 동경특파원과 영친왕 이은 및 마사코 이방자 여사의 백방의 노력으로 1962년 1월 26일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장의 귀국 협조를 얻어 51세로 일본에서 돌아왔다.
귀국 이후 대한제국 황실의 생활공간인 수강재에 처소를 잡고 정신병 치료를 위해 서울대병원을 오가며 생활하다 1989년 4월 21일 사망이후 남양주 금곡 홍유릉에 모셔졌다.
수강재(壽康齋)는 정조 9년 1785년 이극문(貳極門) 안에 자경전(慈慶殿, 창경궁 대비전, 혜경궁 홍씨 처소)을 영건(건물 지을 때)할 때 남은 자갈과 벽돌을 우물 위에 쌓아 가짜 산(假山)을 만들었는데 이를 헐고 오래된 우물 자리에 다시 우물을 파서 작게 건물(小齋) 지었는데 이 자리가 태조 이성계 때 수강궁 옛터이므로 수강재(壽康齋)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정조실록 9년 8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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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실록 20권, 정조 9년 8월 27일 갑진 5번째기사
수강재를 세우다.
이극문(貳極門) 안에 있던 오래된 우물 자리에 수강재(壽康齋)를 세웠다. 자경전(慈慶殿)을 영건(營建, 건물 지을 때)할 때 남은 자갈과 벽돌을 우물 위에 쌓아 가산(假山, 정원 등에 돌을 모아 쌓아서 조그마하게 만든 산)을 만들었다. 이때에 이르러 이를 철거(撤去)하고 그 우물을 파고는 소재(小齋, 작은 집)를 세워 내려다 보게 하였다. 이곳은 태조조(太祖朝) 수강궁(壽康宮)의 옛터로서 “여지승람(輿地勝覽)”에 기재되어 있다. 이어 그 재(齋)를 수강재(壽康齋)라고 이름을 지었다.
태백산사고본 20책 20권 26장 A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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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태종이 세종에게 보위(왕의 자리)를 물려 준(양위, 讓位 )다음 거처하던 곳이고 단종이 퇴위 후 영월로 유배를 떠난 곳이며, 세조가 수강궁에서 승하했다.
그 이후 수강궁이 없어졌다가 정조(1752 – 1800, 이산)가 1785년 정조의 서재이자 문효세자(文孝世子, 이양, 음 1782, 9~1786, 5)의 서연장소로 사용하고 왕과 왕세자의 공부공간을 지근 거리에 두어 정치적 사상 기반을 같게 하고자 1782년 중희당(重熙堂)을 정당(正堂)으로 수강재(壽康齋) 별당(別堂)으로 복원했다.
헌종의 父 효명세자(孝明世子) 이영이 1827(순조 27)년 대리청정(代理聽政, 1827 - 1830)하면서 중희당(重熙堂, 정조 6년 1782년, 성정각 동쪽)을 정당(正堂)으로 수강재(壽康齋) 별당(別堂)(순조실록 28권, 순조 27년 2월 9일 을묘, 청정하는 처소의 정당(正堂). 여러 전물 중 본체로 사용하는 건물)은 중희당(重熙堂)으로 하고, 별당(別堂)은 수강재(壽康齋)로 한다.)으로 한 때 사용하기도 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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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조실록 28권, 순조 27년 2월 9일 을묘 7번째기사 1827년 청 도광(道光) 7년
의정부(議政府)에서 왕세자(王世子)의 청정 절목(聽政節目)에 대한 별단(別單)을 아뢰었다.
1. 청정(聽政)에 대한 절목은 전교(傳敎)에 의하여 을미년의 사례로 마련한다. 1. 청정하는 처소의 정당(正堂)은 중희당(重熙堂)으로 하고, 별당(別堂)은 수강재(壽康齋)로 한다.
태백산사고본 28책 28권 25장 B면 국편영인본 48책 27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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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중희당(重熙堂) 애기를 간략히 해볼까 한다.
문효세자 이양이 정조 6년 1782년 음 9월 7일 태어났다.
정조는 너무 기뻐 이양을 위해 1780년 화재로 소실 된 창덕궁 동궁 시민당(정조 4년 7월 1780년, 건양문 밖)을 대신 할 새로운 동궁 중희당을 지을 결심을 한다.
정조는 이양을 동궁인 중희당에서 왕세자로 책봉(정조 8년)했으나 정조의 바람과는 달리 이양은 1786년 음 5월 11일 세상을 달리하였다.
이양이 죽은 후 중희당은 정조·순조의 편전으로, 효명세자 대리청정(1827 – 1830, 정당) 장소로, 1800년 11월에는 순조가 망곡례(국상이나 왕의 기일에 빈전 또는 능에 가지 않고 능을 향하여 슬피 곡을 하며 지내는 의례)장소로 쓰였고 고종 3년 1866년에는 명성황후 여흥 민씨의 초간택 장소로 사용되었으며 헌종이 승하한 곳이기도 하다.
이후 중희당은 철종 때는 빈공간으로, 고종때는 관례와 청,일, 러 공사 접견 장소로 쓰였으며 고종 28년 5월 1891년 5월, 고종이 중희당을 옮겨 지으라는 명을 내렸고 이후의 기록이 없으며 재건되지 않고 오늘날 옛 흔적으로 주춧돌만 덩그러니 남아 있다.
[참고]
낙선당 소실 : 영조 32년 1756년/영조실록 32년5월 1일,
사도세자(思悼世子, 이선, 1735 – 1762, 윤 5월 13일, 임오화변)가 머물러 있던 낙선당 온돌에서 촛대가 넘어지며 화재가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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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실록 87권, 영조 32년 5월 1일 무진 4번째기사
왕세자가 있는 정당인 낙선당 양정합에 불이 나다
밤 4경에 낙선당(樂善堂) 양정합(養正閤)에서 불이 났는데, 낙선당은 곧 왕세자가 있는 정당(正堂)이었다. 임금이 함인정(涵仁亭) 서쪽 뜰에 나아가 승지와 사관을 불러들이고 이어서 유문(留門)하라고 명하였으며 병조 판서를 패초(牌招)하였다. 조금 있다가 병조 판서 홍상한(洪象漢)이 입시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불이 어디서 일어났는지 알지 못하나, 이처럼 급히 번졌으니 이상하도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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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시민당 소실 : 정조실록 4년 7월 13일, 재건하지 않음.
정조실록 10권, 정조 4년 7월 13일 기축 1번째 기사
시민당에 화재나다
시민당(時敏堂)에 불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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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중희당 : 다산 정약용 필통에 삼중소주 부어 마신 장소(1783년)
정조 이산이 다산 정약용에게 옥필통 가득히 삼중소주(3번 증류시킨 소주, 40도)를 부어서 마시라고 한 곳. 다산은 “오늘 죽었구나.” 라고 생각했었다고 한다.
4. 임오군란(음 1882, 6.9) 당시 구식군대 쫒겨 민겸호와 김보현이 죽은 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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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돌아가 글을 줄일까 한다.
수강재(壽康齋)는 정면 6칸 측면 2칸 이익공 팔작지붕 백골집으로 동쪽에는 중춘문(重春門)이 서쪽에는 수강문(壽康門)이 있었다.
동궐도(東闕圖, 1828 - 1830) 따르면 2개의 현판이 있는데 동쪽에는 수강재(壽康齋), 서쪽 편에는 경녕루(慶寧樓)와 ㄱ자 행각에 유호헌(攸好軒)과 도시관(都是觀)이 있으며 후원 언덕에는 숙종 12년 1686년 건립된 취운정(翠雲亭)이 있다.
* 글 /양은석
* 이미지
1. 수강재 현판/창덕궁/종로구 와룡동
2. 수강재 : 국가유산청
3. 중희당 현판: 국립고궁박물관/창덕궁/종로구 와룡동